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멜리 노통>이라는 이름이 독특했다. 아멜리는 귀엽고, 노통은 튀는 듯한 개성의 느낌을 담고 있다. 뒷표지엔 눈을 부릅뜬 그녀의 흑백사진이 찍혀있다. 처음엔 글쓰는 아가씨가 제법 미인이군(비난받아도 어쩔 수 없다. 나는 여성 전업작가에 대해 안좋은 선입관이 있다. 일례로 최근 미술책을 펴낸 모 여성 소설가는 그 책 속껍데기에 실로 우스꽝스런(적어도 그녀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느꼈을) 사진을 특별 제작(!)하여 박아넣었다. 파격을 넘어 파렴치 수준이다.)하고 지나쳤다. (마흔넷의 나이는 이제 웬만한 여자 사진에 선정적 감정이입을 허락치 않는다) 책을 중간쯤 읽다가 무심코 덮어놓은 책표지의 그 사진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런 빌어먹을. 아주 쑥대머리 귀신 형용에 흰자위 홉뜬 눈이 영락없는 목졸려 숨넘어간 계집아닌가. 불란서 여자중에 이런 류는 처음 보았다. (불란서 여자까진 몰라도, 적어도 불란서는 조금 안다.)

그녀는 책을 쓸 때 일필휘지, 한번 시작하면 수정도 없고, 가감도 없이 써내려가고, 퇴고조차 하지 않는단다. 그래서 이 모양인가. 도무지 글이 난삽하고 업치락 뒤치락 옆길도 새기 일쑤다. 자기도 그렇게 막가는 것이 조금은 미안했던지, 대화중에 <옆으로 새지말라.><본론과는 상관없는 말이다>라는 췌언을 수도없이 밀어넣는다. 이 지경이라면 순발력을 자랑해선 안된다. 출판사의 속셈은 미루어 짐작이 간다. 순발력있게 질러대다 보니 다소 참을 수 없이 난삽한 점은 독자가 양해해야할 대목이라는 얘기다. 그걸 못참아서 나처럼 투덜대다간, 귀기어린 천재성을 몰라보는 무례한 놈으로 목졸림을 당할 수 있다는 뜻이렸다. 

모르긴 모르되, 노통이란 이 처녀는 타슈라는 비겟덩어리에 자가당착형 천재와 니나라는 말장난의 고수이며, 넘겨짚기의 대가를 합쳐놓은 인물일게다. 별거 아닌 글을 이지경으로 꼬아놓는 걸 보면 이 친구의 자의식(혹은 뺑끼)을 피해가며 대화하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처럼 보인다. 타슈가 평범하다 못해 지극히 선량한 기자들 몇명을 반찬먹은 강아지처럼 꾸짖어 내쫓는 걸 보면서 그녀가 기자에 대해 갖는 좋지않은 기억도 추측할 수 있다. 전혀 기자같지 않은(니나같은 기자는 3류소설 또는 수목드라마에서나 나온다. 그리고 방송담당 신문기자에게 턱도 없는 비현실적 캐릭터라고 욕을 엄청 먹는다.)니나는 참다못해 등장한 노통에 다름아니다. 타슈라는 노통과 니나라는 노통이 만났으니 결론은 뻔하다.

역자는 친절하게도 타슈와 그의 어린시절 연인 레오폴딘의 순애보적 살인(?!?)이 문학에 관한 사랑을 은유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난 아무래도 모르겠던데, 원서로 읽으면 느껴지는 것일까? 그렇다면 번역이 말도 못하게(주제가 전혀 잡히지 않을 정도로)엉망이었단 얘긴데, 참 솔직하기도 하다. 내 아둔한 머리로 받아들일 수 있는 메시지는 고작 이 문단 정도였다. 그나마 이런 얘기를 하려고 했던 모양이군 하고 쩝쩝 입맛을 다시며 책을 덮으려던 찰나에, 그것도 역자후기(까놓고 말해서 역자가 후기란 걸 남기는 형식도 못마땅하지만, 거기서 이 책의 주제에 대해 단정적인 언급을 남기는 건 말도 안되는 월권이요, 건방이라 아니할 수 없다.)로  그게 문학사랑이란 걸 몰랐느냐 하니 무람하다 못해 버럭 성질이 난다. 

타슈가 니나에게 말한다.

