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위한 경제학은 없다 - 부자들이 감추고 싶어 한 1% vs 99% 불평등의 진실
스튜어트 랜슬리 지음, 조윤정 옮김 / 비즈니스북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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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046.


  오늘 한겨레 신문에 한 기사가 났습니다. 2010년에 우리나라 소득 상위 1%의 소득 비율이 12%에 이르렀다는군요. 미국과 영국, 캐나다보다는 낮고 일본, 호주보다는 높다고 합니다. 소득별 구성비 중 가장 높은 것은 바로 근로소득(57.4%)이고요. 이런 소득 불평등은 최근 10년간 급격히 악화되는 양상을 보였고, 소득 불평등도가 영미식으로 전환되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네요.


  언제부턴가 우리네 사회에서 자신을 중산층이라 말하는 사람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분명 GDP는 증가하고 경제도 성장하고 있는데 실상 가정 꾸리기는 너무 힘들지 않나요. 세계의 경제 성장은 너무나 자명한 일입니다. 세상은 점점 부유해지는데 우리는 왜, 돈 때문에 서로를 미워하고 해하고 이토록 불행한 걸까요. 적금에 돈을 아무리 부어도 결국 이율이 거지 같아서 돈은 전혀 모이지 않고 집을 사려면 결국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야 겨우 살 수 있지요. 게다가 그 대출금을 갚으려면 아주 등골이 빠지죠.


  이런 소득 불평등은 비단 우리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남북분단 후 미국의 신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성장한 우리나라입니다. 그렇기에 미국이 그동안 보여왔던 문제점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죠.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문제를 분석하고 풀기 위해서는 위에서 영향을 미치는 미국과 영국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책은 지난 100여년 간의 미국과 영국 경제에 대해 말합니다. 그냥 경제가 아니라, 바로 99%의 부를 차지한 1%의 꼼수에 대해서 말이죠. 그리고 이 현상이 도대체 어떻게 벌어졌는지 말입니다.


  규제 당국이 뒷짐을 지고 앉자 은행들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경제의 틀을 만들고 개별 회사들을 성장시키는 데 훨씬 더 직접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학자들은 이런 과정을 '금융화'라고 불렀다. (126쬭)


  그러나 이제 금융 기관은 수익을 최대한 늘리기 위해 고객 예금의 몇 배에 달하는 돈을 빌려 주기 시작했다. 레버리지란 은행으로서는 마치 기적처럼 돈을 더 많은 돈으로 바꾸어 이익을 부풀리는 방법이었다. 은행은 몇 백만 파운드의 고객 예금을 기반으로 이 금액보다 20배나 30배 아니면 그 이상으로 많은 돈을 대출해 주었다. (132쪽)


  다른 어떤 내용보다도 가장 눈에 띄는 건 이 대목이었습니다. 현재 주식시장은 신용대출을 해주고 있습니다. 자본금에 최대 10배까지 돈을 빌려주고 그 돈을 투자에 쓸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돈을 주식시장에 투자하고 시장은 성장합니다. 그런데 참 웃긴거죠. 빌린 돈으로 성장시킨 시장은 그저 허상일 뿐입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정말 모래로 집을 짓고 있습니다. 아마 햇빛에 물이 마르면 곧 무너질지도 모릅니다. 물론 외형적 크기 상승에 따른 외부자본유입이 쉬울지 몰라도 외국 투자자들이 과연 이 사실을 모를까요.


  부자들이 발을 빼 주식을 처분하고 투자를 중단하자 경제의 소득 창출력은 심각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209쪽)


  현재 주가는 2,000 위아래로 계속 왔다갔다 합니다. 그런데 삼성전자 주식은 계속 올라 사상 최고치를 계속 기록하고 있습니다. 낮은 장을 이끄는 장점이 있지만 과연, 삼성전자 주식이 무너지면 우리나라 장에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생각하기도 참 무섭지 않나요. 겨우 몇 프로가 이끄는 전체.


  지독히도 어려운 책이었습니다. 아마 제대로 이해하려면 세 번은 읽어야 할 것 같아요. 하지만 상위 계층의 꼼수를 파악하고 우리의 여유로움을 되찾으려면, 공부하고 노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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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거 게임 헝거 게임 시리즈 1
수잔 콜린스 지음, 이원열 옮김 / 북폴리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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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045.

