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랑 시집
김영랑 지음 / 종합출판범우 / 2011년 1월
평점 :
품절


 

 김영랑 시인하면 먼저 대표작인 『모란이 피기까지는』『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이 뇌리에 깊게 남아 있다.첫행부터 끝행까지 좔좔 암송할 수는 없어도 몇 구절은 아직도 내 가슴에 깊게 파묻혀 있다.모란이 피기까지는에서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찬란하나 슬픔의 봄을'이라든지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에서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가 바로 단적인 예이다.비록 짧은 시귀들이지만 얼마나 자연친화적이고 순수한 미의 탐구를 갈망했던가.

 

 이제 가을이 깊어만 가고 있기에 겨울은 멀지 않으리라.1년이라는 시간 속에 사계가 뚜렷한 한국의 공기와 자연은 참으로 축복을 받아 크나큰 자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있다.돌담에 속삭이는 햇발,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 이 시구만 보아도 김영랑 시인은 자연을 관찰하고 일체가 된 심정으로 맑고 싱그러운 어조를 담아냈던가.게다가 연인을 사랑하는 마음이 불타오르지만 고독으로 씹고 삼켜 버리는 『내 마음을 아실 이』도 애간장을 타게 한다.'향 맑은 옥돌에 불이 달아 사랑은 타기만 하오련만 불빛에 연긴듯 희미론 마음은 사랑도 모르기 내 혼자 마음은'에서 시인이 애모하는 연인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뒤치적거리고 있음을 아련하게 그려본다.

 

 김영랑 시인은 1930년대 《시문학》에 몸을 담으면서 시문학사에 모습을 보이고,그뒤 《문예월간》,《시원》,《문학》 등에서 활동을 했던 순수문학의 선구자라고 여겨진다.김소월 시인도 자연을 소재로 삼아 전통적인 시형을 끌어 들였지만 한정된 소재에 머물렀지만 김영랑 시인의 경우는 전통적인 운율을 살리면서 자연,사계,사랑이라는 3중주를 아름다우면서 서정적인 감각을 재현하고 있는 점이 특색이라고 할 수가 있다.시인은 한국전쟁 속에서 적군의 총탄에 맞아 아쉽게도 짧은 삶을 살았지만 그가 남긴 한국전통미와 서정성을 띤 섬섬옥수와 같고 인공미,화학조미료가 첨가되지 않은 친환경 소재가 내 어린시절을 상기하게 한다.

 

 시가 장르소설와 같은 영역에 밀리면서 찬밥신세를 지고 있는 요즘,운율과 함축미를 더욱 함양해 가고 싶다.가을은 깊어 가고 산하의 산천초목도 늙어 세포들이 나날이 시들어 가고 있다.세상은 자연의 순환섭리에 맞게 늘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마음으로 느끼게 되는데,우리네 인생도 자연의 순환섭리에 맞춰져 있는 것이다.시인은 애닯은 어조로 저무는 『가을날 무너진 성터』를 그윽이 관조하면서 묘사하고 있다.

 

 무너진 성터에 바람이 세나니

 

 가을은 쓸쓸한 맛뿐이구료

 

 희끗희끗 산국화 나부끼면서

 

 가을은 애닯아 속삭이느뇨. - P134

 

 

 

 

 

 어린시절 학교를 가기 위해 사립문을 열고 고샅길을 걷노라면 이웃집들이 돌담으로 엮어져 있고 그 곁에는 우물,장광,이웃집 아줌마의 아침밥 짓는 모습이 어제 일과 같이 생생하기만 하다.아침 7시를 넘긴 시간이라 햇살이 우물물이 내려 앉으며 우물가에 핀 갖가지 꽃들과 감들이 가을 햇살을 받아 붉고 노오랗게 물들어 가는 것을 늘 바라보면서 성장했다.순수하게 물들어 가는 가을녘은 사람,사물,농작물과 같은 존재에서 가을이 깊어만 가는 것을 느끼곤 했는데,『오―매 단풍 들것네』 아침 등교길 이웃집 돌담이 가을빛을 받아 여물면서 완연한 가을의 내음을 온몸으로 맘끽했던 것이다.

 

 '오―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 붉은 감잎 날아 와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 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P51

 

 우리의 인생은 짧기만 하다.인위적으로 수명을 늘리는 것 보다는 자연스럽게 살다 순명하는 것이 지혜롭고 섭리에 맞는 것이다.옛날 같으면 50이 넘으면 할아버지,할머니 소리를 들을 수도 있는데 지금은 의학이 발달하면서 '이팔청춘'이다.그런데 할아버지,할머니 묘에 앉아 그 옛날을 상기하면 나도 언젠가는 명부에 누워 있을 때가 있겠구나 라고 체념을 한다.그 마음을 담은 시가 바로 쓸쓸한 뫼 앞에 이다.

 

 쓸쓸한 뫼 앞에 후젓이 앉으면

 

 마음은 가라앉은 앙금줄같이

 

 무덤의 잔디에 얼굴을 부비면

 

 넋 이는 향 맑은 구슬손같이

 

 산골로 가노라 산골로 가노라

 

 무덤이 그리워 산골로 가노라 - P13

 

 

 김영랑 시인은 다작을 하지는 않았지만 시인이 남긴 시들은 자연과 사계,인간과의 관계 즉 사랑과 사모,죽음과 같은 자연스럽고 아름다우며 묘한 울림을 안겨 준다.나는 김영랑 시인의 시들은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 부르고 싶다.깊어만 가는 만추(晩秋)의 한자락에서 시인의 시를 읽노라니 사립문,돌담,하늘,땅,물,불,공기,사랑,고독,죽음과 같은 일상에서 흔히 왔다 가는 소재들이 한 폭의 소묘(素描)와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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