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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금산 지음 / 실천문학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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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네 부로 이루어진 연작소설이다. 1,2부를 봤던 어제까지만 해도 완독 후 '리뷰' 란에 뭔가 끼적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40자평에다가 "그냥 좋다"라고만 간단히 적으려고 했다. 헌데 오늘 3부를 보고 4부까지 본 뒤 마음이 바뀌었다. 4부가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글의 말미에서 이 문장은 철회될 것이다.)


지금 시대가 어느 땐데, 이 작가, 담대하게도 자기 고백적인 소설을 썼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써도 팔릴까 말까 하는 판국에 대부분 소설 독자들이라면 관심도 갖지 않을 인기 없는/비주류 소설가의 삶에 대한 소설을 쓴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엔 사소설이나 고백 소설이라면 응당 있을 법한 침잠된 분위기가 없다. 그건 소설가 본인이라고 하는 게 맞을 주인공인 '나'와 썰을 푸는 화자 사이의 거리가 꾸준히 유지되기 때문이고, 그 거리 사이에 유머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해학적인 유머도 아닌 것 같고 자조적인 유머도 아닌 것 같으며 말장난식 유머도 아닌, 그러면서 이 모든 게 포함되어 있는 그런 유머. (화자의 이런 어조가 작가의 원래 스타일인지 아니면 이 소설에만 그렇게 쓰였는지 궁금하다.)


하지만 이 소설이 (문학사적으로) 가치가 있다면, 비주류 소설가의 생활사를 쓰는 동시에 그 맞은편에 '문학예술위원회'라는 (한국문학)(제도)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비주류 소설가의 생활사와 제도 사이에는 '자본'이라는 교집합이 철저하게 관여하고 있다. 생각만 해도 웃음보다는 한숨이 먼저 나오고야 마는 자본. 더군다나 자본과 문학이라니. 이미 자본에 결탁해버리고는 나 몰라라 그럼에도 문학입네 부르짖는 집단이 있는 한편, 그러나 자본이 어떻게 문학과 교접하고 있는지 낱낱이 보고해주는 이런 소설도 있는 것이다.


편지 형식으로 쓴 3부만 빼고 나머지 1,2,4부에는 작가가 작심이라도 한 듯한 각주가 잔뜩 달려 있다. 이 각주들이 이 소설에서는 독특한 역할을 한다. 고백 형식의 소설 속에서 각주의 존재란 고백 속의 고백, 말하자면 심층적인 고백과도 같은 외양을 띠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그런 것까지는 아니겠지만 형태적으로 그렇게 보인다.) 나의 진실된 고백을 들어주오. '실소'.


어쨌거나 이 소설,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난 유머가 있는 소설 앞에선 누구보다 먼저 한쪽 무릎을 꿇고 책을 읽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다른 파트에서보다 유난히 '세부'를 강조한, 그래서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있었던 일을 소설화했다기보다는 순수하게 지어내서 쓴 게 아닐까 싶은 3부를 지나 4부에 들어와서 마음이 바뀌었다. ('세부'는 장편소설의 필수 구성요소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세부'하면 필리핀 '세부'가 더 잘 떠올라서 영어로 '디테일'이라고 바꿔서 생각해봤다. 단박에 [나는 꼼수다]가 생각났다. 디테일에 강한 방송, 아이튠즈 팟캐스트 청취율 세계 1위에 빛나는 [나는 꼼수다]!)


4부는 한마디로 실패한 작품이었다. 이건 뭐, 앞서 장점으로 언급한 것들도 거의 드러나지 않고, 그렇다고 인도에서 있었던 일들이 디테일하게 보여지는 것도 아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단순한 에피소드 나열식의 구성. 이렇게 듬성듬성 쓸 바엔 차라리 인도에서 있었던 일을 따로 장편화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의문도 있었다.


하지만 내 생각이 짧았다. 나는 작가가 1,2,3부와 다르게 4부에선 왜 (굳이) 이렇게 썼을까, 라고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내 생각의 빈틈을 채워준 건 '해설'이었다. 미문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광고문구들이 곳곳에 존재하는 해설이 아니라, 정말 해설이었다. 해설에 의하면 4부의 지루함이나 산만함 속에 "20일 이상의 해외연수라는 규정이 다른 세계를 확인하고 탐구하기에 얼마나 부족한 시간인지, 그래서 제도적 지원이라는 명분이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지(384쪽)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제도의 구조적인 문제점을 소설의 구조적인 문제 그 자체로 보여주었다는 것.


해설을 읽자 내 꼬인 마음은 단숨에 해소됐고, 이렇게 리뷰 코너에 성깃성깃 페인팅을 하고 있다. 해설에도 두 차례 나오는 구절이지만 "무언가 하나를 끝까지 밀고 나간 삶에 그 전부가 닿아 있다는 사실"(181쪽)을 알게 된 작가가 앞으로 어떤 소설을 쓸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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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1-08-28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패쓰할 소설 작품을 이렇게 리뷰로 알려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닉네임을뭐라하지 2011-08-29 04:02   좋아요 0 | URL
패쓰라니... 아닌데요;; 이 소설은 괜찮은데요 ^^;

poptrash 2011-09-10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뭔가... 홍상수 같은 느낌인데?

닉네임을뭐라하지 2011-09-11 16:49   좋아요 0 | URL
음, 그런가? 근데 남녀상열지사는 안 나옴 ㅎ
 

















비교적 최근에 알게 된 사실. 바로 2003년 한겨레문학상을 받은 박민규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 전해인 2002년에 문학동네소설상 본심에서 떨어졌다는 것. 어떤 평을 들으며 떨어졌을지 궁금했다. 그러던 차에 오늘, 오랜만에 모 헌책방에 들렀다가 2002년 문학동네 겨울호를 구하게 되어 찾아봤다.  