일본 영화 '배틀로얄' 기억나십니까? 수학여행을 다녀오던 고등학교 한 반이 배틀로얄이라는 프로그램에 강제로 참여하게 되어 서로 죽고 죽이던 영화입니다. 제가 중학생 때 이 영화를 봤는데 처음에는 피 때문에 기겁을 했어요. 그런데 그걸 조금 참고 영상을 보다 보니 신기하게도 자리에 앉아있을수 ㅔ있더라고요. 저도 모르게 익숙해지더라고요. 영화 안의 인물들도, 처음엔 방금 전까지 그리 가까이 지내던 친구를 해꼬지하지 못하지만 차차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은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서로를 죽입니다. 이것도, 그냥 익숙해진 거겠지요.

<헝거 게임>의 두 주인공 캣니스와 피타는, 이런 배틀로얄과 비슷한 상황에 처합니다. 무시무시하고 설명하기 복잡한 어떤 미래에, 판엠이라는 나라의 수도 캐피톨은 주변 도시의 반역에 의해 무너질 뻔했지만 겨우 막아냈습니다. 주변 도시에게 겁을 주고 통치를 쉽게 하기 위해 한 구역을 없애고 남은 열두 구역에서 매해 조공인 두 명씩을 뽑아 '헝거 게임'에 참여하게 합니다. 24명의 젊은이들은 서로를 죽고 죽이며 최후의 생존자가 되어야 합니다. 심지어 자기 구역의 다른 참가자도 쳐내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렇게 올해의 헝거 게임은 비극적인 두 남녀, 캣니스, 피타와 함께 막을 엽니다.

그렇게도 재밌다고 다들 손가락을 추켜세우던 책이었습니다. 인기에 힘입어 최근에는 영화화까지 되었지요. 무슨무슨 게임이란 제목을 보면 일반 장르소설보다 추리나 스릴러 소설을 떠올렸습니다. 사실 이번에 개봉한 영화가 아니었으면 전 이 책이 판타지 성을 띄리라곤 전혀 생각치도 못했을 것입니다. 진심을 말해보자면 이 책, 최근 이슈가 되는 데다가 갑자기 할인하길래 산 거지 그러지 않았으면 아마 사지 않았을 겁니다. 아무리 띠지에서 스티븐 킹이 이 책을 칭찬해도, 베스트셀러여도, 전미 박스오피스 1위여도 처음에 딱 흥미가 생기지 않으면 영 책을 읽을 맛이 안 생기거든요. 이런 선입견 때문에 사놓고 거의 2주일 이상 서랍 한 구석에 쳐박혀 있었지요.

그래도 이런 선입견을 깨고 재밌게 읽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몰입도가 뛰어나 단 세 번 책을 펼쳤는데 훌쩍 다 읽어버렸지요. 어떤 것보다도 '헝거 게임' 자체가 주는 긴박감이 엄청납니다. 물론 인물 사이의 감정선 생성이나 변화도 흥미롭지만 한정된 공간(하지만 사실은 엄청 넓은)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이 재밌습니다. 살기 위해 프로 조공인에게 어깨 쫙 펴고 허세를 부리고는 말벌집을 떨어뜨리는 장면이라든지, 다소 긴장감이 떨어지자 게임의 관리인들이 숲에 불을 질러 조공인들을 이리저리 뛰어다니게 하는 장면 등, 한정된 공간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게임이기에 벌어질 수 있는 사건들이 흥비를 부릅니다.

하지만 곳곳에 책을 덮고 싶은 부분이 많습니다. 재미가 없어서가 아니라 '헝거 게임' 자체가 주는 역겨움 때문이지요. 부와 가난은 어떤 시대, 어떤 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고 불평등은 당연하게 뒤따릅니다. <헝거 게임>에서도 이런 현상이 크게 두드러집니다. 소설의 골자인 '헝거 게임'에 참여하게 만드는 추첨표는 한 사람에게 1년 당 하나 씩 돌아갑니다. 그리고 식량을 얻을 수 있는 배급표 한 장와 추첨표 한 장을 받을 수 있죠. 캣니스와 동갑인 한 아이는 배급표가 무려 캣니스의 3배랍니다. 죽음을 담보로 단지 죽음을 연장할 뿐이지요. 아이들이 서로 피를 보며 싸우고 있는데, TV로 그 광경을 보며 신난다고, 헝거 게임을 자신들을 위한 쇼라고 생각하는 캐피톨 사람들도, 우웩. 이렇게 당하고 사는데도 단지 '헝거 게임' 우승자 배출 도시라는 허명을 얻기 위해 프로 조공인들을 내세우는 다른 도시도, 우웩. 자신들이 쇼에 이용당하는 줄 알면서도 불평등한 사회에 아무런 소리 내지 못하는 루저들에게, 우웩.

