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와디의 아이들 - 성장과 발전의 인간적 대가에 대하여
캐서린 부 지음, 강수정 옮김 / 반비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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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인도라. 인도라면 세계 인구 2위의 나라, 카레, 영국, 유혈사태의 간디, 영화 '세 얼간이', 무한도전(…). 그렇게 많은 게 떠오르진 않는다. 기본적으로 동남아시아에 대한 관심은 유럽권이나 미국보다 당연히 적다. 인도에 대해 자세히 접한 건 거의 없고, 곽재구의 <우리가 사랑한 1초들>이나 이성규 감독의 다큐멘터리 '오래된 인력거'에서 릭샤를 접했다. '세 얼간이'나 뚜루뚜루뚜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코믹에 가까운데, 책과 다큐멘터리에서 접한 인도는 너무나 어두웠고, 그들이 삶은 처절했다.


  1947년 독립 전후 인도는 농업국가였지만 50년대부터 공업화를 추진하면서 경제 발전에 박차를 가한다. 시장개방 및 경제자유화를 본격화하고 소외계층의 빈곤을 타파할 정책을 계속 펼친다. 경제 발전의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2차 산업뿐만 아니라 3차 산업도 발전한다. 인도에는 관광지가 만들어졌고 많은 외국인이 방문한다. 외국인이 인도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공항이 필요하고, 자기 위해서 호텔도 필요하다. 밤새 꺼지지 않는 도시의 불빛, 휘황찬란한 관광도시 뭄바이에서 몇 발자국만 넘어가면 빈민촌이 나온다. 안나와디다.


  책은 고철을 모아 분류하여 되파는 소년 압둘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외다리 여자가 불타 죽어서 경찰이 압둘 부자(父子)를 쫓는다. 아버지는 아들을 고철 보관소에 숨기려 했다. 하지만 여자가 소사한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었다. 압둘은 숨는 것은 죄지은 사람만이 하는 행동이라고 생각에 법과 정의를 믿고 경찰서로 향했다. (프롤로그부터 한참 뒤에 뒷내용이 나오는데, 압둘의 믿음은 헛된 것이었다)


  안나와디의 생활은 처참하다. 식수를 얻기 위해서는 두 시간이 넘게 줄을 서야 하고 안나와디를 가로지르는 개울에선 썩은 내가 떠날줄 모르며 축사 옆 길이 3미터에 폭 1.8미터인 오두막에서 악취와 함께 아버지와 어린 두 남매가 산다. 국가에서 교육을 위해 학교를 몇 세웠지만 학교는 기금을 얻기 위한 수단일 뿐이지 교육의 장은 되지 못한다. 노인의 다리가 차에 으스러져 길에서 도움을 요청해도 아이들마저 외면한다. 피부가 좋지 않은 아이가 밤새 울자 아버지는 펄펄 끓는 콩 항아리를 자는 아이 몸에 쏟아붓는다. 경찰은 뇌물을 위해 애먼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고, 심지어 높은 지위의 의사조차 뇌물을 요구한다.


  이런 환경의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부패다. 빠른 경제 성장에는 어두운 그림자도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인도 권력집단에게 기회는 대체로 내부 거래로 분배된다. 공항이나 호텔 건설도 웃돈을 많이 챙겨준 기업이 맡는다. 부패와 함께 나라가 개방되고 자유경제가 발전하면서 부의 집중은 심해졌다. 현재 인도는 부자 순위 상위 100명의 자산 총액이 국내 총생산의 25퍼센트에 육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일부는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경제 성장의 그림자인 '부패'를 앞세운다. 부패로 아주 많은 기회가 약탈되는 나라에서 부패는 가난한 사람들이 가진 몇 안 되는 순수한 기회인 것이다. 작중 인물인 아샤는 빈민촌 대표가 되어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바꾸기 위해 경찰과 윗사람들에게도 돈을 주고, 심지어 저기 호텔에 자신의 꿈을 실현시켜줄 수 있는 애인도 있다. (딸인 만주는 당연히 싫어하지만)


  가난하면 똘똘 뭉쳐서 서로 도와야 살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부의 정책 순위와 시장의 막강한 권위가 세상을 너무 변덕스럽게 만든 나머지, 이웃을 도우면 가족의 생계를 부양할 능력이 위협받고 심지어 개인의 자유마저 위태로워지는 세상이 될 경우, 가난한 공동체의 상부상조 개념이 무너진다. 중산층은 나라의 추한 그림인 가난한 사람을 비난하는데, 동시에 가난한 사람들은 서로를 탓하기 바쁘다.


