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평전
톰 라이트 지음, 박규태 옮김 / 비아토르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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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라비아에서의 3년

바울이 다메섹에서의 회심을 통해 자신이 이제껏 알았던 유대교의 모든 것이 예수로 집중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바울의 생애에 엄청난 충격이었다. 바울의 가진 모든 것이 이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야기하는 그것과 연결된다는 것! 평행선상에 있다는 것! 그는 바로 예루살렘으로 가서 예수님의 제자들(바울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지 않고 뚱딴지같이 아라비아로 갔다고 나온다.


갈라디아서 1: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아리비아 광야로 갔다는 말인데, 이곳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경로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아라비아에는 무엇이 있었나? 바로 모세가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바로 시내산이 있었다. 유대인들에게 그토록 친숙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언약을 세우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엄숙히 비준한 곳이다. 아라비아의 위대한 산 시내산은 그런 의미에서 시작의 장소였다. 바울은 자신의 신앙의 근원지에 대한 진지한 탐색이 이루어진 것이다.






2 신앙이 삶이자, 라이프스타일 그 자체


하지만, 이런 아라비아에서의 탐색은 단순히 고고학자들의 유물발굴이나 연구가 아니었다. 바울은 철저한 율법주의자였고 철저한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율법자인 가말리엘에게서 수학 받은 엘리트이다. 그가 철학적, 신학적, 율법적으로 완벽한 지성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삶과 완전히 동떨어지거나 분리되어진 신앙인은 아니었다. 이것은 오늘날의 종교라는 개념과 바울 당시의 종교는 다른 차원에서 생각할 수 있다. 바울 당시의 종교는 삶 전체를 아우르는, 더욱이 유대인이기에 그의 삶 자체가 율법(토라)의 충실한 자였다. 삶과 밀착된 율법이었다. 반대로 오늘날의 종교는 삶과는 동떨어진 면이 없지 않아 있다. 우리가 유대인, 유대교인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바울은 우리와 달랐다. 그는 늘 구약의 토라에 충실한 자였다. 날마다 묵상과 금식과 성경읽기와 쉐마(신 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를 암송했을 것이다. 이 쉐마Shema는 모세가 선포하고자 하는 모든 율법의 근원이자 신앙의 대상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유일성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히브리인들은 이 신앙고백을 자신들이 가진 신앙의 본질로 삼아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쉐마를 암송하는 의식을 지키고 또한 가르쳤다(신 6:7). 그럼으로써 선민으로서의 민족적 정체성을 확인하였다.


신명기 6:7-9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3 검증과 확증의 시간

바울에게 신앙, 바울의 종교는 현대인과는 차원이 다른 삶 전체, 라이프스타일 그 자체였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중에 진정한 그리스도인들도 있지만, 말 그대로 Sunday Christian도 많다. 말 그대로 ‘성도‘가 아니라 ‘교인‘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자들이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바울은 유대교, 율법, 토라가 삶의 전부였던 사람이다. 얼마나 열정적이었으면, 유대교를 거절하고 반기를 드는 예수와 예수의 제자들,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에 대해 분노하면서 핍박과 박해와 스데반을 죽음으로 몰고가는 ‘열정‘을 보였을까? 바울의 ‘열심‘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높은 차원의 그 무엇이다. 유대인들은 ‘테필림‘이라고 해서 머리 미간에도 손목에도 말씀을 붙여놓고 외우고 암송하였다. 문설주와 바깥문에도 쉐마를 암송하고 기억하고 기억했다(신 6:7-9). 반복하고 반복했다. 토라가 삶에 녹아내리도록 삶을 훈련하고 살아왔던 이들이었다. 그런 바울에게 다메섹 도상에서의 예수님과의 만남은 엄청난 쓰나미로 다가왔다. 이것을 자신 안에서 통합할 필요를 느꼈다. 그러기에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만나 사역에 임하지 않고 갈 1:16에선 자신의 가까운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바로 아라비아로 간 것이다. 바울에겐 자신의 인생을 뒤덮었던 이 영적 쓰나미를 자신의 과거와 현재에 통합하는 시간이, 그 무언가가 더 필요했다고 느꼈던 것이다. 삶과 신앙의 검증과 확증의 시간의 3년을 아라비아에서 보냈던 것이다.






