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피엔스로 살 것이냐? 그리스도인으로 살 것이냐?


최고의 영적 거장들의 강의가 상쾌하다!
<이미-아직>의 긴장 가운데 그리스도인의 천국 소망이 있다!
개인적으로 D.A.카슨의 “여호와 삼마!”가 여운이 길다!


빅데이터가 출현하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천국이라는 이상왕국을 이야기하는 것은 정말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전제(premise)‘이 차이이다. <전제>가 다르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르다.
그 전제는 패러다임과 프레임을 구속하고 제한하기도 하고, 확장하기도 한다.


이것은 단순히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에서 스티븐 코비가 이야기한 지하철에서 이유도 없이 생떼를 부리는 어린 소년의 일화의 차원처럼 다룰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알고보니, 그 어린 소년은 지하철에 타기 전 자신의 엄마가 병원에서 죽었다는 현실을 감당할 수 가 없어서 그런 행태가 벌어진 것이었다). 프레임, 패러다임은 결국 전제에서 출발되어진다.


땅중심의 세상에서 천국을 생각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시대이다. 오늘날같이 인문학이 대세인 시대에, 저마다 합리적인 인문주의자가 되길 원하지, 하늘의 것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신기루 같은 신앙인, 종교인 된다는 것은 비합리적이고 어리석어 보인다. 나는 후자의 부류의 한 사람이다. 혹시나 나의 글이 전제가 다른 이들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도 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종교는 왜 과학이 되려 하는가?”란 리처드 도킨스의 접근에 대해 나는 반대로 질문하고 싶다. “과학은 왜 종교가 되려 하는가?” 하지만, 현실은 지금 ‘과학이 종교가 되어가고 있는‘ 현실이다. 과학은 검증된 것이고, 종교는 검증 불가하는 영적인 세계이니 더 할 것이다.


역사와 과학이 결합한 걸작,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과학이 인간의 생명까지도 정복할 수 있다, 생명의 길이까지도 늘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어느정도 과학은 생명연장과 장수에 기여를 했다. 하지만 과연 과학이 ‘길가메시의 프로젝트’인 인간의 불멸성, 영원성을 가져올 수 있을까? 그런 시도와 접근이 나쁘진 않겠지만, 난 거기에 부정적이다. 사람이 한번 태어나면, 한번 죽는 것은 운명이다.


유발 노아 하라리가 그의 저작에서 그렇게 그로테스크하게 총체적인 역사를 기술하고 과학의 폭발적인 동행으로 인해 우리는 지금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현재의 지금에 유발 노아 하라리는 그 책의 마지막에서 물음표를 던진다.


‘우리의 기술은 카누에서 갤리선과 증기선을 거쳐 우주왕복선으로 발전해왔지만,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이보더 더욱 나쁜 것은 인류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무책임하다는 점이다. 우리는 친구라고는 물리법칙 밖에 없는 상태로 스스로를 신으로 만들면서 아무에게도 책임을 느끼지 않는다. 그 결과 우리의 친구인 동물들과 주위 생태계를 황폐하게 만든다. 오로지 자신의 안락함과 즐거움 이외에는 추구하는 것이 거의 없지만, 그럼에도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채 불만스러워하며 무책임한 신들, 이보다 더 위험한 존재가 또 있을까?‘(p.588)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사피엔스는 대약진에 성공했다. <명견만리>에서 2030년이 되면 우리의 지식의 총량은 3일에 2배가 넘는 정보가 주어질 것이라 했다. 지식의 빅뱅이 일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인류의 대약진’이 우리의 근본적인 질문을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윌리암 세익스피어의 <리어왕> 1막 4장에서,

˝아아, 나는 잠들었는가, 깨어 있는가
누구,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가 없느냐˝ 라고 했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는 이인화의 장편소설 제목이기도 하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가 없느냐?‘란 본질적인, 철학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결국 사피엔스냐? 그리스도인이냐?의 질문은 인간의 ‘정체성‘(identity)의 문제로 귀결된다.

허먼 멜빌의 걸작, <필경사 바틀비>는 유명한 문장을 우리에게 남겼다.

˝(나는)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바틀비는 행동의 문제에 국한되었지만, 그 행동은 존재의 중심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하는가? 우리의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지으며 살아가는가에 따라 우리의 인생의 컨텐츠나 스토리도, 죽음도, 그리고 영원한 목적지도 달라질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의 편을 택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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