  꿈도 희망도 없는 안나와디에는 빛이 들 수 있을까?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지만 글쎄, 인물들에게 달라진 건 없다. 옆에서 누가 죽어도 그뿐, 넝마주이를 하든 고철팔이를 하든 어제와 같은 날의 반복이다. 길고 어려웠던 외다리 여자의 살인 재판을 끝낸 압둘의 아버지 카람은 말한다. 꿈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걸 알 때조차, 그리고 그냥 받아들이는 게 나을지 모를 때에도, 그걸 잡으려는 노력을 중단해서는 안된다고. 언뜻 보면 끝까지 꿈을 좇으라는 것처럼 보이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아무리 뛰어도 앞의 빛은 따라갈 수 없다는 뜻이 된다. 이렇게 강력한 고발서가 세상에 소개되어도 인도의 발전과는 반대로 안나와디 사람들은 여전히 그대로일 것 같은 무서움과 분노가 나를 뜨겁게, 동시에 차갑게 만든다. 현실에 기반한 소설이었으면, 강렬히 바란다. 너무나 무서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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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오늘의 일본문학 12
아사이 료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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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많은 이들이 개방형 SNS인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떠나서 다시 폐쇄형 SNS로 회귀하고 있다. 타임라인의 홍수라고도 할 수 있는 트위터는 무의미한 팔로잉 때문에, 페이스북은 각종 광고로 뒤덮인 뉴스피드 때문에 인기가 식는다. 싸이월드 때부터 익히 알려진 허세나 자기 과시를 위한 미사여구로 뒤덮인 프로필 등 익명성이 가지는 문제는 그 무대가 어디든 횡행한다.


  1989년생 어린 작가가 쓴 <누구>는 근래의 시각으로 익명성의 공간의 문제를 풀어내었다. 연극 동아리를 나와 그와는 정반대의 취업길을 택하려는 다쿠토, 밴드 출신의 고타로, 고타로의 옛 연인이자 유학파 미즈키, 미즈키의 친구 리카 등 취업을 앞두고 스터디를 하는 4명의 대학생과 주변 인물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린다.


  단순히 취업이 소재라면 아무리 젊은 작가가 그리는 생생한 이야기라도 나오키상을 수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취업 이야기가 극을 이끌어가는 데 큰 원동력이지만 근본적으로 이야기의 바닥에는 SNS가 깔려 있다. 등장인물 소개을 그들의 트위터 프로필로 대신하고 각 장(章) 시작이나 끝은 인물들이 쓴 트윗이다.


  트위터는 140자 이내의 짧은 글밖에 쓸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효율적인 단어를 써야만이 한정된 공간에 자신의 뜻을 정확히 전할 수 있다. 이 효율적이란 단어, 참 좋아보이지만 동시에 매우 쓸쓸하기도 하다. 최소한의 말로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버린 말이 필시 있기 때문이다. 짧고 간결하게 표현하기 위해 버리는 문장이 압도적으로 많아지는 순간, 실질적으로 한 사람을 표현하는 건 버려지고, 선택되지 못하는 단어가 된다.


  비슷하게 선택된 단어 때문에 사람들은 몰개성화(化)되어 보인다. 주인공 다쿠토는 친구인 긴지와 리카의 애인 다카요시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둘의 트윗은 얼추 비슷하고, 우리가 보는 건 트윗뿐이기 때문에 그 둘이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사고의 편의성과 효율성을 위해 비슷해 보이는 것끼리 한데 그룹화하는데, 이는 그저 표상적으로 보이는 것만으로 사람이나 현상을 판단하는 위험을 낳는다. 효율성을 외치는 시대에 상상력이 필요한 이유다. 상상을 통해 짧은 트윗 너머 진짜 본질을 볼 필요가 있다.


  자유로운 팔로잉 시스템도 트위터를 불편하게 만든다. 처음 보는 사람을, 단지 프로필만 보고 팔로잉 하는 것. 트위터를 처음 시작한 사람은 한번씩 거친 단계일 것이다. 맞팔 100%를 외치며 여기저기 팔로잉을 하고 그 숫자가 늘어날수록 왠지 모를 희열(?)을 느낀 이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내 이런 행동에 환멸을 느끼고 트위터를 떠나오는 사람도 많다.