우선 김윤식의 평

ㅡ 두 가지 점이 뚜렷했다. 소설적 존립 유형이 토종이라는 점이 그 하나. 다른 하나는, 풍속 유형이라는 점. 둘 다 소설이 지닌 발생사적 강점이라 할 것인데, 매우 딱하게도 이 두 가지 점이 그 나름의 본령을 발휘하기에는 각각 상당한 제약이 주어져 있어 보였다. 농경사회에서 비롯, 적어도 산업사회의 터전이 건재해야 한다는 조건이 그 하나인데, 이 터전이 무너져가는 오늘의 처지에서 보면 그 존립 기반의 빈약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어떤 대상, 가령 야구라든가 하는 직업적 특이성을 그릴 때 지독한 풍자라든가 유머, 요컨대 '지극한 가벼움'을 지향한다 해도 거기엔 산업사회를 지탱했던 철학이 깃들여야 하지 않을까. 이런 점을 염두에 두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다가왔다.


김화영의 평은 없다.


마지막으로 오정희의 평.

ㅡ 한국프로야구의 원년으로 기록되는 1982년 창단되어 1985년에 해체된, 프로야구팀 삼미슈퍼스타즈와 같이한 개인의 역사를 그리고 있는 이채로운 소설이다. '삼미슈퍼스타즈'라는 비운의 야구팀이 그 야구팀의 어린이 회원이었던 한 사람의 인격과 정서, 인생관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가 이십 년의 시간에 걸쳐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 혹은 고백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는 - 강하고 빠르고 쉴새없고 비정한 프로의 세계에 대비되는 유희성의 회복, 진정한 아마추어로서 아름다운 야구의 복원은 곧 본질적 인생의 복원이라는 - 전언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십 년의 세월을 소설적 전략이나 계산 없이 펼쳐 보이는 데서 생기는 장황함과 시시콜콜함이 지루하게 이어져 긴장감을 떨어뜨렸다.
  야구에 비유하여 펼쳐지는 사유는 자유롭고 재기가 번득이나 산만한 게 큰 흠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은 이 소설에 대한 한겨레 문학상 심사위원들의 심사평. (책 소개 코너에서 스크랩했다.)

현대 젊은 세대의 경쾌하면서도 치열한 삶의 자세를 스포츠 열기로 상징화한 감각성이 돋보였다. 실재했던 삼미 슈퍼스타즈 야구팀을 매개로 한 등장 인물들의 운명의 부침은 곧 현대인 모두가 피해갈 수 없는 삶의 실체이기도 하다. 특히 감각적인 문체와 스포츠를 통한 인생론이 탁월하다. - 임헌영(문학평론가)

<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처음에는 응모작 가운데서 눈에 잘 띄는 작품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단 잡게 되면 단숨에 읽어치우게 되는 재미와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심사위원들 사이에 '가벼움'이 잠깐 문제로 떠올랐지만 그 가벼움은 이 소설의 주제이기도 했다. '하잘것없는 인생'에 대한 서술이면서도 팬클럽 결성과 야구 시합의 결미 부분에 가서 전망은 경쾌하게 열리고 있다. 임시직 노동자, 청년 실업자, 신용 불량자가 수백만씩 되는 무한 경쟁 사회에서 이 소설은 개그 같은 말 솜씨로 일상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 황석영(소설가)

자본주의 세계권력에 대한 통렬한 비판의식은 결코 가벼운 주제가 아니다. 그런데도 이 소설이 가볍고 재미있게 읽히는 것은, 소설을 드는 순간, 다양한 문화적 코드와 유니크한 어조를 기반으로 한 문장의 강렬한 힘에 의해 우리가 '박민규식 에스컬레이터'에 자연스럽게 태워지기 때문이다.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을 자유자재 섞어 향기로운 이야기로 빚어낼 수 있는 신인 작가를 만나는 일은 분명히 우리 소설 작단의 축복이자 희망이다. - 박범신(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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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8-25 0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연랑님 :)
작년에 떨어졌던 작품이 당선되는 경우가 종종 있나봐요. [수상한 식모들]도 그랬는데 말이에요. 산만하다, 철학이 깃들지 않았다, 1년 먼저 태어났으면 큰 일 날 뻔했네요.

닉네임을뭐라하지 2011-08-25 20:53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말없는수다쟁이님
출간될 만한 소설이라면 시간이 좀 지나서라도 꼭 출간되는 것 같아요 :)

poptrash 2011-08-25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민규 초창기에 대한 평론가들의 평을 보면 과연 단편 소설을 제대로 쓸 수 있나 같은 우려 섞인 말들도 있었다던데... ㅋㅋ 참, 볼라뇨 전화를 이제야 봤는데 좋더라. 번역이 특히 좋던데.

닉네임을뭐라하지 2011-08-25 20:55   좋아요 0 | URL
걱정이 많은 게 평론가들의 특징인가... -_-a
볼라뇨 [전화]는 볼라뇨 입문서로 꽤 괜찮은 거 같은데, 암튼 1쇄 다 소화해서 맞춤법 틀린 거랑 역자가 좀 찝찝해하는 부분 다시 고쳐셔 2쇄 찍었으면 좋겠다.
열린책들 카페에 가면 [전화]와 관련된 번역자와 편집자의 알흠다운 대화도 있음둥 ㅎㅎ

2011-08-28 0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29 02: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더블 - 전2권 - side A, side B + 일러스트 화집
박민규 지음 / 창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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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뷰를 쓰려다 별점 앞에서 주춤, 한다. 한참 좋은 말을 한 것 같은데도 별점이 네 개밖에(?) 없는 소설집도 있고, 별로 좋은 말을 많이 한 것 같지도 않은데 별점이 네 개씩이나(?) 되는 소설집도 있고. 별이 열 개 정도 있으면 체크하기가 좀 더 쉬웠을까. 결국 이 소설집은 또 어쩌란 말인가.

 아무려나, 다음은 [더블]에 실린 각 단편들의 문학적(?) 성과(???)다.


