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파네스 희극 전집을 고대하고 있던 차에 천병희 선생님의 노고로 신간이 나왔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즐거운 마음에 읽었다. 그리스 비극만큼 그리스 희극도 만족스러울까. 비극의 절절함 대신 어떤 즐거움을 안겨줄까. 수많은 궁금함을 안고 책장을 넘겼다. 이 책은 재미있다. 이 때까지 나온 모든 소설 중에 손꼽을 정도로 즐겁다. 아리스토파네스(B.C.445?~386?)는 고대 그리스의 황금기에 태어나서 몰락기를 살았다. 그가 '구름(Nephelai)'을 공연했던 B.C.423년(그의 나이 22세)에 아테네는 스파르타와의 펠로폰네소스 전쟁(B.C.431~404)에 지친 나머지 잠시 휴전기를 갖고 있었다. 나라가 한창 전쟁 중이다 보니 이 때를 노리고 사이비 철학을 전파하는 소피스트들이 넘쳐났다. 영원한 정의는 사라지고 궤변이 넘쳐나고 강한 자가 정의가 되었다. 프로타고라스가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며 상대주의적 진리를 말하던 것도 이 때였다. 그나마 소크라테스(B.C.469~399)라는 현인이 나타나 이런 현실을 개탄하며 아테네 시민들에게 변치 않는 지혜를 말하며 영혼을 다스릴 것을 얘기했지만, 사람들은 그도 소피스트의 한 명으로 여기며 코웃음칠 뿐이었다. 그 소크라테스가 이 희극에서 하염없이 조롱당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스트레프시아데스라는 나이 든 농부가 채권자들에게 돈을 꾼 후 갚기가 싫어져 채권자들과의 소송에서 이길 수 있는 필승의 변론술을 익히기로 한다. 아들 페이피데스를 보내 배우게 하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자 그가 직접 소크라테스를 찾아가 변론술을 배워보려고 하지만 우둔함 때문에 실패하고 만다. 그래서 아들 녀석을 다시 소크라테스에게 보내 필승의 변론술을 배우게 한다. 시간이 지난 후 필승의 무기를 장착한 채로 아들이 나타나고 마침 채권자들도 돈을 받으러 온다. 그는 아들을 믿고 채권자들을 무시하고 분노한 채권자들은 그를 소송한다. 하지만 그는 그가 이길 것을 믿기 때문에 희희낙락이다. 소송일을 하루 앞두고 갑자기 집안에서 곡소리가 난다. 스트레프시아데스의 말인즉 갑자기 아들 페이피데스가 그를 때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가 사람들 앞에서 아들의 잘못을 얘기해보지만 아들은 얼굴에 미소가 가득한 채 여유가 넘친다. 아들은 아버지가 어떤 얘기를 하던지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오호! 통재라! 내가 범새끼를 키웠구나. "생각건대, 젊은이들은 그의 변명을 듣고 싶어 가슴이 두근거리겠지." (1391~1392행) 아버지의 성토에 아들이 조목조목 자신을 변호하기 시작하는데 이건 정말 필승의 변론술이다. 자세한 얘기는 책을 읽을 사람들을 위해 남겨놓도록 하겠다. 내용이 궁금해 미칠 것 같지 않은가. 소설 속의 소크라테스는 한껏 조롱당하고 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 자신보다는 돈이라면 무엇이라도 가르치던 그 시절 소피스트들을 상징한다고 하겠다. 제목인 '구름'은 실제로 세상을 다스리는 신이 신화 속의 신들이 아니라 구름이라는 얘기다. 비를 내려 만물을 자라게 하고, 천둥을 울려 사람들을 경건하게 만들고, 번개로 찢긴 구름은 바람을 불게 만든다. 책에서 소크라테스는 구름의 여신들을 섬긴다. 이것도 사실 만물의 근원을 물(탈레스), 불(헤라클레이토스) 등 여러가지로 얘기했던 자연철학자들을 비꼬는 것이라 하겠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이런 성역없는 조롱과 날선 비판이 가능하던 시기는 아테네가 펠레폰네소스 전쟁에서 패배하고 스파르타 정권이 들어서면서 막을 내린다. 이런 시대적 배경을 생각하노라니 작품을 읽을 때는 웃겨서 눈물이 났지만, 읽고나니 소크라테스의 최후와 아테네의 최후가 떠올라 짠하다. 사람들은 자유를 가졌을 땐 모르다가 빼앗겨서야 소중함을 안다. 2500년 전 아테네 시기의 자유만큼도 누리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그리스 희극에 필적할만한 작품을 만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남은 작품들이라도 아껴서 읽어야겠다. P.S. 전집이 나올 것 같아 내내 미루다 마침내 구판을 구입해 읽고 있던 차 전집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구매했다. 가슴이 쓰리다. 메난드로스 전집도 나올 것 같으니 꾹 참았다가 나중에 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