"내가 당신한테 가르쳐주고 싶었던 건 말이오, 레오폴딘을 목조르면서 내가 그애를 진정한 죽음으로부터, 즉 망각으로부터 구해주었다는 거요. (미움보다 더 잔혹한 복수는 망각이란 진부한 얘기-필자주) 당신은 나를 살인자로 생각하지만 사실 난 아무도 죽인 적 없는 지구상에 몇 안되는 인간들 중 하나라오. 당신 주변을, 그리고 당신 자신을 바라보시오. 이 세상은 살인자로 득실대고 있소. 즉 누군가를 사랑한다 해놓고 그 사람을 쉽사리 잊어버리는 사람들 말이오. 누군가를 잊어버린다는 것,그게 뭘 의미하는지 생각해본 적 있소? (중략) 그런 식으로 날마다 수없이 많은 살인이 저질러 지고 있다오. 처벌도 받지 않는 살인이지. 난 단 한번도 그런 무시무시한 살인행위를 모의한 적 없도. 그런데 그렇게 결백한 나를, 당신은 세상 사람들이 정의라 부르는 것으로 단죄하려 하는구려."

고작 이 정도의 메시지를 던지기 위해 온갖 허접스레기같은 얘기들을 범벅으로 널어놓았다면 노통은 미안하지만 천재도, 무엇도 아닌, 용렬한 문학소녀에 다름아니다. 지금 글을 닫으며 우연히 발견한 건데, 책띠(이걸 뭐라고 그러나?)에 박힌 한마디가 너무 멋지고 인상적이다.

"그녀가 쓰면 베스트셀러, 입으면 패션이 된다." -조선일보.

앞뒤가 딱 들어맞는, 바로 이 수준이다. 노통이나, 출판사나, 조선일보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보슬비 > Gary Benfield


..



Gary Benfield



"Dream Dancing"
 
 
"Miranda"
 
"Equinox"
 
"Symphony"
 
 
"Purity"
 
 
"Paradise"
 
 
"Maidens"
 
"Golden Dreams"
 
 
"Dance"
 
"Capriccio"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보슬비 > Ubaldo Ballerini


"San Polo in Chianti" - oil on canvas 100x250 cms " Paesaggio a San Marcellino " - oil on canvas 70x120 cms. " San Tommaso a Giobbole " - oil on canvas 80x120 cms. "San Giusto alle Monache" - oil on board 100x70 cms " Vendemmia nel Chianti " - oil on canvas 70x120 cms " Antella " - oil on canvas 90x140 cms " Maggio toscano " - oil on canvas 90x140 " Gaiole in Chianti, estate " - oil on canvas 90x140 "Paesaggio nel senese", oil on masonite, cms 50x100 "Il Cennino", oil on masonite, cms 40,3x80 "Primavera a Pian de" Giullari", oil on canvas, cms 100x150 "Leccio a Rignano sull"Arno", oil on canvas, cms 70x120 "Venezia, Chiesa della Salute", oil on masonite, cms 90x140 "Chianti, Maggio Toscano", oil on masonite, cms 70x120 Cascinale toscano in primavera", oil on canvas, 60x100 "Canale di Venezia", oil on canvas, cms 90x140 " Estate in Toscana " - oil on canvas 90x140 cms "Tra Montepulciano e Pienza", oil on masonite, cms 80x12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보슬비 > 김 창렬-물방울 작가




..





















































김창렬 화백



Ja vas ljubil (I loved you) - Vladimir Ognev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다섯달동안 올려놓은 문패글을 떼었다. 지울까하다가 어디 쓰일지 모르니 남겨두기로 한다. 이런 글조각을 쓰긴 어디다 쓸까. 그래도 다행인 것은 아직 이글의 느낌이 눈썹만큼 남아있어 가슴이 아리다. 일본에 갔을 때 치명적이라는 복어의 독을 혀끝에 살짝 대본 적이 있었다. 짜르르 건전지를 핥은 것처럼 전율이 퍼진다. 지금 이 글조각을 읽으면서 그런 느낌이 떠오른다.

'혼자 있는 시간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분주하고 수선스럽게 살아서 바깥에 미련은 없다. 이따끔 매화꽃이 벙글었는지 궁금할 뿐. 말수를 줄이고 책읽기에 골몰하다보면 지구가 자전, 공전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을까. 여기 올린 글은 가볍게 쓰진 않았지만 손님을 배려하지도 않았다. 산간묘옥 세평짜리  서재에 시냇물소리라도 낭랑했으면 좋겠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 내 귀에 들리는 웃음소리도 맑아졌고, 마음도 한결 편안해졌다. 올해는 안식년이라 둘러댈 만큼 뻔뻔스러워지기까지 했다. 역시 인간은 기막힌 균형본능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잊지 말아야겠다. 어떤 고통과 번민이 덮쳐 눌러도 인간은 오뚜기처럼 균형을 되찾는다. 그 사실을 믿는 것과 아닌 것의 차이는 매우 크다. 이 글을 썼던 2월과 지금의 차이 정도라고 보면 된다.