+ 비치 보이스 ㅡ 2006 이효석문학상 후보, 2006 현대문학상 후보
+ 굿바이, 제플린 ㅡ 2007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소설
+ 깊 ㅡ 2007 황순원문학상 후보
+ 아치 ㅡ 2007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 2008 올해의 문제소설
+ 누런 강 배 한 척 ㅡ 2007 이효석문학상 수상, 2007 현대문학상 후보
+ 龍龍龍龍 ㅡ 2008 황순원문학상 후보, 2008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 2009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소설, 2009 이상문학상 후보
+ 크로만, 운 ㅡ 2008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소설
+ 낮잠 ㅡ 2008 이상문학상 후보, 2008 이효석문학상 후보
+ 근처 ㅡ 2009 황순원문학상 수상, 2009 현대문학상 후보
+ 루디 ㅡ 2010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 2011 올해의 문제소설


  모아놓고 보니 이거 무슨, 프로야구 올스타전을 보는 듯한 화려한 작품들의 총집합이 아닌가. 물론 올스타전에 뽑혔다고 그 선수가 무조건 좋은 선수라고는 할 수 없듯, 문학상 후보에 오르거나 문학상을 받았다고 해서 그 작품을 무조건 좋은 소설이라고 믿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을 터. 하지만 위 소설들을 비롯 다른 여덟 편의 소설들을 주르륵 읽어본바, 대체로 좋았다.

 오, 이거 좋은데?
 와, 이거 쫌 짱이다.
 아, 가슴 깊은 곳을 건드리는 이 맑고 쓸쓸한 정서.
 
 물론 다 그렇다는 건 아니고.

 아니 이게 웬 자기 꼴리는 대로, 그러니까 리비도적... 난 당신의 리비도엔 관심이 없는데, 싶어 보는 듯 마는 듯 본, 그래서 어제오늘 읽었지만 기억도 거의 안 나는 소설도 두 편 정도 있는 것 같고...

 하지만 몇 편의 좋은 소설, 또 몇 편의 그럭저럭 소설, 두어 편 정도의 읽으나마나 한 소설 가운데 눈이 멀어질 만큼 빛나는 작품이 하나 있었다. "루디"였다. 오오, 루디. "루디"는 정말, 와, 좋다는 말도 안 나올 정도로 좋았다. 작년에 계간지에 실린 걸 읽었을 때도 머리를 뜨겁게 강타한 느낌을 받았는데 일 년 남짓 지나 다시 읽어도 그때만큼, 혹은 그때 이상으로 좋았다.

 [더블]은 그냥 넘길 테니 떡을 치든 떡을 해먹든 그도 아니면 동인문학상을 주든 니들 맘대로 해라.
  하지만 "루디"만큼은 절대로 못 넘긴다.

 뭐 이런 기분이랄까.

 어느 평론가가 어느 문예지에 이런 식의 말을 한 적이 있었지. 2010년은 "루디"의 해로 기억될 거라고. 아니, 1년 동안 쏟아지는 한국소설이 얼마나 많은데, 그리고 그 모든 소설을 다 보지도 않았을 게 분명할 텐데 어찌 이런 도발적인 발언을! (어차피 백 편을 읽어야 한 편의 가치를 알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더군다나 장편도 아니고 단편에 불과한 "루디"가 과연 어떻게 2010년을 떠맡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평론가도 아니고, 물론 미문가도 아니며, 당연히 예언자도 아닌지라 뭔가 그럴싸한 말은 못하겠고 그냥 이런 리뷰인지 애정표현인지 모를 글이나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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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이퍼 제목이 좀 우스운데 어쩔 수 없다. 소설을 보며 이곳저곳에 발췌해둔 문구들을 사용해서 페이퍼를 작설할 계획이기 때문이다. 너무 까리한 소설이기 때문에 어떻게서든 리뷰를 쓰고 싶었으나 정상적인(?) 소설이 아니므로 정상적인 리뷰가 불가능하기에 내린 언 발에 오줌 누기. 

 

 언 발에 오줌을 누면 어떻게 될까? ㅎㅎ
 

 페이퍼는 이 소설을 완독한 어제(1월16일) 밤 11시 30분 즈음에서 시작해 이 소설을 읽기 시작한 2주 전으로 천천히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26시간 전, 나는 <인생사용법>을 다 봤다는 사실에 감격해 다음과 트윗을 연속으로 날려다. 

ㅡ 2주일에 걸쳐 페렉의 <인생사용법>을 보았다. 소설이라기보단, 이야기가 있는 20세기 유럽 백과사전이라는 인상이 더 강한 작품이었다. 보는 동안 다음과 같은 그림(?)을 그리면서 보니 더 재밌었다.

ㅡ 해설에 소개된, “<인생사용법>을 위해 그가 10여 년 동안 공들여 작성한 노트들과 기타 자료들을 묶은 <인생사용법의 작업노트>”를 보고 싶은데 불어를 못해 아쉽기 그지없다. <인생사용법> 판권 갖고 있는 출판사에서 같이 내줬으면 좋으련만...

 이것으로 내 감격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는 생각에 다음과 같은 호들갑도 떨었다. 

ㅡ <인생사용법>처럼 까리한 작품을 보고나면 꼭 다음과 같은 유치한 말장난이 하고 싶어진다. “세상에는 두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다. 인생사용법을 본 사람과 보지 않은 사람ㅋ” 

 다행히도 내 호들갑은 단순한 독백에 머무르지 않았다. 친구가 다음과 같은 멘션을 걸어왔기 때문이었다.



ㅡ 친구 : [Rayuela]도 제대로 읽으려면 창작노트를 꼭 같이 읽어야 하는데, 이런 류의 소설은 창작 과정이 더 흥미를 자극하는 듯. / 나 : 좌우간 창작 과정이 무지무지하게 궁금한 소설들이 있다니까. 인생사용법을 좀 더 잼나게 보기 위해선 추신에서 언급된 작가들을 더 읽어봐야 하는데... ㅠㅠ / 친구 : 그렇게 책 한 권으로 인생 전체를 사용하라고 <인생사용법>이겠지. 그렇게 독자의 삶 전체를 요구하는 작품들이 있는 것 같아. 번역자의 삶 전체를 요구하는 작품들도...


