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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평점 :
요시모토 바나나. 일본에서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함께 인기를 양분하고 있다는 그녀의 첫 소설인 <키친>을 접하게 되었다. 읽고난 소감은 한마디로 뭐랄까 여자 하루키라고 할까?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와 비슷한 느낌을 받는 동시에 쉽게 맛보지 못했던 묘사들이 책속 곳곳에 눈에 띄었다.
눈물도 마른 포화 상태의 슬픔.
투명하게 가라앉은 시간이 볼펜 소리와 함께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진다.
이외에도 많은 문장들이 책속의 주인공의 상실감과 외로움과 맞물려 나를 책속으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그렇다. 이 책은 사랑하는 이를 예기치 못한 죽음으로 잃은 사람들의 가슴 절절한 세편의 짧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키친>의 사쿠라이 미카게는 할머니를 잃는다. 그래서 그녀는 아무도 없는 부엌을 가장 편하게 여기는 외톨이가 된다. 그러나 그녀에게 손을 내미는 이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다나베 유이치. 사쿠라이가 할머니와 둘이서 생활한 것과 같이 다나베도 역시 자신의 트랜스젠더 어머니와 둘이서 살고 있는 외로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사쿠라이는 그들의 비정상적이지만 끈끈한 가족애를 통해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는 두려움을 떨쳐내고 사회로 나가는데 성공한다.
<만월>의 다나베 유이치는 앞의 소설의 그 다나베 유이치다. 그의 어머니이자 동시에 아버지였던 에리코는 괴한의 습격으로 숨을 거두게 되면서 이번에는 그가 홀로 남겨진다. 그는 이제 막 세상을 향해 발을 내딛은 사쿠라이에게 차마 그의 이야기를 할 수 없어서 오랜 기간 동안 홀로 아픔을 달래다가 마침내 그녀에게 손을 내민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서로는 그들이 느끼는 사랑의 감정을 확신하게 된다. 같은 곳을 향해 내딛을 준비를 마친다.
아픈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남녀의 이야기. 그러나 우리들이 우려할 만큼 비관적이지는 않았다. 그들은 서로를 위로하고 의지하며 힘겹게 아픈 과거로부터 벗어나 사랑을 찾게 된다. 책 속의 그들을 보면서 아무리 어렵고 힘든 시기가 찾아온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믿어주는 그 누군가가 있다면 어떤 어려움이라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또 다른 이야기인 <달빛 그림자>는 교통사고로 애인을 잃게 되는 사츠키와 히토시의 동생 히라기의 이야기다. 사츠키는 4년간 만나왔던 히토시를 잊기 위해 한시라도 멈춰있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잠시라도 다른 생각을 할 때면 그의 환한 얼굴과 방울소리가 뇌리에 울려 퍼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매일 새벽 조깅으로 그를 잊으려는 노력을 한다. 한편 히라기는 그의 형과 같이 사고를 당한 애인 유미코를 멀리 보내지 않기 위해 그녀가 즐겨 입던 세일러 복장을 하고 학교를 다닌다. 그리고 사츠키와 히토시는 서로를 위로해주는 생활을 반복한다.
그러던 어느 날 우라라라는 이름을 가진 수수께끼의 한 여인이 사츠키에게 접근한다. 그녀는 애인을 그리워하면서 점점 야위어 가는 사츠키에게 히토시와의 작별의 자리를 마련해준다. 몽환적인 분위기의 가상세계의 이야기로 흘러갔지만 마치 견우와 직녀의 이야기처럼 그들 둘이 만나는 장면에서 그리고 히토시가 손을 흔드는 장면에서 그들의 감정이 나에게로 전이되는 것을 느꼈다.
작가 요시모토 바나나는 이 세 가지 이야기를 통해서 이별의 순간은 불의의 순간 자신에게 찾아올 수 있지만 그것에 휘둘려서 삶을 포기하는 것은 그들이 사랑했던 이들이 결코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오히려 더 꿋꿋하게 이겨내기를 원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사실 책의 내용적인 요소보다도 앞서 예로 든 문장들 처럼 등장인물들의 아픔을 그려내는 섬세한 글 솜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마치 주인공이 된 것과 같이 그들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도록 뛰어난 묘사들로 만들어지는 책 속의 깊은 바다를 보면서 과연……. 이라는 감탄사가 절로 쏟아졌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이제껏 여성들의 작품을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책장을 둘러봤지만 그 어디에서도 여성작가의 책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 섬세함이야말로 여성작가들의 책들이 가지는 매력이구나라고 깨닫게 되었다. 이제부터라도 자주 여성작가들의 책을 접해야 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왜냐하면 사실 나는 섬세함이라는 것과 거리가 먼 아주 둔한 인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