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tivation Of Claudius' guilt  
  윌리암 세잌스피어의 <Hamlet>은 많은 것을 생각게 하는 소설이다.

한 왕실에 얽힌 음모와 그로 인한 후유증을 비극으로 그려낸 4대 비극 중의 하나이다.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Hamlet"에도 창조적인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지만 여러 인물들 중에, 특히 나에게는 음모의 주동자였던, 그리하여 그 음모의 댓가로-By Costs-권력의 보좌를 차지하게 되었던 클로디어스를 주목하게 되었고, 그 클로디어스의 guilt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특히 클로디어스의 죄책은 햄릿이 고안한 연극 공연으로 말미암아 자극되어져 그의 guilt는 정점(頂點)에 치닺게 된다. 그 peak에서 클로디어스는 참회 아닌 참회-이렇게 표현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클로디어스가 '참회기도'를 하긴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참회라 할 수 없는 것이 그는 이 참회 이후에 자신의 잘못과 살인과 범죄를 은닉하는데 더 혈안이 되어 조카인 햄릿(클로디어스의 guilt의 폭로자, 선동자)을 광증(狂症)이라는 빌미로 영국으로 보낼려는, 더 나아가 죽일려는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가 나타나는데, 개인적으로 내가 받은 인상은 자기의 형을 독살한 클로디어스라는 인물에게서

어떻게 이러한 guilt가 나올 수 있는가 하는 의문점이 들었다. 어떻게 그렇게 파렴치한 인간에게서 그러한 심각한 guilt가 나올 수 있냐 이 말이다. 그 의문점이 나를 클로디어스라는 인물에게로 이끈 Motivation이라고 할 수 있겠다.

 

 

 

 

guilt Of Claudius
  클로디어스는 자기 형인 선왕(先王)을 독약으로 죽이고서

 

그 덴마크의 왕좌를 차지할 뿐만 아니라 햄릿의 어머니이자 왕비인 거트루드와 재혼을 한다.

자기의 계략대로 모든 것들이 자기의 수중에 들어오게 되었지만 그 모든 음모를 빤히 들여다보듯이

그 상황을 그대로 재현한 연극 공연을 관람하면서부터 그의 잠재된 guilt는 시작된다. 물론 이 연극의 내용은 햄릿의 계획에 의해 설정되어진 것이다.

 

클로디어스의 guilt는 아주 단말마적이다.

 제3막 제3장에만 드러나는 것이다. 그 이전에는 클로디어스의 행동에 이렇다할 guilt의 흔적이 없다(그 이후에도 없다).

그러다가 갑자기 제3막 제3장에서 봇물 터지듯이 그러나 아직 짧고 굵게 나타나는 guilt에 대해서 나는 조금은 어색한 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클로디어스가 그런 guilt를 느끼는 인간이라면서 어떻게 자기 친형을 죽이고 더 나아가 형수를 가로챌 수 있단 말인가? 그 엄청난 살인과 간통의 참상을 저질렀던 장본인이 참회의 기도를 드린다는 데서 조금은 어불성설한 느낌을 주는 작자의 '인물의 통합성(Unity of character)의 defect'를 지적하고 싶다. 허나 가만히 좀 더 들여다보면 왕비인 거트루드-거트루드의 성격창조는 많이 거슬리는 부분이 없지 않다-의 맘에 조금이라도 동(動)하게 한 인물이라면 이러한 guilt를 느끼는 것이 조금은 수용되어진다. 

 클로디어스의 guilt의 고백은 다음과 같이 비통하고 절실하다.

심각성을 스스로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 이 죄악, 악취가 하늘까지 찌르는구나.

인류 최초의 저주를 받으렷다. 형제로 죽인 죄로-기도도 드릴 수 없구나, 심정만은 간절한데...설사 이 저주받은 손목이 형의 피로 두꺼워졌다 할지라도, 하늘에는 이 손을 백설처럼 희게 씻어줄 단비는 없을까?

...그렇다면 나도 희망의 눈을 들어 우러러보겠다. 내 죄과는 이미 지나간 일, 하지만 어떠한 기도를 드려야 내 경우에 알맞을까? 그저 빌며 '비열한 살인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할까? 안될 말이지. 게다가 난 살인죄에서 얻은 소득을 보유하고 있쟎은가, 왕관과 야심과 왕비를, 죄의 결과를 얻은 소득을 보유하고서도 죄의 용서를 받을 수가 있을까?...하느님 앞에서는 피할 도리가 없고, 죄상은 그 본체를 드러내고, 그리고 죄상에 대해 일일이 증거를 실토할 수밖에 없으니까...아, 덫에 걸린 새 같은 이 영혼, 몸부림을 칠수록 더 죄어들기만 하는구나.