책을 보는 동안 "이야기 전개보다는 자료 수집에 공을 더 많이 들인 것 같다, 그래서 소설을 읽고 있다는 느낌보다는 백과사전을 보고 있다는 인상을 더 많이 받았다"든지 "이 책은 퍼즐 모양의 옷을 입고 소설이라는 가면을 쓴 유럽백과사전에 가깝다"는 생각을 했는데 아닌 게 아니라 책 말미에 무려 60여 쪽에 걸친(858-918p) '찾아보기'가 있다. 이 책에 등장한 각종 인명, 지명, 작품명 등등이 ㄱㄴㄷ 순으로 열거되어 있다. 물론 '찾아보기'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보다 몇 십 페이지 앞에는 "작품에 서술된 이야기 목록"이라는 '찾아보기'가 6페이지에 걸쳐(831-836p) 나온다. 'ㄱ'의 가출한 젊은 여자 이야기, 강낭콩을 원했던 부인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ㅎ'의 황제의 메신저 이야기, 히틀러 생존 가능성의 증거들을 모았던 창고 계장 이야기까지 총 100개 남짓의 이야기들이 있다. 하나 더 남았다. '연표'가 있다. 이 책 속에 계통없이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차례로 나열되어 있다. 이 책의 주인공이랄 수 있는 바틀부스의 "증조부, 그러니까 그의 외할아버지의 형제, 달리 말하면 그의 어머니의 삼촌"(169p)인 제임스 셔우드가 출생한 1833년에서 시작하여 이 책의 주요 인물이랄 수 있는 세르주 발렌이 사망한 1975년 8월 15일까지 총 11쪽에 걸쳐서(820-830p)


이제 본격적으로 소설의 발췌 구절을 뒤적여보자. 책에서 가장 마지막에 접힌 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구절이 있다.  

"카트마(CATMA: 해상 운송 보험회사)의 기안 작성 보조원으로 일하고 있는 남편 모리스 레올은 자기 부서의 과장에게 임금 인상을 부탁해보기로 결심했다."(795p)

 

이 구절을 보고 얼마 전에 출간된 페렉의 <임금 인상을 요청하기 위해 과장에게 접근하는 기술과 방법>이 떠오른다면 당신은 페렉의 팬일 확률이 높다. <임금 인상...>이라는 짧은 소설에서 주인공은 결국 임금 인상을 요청하는 데 **하는데, 과연 <인생사용법> 속 레올이라는 인물은 어떨까. 스포일러일 수 있기에 결말은 언급할 수 없지만 그가 왜 자신의 부서 과장에게 임금 인상을 부탁하고자 결심했는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다.

"레올 부부는 시몽크뤼벨리에 거리로 이사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부인인 루이즈 레올이 송장 담당자로 일하는 백화점에서 우연히 한 현대식 침실 세트를 보고는 완전히 반해버렸다. 침대 하나만 해도 3,234프랑을 호가했다. 침대 커버, 나이트 테이블, 소형 경대와 그에 딸린 쿠션 의자, 거울 달린 장롱 등을 합치면 약 1만 1,000프랑이 넘었다. 백화점 측에서는 예외적으로 당사 여직원 레올에게 선수금 없이 24개월 특별 할부 판매를 허용했다. 이자는 13,65%였다. 그러나 서류 작성 비용과 생활 보험료, 상각 계산비 등을 고려하면 레올 가족은 매달 941프랑 32상팀을 불입해야 했고, 그것은 루이즈 레올의 봉급에서 자동적으로 공제되었다. 그 금액은 가계 수입의 3분의 1에 해당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부부는 그러한 조건에서는 상식적인 수준을 유지하며 살아가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795p) 그렇게 결심하게 된 것이다. 장난꾸러기 페렉 같으니 ㅎ


이쯤 해서, 이제서야, 이 소설의 주인공이랄 수 있는 퍼시발 바틀부스에 대해서 잠깐 언급하기로 한다. 책 뒷날개에 '주요 등장인물'이라며 다음과 같이 요약해두었다.

"세상을 포착하고 철저히 규명하기 위한 방법으로 퍼즐 맞추기를 선택한 재력가. 단지 퍼즐 맞추기를 하기 위해 10년간 수채화를 배우고, 20년 동안 세계를 여행하며 보름마다 수채화 한 점씩을 똑같은 크기로 500점 그려서 하나하나 완성될 때마다 (*또 다른 주요 인물인) 윙클레에게 보낸다. 그러고 나서 20년 동안 퍼즐을 맞춘다. 이렇게 완성된 퍼즐들은 다시 그것이 그러졌던 장소로 보내져서 세척 용액으로 깨끗이 씻겨져 무(無)의 상태로 돌아간다. 이렇듯 퍼즐 맞추기에 50년이라는 긴 시간을 바쳐 계획하고 실행하지만, 결국은 퍼즐 속에 숨겨져 있는 윙클레의 속임수를 풀지 못한 채 죽는다."



(카페 비평고원의 reprise 님은 바틀부스에 관해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해두었다. "우선 Bartlebooth라는 이름은 멜빌의 소설 Bartlby the scrivener의 주인공 Bartlby와 Valery Larbaud라는 프랑스 작가의 작품 주인공 Barnabooth의 이름을 합성해서 만들어 낸 것입니다. 솔직히 두 권 다 읽어보지는 못했는데, 들은 얘기로는 Barnabooth는 여행을 좋아하는 인물이었고, Bartlby는 끊임없이 베껴 쓰는게 일인 필경사, 거기에 늘 아무것도 하고 싶어하지 않는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늘 ‘I would prefer not to’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고 하더군요." 출처: http://cafe.daum.net/9876/2233/1520 )


이 요약은 주인공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지만 그렇다고 소설을 다 본다고 해서 주인공을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주인공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소설의 재미가 반감되는 것도 아니다. 굳이 주인공이라고 하기는 했으나 바틀부스는 소설 속에서 수많은 퍼즐 중 하나에 불과하다. 다른 퍼즐보다 조금 더 크거나 다른 퍼즐.



퍼즐은 이 소설의 구성적인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이다. 퍼즐의 원리가 그대로 소설의 원리에 적용되기 때문이다. 독특한 구성의 소설들은 대부분 다른 얘기를 하는 척하면서 소설에 대해서 차근차근히 설명해준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페렉은 독자들이 <인생사용법>의 구조적인 면모를 간파할 수 있게끔 "퍼즐의 기술은 일단"으로 시작하는 44장을 마련해두었다.

