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열린책들 세계문학 20
토마스 만 지음, 홍성광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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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생 때 민음사에서 나온 '베니스에서의 죽음' 을 읽으며, 세상에 이렇게 재미 없는 소설들이 있을까 싶었다. 억지로 읽어서 그런지 끝까지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니스에서 죽음' 외 다른 단편 소설의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러다 거의 새책과 다름없는 열린책들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을 중고서점에서 발견하였고, 정말로 이 책이 내 기억대로 재미없는 소설인지, 아니면 이제와서 읽으면 꽤 재밌는 소설일지 궁금해서 다시 읽었다.

  대학생 때 보다는 재밌게 읽었지만, 역시 토마스 만의 중단편 소설은 재미에서 가치를 찾기는 어렵단 결론을 내렸다. 이 책에는 토마스 만이 작가로서 조금씩 인정을 받던 시기의 소설 8편이 실려있다. 「굶주리는 사람들-토니오 크뢰거-힘든시간-베네치아에서의 죽음」 까지 무려 책의 절반인 4편의 소설 주인공이 속세와 거리가 멀고,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지만 외로운 예술가, 즉 토마스 만 자신을 투영한 사람인 건 좀 아쉬웠다. 또 소설들 대부분이 바그너의 음악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바그너 음악이라곤 '발퀴리의 비행' 과  '트리스탄과 이졸데' 서곡 밖에 모르는 나는 그의 소설들을 완벽하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 그래도 이번 열린책들 버전에서는 바그너에 대해 주석으로 꽤 많은 설명이 되어있어서 읽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


  제일 좋았던 소설은 대학생 때도 좋아했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이고, 그 다음으로는 이번에 처음 읽은 '굶주리는 사람들' 이었다.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은 베네치아에서 휴가를 보내던 소설가 '아센바흐'가  아름다운 소년 '타지오'를  사랑하게 되고 결국 그 곳에서 죽는 이야기다. 이 소설을 다시 읽으니,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베네치아를 어딘지 모르게 병들고 광기어린 곳으로 묘사한 것 자체가 대단하단 생각을 했다. 아센바흐가 사랑하는 타지오도 단지 미와 젊음의 상징이 아닌, 불길함과 타락의 상징이지 않은가. 이러한 역설적 상징과 소설 전반의 어두운 분위기에 매혹될 수 밖에 없었다.

  '굶주리는 사람들' 에서는 언제나 사람들 사이에 섞이지 못하는 이가 느끼는 고립감과 나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조롱과 선망이 뒤섞인 묘한 감정이 너무 절절하게 서술되어 있어 읽다 좀 울었다. 이 소설이 좋았던 건, 제목이 그냥 '굶주리는 사람' 이 아니라 '굶주리는 사람들' 인 것이다. 마지막에 주인공이 나와 비슷한 누군가를 발견하고, 자기와 닮은 그를 깊이 동정하면서도 동질감을 느끼는데 그 장면마저 없었다면 이 소설 역시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만큼 우울한 소설이 되었을 것이다. 

 토마스 만의 가장 유명한 소설 중 하나인 '토니오 크뢰거' 도 다시 읽으니 새로웠다. 누군가를 사랑하지만, 그 사람과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것에 대하여 누가 토마스 만 처럼 잘 쓸 수 있을까 라고 내내 감탄하며 읽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여행에서 돌아온 토니오가 자기 애인에게 본인의 예술관을 설교하는 부분은 좀 지루했다. 그 설교가 아예 의미가 없다고 보진 않는다. 토니오가 굳이 그렇게 반복 설명을 한 이유는 아마도 토마스 만 본인이 예술가로서의 사명감과 가치관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였으리라. 

  근친상간을 소재로 한 '벨중족의 혈통' 은 다 읽고나서 너무나 찝찝했다. 남녀 이란성 쌍둥이였던 토마스 만의 아내에게서 소재를 가져와 쓴 소설이고 그 때문에 소송에 휘말릴까봐 한동안 출판을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소설이 신기한 게 이 소설이 쓰여진 후 태어난  토마스 만의 자녀 중 첫째인 딸 에리카와 둘째인 아들 클라우스도 남매보다는 연인에 가까운 관계 였다는 것이다. 어쩌다보니 이 소설이 자녀들의 미래를 예언한 꼴이 되고 말았다니.. 좀 끔찍하다. 소설에 베를린의 '티어가르텐'이 언급되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갔던 곳이 독일 소설에 나오다니?!


토니오는 갑자기 입을 다물어 버렸고, 그의 두 눈은 우울한 빛을 띠며 흐려졌다. 둘이서 오늘 오후에 같이 가볍게 산보를 하기로 한 사실을 한스는 잊어버렸단 말인가? 이제야 그것이 생각났단 말인가? 자신은 그 약속을 한 이후 거의 한시도 잊지 않고 이 순간을 손꼽아 기다려 오지 않았던가!

- 「토니오 크뢰거」 중

그래서 그는 해맑고 순결한 자신의 사랑의 불꽃이 불타오르는 제단 주위를 조심스럽게 맴돌다가 그 앞에 무릎을 꿇고는, 변치 않는 마음을 간직하려고 불을 휘저으며 어떻게 해서든 그 불씨를 되살리려고 애썼다. 그럼에도 어느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소리 소문도 없이 그 불꽃은 사그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토니오 크뢰거는 이 지상에선 변치 않는 마음이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라움과 환멸감으로 가득 찬 채, 불꺼진 차가운 제단 앞에 아직 한동안 서 있었다. 그러다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제 갈길을 갔다.
- 「토니오 크뢰거」 중

아센바흐는 소년의 외모가 완벽하게 아름다운 것을 보고 흠칫 놀랐다. 창백하고 우아하며 내성적으로 보이는 그 소년의 얼굴은 벌꿀 색 머리칼에 에워싸여 있었다. 곧게 뻗은 코와 사랑스런 입, 감미롭고 신적인 진지한 표정은 가장 고귀한 시대의 그리스 조각품을 생각나게 했다. 더없이 순수하고 완전한 형태에도 불구하고, 그의 모습은 바라보는 자가 자연에서도 조형 예술품에서도 그만한 성공작을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유일무이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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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에 관한 잡담
    from 케이의 가지 못한 길 2017-09-07 13:12 
    P.S 1. 단편 소설집 독후감 제대로 쓰려고 맘 먹은 건 처음인데 너무나 어렵다.. 7월에 읽어놓고 이제서 쓰는 이유도 도저히 어떻게 써야할 지 감이 안잡혔기 때문이다. 으아아아. 구려 구려.P.S 2. 요즘 구글에서 작가들의 실제 삶에 대해 찾아보고, 사진 보는 데 재미가 들렸다. '벨중족의 혈통' 을 읽고 너무나 큰 충격에 토마스 만의 가족들에 대해 찾아봤는데, 토마스 만의 누나 둘은 자살했고, 토마스 만의 첫째, 둘째 아들도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