나를 도와주소서...만사 다 잘되게 해주옵소서(무릎을 꿇는다)."

 

 

 

  클로디어스의 기도에는 자신의 죄에 대한 철저한 인식(認識)-밑줄 친 부분-, 죄의 결과로 얻은 소득에 대한 자각과 죄책(罪責)-기울여진 부분-을 충분히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limit Of his guilt
 그러나 그의 회개의 한계는 여기에 있다.

"만사 다 잘되게 해 주옵소서"

   그의 기도에는 일종의 후회나 회개나 참회의 기미는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것은 후회도 아니요, 회개도 아니요, 참회도 아니다. 그냥 넋두리에 불과하다. 자신이 벌인 죄악의 열매를 다 먹으면서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진정한 회개와 참회는 그 자리에서 돌아서는 것, 방향을 돌리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클로디어스의 guilt는 불완전하고도 온전치 못한 guilt이다. 이것은 인물창조의 일관성에도 조금은 위배된다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다.

 

 

Epilogue...

   guilt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신약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를 은전30에 팔았던 가룟 유다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기의 스승을 판 제자같지 않은 제자였다. 처음에는 그가 물질, 금전에 욕심을 부려 예수를 팔았지만 후에는 그것에 대한 강렬한 guilt를 느낀다. 그 guilt는 곧 목매달아 자살하는 지경에 이르른다. 그것은 가룟 유다의 guilt의 peak였다. 클로디어스의 guilt도 Judah처럼 자살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내가 이야기하고픈 것은 최고의 악한에게도 일말의 양심(consciousness)은 있기에 그것은 죄의식 즉 guilty를 자극한다는 것이다.

  일종의 넋두리처럼, 클로디어스의 guilt에 대해서 내가 생각하기엔 일종의 '지킬박사와 하이드'적(的)으로 이해하면 될까?

비록 그가 엄청난 참상을 저지른 흉악범이지만 그에게도 일말의 양심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내부에는 언제나 지킬박사(善)적인 면모와 하이드(惡)적인 면모가 공존한다. Shakespeare는 이러한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과 안목을

 

자신의 인물창조에도 녹아나게 했다고 말하면 지나친 아부일까?

 

 

 

 

 

여담......

 

 

 

 

 

히가시노 게이고의 <기린의 날개>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고교 수영부의 유망주였던 2학년 요시나가 도모유키, 3학년들은 2학년이 잘 나가는 것에 질투와 시기가 가득했다. 수영부원들은 장난 비슷하게 도모유키를 괴롭히다가 수영장에서 질식사시킨다. 살해하고 만다. 고의성이 있어지만 죽이기까지 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이는 죽었다. 수학선생이자 수영교사인 이토가와는 이를 은폐한다. 학교의 명예와 자신의 미래와 모든 것을 고려해(?) 청소년들의 살해사건을 감춘다. 이를테면, 왕따 이후에 특별훈련이란 명목하에 훈련하다가 수영장에서 질식했다는 것이다. 선생이 죄를 덮고 수영부원들은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을 어찌 하지도 못한 채 죄책감 속에 살아가게끔 만든다.

 

"아이들을 위한 길이라고요? 거짓말 하는게 어떻게 아이들을 위한 길이란 말입니까?...3년전 당신은 세 아이에게 그렇게 가르쳤어. 그래서 스기노가 똑같은 잘못을 반복한거야."(기린의 날개,141.p)

 

스기노는 자신들의 그 옛날의 잘못된 범죄가 드러날까봐 죽은 학생, 요시나가 도모유키의 아버지 다케아키까지 살해하고야 만다. 진실이 은폐되면 은폐될 수록 진실을 더 감추기 위해 인간은 더 끔직한 만행을 스스럼없이 저지르고야 만다.

 

"우리가 무슨 짓을 한건가싶고, 한 사람의 인생을 엉망진창으로 망쳐놓고 이렇게 태연하게 살고 있다니, 인간실격이죠."

(31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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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08-11 23: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햄릿의 글은 대학때 쓴 글이라 부끄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