"퍼즐의 기술은 일단 하나의 간단한 기술, 즉 형태 심리학의 간략한 지침으로도 전부 설명될 수 있는 단순한 기술처럼 보인다. 목표 대상 ㅡ 그것이 지각 행위이건, 학습이건, 심리 체계이건, 혹은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것처럼 나무 퍼즐이건 간에 ㅡ 이 분리하고 분해해야 할 요소들의 합이 아니라 하나의 전체, 즉 하나의 형태이자 구조이다. 요소는 전체에 앞서 존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요소는 전체보다 더 즉각적인 것도 아니며, 더 오래된 것도 아니다. 나아가 전체를 결정짓는 것은 요소들이 아니지만, 요소들을 결정짓는 것은 전체이다. 전체와 그 규칙들에 대한 지식, 집합과 그 구조에 대한 지식은, 그 전체를 구성하는 부분들에 대한 개별적인 지식으로부터 추론될 수 없을 것이다." (325p) 

물론 이 구절만 봤을 땐 이게 무슨 생뚱맞은 소리냐 싶겠지만, 소설을 읽어가는 도중에 이런 구절과 맞닥뜨린다면 굳이 이런 식의 기술을 삽입한 페렉의 의중을 어렵지 않게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다음에 발췌하는 구절은 페렉이 작가로서 이 소설에서 자신의 위치를 설명(변명?)하는 듯해 재미있었다.

"퍼즐 제작자의 역할은 정의하기 어렵다. 대부분의 경우 ㅡ 특히 두꺼운 판지로 만들어지는 모든 퍼즐의 경우 ㅡ 퍼즐들은 기계로 만들어지며, 퍼즐 조각들을 절단하는 데는 어떠한 법칙도 요구되지 않는다. 정해진 어떤 그림에 맞게 조정된 압축 절단기가 항상 똑같은 방식으로 두꺼운 종이판들을 절단하면 되는 것이다. 진정한 퍼즐 애호가들은 이런 식의 퍼즐을 거부한다. 그 퍼즐들이 나무가 아닌 종이로 만들어졌기 때문도, 포장 상자 위에 완성된 견본이 재현되어 있기 때문도 아니며, 바로 그러한 절단 방식이 퍼즐의 특수성 자체를 없애버리기 때문이다. 이 경우, 일반인들의 머릿속에 굳게 뿌리내리고 있는 생각과는 반대로, 애초의 그림이 쉽다고 간주되는 것인지 (예를 들면 베르메르 풍의 장면이나 오스트리아 어느 성의 컬러 사진) 어렵다고 간주되는 것인지는(잭슨 폴록이나 피사로 또는 ㅡ 치졸한 패러독스이지만 ㅡ 아무 그림이 없는 퍼즐) 별로 중요하지 않다. 퍼즐의 어려움을 만들어내는 것은 퍼즐 그림의 주제도, 화가의 화법도 아니며, 바로 절단의 정교함이다." (326-327p)

("소설은 크게 세 개의 계열을 주골격으로 하며 이루어졌는데, 건물의 100개의 칸이 이루는 계열과 작품의 100(99)개의 장이 만드는 계열 그리고 서양 장기판에서 '기사'가 만들어내는 계열이 바로 그것이다. 이 세 계열은 모두 100개의 요소들로 이루어졌다는 공통점을 가지며, 이들을 도면화시켜보면 모두 10 X 10의 바둑판 형태로 재현될 수 있고 구조상 서로 완벽하게 일치한다."(853p))


이에 앞서 페렉은 자신이 이 소설을 어떤 식으로 구상했는지에 대해, 바틀부스의 인생 구상과 연결시켜 설명해주고 있다. 그러니까 아래 나오는 바틀부스의 삶에 대한 구상 원리를, 소설 <인생사용법>의 구상 원리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는 의미다.

"어느 날 바틀부스는, 그의 삶 전체를, 오직 자의적인 필연성 그 자체만을 목적으로 하는 어떤 독특한 계획에 따라 구성해나가기로 결심했다. (...) 이 구상은 달이 가고 해가 가면서 발전되어, 다음의 세 가지 기본 원리를 중심으로 모습을 갖춰나갔다. 

 첫 번째 원리는 도덕의 영역에 속했다. 그 구상이 어떤 탐구나 기록, 올라가야 할 정점이나 다다라야 할 심층과 관계된 것이 아닐 거라는 뜻이다. 바틀부스가 하는 것은 구경거리가 될 만한 것도 아니며, 영웅적인 것도 아닐 것이다. 그것은 단지 조심스럽게 추진하는 하나의 계획이며, 당연히 어렵지만 그렇다고 실현하지 못할 것도 없는, 시작부터 끝까지 완전하게 통제되는 계획, 대신에 거기에 몰두하는 이의 삶의 구석구석을 지배하게 될 계획일 것이다.

 두 번째 원리는 논리의 영역에 속했다. 말하자면 그 구상은 절대 우연에 기대지 않고 시간과 공간을 추상적인 좌표처럼 기능하게 할 것이며, 각각의 정해진 날짜와 장소에서 엄격하게 일어나는 동일한 사건들은 불가하역적으로 순환되도록 그 좌표 위에 자리를 잡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세 번째 원래는 미학의 영역에 속했다. 무용하지만, 오직 바로 그 무상성 덕분에 엄정성을 보증받게 되는 이 계획은 결국 완성되어감에 따라 스스로 파괴될 것이고, 그것의 완성은 윤회적인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일련의 사건들이 연결되면서, 동시에 사라질 것이다. 무에서 출발한 바틀부스는 이렇게 완성된 사물들의 뚜렷한 변형을 통해, 다시 무로 돌아올 것이다."(205-207p)





주인공의 세계 편력 탓도 있고 소설의 특성상 이야기들이 여러 나라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책을 보는 동안 커다란 지구본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몇 차례 했는데 때마침 세계 지도와 관련한 흥미로운 구절이 등장한다.

"만약 이 지도를 오른쪽으로 90도 회전시켜 서쪽이 위쪽에 오게 만든다면, 적어도 초등학교를 나온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친숙한 유럽 대륙의 윤곽이 덴마크 땅의 윤곽과 닮아 보이게 되는 것이다." 

정말 그런가? 다음 두 이미지를 비교해보면 될 듯.

 

(음...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세계의 여러 나라들이 등장하니 우리나라도 물론 빠지지 않는다. 총 세 번 나온다.