게임이 주는 긴박감을 이끌어 가는 데 다소 부족한 점을 느꼈다는 걸 굳이 단점으로 꼽겠습니다. 긴박감 외에 스토리나 감정처리가 다소 허술하고 유치했습니다. 화자가 16살의 어린 아이라서 그런 걸까요? 스토리 진행은 너무나 뻔하고 사이사이에 숨겨진 비밀 따위 없이 일직선방향으로 진행되서 이리 느꼈나 봅니다. 뒤로 갈수록 이야기의 힘이 줄어드는 것도 확연히 느꼈습니다. 제가 '왜?' 하며 궁금해 했던 것들은 아마 2부나 3부에서 밝혀주겠죠. 안 밝혀주면, 이건 그냥 그 상황을 위한 떡밥일 뿐이므로 작가에게 완전 실망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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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책의 숲에서 꿈을 찾다 - 중고생을 위한 자기관리 추천도서 60 청소년 자기계발 시리즈 2
방누수(일열) 지음 / 인더북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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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4.


사실 저는 책을 소개한는 책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좋아하지 않는다기보다는 싫어한다고 말해야 옳을까요? 특히 소개하는 책이 주로 문학이 된다면 더더욱 싫어합니다. 그 긴 장편 소설을 단지 네다섯 장에 요약해버립니다. 이게 단순한 스토리 소개로 끝났다면 거기서 그치겠지만, 게으른 사람은 겨우 그 다이제스트를 읽고 '아 이 책, 읽었지' 하며 책은 펴보지도 않습니다. 책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안다는 오만함, 그게 참 싫습니다. 아무리 요즘이 효율성을 따지고 시간을 아끼자는 시대이긴 하지만 단순히 이야기 얼개만 파악한 독서는 영 탐탁치 않거든요. 게다가 원래 책의 저자 의도를 읽는 사람이 날 것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책을 소개하는 책의 저자(뭔가 말이 이상하지만 그냥 넘어갑니다)가 원작자의 의도가 이럴 것이다 하고 한번 눈과 뇌의 필터를 거쳐 말하기에, 그건 제대로 된 감상이 아닙니다. 책을 읽은 후 자신만의 생각을 정리하고 여러 의견을 모아야지, 먼저 '이럴 것이다' 하는 추측성 의도를 접하고 책을 읽으면 사고는 너무 고착화됩니다.

하지만 그건 문학에서의 이야기이고, 비문학이나 실용서적에 들어오면 조금 다릅니다. 저번에도 누차 말했듯이 독서에는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정독, 통독, 속독, 간독, 발췌독 등이 있는데요, 문학과 다르게 비문학은 간독과 발췌독이 가능한 분야라고 합니다. 책의 모든 내용을 읽지 않고 내가 필요한 부분, 즉 수많은 예시는 모두 제외하고 굵직한 주장만 뽑아서 보자는 주장이지요. 어느 정도 공감은 합니다. 사실 쓰잘데기없는 예시를 나열해 책 한 권을 출판한 경우도 많거든요. 그럴 때, 사실 그 많은 예시가 저자의 주장을 확실히 뒷받침하는 데 쓰이긴 하겠지만 그걸 읽지 않아도 우린 저자의 뜻을 잘 알잖아요. 똑똑하잖아요 여러분은.