4. 3년만의 출사

그리고서 그는 3년 만에 예루살렘 1차 방문을 하게 된다.


갈 1:18-19
18.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19.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20.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다
21.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22.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23.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24.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바울은 유대인의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계획 속에 ‘온 세상의 주‘가 되었다는 사실을 아라비아에서 확증한 후에 베드로와 예수님의 아우이자 새로운 운동의 중심인물로 인정받고 있던 야고보만 보았다고 이야기한다. 이 만남은 바나바가 주선한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친숙한 바나나의 주선이 아니었다면 옛날의 폭력과 살인으로 예수 믿는 이들을 괴롭힌 이 자가 회심했다는 사실을 못 받아들였을 것이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예상대로 사울을 의심했지만, 바나바는 사울이 정말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를 만났고 실제로 다메섹에서 예수를 메시아로 담대히 선포했음을 확실히 보증했다. 정말 바나나는 그의 이름의 뜻대로 ‘위로의 아들‘의 역할을 잘 수행했다. 이때까지는 일이 잘 풀렸다고 생각해도 될 듯 싶었다.







5 그러나, 귀향

그런데, 갈라디아서 2:1은 이렇게 시작된다. 갑자기 ‘14년 후‘란 말이 나온다.


2:1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왜 바울의 사역이 지속된 스토리는 나오지 않고, ‘십사 년 후에‘라는 말이 등장하는가? 이런 상황과 배경에 대한 설명을 톰 라이트의 <바울 평전>에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그 패턴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한다. 성경을 속속들이 알았고 예리한 지성과 막힘없는 달변을 소유했던 사울은 이제 사람들 앞에서 토론을 벌일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는 이런 공개 토론 때문에 고초를 겪게 된다.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인 지 불과 수년 뒤에 찾아온 이 고초는 예수를 믿는 자들이 겪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결국 신자들은 바울을 가이사랴 해안으로 데려간 뒤, 거기서 그를 배에 태워 그의 고향인 지금의 터키 남부로 보낸다.


예루살렘 공동체가 뒤 이어 무슨 일이 일어나리라고 생각했을지 우리는 알기 어렵다. 그들은 아직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은 위험한 새 땅에 있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기억이 아직도 그 가슴에 불타오르던 다소의 사울은 그 모든 일의 전말을 성경을 토대로 설명하고 싶은 열망에 들뜬 나머지, 자신이 건드린 벌집에는 분명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이제 그는 문제만 아주 많이 만드는 골칫덩어리였다. ˝그를 다소로 돌려보냅시다.˝ 그들은 필시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거기 사람들은 달변가를 좋아한다죠. 게다가 거기는 본디 그의 고향이기도 하니...