첫 번째는 1950년 7월의 한국!

"그들은 첫눈에 반했으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1950년 7월에 블런트 스탠리는 한국으로 떠났다. (...) 그가 저지른 짓은, 한반도 38선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정찰대를 지휘하다가 허가 없이 ㅡ 분명 그는 허가를 받지 않았다 ㅡ 몰래 빠져나와버린 탈주 행위였다."(509p) 

다음은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이승만

"나치의 이념에 동의하거나 히틀러의 조종을 받았던 인물들(그 중 몇 명만 열거해본다면, 포스터 덜러스, 캐벗 로지, 그로미코, 트리그베 리, 이승만, 애틀리, 티토, 베리아, 스태퍼드 크립스 경, 바오 다이, 맥아더, 쿠데 뒤 포레스토, 슈만, 베르나도트, 에비타 페론, 게리 데이비스, 아인슈타인, 엄프리, 모리스 토레즈 등이다)이 어떻게 국가적·초국가적 집단의 최상부에 침투해 얄타 회담에서 명시되었던 화해적·평화주의적 정신을 고의로 파괴할 수 있었는지, 나아가 네 강대국의 냉정한 판단 덕택에 1951년 2월 간신히 피할 수는 있었지만 하마터면 제3차 세계대전의 서막이 될 뻔한 국제적 위기를 어떻게 선동할 수 있었는지를 증명해 보였을지도 모른다." (750p) 

마지막으로 다시 한국 전쟁. 

소설에서 주요 인물 중 하나인 세르주 발렌의 방에 있는 물건들을 설명하고 있는 51장. 세르주 발렌의 모습도 잠깐 묘사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주위에는, 각자의 이야기, 각자의 과거, 각자의 전설을 가지고 있는 그의 등장인물들의 긴 행렬이 이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라는 문장을 시작으로 짤막한 행렬이 시작된다. "1 코방동가에서 알카마흐에게 승리를 거두고 왕관을 수여받는 펠라요"(384p)를 시작으로 하여. "179 자신의 화폭에 건물 전체의 이야기를 담으려 하는 늙은 화가"(393p)까지. 이 와중에 한국 이야기가 나온다.

"(...) 51 시나리오를 읽은 후 배역을 거부하는 일곱 명의 배우 
52 한국에서 자신의 순찰대를 죽게 만드는 미국인 탈주병
53 성 전환 수술을 받은 후 슈퍼스타가 되는 기타리스트 (...)"(386p)

어, 근데 52번 이야기, 어디서 본 듯 낯익은 이야기다. 바로 첫 번째 1950년 7월의 한국이라며 발췌했던 구절의 이야기다. 고백하자면 이 페이퍼를 쓰고 있는 지금에서야 이 사실을 깨달았다. 더불어 179번 이야기가 바로 세르주 발렌 본인의 이야기라는 것 또한. 짤막하게 요약되어 있는 백칠십아홉 가지 이야기들이 모두 이 소설 어딘가에 변주되어 숨어 있는 것이었다!




열린책들 카페의 <임금 인상을 요청하기 위해 과장에게 접근하는 기술과 방법>을 소개하는 글(http://cafe.naver.com/openbooks21/1343)을 보면 "페렉이 말하는 페렉" 꼭지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나는 공상 과학 소설을 쓰고 싶고, 탐정 소설을 쓰고 싶고, 연재 만화도 쓰고 싶고, 애니메이션 시나리오도 쓰고 싶고, 오페라 대본도 쓰고 싶고, 비극도 쓰고 싶고, 희극도 쓰고 싶고, 영화 시나리오도 쓰고 싶다. 나는 문학의 모든 분야를 시도하고 싶다. 나는 사전의 모든 단어를 사용하고 싶다. 그건 불가능하다. 그게 바로 나의 야심이다. _ 조르주 페렉

당신은 무엇이 되고 싶은가? _ 마르셀 프루스트의 질문지
문인un homme des letres. 즉 알파벳의 활자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 _ 페렉의 답변"

다른 무엇보다 "나는 사전의 모든 단어를 사용하고 싶다"며 그건 불가능하지만 그게 바로 자신의 야심이라는 문구가 무척 인상적인데, 그의 야심을 쏙 빼닮은 인물이 소설 속에 등장한다. 이 즈음 나는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인생사용법>을 보고 있다. 이 책을 보기 전의 나와 보고난 후의 나는 아마 제법 달라져 있을 것이다."

"시노크는 센 강변을 따라 돌아다니며 헌책 장수의 진열대를 뒤지고, 2수짜리 값싼 소설들과 시대에 뒤떨어진 수필집들, 쓸모 없게 된 여행 안내 책자, 오래된 생리학이나 역학이나 윤리학 서적들, 이탈리아가 아직 작은 왕국들의 엉성한 조합으로 나타나 있는 옛 지도 등을 뒤적거렸다. 얼마 후 그는 자크뱅장 거리에 있는 파리 17구 구민 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갔고, 거기서 먼지 쌓인 2절지 꾸러미와 ‘로레’ 개요서, ‘불가사의’ 도서관의 서적들, 낡은 사전들 ㅡ 라샤트르 사전, 비카리우스 사전, 옛 베슈렐 사전, 라리브와 플뢰리 사전, 문인협회에서 만든 대화 백과사전, 그라브와 데스빈녜 사전, 부예 사전, 드조브리와 바슈레 사전 ㅡ 을 청구해 읽었다. 마침내 그가 사는 지역 도서관의 자료들을 전부 뒤져본 그는 서둘러 생트 주니비에브 도서관으로 가 등록을 했고, 도서관으로 들어가면서 본 건물 전면에 작가 이름이 새겨진 것을 보고는 그 작가들의 작품들부터 읽기 시작했다. (...) 시노크는 천천히 읽으며 희귀한 단어들을 기록해갔고, 그의 계획은 조금씩 모양을 갖추어 갔다. 그는 잊혀진 단어들의 대사전을 편찬하기로 결심했다. 이것은, (...) 오로지 아직도 그에게 끊임없이 말을 하고 있는 단순한 단어들을 구해내기 위해서였다. 10년 동안 그는 8,000개가 넘는 단어를 모았고, 이렇게 모인 단어들을 통해 오늘날 간신히 전해질 수 있는 하나의 이야기가 형성되었다."(478,479p)

그야말로 느낌표를 쾅쾅쾅 찍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 사전에 있는 모든 단어를 사용하고 싶다며 공언했듯이, 페렉은 소설 곳곳에다 사전을 뒤져서 이미 죽은, 혹은 앞으로 죽을 수많은 낱말들을 구출해냈다. 명사가 유독 눈에 띄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페렉은 <인생사용법>에서, 자신이 (아마도) 수집한 명사들을 모조리 사용하려 했었던 것 같다." 그중 한 예.

