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자의 슬픔 - 1992 제16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박일문 지음 / 민음사 / 1992년 6월
평점 :
품절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살아남은 자의 치유



 살아남은 자의 슬픔


 브레히트의 시에서는 죽어버린 자와 살아남은 자가 나온다. 살아남은 자는 죽어버린
자에게 애석애함과 동시에 미안해함을 지우지 못하는 풍경이 나온다. 소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이 브레히트의 시를 인용발췌하면서 이야기의 보따리를 풀고 있다. 80년대의
민중을 위한 리볼루션, 운동을 했던 죽어버린 세대와 변해가는 시대와 탈색되어지는
시대정신에 대해 90년대에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그리고 있다. 


 살아남은 자의 치유

 박일문의 산발적이면서도 도발적인 글쓰기의 작법은 독자들로 하여금 마치 리트머스
종이에 물이 흡수되는 것처럼 강한 흡인력으로 그 세계 속으로 빠져들게끔 한다. 아무리
뛰어난 고전이라도 한 번 완독 후에는 책을 덮어버리는 나에게, 두세 번 책을 다시
읽게끔 한 이유도 거기에 있으리라. 라라와의 이별 그리고 디디의 죽음, 이 두 가지의
큰 이야기의 맥을 이어가면서 작자는 운동권의 이념과 생각과 관념들을 곁들이고 있다.
90년대 학번인 나로서 솔직히 80년대를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운동을 하는
자들도 마르크스의 자본론조차 완독치 못하고 운동한다는 저자의 말에 이끌려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고자 책을 구입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시대를 불문하고 언제나 모든 그
시대의 아들들은 그 나름대로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있다. 그 슬픔, 그 울분, 그 상처를
어떻게 치유해 나가면서 생을 어떠한 방향으로 건설해 나갈지가 바로 또 하나의
딜레마(dilemma)일 것이다.  
 

 이율배반적인 세상, 이율배반적인 생의 구도

 

 시대니 민중이니 하는 모든 운동의 주체자들이 인간인 이상 <이율배반적>인 현상이
계속적으로 반복되지 않겠는가? 그 이율배반은 단순한 운동권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와 인간관계, 심지어 사랑에서도 나타난다. 그 가운데 늘 우리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체감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글로써 그런 80년대의 삶의 작풍을 드러내
놓으면서 '우리는 이렇게 한 시대를 보냈다'라고 무용담처럼 이야기한다 해도 그것이
90년대로 연장되는 현재의 삶이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여전히 <이율배반적>인 구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기에 진정한 리벌루션은 바로 '한 인간' 각자에게서 이뤄져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나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80년대는 이른바 민중이니 대중이니
사회니 하면서 공동체적인 노래를 불렀다면 90년대, 더 나아가 2000년대는 보다 더
개인중심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 큰 차별점이다. 그러기에 예전에
대충 뭉쳐서 부른 노래가 이제는 더 개체적인 노래로 불려져야 할 것이다. 마치 뭉쳐지지
않는 모래알 같은 우리 시대에 리벌루션은, 운동은 각 개개인에게서 퍼져 나와야 할
것이다. 한 인간, 한 존재로부터 말이다. 그리고서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함께 나란히

놓여져야 할 것은 '살아남은 자의 치유, 재생, 회복' 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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