그렇기에 이 책이 참 의미가 있습니다. 이 책은 사실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류대성 선생님께서 쓰신 <청소년, 책의 숲에서 꿈을 찾다>라는 책에 이어 비슷한 제목을 달고 출판된 책입니다. 앞의 책도 상당히 재밌게 읽었는데 이번 책도 정말 재밌습니다. 저도 남들에게 뒤지지 않으려 열심히 책을 읽는 편이긴 합니다만 여기서 소개된 책 중 딱 두 권밖에 읽어보지 않았더군요. 절반이 넘는 책을, 제목조차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참 시야가 좁게 살아왔던 거죠. 맨 앞 장(자서전) 빼고는 대부분 실용서적이나 인문서, 교양서이기에 발췌독이 가능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 책은 바로 그 발췌독의 산물이라 할 수 있겠네요. 굵직한 예시를 몇 개 들어주고 저자의 의도나 책이 위시하고 있는 주장을 적었습니다. 단순히 거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생각해볼 점을 던짐 독자에게 단순한 정보를 주는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필터를 한 번 거쳐 쓰인 생각이기에 이 역시 무조건적으로 믿으면 안 되겠지만요.

저는 나이로는 청소년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정말, 가슴뛰었습니다. 아, 아직 내가 읽지 못한 책이 많구나, 접하지 못한 세계가 많구나, 많이 모자라구나, 하면서 말이죠. 조금 열등감이 들면서도 기뻤습니다. 모르는 것을 인식했다는 것, 그건 모르는만큼 내가 알 수 있고 성장할 여지를 주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혜란 모름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모름의 즐거움, 무지의 즐거움을 아는 자만이 진정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이 책과 함께, 당신이 청소년이 아니더라도, 즐겁게 숲을 걸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한가지, 당신의 눈에 보이는 것을 무조건 믿지는 마시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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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찬 청춘 - 원하는 것을 스스로 요구하는 정치적 주체
조윤호 지음 / 씨네21북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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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043.


  저번 주에 드디어 대망의 총선이 끝났습니다. 이래저래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사건이었지요. 뭐, 여권이 과반수 이상을 차지할 거란 예상은 했기에 그리 충격적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SNS에 재밌는 소식이 돌았습니다. 20대 여성의 투표율이 겨우 8%밖에 되지 않는다는 얘기 말예요. 그리고 20대 투표율은 25% 정도였던가요? 어쨌든 SNS에서 그렇게 광풍이 불던 것과는 다른 양상을 띤, 아주아주 아쉬운 선거였습니다. 물론 투표율 관련한 소식은 모두 루머라고 합니다. 세세한 통계는 2개월 정도 뒤에야 분석이 된답니다.


  덕분에 저희 20대는 '또' 욕을 먹었습니다. 20대 70% 이상만 투표를 했어도 야권이 이겼을 것이다, 20대 너희는 반값 등록금 공약을 지키라는 말 따위 하지 마라, 너희에게 미래는 없다, 아주 난리도 아니었죠. 이런 비난이 쏟아지는 이유는 비단 이번 투표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지금의 20대, 뭐랄까, 참 힘든 사람들입니다. 어떤 세대가 힘들지 않느냐고 하겠냐마는,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세대라 이겁니다. 당장 사회 제도권에 발을 들이기 위해 열심히 공부에만 집중하면 너희는 왜 지금의 틀 안에 갇혀서 놀려고 하냐 타박을 주고, 반대로 사회에 고착된 틀을 깨려고 행동에 나서면 남 생각 안하고 혼자 튀려고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욕들만 먹어왔습니다. 이게 왜냐, 지금 어른이 되신 분들은 8, 90년대에 민주화를 위해 힘써 오신 분들이기 때문이고, 그분들과 20대 사이에 끼어 계신 분들은 그나마 정치와 행동에 관심을 덜 가질 수 있는 시기(IMF 때 먹고 사는 데에나 신경쓰면 다행이었지요)를 사셨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경제위기도 벗어났고 사회는 성장만 바라보고 있던 시기, 그때 우리 20대는 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재난은 언제 어디서든 터지는가 봅니다. 서해교전이나 효순이 미순이 사건, 한미FTA,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등,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니 엄청나게 머리 아픈 문제가 빠빠빵 터졌습니다. 그런데 그때 우리는 무얼 하고 있었을까요. 뭐겠어요, 당장 입시에 내 코가 석자다 이 모양인데 다른 곳에 신경쓰고 있을 겨를이 있나요. 아침에 일어나 아침 먹고 학교 가고 공부하고 점심먹고 공부하고 저녁먹고 야자하고 집에와서 공부하고 조금 자고, 이런 생활의 반복인데 다른 곳에 한눈 팔 겨를이 어딨겠습니까. (감히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렇게 저희는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틀 안에서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치던 세대였고, 그랬기에 욕을 먹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똑똑한 사람은 똑같은 시대를 살아도 뭔가 특출하나 봅니다. 이 책의 저자는 ㅈㅓ보다 한 살이 적은데도 이력이나 경력이 대단합니다. 이명박 정권이 엉망일 때부터야 정치에 관심을 가지던 저였는데 저자는 무려 중학생 시절부터 세상을 보는 눈을 키웠습니다. 참, 부러운 친굽니다. 이 책은 2002년부터 2012년까지 저자가 어떤 눈으로 우리나라를 봐왔는가 기록한 책입니다. 정치는커녕 축구에도 관심이 없던 저자였지만 광장에서 함께 축구응원을 하면서부터 세상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미군부대 문제부터 노무현 당선, 탄핵, 한미FTA, 이명박 당선까지, 10년 동안 사회에서 다루어진 굵직굵직한 이슈에 대해 그때의 상황과 자신의 시각, 느낌을 썼습니다. 정치얘기를 한다고 딱딱하지만은 않고 톡톡튀는 20대의 감각이 있어서인지 이야기도 상당히 재밌게 풀어나갑니다.