"왼쪽 벽은 식료품들 자리다. 우선 기초 식량이 있다. 밀가루, 굵은 밀가루, 옥수수 가루, 감자 전분, 타피오카, 갈아놓은 귀리, 각설탕, 가루 설탕, 얼음 설탕, 소금, 올리브, 서양 양각초 꽃봉오리, 조미료, 겨자와 작은 오이들이 들어 있는 커다란 병들, 기름통들, 말린 잎들이 담긴 상자들, 말린 호추 열미 상자들, 정향(丁香), 동결 건조시킨 양송이, 서양 송로 껍질을 담은 작은 상자들, 포도주와 알코올로 만든 식초, 가늘게 자른 편도, 호두 속, 진공 상태로 포장된 개암 열매와 땅콩, 애피타이저용 비스킷, 사탕, 녹여 먹는 초콜릿과 씹어 먹는 초콜릿, 꿀, 여러 종류의 잼, 상자에 담은 우유, 분말 우유, 계란 갈아놓은 것, 효모, 프랑스·러시아 스타일의 앙트르메, 차, 커피, 카카오, 탕약, 커버 스프, 토마토 농축액 (...) 화이트 소스로 양념한 옛날식 송아지 고기 스튜 등을 담은 고기 통조림들과 조리된 음식 통조림들이 있다."(265-267p)

소설이 단지 이야기였다면 정말 아무 의미도 없고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구절인데, 그게 <인생사용법>이라는 소설 틀 안에서는 아주 유의미하게 사용되었다.



점점 소설 앞부분으로로 다가가고 있다. 그즈음, 나는 어쩌면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조르주 페렉, <인생사용법> 너무 좋다 엉엉. 내 책꽂이에서 단 한 권의 책을 구출해야 한다면 이 책을. 누가 20세기 최고의 소설 다섯 편만 꼽아 달라는 터무니없는 요청을 해온대도 이 책을." 
 
다음과 같은 등장인물을 진심으로 부러워하기도 했다. "그는 배우면 배울수록 좀더 배우고 싶어졌다. 그의 열정은 그의 집중력만큼이나 무한한 것 같았다. 그는 한번 읽은 것은 영원히 기억했고, 그리스어 문법서들과 폴란드 역사서, 25편으로 이루어진 서사시, 검술 교본서는 원예 교본서, 대중 소설, 백과사전들을 모두 똑같은 정도의 신속함과 탐욕, 지적 능력으로 소화해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특히 백과사전들을 편애했다."(299쪽) 어쩐지 페렉의 모습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며 조만간 우리나라에서도 본격적으로 출간될 심농의 작품들을 기대하기도 했다. "몇 주 동안 여론은 이 수수께끼 같은 사건에 관심을 쏟았고, 메그레 탐정을 흉내 낸 아마추어들과 기사를 짜내느라 애쓰는 신문 기자들이 수십 명 달려들었다." (239쪽) 


몇 시간째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지만 길게 쓰면 길게 쓸수록 소설의 중심부에 가닿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는 것 같아 곤혹스럽기 짝이 없다. 이를테면 그런 소설이 있는 것이다. 소설 속의 모든 구절을 발췌해야 그 소설을 설명할 수 있는 소설. <인생사용법>이 내게는 그런 소설이다. (내 능력을 탓하느니 이 소설을 탓하겠다 쀍!) 그런 소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사실 많은 말이 필요한 게 아니다. 실은 단 한두 문장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다음은 이 소설을 150여 페이지쯤 보고 나서 남겨둔 기록이다. 이 두 문장만을 마지막으로 길고 길었던 <인생사용법> 발췌사용법은 끝을 맺어야겠다.



"조르주 페렉의 <인생사용법>을 읽고 있다. 머릿속에서 폭죽이 터지는 것 같다."  



PS.

구글 이미지를 통해 위의 이미지들을 퍼왔는데 이제서야 이미지의 출처를 일일이 챙겨두지 못했다는 생각에 미쳤다. 어쩌나... 


추신. 

그러니까 작가 페렉은 <인생사용법> 말미에 "추신"이란 타이틀로 다음과 같은 떡밥을 던져두었다. "이 작품은 다음의 작가들에게서 차용하면서 경우에 따라 약간 변형시켰다. 르네 벨레토, 한스 벨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미셸 뷔토르, 이탈로 칼비노, 애거사 크리스티,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그문트 프로이트, 알프레드 자리, 제임스 조이스, 프란츠 카프카, 미셸 레리스, 말콤 로이루, 토마스 만,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해리 매튜, 허만 멜빌,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조르주 페렉, 로저 프라이스, 마르셀 프루스트, 레이몽 크노, 프랑수아 라블레, 자크 루보, 레이몽 루셀, 스탕달, 로렌스 스턴, 테오도르 스튀르종, 쥘 베른, 유니카 쥐른"(837p) 기왕 줄 거면 작가보단 구체적 작품이었으면 더 좋았으련만. 대부분의 작가는 한국어 번역본이 있으니 부지런히 위에서 언급된 작가들의 작품을 읽어서 다음에 <인생사용법>을 읽을 땐 구절구절 차용되거나 변형된 부분을 발견하면서 좀 더 많은 재미를 만끽할 수 있으면 좋겠다.

