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쓴다는 것, 그것은 내 마음을 가지는 일이다(p.246)”


이 문장이 이 책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
저자는 삶의 밑바닥까지 간 인물이다. 채무관계 때문에 결국 감옥까지 갔다.
그리고 출옥후에 무일푼 막노동꾼, 즉 노가다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한다.

그런 그가, 무슨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한단 말인가?

아니다.

저자 이은대의 글은 굉장히 쉽다. 잘 읽힌다.
그리고 엄청난 에너지와 힘이 있다. 그 힘이 책장을 덮을 때까지 사그라들지 않는다. 그게 이 책의 대단함이다! 디테일한 자기 경험도 없고, 유명인사의 이야기도 거의 인용이 없다. 이런 책이 어디 있는가? 근데 힘이 있다.

그건 밑바닥에서 치고 올라오는 힘이다!!!

나는 누워서 조금 읽다가 자야지 했는데, 다 읽어버렸다.
인용문장을 보라.

‘마음을 가지는 일‘이라 한다.

얼마나 쉬운 문장인가?
‘이오덕의 우리말 바로쓰기‘에 딱 맞는 문장이지 않는가!
‘-마음을 지킨다, -마음을 다스린다, -마음을 소유한다‘ 이런 말보다 훨씬 더 다가온다.
이 문장을 보고서 심쿵했다.

이 책의 주제는 주구장창, 시종일관 ‘글을 쓰라!‘란 말이다. 근데 지겹지가 않다. 그것은 저자가 삶으로 체험해낸 고백을 해서 그렇다.
삶의 냄새가 난다. 새벽에 일어나 몇분 동안 글을 적고, 노가다를 하루종일 하고 얼마나 피곤한가! 그런데 돌아와 다시 몇시간씩 글을 쓴다.

왜 쓰는가?
생존의 글쓰기이다. 감옥에서 사랑하는 가족들을 남겨둔 채 빚쟁이의 죄수로 남겨졌다. 할 수 있는게 없었다.
그래서, 글을 썼다. 그게, 그것이 저자를 살렸다.

이런 이야기는 너무 뻔한 레퍼토리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저자가 이야기하는 글쓰기는 자기 영혼과의 독대이다. 영혼의 맨얼굴과의 직면이다.

영화 ‘히말라야‘에 보면, 엄홍길(황정민)과 박무택(정우)이 나온다. 남자들이 왜 미친듯이 산, 히말라야를 오르려고 하는가? 라고 질문할 때, 답은 이것이다.
˝영혼의 맨얼굴을 보기 위해서˝라고 했다. 거대한 히말라야 앞에서 인간은 너무나 작고 보잘 것 없는 인생이다. 생사를 결정할 권리도, 힘도, 자격도 없는 인간, 그 히말라야 앞에서 등반가들은 생사의 기로 앞에서 자기 인생에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영혼의 맨얼굴‘을 본다는 것이다. 군더더기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죽을 수도 있는 등정에서 자기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할 수 밖에 없다.

˝영혼의 맨얼굴˝


책의 목차중에 몇개만 소개한다.


-‘보이는 것을 구체적으로 써라. 보이지 않는 것에 닿을 수 있다.‘
-‘솔직해져야 진정한 나와 마주하게 된다.‘
-‘찌꺼기를 남기면서 치유되길 바라는가‘
-‘결국 배설은 나만의 힘으로 해내야 한다‘...


단순히 손 끝으로 적는 것, 글을 쓰는 것, 글을 치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내 마음을 가지는 일이다‘ .


저자의 재밌는 표현이 있다.

‘펜은 귓구멍을 파라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p.202)

(푸하하하!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여기까지 너무 싱겁다.
나는 책을 한 번 읽고 저자에 대해 검색해 봤다. 저자가 어느새 책을 몇 권 더 낸 것이다.
근데, 게중에 유독 눈에 들어온 책 제목이 있다.
제목인즉,

‘최고다 내 인생!‘....

생판 처음 대하는 저자가 글쓰기를 통해 감옥에서 마음정리 했다 치자. 직장을 얻고자 해도, 전과자이고, 나이도 많고 결국 ‘노가다‘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가 글쓰기를 좀 했다고, 마음을 가졌다고, 책 몇권 썼다고 ‘내 인생 최고‘란 말을 하다니.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최고다 내 인생‘


난 이 표현이 너무 가슴에 와 닿았다. 그러면서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이 책이 더 감동적이게 느껴졌다.
자기 영혼의 모든 껍질과 각질을 벗고서 자아의 벌거벗은 모습을 글쓰기를 통해 독대한 저자이다.
그가 스스로 ‘최고다 내 인생!‘이라고 외치는 것이다.


우리중에 그렇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만족한다는 수준이 아니라, SOSO한 수준이 아니라, ‘내 인생 최고‘라고 했단다.


난 그게 부러웠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 얼마나 깊은 어루만짐이 있었기에, 정신적 무장이 되었기에 그런 제목을 취했을까? 글쓰기를 통해 자신을 완전하게 용납하고, 이해하고, 사랑하고, 성취했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난 그런 그의 글쓰기가 부러웠다!


글쓰기가 ‘내 인생 최고이지 않느냐‘라고 사람들에게 동의를 구하면서
인기와 좋아요를 갈구하는(나도 찔린다), 더 나아가 대중적인 지지와 명성과 경제력을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에게 내가 거침이 없다는 게 말이다.


결국, 자기 자신의 문제이다.
<버스데이걸>리뷰에서도 밝혔듯이, 인생의 문제는 자기 존재, 자아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진정한 만족과 행복이 오는 것이다.


재독철학자 한병철의 <시간의 향기>에서 보면, 현대인의 가속성, 너무 빠르고, 너무 분주하고, 너무 할 일 많은 이 세상에선 시간의 향기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현대의 생명은 속도이다. 하지만 그렇게 자랑하는 속도 속에 시간은 쉽게 사라지고 휘발되어간다. 그 시간은 향기가 없다. 이유인즉, 하이데거는 ‘머무르지 못하는 산만함‘ 또는 ‘머무름의 부재‘로 표현했다(p.104),
시간의 ‘진행은 어디론가를 향한 전진이 아니라 단순히 끝없는 현재의 사라짐 일 뿐이다‘(p,8). 그러면서 대안을 ‘사색적 삶(vita contemplative)을 되살려야 한다‘(p.17)고 했다.


글쓰기는 내 마음을 가지는 일이다. 우직하게 자신의 영혼의 맨얼굴에 머무르면서 사색하는 삶이다. 거기에 ‘내 인생 최고‘가 있는 것이 아닐까!
(근데, ‘내 인생 최고‘란 문구가 들어간 책이 진짜 많네! 헉!)


아이들과 에코랜드를 갔다. 숲체험프로그램이 있어 참여했는데, 가이드가 인솔해서 숲을 돌다가 문득 눈을 감고 조용히 숲의 소리를 들어보라고 했다. 새소리, 물소리, 숲이 주는 미세한 고요함...아, 그런 경험은 또 처음이네! 나는 왜 숲을 잘 몰랐지? 세상이 줄 수 없는 잔잔한 고요함이 내 마음을 감싸안는 듯 했다. 숲의 향기였다. 그 짧은 찰나적인 머무름이 내 존재를 상쾌하게 했다.

우리의 글쓰기가 머무름의 시간을 통해 향기가 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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