  본능적으로 팔로잉/팔로워 숫자가 무의미함을 느낀 것이다. 인맥의 '맥'자는 맥박의 '맥'자와 같다. 맥박은 피부 밑에서 뛰고, 우리가 산다는 걸 느끼게 해준다. 타임라인에서 맥박을 느낄 수 있을까. 대부분의 트윗은 메아리가 없이 그저 퍼질 뿐이다. 갑자기 어디서 만나자고 해봐야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이건 진짜 '맥'이 아니다. 진짜가 아닌 가짜에 대고 아무리 말해봐야 돌아오는 대답은 무의미하다.


  이런 현상은 비단 트위터, 페이스북으로 대표되는 SNS뿐 아니라 실제 사회에서도 보인다. 명함이나 인상을 보고 사람을 쉽게 판단한다든가 인맥을 넓히기 위해 관심에도 없는 단체활동을 하는 것에서 충분히 볼 수 있다. 소설 속 인물이 냉소를 가장하여 남을 비방하는 행동하면서 남에게 관심받는 것을 즐기는 부분은, 무대가 트위터 비밀 계정일 뿐 이미 익숙한 장면이다.


  SNS에서 느껴지는 많은 장단점이 이미 많이 알려지는 지금에는 그리 새로울 것은 없고 평이하게 느껴져 아쉽다. 인간관계에 대한 통속적 통찰을 젊은 감각으로 SNS와 취업 등의 트렌드에 맞춰 이야기를 잘 풀어내서 좋은 평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10점, 20점짜리 자신을 남에게 보여주는 건 큰 실례라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철학자 강신주는 가면이란 약자가 쓰는 것이라고 했다. 남들에게 진짜로 부딪히는 것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 당당한 것이다. 팔팔 뛰는 진짜 맥을 찾아 자신의 이야기를 하길 진정으로 바란다. 정말로 중요한 이야기는 SNS 어디에도 쓰지 않는다. 정말로 말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런 데 쓰고 답장을 받는다고 만족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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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 맥베인 전작, 반드시 이뤄지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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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13가지 질문 - 둥근 사각형을 믿는 사람들에게
잭 보웬 지음, 하정임 옮김, 박이문 감수 / 다른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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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


0. 짧게 짧게.


1. 두 달 전에도 멋진 철학 입문서라고 <만화로 보는 지상 최대의 철학 쑈>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포스트) <철학 쑈>의 출판사인 '다른'에서 철학서적을 하나 더 냈길래 냉큼 구매했더랬죠. 점찍어두었던 <범퍼스티커로 철학하기>의 저자인 잭 보웬의 책이어서 더욱 신뢰가 가기도 했구요. 물론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사놓고 책장에서 먼지만 쌓이고 있었습니다. 이 책을 완전히 잊었는데, 어느 날 택배가 왔더군요. 아무 것도 사지 않았는데 말이죠. 알고보니 <철학 쑈>의 구매 이벤트에 당첨됐더군요. 덕분에 똑같은 책이 두 권.


2. 선물 용도 외에 같은 책을 다시 구입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구입은 고사하고 누구에게 선물받은 적도 없습니다. 참 비루한 인생이야. 쨌든, 짧은 기간에 같은 책이 생긴 건 운명이다!라는 생각도 들고 손때는 커녕 먼지만 끼는 책에게 미안하기도 해서 박스 뜯자마자 책을 폈습니다.


3. 제목 그대로 철학서적입니다. 기존의 철학서와는 다르게 소설형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소피의 세계>가 철학사를 다루었다면 <13가지 질문>은 몇 가지 주제나 소재를 던져주고 그에 대한 철학적 논제를 풀어나갑니다. 지식, 자아·이성·정신, 과학, 참과 거짓, 신, 악, 동양 사상, 종교와 이성, 자유의지, 과학, 논리, 사회·정치·돈, 윤리와 도덕에 대해 총 13장에 걸쳐 말합니다.