이제 뭐라고 다시 문패를 걸 것인가? 아무래도 이번 문패까진 고개를 짓수그리고 있는게 좋겠다. 알라딘 블로그가 처음 생겼을 때보다 사람들의 왕래가 많이 늘어났다. 지나는 길에 이름을 보고 담장너머 기웃거리는 이들도 가끔 있는 것 같다. <어? 사람 안사는 집인가?> 그럴만도 하다. 두달쯤 이 집을 비웠다. 매일 작은 글이라도 한쪽씩 올리리라던 다짐을 잠깐 유보했다. 그 만큼 급하고 중요한 일이 있었다.(앞으로 계속해야한다. 그러나 집까지 비우면서 할 일은 아니어야 겠다.) 

내게 이 한달은 하안거. 두문불출 용맹정진해야 한다. 마음의 매무새가 흐트러지려고 한다. 잘못하면 예전 생활리듬으로 돌아갈 수도 있을 것 같다. 불안한 마음에 사립문 지르고 얼른 방안으로 뛰어들었다. 천천히 가자. 천천히 가야한다. 팔뚝의 푸른 힘줄과 장딴지 알통이 잔뜩 부풀어 올랐다. 다시 뛰어야 안되겠느냐라는 이데올로기 공세도 만만치않다. 아서라. 어떤 상황에서든 빠른 속도로 낙관을 만들어내는 내 위장본능을 조심해야 한다.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파울로 코엘료>를 막 읽었다. 죽음을 정확하게 일주일 앞둔 사람은 남은 시간에 뭘하는게 가장 좋을까? 한달전 세븐해빗 워크샵에서 비슷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앞으로 1년밖에 못산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그 질문에 <가족과 여행을 간다><봉사한다><원수와 화해한다><책을 쓴다> 등등. 수천수만명이 거의 비슷한 프로그램을 생각하는 것 같다. 몇줄 적긴 했지만 뭐라고 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적잖이 당황했던 것 같다. 그런 질문을 3분줄테니 적어보라는 요구부터 화가 치밀만큼 졸속이다. 그나마 일년이니 망정이지, 이 책의 주인공처럼 일주일밖에 없다면 어쩔 줄 몰라 허둥대다 꼴깍 숨이 넘어갈 것 아닌가.

친절하게 코엘료는 몇가지 신중한 선택지를 보여준다.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 앞으로 얼마쯤 더 살수 있다는 정보를 갖는 순간 사람은 대단한 삶의 집착을 갖는다. 그때부터 하루하루를 수십배 짙은 농도로 살려고 노력한다. 만일 그렇게 평생을 산다면 정말 한점 후회없는 행복한 삶을 살다 가련마는.

그 워크샵에서 얻은 몇가지 성과중에 내 남은 시간을 계산해본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똑떨어지게 몇년 몇개월 며칠 몇시간이라는 숫자가 나온다. 최소한 30년은 남아있을 줄 알았는데, 이것저것 빼고나니 건강하게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은 고작 십수년에 불과했다. 자, 이제 이 시간들을 어쩔 것인가.

그 순간 갑자기 현명해졌다. 짧고 굵게 살자던 호언장담은 개풀 뜯어먹는 소리에 불과하다. 일단 생명연장이 으뜸이다. 급사할 가능성을 줄이고, 건강하게 활동하는 시간을 최대화하려면 해야할 일은 정해져있다. 말그대로 웰빙해야 한다. 하루 1440분의 10%를 건강에 우선 배정한다. 이 시간에는 건강만 생각한다. 달릴 때도, 윗몸일으키기를 할 때도 웰빙을 생각한다. 고기섭취를 대폭 줄이고 밭에서 갓 따온 채소들로 검박한 식사를 한다. 이렇게 사는 것을 눈꼴 사납게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면 다가가서 친절하게 그의 여생을 계산해주리라.

