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바디페인팅
박금산 지음 / 실천문학사 / 2007년 9월
평점 :
총 네 부로 이루어진 연작소설이다. 1,2부를 봤던 어제까지만 해도 완독 후 '리뷰' 란에 뭔가 끼적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40자평에다가 "그냥 좋다"라고만 간단히 적으려고 했다. 헌데 오늘 3부를 보고 4부까지 본 뒤 마음이 바뀌었다. 4부가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글의 말미에서 이 문장은 철회될 것이다.)
지금 시대가 어느 땐데, 이 작가, 담대하게도 자기 고백적인 소설을 썼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써도 팔릴까 말까 하는 판국에 대부분 소설 독자들이라면 관심도 갖지 않을 인기 없는/비주류 소설가의 삶에 대한 소설을 쓴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엔 사소설이나 고백 소설이라면 응당 있을 법한 침잠된 분위기가 없다. 그건 소설가 본인이라고 하는 게 맞을 주인공인 '나'와 썰을 푸는 화자 사이의 거리가 꾸준히 유지되기 때문이고, 그 거리 사이에 유머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해학적인 유머도 아닌 것 같고 자조적인 유머도 아닌 것 같으며 말장난식 유머도 아닌, 그러면서 이 모든 게 포함되어 있는 그런 유머. (화자의 이런 어조가 작가의 원래 스타일인지 아니면 이 소설에만 그렇게 쓰였는지 궁금하다.)
하지만 이 소설이 (문학사적으로) 가치가 있다면, 비주류 소설가의 생활사를 쓰는 동시에 그 맞은편에 '문학예술위원회'라는 (한국문학)(제도)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비주류 소설가의 생활사와 제도 사이에는 '자본'이라는 교집합이 철저하게 관여하고 있다. 생각만 해도 웃음보다는 한숨이 먼저 나오고야 마는 자본. 더군다나 자본과 문학이라니. 이미 자본에 결탁해버리고는 나 몰라라 그럼에도 문학입네 부르짖는 집단이 있는 한편, 그러나 자본이 어떻게 문학과 교접하고 있는지 낱낱이 보고해주는 이런 소설도 있는 것이다.
편지 형식으로 쓴 3부만 빼고 나머지 1,2,4부에는 작가가 작심이라도 한 듯한 각주가 잔뜩 달려 있다. 이 각주들이 이 소설에서는 독특한 역할을 한다. 고백 형식의 소설 속에서 각주의 존재란 고백 속의 고백, 말하자면 심층적인 고백과도 같은 외양을 띠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그런 것까지는 아니겠지만 형태적으로 그렇게 보인다.) 나의 진실된 고백을 들어주오. '실소'.
어쨌거나 이 소설,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난 유머가 있는 소설 앞에선 누구보다 먼저 한쪽 무릎을 꿇고 책을 읽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다른 파트에서보다 유난히 '세부'를 강조한, 그래서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있었던 일을 소설화했다기보다는 순수하게 지어내서 쓴 게 아닐까 싶은 3부를 지나 4부에 들어와서 마음이 바뀌었다. ('세부'는 장편소설의 필수 구성요소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세부'하면 필리핀 '세부'가 더 잘 떠올라서 영어로 '디테일'이라고 바꿔서 생각해봤다. 단박에 [나는 꼼수다]가 생각났다. 디테일에 강한 방송, 아이튠즈 팟캐스트 청취율 세계 1위에 빛나는 [나는 꼼수다]!)
4부는 한마디로 실패한 작품이었다. 이건 뭐, 앞서 장점으로 언급한 것들도 거의 드러나지 않고, 그렇다고 인도에서 있었던 일들이 디테일하게 보여지는 것도 아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단순한 에피소드 나열식의 구성. 이렇게 듬성듬성 쓸 바엔 차라리 인도에서 있었던 일을 따로 장편화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의문도 있었다.
하지만 내 생각이 짧았다. 나는 작가가 1,2,3부와 다르게 4부에선 왜 (굳이) 이렇게 썼을까, 라고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내 생각의 빈틈을 채워준 건 '해설'이었다. 미문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광고문구들이 곳곳에 존재하는 해설이 아니라, 정말 해설이었다. 해설에 의하면 4부의 지루함이나 산만함 속에 "20일 이상의 해외연수라는 규정이 다른 세계를 확인하고 탐구하기에 얼마나 부족한 시간인지, 그래서 제도적 지원이라는 명분이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지(384쪽)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제도의 구조적인 문제점을 소설의 구조적인 문제 그 자체로 보여주었다는 것.
해설을 읽자 내 꼬인 마음은 단숨에 해소됐고, 이렇게 리뷰 코너에 성깃성깃 페인팅을 하고 있다. 해설에도 두 차례 나오는 구절이지만 "무언가 하나를 끝까지 밀고 나간 삶에 그 전부가 닿아 있다는 사실"(181쪽)을 알게 된 작가가 앞으로 어떤 소설을 쓸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