4. 그리고 이 한 장에는 세 개의 이야기가 들어갑니다. 주인공인 이언이 꿈에서 노인을 만나 각종 모순이 가득한 질문과 상황을 맞닥뜨리는 이야기, 꿈에서 깬 이언이 부모님과 함께 그 모순에 대해 토론하는 이야기, 마지막으로 친구들과 만나 새로운 의문을 갖는 이야기입니다. 가장 재밌는 부분은 첫번째 이야기인 꿈의 세계입니다. 난생 처음 들은 이야기를 하나 꺼내보겠습니다. '날마다, 모든 것은 크기가 두 배가 된다.'입니다.(10장- 이기심, 과학) 측정기구마저도 두 배로 커지기 때문에 크기의 변화를 인지하지 못한다는 거지요. 재밌지 않나요? 이 역설을 돌파하는 법은 역시 책에 있기 때문에 한번 읽어보시면 아실 겁니다. 사실 저는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5. 책의 중간중간 가장자리에 주석이 달려 있는데요, 이언이 경험하는 사상(철학, 과학, 심리학, 종교학, 인문학, 사회학 등)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언의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주석이 눈에 거슬리긴 하지만 모두 좋은 내용입니다. 추가로 책 마지막의 '더 깊은 질문들' 장이 걸작입니다. 한가지 답을 낼 수 없는 고민스런 질문을 던집니다. 실제로 일이 일어난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운동은 불가능하다는 제논의 역설은 현실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질까? 카뮈는 시지프가 행복할 거라고 말했는데, 당신이 그와 같은 운명에 처했다면 행복하겠는가? 정답 없이 그저 주관만 있는 질문들이라 난감할 따름이지만 자신의 답을 끝없이 의심하고 생각을 바꾸면서 자신만이 아닌 남도 사유할 수 있다는 데 큰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6. 소재별로 철학적 논제를 풀어나가는 전개는 전부터 이상적으로 생각하던 '철학 입문서'의 형식입니다. 하지만 철학이란 놈이 늘 그렇듯이 한 소재가 다른 소재와 완전 별개는 아닙니다. '신'의 소재만 해도 인식과 지식의 한계 및 범위, 신학, 자유의지, 윤리학까지 여러 방면에 걸쳐 있거든요. 전체적인 사고 틀은 비슷한데 소재별로 장마다 이야기가 따로 나오니 이야기의 수렴이 힘들고 조금 난잡한 편입니다.


7. 그럼에도, 이 책, 무지 재밌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딱딱한 철학사를 다루지 않는다는 점이겠지요. 소설형식을 취하기에 읽는 재미도 있고 흐름을 따라가다보면 수많은 철학 논제와 사상을 접할 수 있습니다. 재밌게 접하기, 제 독서론이기도 합니다. 재미는 어떤 것이든 시작에 있어 정말 큰 장점입니다. 음식으로 굳이 비교하자면 에피타이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장마다 수많은 이야기거리가 있는 책인데 짧고 서투르게 다루니 책의 재미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네요. 여튼, 모두 모순과 역설의 세상에 빠져보시겠습니까?


8. 추가로, '다른 출판사', 꽤나 멋진 곳입니다. <철학 쑈>나 <13가지 질문>, <소설쓰기의 모든 것>등 정말 좋은 책들을 뽑아주었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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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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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


  아마 두번째로 접한 스웨덴 소설이 아닌가 싶습니다. 첫 작품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밀레니엄 시리즈지요. 북유럽 스릴러 특유의 차가움과 건조함이 그리 와닿지 않아 1권에서 접었던 시리즈입니다. 그런데 이 소설은 밀레니엄 시리즈와는 전연 딴판입니다. 장르가 다르다보니 추리 따위는 당연히 없고, 전혀 딱딱하거나 건조하지 않고 부드러우며 유머가 넘칩니다. 하긴, '스웨덴 소설'이라는 큰 틀에 가두는 건 소설을 너무 얕잡아보는 행동이겠죠.


  곧 양로원에서 100세 생일파티를 맞이할 알란은 통제되고 자기 마음대로 생활하지 못하는 양로원 생활이 싫어 탈출을 감행합니다. 쑤시는 무릎에 오줌 슬리퍼를 질질 끌고 걷지요. 버스정류장에서 자기가 가진 돈으로 최대한 멀리 갈 수 있는 버스를 탑니다. 헌데 도중에 한 사내의 트렁크를 쓱싹(?)하고 맙니다. 나중에 보니 갱의 트렁크였고, 그 갱은 알란을 쫓아옵니다. 하지만 알라은 그런 사정 모르고 자기 갈 길을 갑니다. 실종, 납치, 살인사건에 휘말리면서 자기도 모르게 유명인사가 됩니다. 이렇게 현재가 이야기의 한 축이고,


  다른 한 축은 과거입니다. 알란이 태어난 후 100년의 세월을 다룹니다. 어릴 때부터 폭약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폭탄 만들기에 열을 올립니다. (그렇다고 범죄자는 아닙니다!) 알란이 크면서 자연히 세계 역사에 뒤섞입니다. 스페인 내전에서 폭사당할 뻔한 프랑코 장군을 구하고 트루먼 대통령과 친구가 되지를 않나 핵 탄두 개발에 큰 힌트를 주고 심지어 6·25전쟁이 한창일 때 북한에서 징징대는 어린 김정일과 만나기도 합니다. 세계사의 굵직굵직한 사건 뒤에는 칼란 알손이라는, 초등교육도 이수하지 않은 보통 사람이 있던 것입니다! 엄청난 비화입니다.


