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달동안 올려놓은 문패글을 떼었다. 지울까하다가 어디 쓰일지 모르니 남겨두기로 한다. 이런 글조각을 쓰긴 어디다 쓸까. 그래도 다행인 것은 아직 이글의 느낌이 눈썹만큼 남아있어 가슴이 아리다. 일본에 갔을 때 치명적이라는 복어의 독을 혀끝에 살짝 대본 적이 있었다. 짜르르 건전지를 핥은 것처럼 전율이 퍼진다. 지금 이 글조각을 읽으면서 그런 느낌이 떠오른다.

'혼자 있는 시간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분주하고 수선스럽게 살아서 바깥에 미련은 없다. 이따끔 매화꽃이 벙글었는지 궁금할 뿐. 말수를 줄이고 책읽기에 골몰하다보면 지구가 자전, 공전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을까. 여기 올린 글은 가볍게 쓰진 않았지만 손님을 배려하지도 않았다. 산간묘옥 세평짜리  서재에 시냇물소리라도 낭랑했으면 좋겠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 내 귀에 들리는 웃음소리도 맑아졌고, 마음도 한결 편안해졌다. 올해는 안식년이라 둘러댈 만큼 뻔뻔스러워지기까지 했다. 역시 인간은 기막힌 균형본능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잊지 말아야겠다. 어떤 고통과 번민이 덮쳐 눌러도 인간은 오뚜기처럼 균형을 되찾는다. 그 사실을 믿는 것과 아닌 것의 차이는 매우 크다. 이 글을 썼던 2월과 지금의 차이 정도라고 보면 된다.

이제 뭐라고 다시 문패를 걸 것인가? 아무래도 이번 문패까진 고개를 짓수그리고 있는게 좋겠다. 알라딘 블로그가 처음 생겼을 때보다 사람들의 왕래가 많이 늘어났다. 지나는 길에 이름을 보고 담장너머 기웃거리는 이들도 가끔 있는 것 같다. <어? 사람 안사는 집인가?> 그럴만도 하다. 두달쯤 이 집을 비웠다. 매일 작은 글이라도 한쪽씩 올리리라던 다짐을 잠깐 유보했다. 그 만큼 급하고 중요한 일이 있었다.(앞으로 계속해야한다. 그러나 집까지 비우면서 할 일은 아니어야 겠다.) 

내게 이 한달은 하안거. 두문불출 용맹정진해야 한다. 마음의 매무새가 흐트러지려고 한다. 잘못하면 예전 생활리듬으로 돌아갈 수도 있을 것 같다. 불안한 마음에 사립문 지르고 얼른 방안으로 뛰어들었다. 천천히 가자. 천천히 가야한다. 팔뚝의 푸른 힘줄과 장딴지 알통이 잔뜩 부풀어 올랐다. 다시 뛰어야 안되겠느냐라는 이데올로기 공세도 만만치않다. 아서라. 어떤 상황에서든 빠른 속도로 낙관을 만들어내는 내 위장본능을 조심해야 한다.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파울로 코엘료>를 막 읽었다. 죽음을 정확하게 일주일 앞둔 사람은 남은 시간에 뭘하는게 가장 좋을까? 한달전 세븐해빗 워크샵에서 비슷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앞으로 1년밖에 못산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그 질문에 <가족과 여행을 간다><봉사한다><원수와 화해한다><책을 쓴다> 등등. 수천수만명이 거의 비슷한 프로그램을 생각하는 것 같다. 몇줄 적긴 했지만 뭐라고 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적잖이 당황했던 것 같다. 그런 질문을 3분줄테니 적어보라는 요구부터 화가 치밀만큼 졸속이다. 그나마 일년이니 망정이지, 이 책의 주인공처럼 일주일밖에 없다면 어쩔 줄 몰라 허둥대다 꼴깍 숨이 넘어갈 것 아닌가.

친절하게 코엘료는 몇가지 신중한 선택지를 보여준다.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 앞으로 얼마쯤 더 살수 있다는 정보를 갖는 순간 사람은 대단한 삶의 집착을 갖는다. 그때부터 하루하루를 수십배 짙은 농도로 살려고 노력한다. 만일 그렇게 평생을 산다면 정말 한점 후회없는 행복한 삶을 살다 가련마는.

그 워크샵에서 얻은 몇가지 성과중에 내 남은 시간을 계산해본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똑떨어지게 몇년 몇개월 며칠 몇시간이라는 숫자가 나온다. 최소한 30년은 남아있을 줄 알았는데, 이것저것 빼고나니 건강하게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은 고작 십수년에 불과했다. 자, 이제 이 시간들을 어쩔 것인가.

그 순간 갑자기 현명해졌다. 짧고 굵게 살자던 호언장담은 개풀 뜯어먹는 소리에 불과하다. 일단 생명연장이 으뜸이다. 급사할 가능성을 줄이고, 건강하게 활동하는 시간을 최대화하려면 해야할 일은 정해져있다. 말그대로 웰빙해야 한다. 하루 1440분의 10%를 건강에 우선 배정한다. 이 시간에는 건강만 생각한다. 달릴 때도, 윗몸일으키기를 할 때도 웰빙을 생각한다. 고기섭취를 대폭 줄이고 밭에서 갓 따온 채소들로 검박한 식사를 한다. 이렇게 사는 것을 눈꼴 사납게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면 다가가서 친절하게 그의 여생을 계산해주리라.