  모든 정치관련, 아니 어떤 이념이나 주의에 대한 책을 읽을 때 주의해야 할 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양쪽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후 자신만의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자유주의를 비판한 장하준의 저서가 나오자, 그 저서에 반하는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장하준의 책에 대해 엄청난 열광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장하준도 사람이니 완벽할 순 없겠지요. 분명 논리에 빈틈이 있었을 테고 그 빈틈을, 그에 반대하는 책이 멋지게 파고들었지요. 물론 판매량이 어땠을지는 모르겠네요. 어쨌든, 자신만의 기준을 만드려면 양쪽의 이야기 모두 들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이 책은, 똑똑한 친구가 쓴 멋있는 책이기도 한 동시에 상당히 위험한 책이기도 합니다. 물론 저자는 양쪽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의견을 냈을 겁니다. 하지만 제가 읽은 책에는 자신이 지지했던 의견들에 대한 근거만 나와 있지 반대되는 의견의 근거는 그리 크게 부각되지 않습니다. (물론 전자도 부족하긴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독자가 아무런 정보나 근거 없이 저자의 의견을 따라갈 수 있다는 점입니다. 현재 시국으로 보면 저자의 의견을 수용하는 건 아주 일반적일 수 있거든요. 생각하기 싫어하는 요즘 젊은이들에게 이 책은 아주 먹기 쉬운 과일과 같습니다. 그냥 떠먹여줘요. 저자야 치열한 사고 끝에 결론을 얻었지만 책에 그런 게 나와 있답니까. 독자는 그냥, 아, 이렇다니까 이렇겠구나 하며 아무 비판 없이 넘어가버립니다. 그러니까 이 책을 모두 맹신하시진 말란 소립니다. 뭐든지 맹신은 좋지 않은 겁니다.


  정치. 참 어려워보이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도 어렵습니다. 수식이나 이론에 얽매이는 게 아닌 사람 사이의 심리, 세계경제, 역사 모두에 영향을 받고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앎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에 영향을 받는 정치이기에, 정치는 세상의 모든 것에 영향을 줍니다. 내 먹을 것, 입는 것, 사는 곳, 놀 것, 읽을 것, 즐길 것, 탈 것, 이 모든 것에 말이지요. 전 누군 여당을 찍었다고, 누군 야당을 찍었다고 편 가르기를 하며 싸울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다들 자신의 신념이 있기 마련이고 다른 것을 존중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우리나라는 언제 웃으면서 정치얘기를 할 수 있을까요. 싸이 말마따나 동서로 갈라 여야로 갈라 놀지 않고, 부산에서도 민주당이 전라도에서도 새누리당이 당선되는 날은 언제 올까요. 서로를 까대기만 바쁜 이 나라에서 과연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야 할까요. '개념차다'라는 의미는,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아니라 왜 그 선택을 하느냐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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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 수필
최민자 지음 / 연암서가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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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


  저에게 수필은 범접하기 어려운 분야입니다. 참 쉬운 단어와 문장으로 쓰이기에 접근하기 쉬워보이지만 쉽게쉽게 쓴다고 글을 내려적다 보면 결국 쓰레기가 되곤 하지요. 아아, 좌절. 물론 방법론 이전에 의식이 문제지만요. 예전엔 소설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다면, 이제 꿈은 '내 이야기를 온전히 쓰고 싶다'로 바뀌었습니다. 절대 파이가 작아진 게 아니어요. 오히려 더욱 깊어진 거지요.