  고백하건데, 생각보다 지루했습니다. 출판사에서 엄청 광고를 때리고 다들 재밌다고 손가락 치켜드니 우선 사긴 했는데 1/3 정도 까진 영 아니올시다, 였죠. 현재에 벌어지는 100세 노인의 도주극은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면서도 너무나 태연한데다가 큰 갈등이나 위험요소가 없어요. 하긴, 나이가 먹을대로 먹은 인물들이 도망치는데 무슨 스펙타클을 바라겠습니까. 과거는 더 터무니없습니다. 오펜하이머도 끙끙대던 원자폭탄 문제를 단숨에 풀지 않나 블라디보스토크 수용소 대폭발의 주범에다 소련 물리학자와 함께 스파이로 활동까지 하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아무리 소설이 허구의 사건을 다룬다지만 이건 도가 지나쳤지요.


  하지만 계속 읽다보니 알란의 매력에 폭 빠지게 되었네요. 알란이 살아온 100년의 세월을 돌이켜보면, 세상은 참 많은 이념에 의해 지배되었습니다. 왕정, 공화정, 사회주의, 민주주의, 이런 이념은 사실 일반 사람이 이해하기 너무나 어렵습니다. 윗대가리들이 들고 일어나니까 아, 똑똑한 사람이 맞다고 하니 맞나보다 하며 그저 휩쓸려가기 일쑤지요. 프랑코, 트루먼, 마오쩌둥, 처칠, 김일성. 이 인물들이 한 데 섞일 수 있겠습니까? 그런 가운데 정치 얘기를 가장 싫어하고, 그저 휴식과 한 잔의 술만 있으면 좋다는 알란이 빛을 발합니다. 알란은 일련의 사건들을 정치적 편견 없이 자신의 시각으로 판단합니다. 자신의 청을 들어준다면 부귀영화를 주겠다는 스탈린에게, 당신의 성격이 마음에 안 드니 없는 일로 하겠다며 알란이 스탈린의 부탁을 단칼에 거절하는 모습은, 정치적 이념을 위한 행동과 사고에서 오히려 '사람'이라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빠져 있었다는 걸 극대화해서 보여줍니다.


  뒤로 갈수록 흥미진진해지는 과거와 달리, 현재는 너무나 술술 풀려갑니다. 부하를 모두 잃은 갱 두목이나 사건을 담당하던 수사반장이 오히려 알란 일행에 합류하면서 이야기는 산으로, 산으로. 하긴, 세계사의 중심에 있었던 알란의 과거보다 더 황당한 이야기는 없겠습니다만. 유쾌해보이는 여행길이지만 사실 현재의 이야기는 꽤나 심각합니다. 실종으로 시작해 절도, 납치, 살인, 거짓진술까지 지금의 눈으로 보면 깜짝 놀랄 만한 중범죄입니다. 분위기가 부드러운 이유는 등장인물들의 느긋한 성격도 있겠지만, 과거의 이야기와 대비되면서 그 경향이 두드러집니다. 과거에 '사람이 빠진, 오로지 이데올로기만의 대립' 사이에서 많은 이들이 희생에 비하면 - 그것도 개미손톱만큼의 비중으로 말예요 -  현재의 사건은 아무 것도 아닌 게 되어버립니다. 그만큼 과거의 비극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셈이지요.


  유쾌하게만 생각했던 여행길(사실 도주)을 곱씹다보니 심각한 의미가 숨어 있었군요. 쓰고보니 출판사 제공 책 소개와 겹치는 부분이 상당히 많네요. 작가가 아닌 출판사가 원했던 방향으로 해석은 어느 정도 했나보네요. 뭐, 사실 꿈보다 해몽이라고 괜한 과잉해석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사실 작가는, 그저 알란의 101살의 여행을 쓰고 싶었는지도 모르죠. 여튼, 과거의 굵직한 사건을 새로운 장면으로 만나는 재미도 있는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이었습니다. 알란에게 장수의 축복을. 치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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