<달라이라마의 죽음에 대하여>에 이런 내용이 있다. 누구나 한번은 죽는다는 것을 모르는 이 없다. 그러나 대부분 죽기 얼마전까지 죽음을 의식하지 않고 산다. 인간을 제외한 동물들도 그러하다. 즉 자신의 죽음을 알고 있는 인간이지만, 평생 동물처럼 인생을 그럭저럭 깨달음없이 탕진하고 있다는 뜻이다. 왜 사람들은 죽음을 느끼지 못하는 걸까? 현자는 추측한다. 자기가 어떻게 나왔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가 언제 어떻게 갈지도 전혀 감을 못잡는 것이 아닐까. 마치 자신만은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처럼 착각하면서 시간을 물처럼 써버린다.

어떻게 시간을 쓸 것인가. 어떻게 코앞에 닥친 죽음을 맞을 것인가. 나는 지금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 건가. 후회없는 삶이란 무엇일까?

정신병원 원장 이고르박사는 마리아부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개개의 인간은 모두 유일해요. 자기 자신만의 자질, 본능, 쾌락의 형태, 모험을 추구하는 방식을 가지고 있죠. 하지만 사회는 집단적인 행동양식을 강요해요.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왜 그런식으로 행동해야 하는지 의문을 가지지 않게 되죠. 그들은 그걸 받아들여요. 타자수들이 아제르티 자판이 최선이라는 사실을 아무런 의심없이 받아들였듯이." (아제르티 자판은 우리가 보통 쓰는 컴퓨터 자판인데 원래 빠르게 자판을 두들기면 타자기가 쉽게 고장날까봐 일부러 타자속도를 줄이기 위해 고안된 것이란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이상한 순열에 익숙해지려고 애를 쓰면서, 그렇게 해야 최고속도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한다.)

"모든 사람과 닮기를 자신에게 강요하는게 심각한 겁니다. 그건 신경증, 정신장애, 편집증을 유발시켜요. 지연을 왜곡하고 하느님의 법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심각한 겁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숲에 똑같은 잎은 단 하나도 창조하지 않으셨어요. 하지만 부인은, 부인이 다르다는 걸 미친 걸로 생각하죠." 

남과 다르게 살려고 애쓸 것도 없지만, 남들처럼 살려고 자기 목을 옭죌 필요는 없다. 지금의 나를 판단하는 잣대는 내가 들고 있다. 아까운 내 삶을 누구에게 재단해달라고 할 것인가. 남들의 생각에 맞추다가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 그 미련하고 제 앞가림도 못하며,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의 이목만을 곁눈질하는 자들에게 잣대를 맡길 순 없다. 

요즘 시도때도 없이 산에 오른다. 짧게는 한시간여, 길게는 세시간 정도 산행을 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젊었을 때는 산을 뛰어오르다 시피 서둘러 올라갔다. 땀을 비오듯 흘리고, 장딴지 살이 돌덩이처럼 굳는다. 입과 코로 식식 내뿜는 가쁜 숨결과 터질듯이 쿵쾅거리는 심장박동을 느끼며 쫓기듯 올라간다. 북한산 정상까지 그렇게 두시간반 걸려 올라갔다는 사실에 만족한 젊은 것들은 그후 몇년동안 근처에 얼씬도 안한다.

이번에도 첫날은 그랬다. 대번에 그 효과가 나타났다. 산을 오르는데 두번이나 주저앉았다. 다음날 팍팍한 다리를 끌고 다시 그 산에 올랐다. 이번엔 어제의 절반으로 속도를 줄였다. 그리고 코스에 난 모든 턱과 계단을 하나씩 차례대로 밟고 올라갔다. 정상에서 시간을 따져보니 어제보다 불과 5분 늦었다. 물론 다리는 멀쩡했고 땀도 적당히 났다. 다음날은 약수터까지 가는 코스를 다녀왔는데도 시간은 똑같이 걸렸다.

늙으면 호흡을 길게 하고, 차근차근 순서 지키며 살아야 무리가 없다는 것이 산의 교훈이다. 젊어선 산이고 바다고 눈에 뵈는 게 없으니 도전하고 고생하고 그 결과조차 기쁘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늙으면 도전의 기회도 별로 없지만 고생하면 보람보다 몸 축나는 게 더 무섭다. 천천히 순하게 가면 심신이 편하고 그다지 늦지도 않는다.

천천히 내 길을 가는 게 좋다. 착한 미류나무처럼 바람결에 살랑살랑 웃으면서 하늘을 향해 조금씩 올라가면 된다. 그러자면 내 호흡을 만들고 그것에 익숙해져야 겠다. 운동을 하고 산행을 하는 이유는 내 호흡을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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