2012년 6월 26일 현재 신간 검색이 된다. 분권될 거라 예상했는데 너무 감사하게도(?) 한 권으로 나왔다. 지난 판본과 온라인 서점에 올라온 이번 판본 발췌 구절을 비교해보니 사소해보이는 부분들 꼼꼼하게 꽤 바뀐 것 같다. 원서 읽을 줄 알면 비교해서 보면 재밌겠다만... 이전에 나온 책세상 판은 919쪽인데 신판은 744쪽이라는 점도 눈에 띈다. 궁금하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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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11-01-18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근데 지금 알라딘 검색해보니 이 책 품절이래요, 엉엉.

닉네임을뭐라하지 2011-01-18 15:31   좋아요 0 | URL
네, 품절된 지는 좀 됐어요. 출판사 직원분께 물어보니 다른 출판사로 판권이 넘어갔다고 하니 조만간 다른 출판사에서 나오겠... 나오겠죠 ㅎㅎ

Sylvia 2011-01-29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네요. 판권이 (드디어!!??) 넘어갔군요.


닉네임을뭐라하지 2011-01-31 13:07   좋아요 0 | URL
네 ㅎㅎ
분명 기다리는 분들 많을 텐데, 얼른 새로운 판본으로 나왔으면 좋겠어요. :)

2011-05-08 04: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08 2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제 모 처에 있는 중고서점에 들렀다가 재미난 사전을 발견했다. (링크된 상품의 상세 정보는 내 책과 조금 차이가 있는데, 내 책은 1999년 초판 2쇄고 총 1738페이지에 가격은 50000원이다. 링크된 책은 최근에 업데이트된 책인 듯하다.)

책장을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이 사전이 눈에 띄어 무심히 펼쳤는데 566쪽 fascinate, fascination이란 단어에 딸린 설명이 눈길을 끌었다.

// fascinate는 뱀이 새 같은 것을 노려보아 꼼짝 못하게 한다는 항간의 이야기처럼, "이상한 힘으로 꽉 잡다, 홀리게 하다"(hold by enchantment)의 뜻, fascination은 그렇게 홀리게 하는 것을 말한다. The fascination of her charms held him a happy slave. (그 여자의 매력에 홀려서 그는 행복한 노예가 되었다). 과장된 칭찬의 말로 기분좋은 물건에 쓰여, 흔히 attractive(매력적인)의 뜻으로 쓰인다. My dear, what a perfectly fascinating bracelet! (여보, 아주 멋진 팔찌구려.) Evans는 과장되어 사용된 말이 흔히 그렇듯이 이 말도 뜻이 약해져서, 말할 때에 흔히 이 말에 강세를 두어 뜻을 통하게 하려고 한다고 말한다. 이 말이 진정으로 본래의 뜻으로 사용되는 경우에는 불쾌한 사물, 극심한 공포심에 적용되는 수가 더욱 많다<<CAU>> Helpless with fear, the rabbit stared, fascinated, at the approaching stoat. (공포심에 질려 무력해져서, 토끼는 꼼짝 못하고 다가오는 담비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 말에 쓰이는 전치사에 조심할 필요가 있다. Something has a fascination for one. (어떤 것이 아무개를 홀리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 One is fascinated by a person. (아무개는 어떤 사람에게 홀렸다) / One is fascinated with an inaniamate object. (아무개는 어떤 무생물에 홀렸다). 즉 by는 사람에게, with는 사물에 쓰인다. I am fascinated by her (나는 그 여자한테 홀렸다). 그리고, the fascinated with her beauty. (그는 그 여자의 아름다움에 홀렸다). 그리고, the fascination of A by B(B에 의한 A의 홀림, B가 A를 홀리게 함)라고 하면, 뜻이 본명하지만, the fascination of A 라고 하면, A가 홀림을 당한 것인지, 홀리게 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 (566,567쪽)

모든 단어들이 이런 식으로 설명되어 있다.

// Q  영어 자모에서는 필요 없는 글자이다. 원래 question, quarter, quit 같이 라틴어에서 유래한 프랑스 말에서 빌려온 말의 철자에 쓰였고, 나중에 라틴어에서 직접 빌려온 말(quorum, quota)로 인해 그 수효가 늘게 되었다. 고대 영어에서 [kw]로 발음된 cw의 철자를 가졌던 말 중에는 qu로 고쳐 처자된 것이 있다. quick(<cwic), queen(<cwen). 몇몇 외국 지명(보기: Gulp of Aqaba, 아카바 만, 아랍 연합 공화국과 사우디 아라비아 사이에 있다)의 경우를 빼고서는, 영어에서 q 다음에 u가 따른다. qu는 보통 [kw]로 발음된다. quite, quill. 그러나 몇몇 말에서는 프랑스어의 음가 [k]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 coquette[kouket]. 말 끝에 나타나는 -que는 [k]로 발음된다. antique[(ae)nti:k], unique[ju:ni:k]. 영어화된 말은 영어식으로 발음한다. Quebec[kwibek], questionnaire[(*생략)]. // (1164, 1165쪽)

책 말미에 INDEX가 있는데 대충 계산해본바 이 사전에는 총 7500여 개의 단어가 있는 것 같다. (80(대략 한 페이지 단어 수) 곱하기 94(총 페이지))

책 뒤 커버에는 다음과 같이 이 사전의 특징을 소개하고 있다.

+ 우리말로 된 최초의 '영어 사용법' 사전
+ 영.미 현행 영어 사용의 차이를 상세하게 설명
+ 단어의 변화된 형태와 그것의 독특한 용법 설명
+ 잘못 쓰기 쉬운 동의어의 뜻을 구별하여 묶음
+ 문장구성법, 문장부호, 문체 등에 관한 자세한 해설
+ 숙어에 대한 세밀한 설명
+ 문학용어와 문법용어도 수록
+ 부록에 색인을 넣어 단어를 찾기 쉽게 하였음

편저자 약력은 다음과 같다.

1918년 서울에서 출생
연희 전문학교 졸업, 일본 同志社 대학 영문과 졸업
Michigan 대학 대학원 및 Yale 대학 대학원 수료 (M.A.)
서울 대학교 문리과대학 조교수
Yale 대학 Lecturer 역임

편저서
- Gateway to English (장영숙 공저, 민중서관)
- A Korean-English Dictionary (S.E. Martin, 이양하 공편, 예일 대학 출판. 한국판, 민중서림)
- 포켓 한미 사전 (이양하, S.E. Martin 공편, 민중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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