<달라이라마의 죽음에 대하여>에 이런 내용이 있다. 누구나 한번은 죽는다는 것을 모르는 이 없다. 그러나 대부분 죽기 얼마전까지 죽음을 의식하지 않고 산다. 인간을 제외한 동물들도 그러하다. 즉 자신의 죽음을 알고 있는 인간이지만, 평생 동물처럼 인생을 그럭저럭 깨달음없이 탕진하고 있다는 뜻이다. 왜 사람들은 죽음을 느끼지 못하는 걸까? 현자는 추측한다. 자기가 어떻게 나왔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가 언제 어떻게 갈지도 전혀 감을 못잡는 것이 아닐까. 마치 자신만은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처럼 착각하면서 시간을 물처럼 써버린다.

어떻게 시간을 쓸 것인가. 어떻게 코앞에 닥친 죽음을 맞을 것인가. 나는 지금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 건가. 후회없는 삶이란 무엇일까?

정신병원 원장 이고르박사는 마리아부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개개의 인간은 모두 유일해요. 자기 자신만의 자질, 본능, 쾌락의 형태, 모험을 추구하는 방식을 가지고 있죠. 하지만 사회는 집단적인 행동양식을 강요해요.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왜 그런식으로 행동해야 하는지 의문을 가지지 않게 되죠. 그들은 그걸 받아들여요. 타자수들이 아제르티 자판이 최선이라는 사실을 아무런 의심없이 받아들였듯이." (아제르티 자판은 우리가 보통 쓰는 컴퓨터 자판인데 원래 빠르게 자판을 두들기면 타자기가 쉽게 고장날까봐 일부러 타자속도를 줄이기 위해 고안된 것이란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이상한 순열에 익숙해지려고 애를 쓰면서, 그렇게 해야 최고속도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한다.)

"모든 사람과 닮기를 자신에게 강요하는게 심각한 겁니다. 그건 신경증, 정신장애, 편집증을 유발시켜요. 지연을 왜곡하고 하느님의 법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심각한 겁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숲에 똑같은 잎은 단 하나도 창조하지 않으셨어요. 하지만 부인은, 부인이 다르다는 걸 미친 걸로 생각하죠." 

남과 다르게 살려고 애쓸 것도 없지만, 남들처럼 살려고 자기 목을 옭죌 필요는 없다. 지금의 나를 판단하는 잣대는 내가 들고 있다. 아까운 내 삶을 누구에게 재단해달라고 할 것인가. 남들의 생각에 맞추다가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 그 미련하고 제 앞가림도 못하며,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의 이목만을 곁눈질하는 자들에게 잣대를 맡길 순 없다. 

요즘 시도때도 없이 산에 오른다. 짧게는 한시간여, 길게는 세시간 정도 산행을 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젊었을 때는 산을 뛰어오르다 시피 서둘러 올라갔다. 땀을 비오듯 흘리고, 장딴지 살이 돌덩이처럼 굳는다. 입과 코로 식식 내뿜는 가쁜 숨결과 터질듯이 쿵쾅거리는 심장박동을 느끼며 쫓기듯 올라간다. 북한산 정상까지 그렇게 두시간반 걸려 올라갔다는 사실에 만족한 젊은 것들은 그후 몇년동안 근처에 얼씬도 안한다.

이번에도 첫날은 그랬다. 대번에 그 효과가 나타났다. 산을 오르는데 두번이나 주저앉았다. 다음날 팍팍한 다리를 끌고 다시 그 산에 올랐다. 이번엔 어제의 절반으로 속도를 줄였다. 그리고 코스에 난 모든 턱과 계단을 하나씩 차례대로 밟고 올라갔다. 정상에서 시간을 따져보니 어제보다 불과 5분 늦었다. 물론 다리는 멀쩡했고 땀도 적당히 났다. 다음날은 약수터까지 가는 코스를 다녀왔는데도 시간은 똑같이 걸렸다.

늙으면 호흡을 길게 하고, 차근차근 순서 지키며 살아야 무리가 없다는 것이 산의 교훈이다. 젊어선 산이고 바다고 눈에 뵈는 게 없으니 도전하고 고생하고 그 결과조차 기쁘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늙으면 도전의 기회도 별로 없지만 고생하면 보람보다 몸 축나는 게 더 무섭다. 천천히 순하게 가면 심신이 편하고 그다지 늦지도 않는다.

천천히 내 길을 가는 게 좋다. 착한 미류나무처럼 바람결에 살랑살랑 웃으면서 하늘을 향해 조금씩 올라가면 된다. 그러자면 내 호흡을 만들고 그것에 익숙해져야 겠다. 운동을 하고 산행을 하는 이유는 내 호흡을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