6 10년의 기다림과 침묵의 시간

그 뒤, 대략 AD36년부터 46년까지 10년 남짓 침묵이 이어진다...만일 우리가 빈칸으로 남아 있는 이 시기의 역사와 사울의 행적을 양쪽에서 신중히 파고들어 간다면, 탐구해 봐야 할 주제를 적어도 셋은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이는 가장 확실하면서도 간명한 주제인데, 우리는 사울이 가업에 종사하면서 스스로 생계를 꾸려 가기 시작했다고 추측할 수 밖에 없다....사울은 천막 만드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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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두번째 사실은 그가 기도했고 연구했으며 온갖 종류 일을 이해했다는 것이다. 그가 10여년 뒤에 쓴 서신들을 마주하면, 이 서신들이 집약된 논지를 담고 있어 난해하긴 하지만 그래도 그가 이 서신들을 쓰면서 완전히 신기원을 이룩했다고 생각하기를 불가능하다. 그는 분명 그때그때 상황을 따라 즉석에서 생각나는 대로 쓰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가 오랫동안 숙고했음을 보여 주는 모든 증거를 그의 무르익은 사상을 통해 제시한다. 사울은 침묵하며 10년을 보냈다. 이 세월 동안 그는 성경 성찰이라는 우물을 더 깊이 파고들었고, 나중에 이 우물에서 그에게 필요한 물을 길어 올리게 된다...우리가 바울을 이해하려 할 때 전제해야 할 점은 그가 기도하고 묵상하는 습관을 이어 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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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사울은 그 주위에서 들려오는 모든 사상과 귀를 기울인다. 국제도시 다소의 종교 문화뿐 아니라 철학 사상과 정치 사상에도 귀를 기울인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이방인의 어리석음을 더 깊이 일러 주는 증거요(물론 그런 증거는 많았을 것이다), 비록 인간의 삶 그리고 다소 너머의 더 넓은 세상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을 예배함으로 말미암아 뒤틀리고 흠이 났을지라도, 만유를 지으신 한분 하나님이 이 세상과 인간의 삶 속에서 역사하고 계심을 일러 주는 징표로 받아들였을 것이다.....다소는 삶, 죽음, 여러 잡신, 미덕, 괴로움이 없는 실존으로 나아가는 길에 관한 말과 철학적 담화, 사색, 논리, 현명한 충고와 그리 현명하지 않은 충고가 넘쳐나는 곳이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바울 평전>, 121-132p)







9 모든 생각을 메시아에게 순종하는 법을 배운, 침묵의 10년

바울의 침묵의 10년에 대해 톰 라이트는 이런 언급을 남긴다.


˝그는 나중에 자신이 ˝모든 생각을 포로로 사로잡아 메시아께 순종하게 만˝드는 법을 배웠다고 쓰는데, 이런 확신은 십중팔구 다소에서 보낸 침묵의 10년 동안에 갖게 된 것 같다...˝(<바울평전>, 134p)







10 기다림과 침묵, 바울의 사회적 거리두기

아라비아에서의 3년, 그리고 고향 다소에서의 침묵의 10년...!



과거에는 예수님에 대해 ‘비방자, 박해자, 포행자‘(딤전 1:13)였던 바울이 하나님의 사역을 본격적으로 감당하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했다. 그 시간 아라비아, 그리고 다소에서의 침묵...그 시간은 낭비의 시간이 아니었다. 그 시간은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시간은 우리가 맛있는 음식이나 밥을 먹기 위해선 뜸을 들이는 것처럼 숙성의 시간이었다. 사역은 속성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숙성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우리의 영혼도 숙성이 필요하다. 바울에 대한 모든 오만과 편견이 벗겨지는 데도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했다. 드라마틱한 변화와 회심으로 인해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변할 것 같았지만,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제대로 사용하고 싶어셨다. 그리하여 후에는 당대 최고의 제국인 로마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함을 통해 세계선교와 세계 복음화에 기초를 놓았던 인물이 바로 바울이었다! 그의 회심이후의 사역은 이전에 그가 가진 ‘열심‘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거기엔 기다림과 외로움과 침묵과 묵상, 기도의 더딤으로 준비되어져야 했다. 숙성의 니즈needs가 필요했다. 그리하여 그는 신약성경의 대부분의 서신을 기록하고 기독교의 교리dogma를 체계화하게 된 것이다.




바울의 사회적 거리두기의 시간들...
기다림은 결코 버려지는 시간이 아니다.
침묵은 결코 낭비되고 소모되고 휘발되는 시간이 아니다.
기다림과 침묵은 숙성의 시간이다!





덧붙이며:


*팬데믹으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기다림과 침묵의 우리의 시간들이 숙성의 시간이 되길 바라 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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