  수필과 일기, 낙서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항상 고민하지만 항상 난항에 빠지고 좌절하고 말지요. 소설은 신변잡기적인 글을 쓰면 안 된답니다. 그렇다면 수필은? 수필 역시, 형식은 매우 자유롭지만 잡담을 쓴다면 그저 그런 낙서에 지나지 않겠지요. 자기반성과 성찰, 그리고 세심한 관찰력이 없다면 글은 그저 허세 가득한 글자모음밖에 되지 못할 겁니다. 그런 면에서 수필은 세상에서 가장 쓰기 어려운 글인 것 같습니다.


  제 글쓰기의 마지막 꿈이 '내 이야기를 쓰고 싶다'였는데, 과연 이 꿈을 제대로 세운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있어 보이고 싶어서 저런 문장을 앞세운 건 아닌지. 때론 자만에 잔뜩 취해 고개를 한껏 쳐들다가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하는가 하며 머리를 쥐어싸매며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요. 하긴, 글쓰기는 자신감과 자만심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라고, 누군가 말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 사실을 잊고 기뻤다가 슬펐다가,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하루에 몇 번이고 타고 말지요.


  저는 글을 잘 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참 바보처럼요. 아니, 노력이 아니라 시간 낭비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소설을 쓰려면 소설을, 수필을 쓰려면 수필을 봐야 했습니다. 그런데 전 작법서만 신나게 쳐다보고 있었지요. 이렇게 쓰면 소설을 잘 쓸 수 있어, 저렇게 써야 제대로 된 묘사야, 이게 바로 공감각적 표현이지. 방법을 알면 글 쓰는 게 쉬워질 줄 알았지요. 하지만 방법이 중요한 게 아니었더군요. 제길.


  그런 면에서 <손바닥 수필>을 접한 나흘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폭신한 양장본 표지에 앙증맞은 크기, 하늘을 향해 마음의 창을 활짝 여는 듯한 표지그림까지, 정말 너무 멋진 책이더군요. 물론 단순히 모양 때문에 책이 사랑스러웠던 건 아닙니다. 수필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지요? 일상의 작은 편린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감정이 과잉되지 않게 담담히 써내려가는 글이라고 생각해요.


  시간이 귀해지기 시작한 것은 시계가 흔해지고 나서부터다. 시계는 시간 도둑, 시간의 천적이다. 시간을 계량하는 게 아니라 시간을 훔치고 잡아먹는다. 시계들이 기하급수족으로 새끼를 쳐서 부엌에도 책상에도 손목 위에도 크고 작은 변종들이 범람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시간이 귀해지기 시작한 거다. 먹잇감은 일정한데 개체수가 증가하니 모자라 아우성을 지를 수밖에. (49쪽, '시간도둑'에서)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받아들였던 일상들을, 배배 꼬는 것도 아니고, 조금만 다르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남들과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누구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며 지나쳤던 것들을 조금 다르게 봄으로써 그것들은 생각한 이에게 의미를 가진 것이 되겠지요. 그럼으로써 조금씩 주변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고 다들 지루하다고 생각하는 세상을 조금 더 따뜻하고 재밌게 살 수 있지 않을까요?


  사실 글쓴 이 최민자 씨의 이름은 처음 듣습니다. 하지만 글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시선과 마음에서, 저자의 푸근한 미소가 떠오릅니다. 왠지 여기저기 주름도 패어 있지만 그 주름이 단순한 세월의 흔적은 아닐 듯싶습니다. 엽편 또는 장편이라 불리는 분량의 짧은 글로 구성된 책입니다. 어느날, 그냥 아무 생각없이 아무 페이지나 쫙 펴서 읽어도 너무나 좋을 책이란 걸 직감합니다. 책을 덮고나니 푹신한 표지가 손바닥처럼 느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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