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으면 - 낮의 이별과 밤의 사랑 혹은 그림이 숨겨둔 33개의 이야기
황경신 지음 / 아트북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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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박하고 치열했던 하루가 끝나고 잠자리에 들게 되면 노곤함이 밀려와 곧바로 코를 드르륵 거리면서 꿈나라로 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사랑했던 사람과 아쉬운 이별을 고하고 다시는 못 만날 사람이라도 된 것마냥 시린 상처를 다독거려야 할 경우가 있을 것이다.일반적인 얘기이지만 내 눈에 들어오는 상대는 상대가 나를 마음에 두지 않아 물과 기름과 같이 마음과 마음을 잇는 교집합을 찾지 못해 다음 만남을 기약도 하지 못한 채 속절없이 헤어져야만 하는 시간도 있을 것이다.이렇게 된 사연 안에는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문제이다.사랑이라는 것은 고귀한 인간의 정서적 풍요로움이고 텅 비어 있는 참새 가슴을 따뜻하게 어루만지고 안아 줄 수도 있는 무형의 실체이다.열정적인 섹스,식어 버린 공허함보다는 은은하게 우려내는 사골국물과 같은 인연을 만나 계속적으로 만나면서 우정과 사랑을 확인하고 매만져 가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지만 찰떡 궁합과 같이 남.녀가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태어나 이것보다 더 큰 행운과 축복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사람 사이는 밉든 곱든 결국에는 미운 정,고운 정이 켜켜이 쌓아가 곁에 있어도 보고 싶고 떠나 있어도 목소리라도 듣고 싶은 것이 인간이다.그때는 몰랐는데 몇 십년의 세월이 흐르고 난 이즈음 나에게도 소중한 인연이 있었다는 것이 불현듯 눈가를 스치고 있다.대학시절 어찌어찌하여 일본인을 알게 되면서 일본인과 오랜 기간 펜팔을 하면서 편지 왕래가 있었다.어떠한 이념과 목적,의도를 갖고 만나지 않아서인지 마음으로 부담은 거의 없었다.전공이 일어가 아니었지만 일어에 투자를 많이 한 나는 일어실력이 괜찮다고 자부를 하는데도 일본인 친구로부터 받는 편지 내용은 내 일어실력이 아직은 멀었다라는 생각을 갖게 했다.일본어도 배우고 일본인과의 우정을 돈독히 하고저 시작한 편지수가 어느덧 한보따리가 되면서 일어실력도 늘어만 갔다.마음의 부자가 따로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세월이 또 흐르고 여러 번 이사를 하면서 일본인과의 편지는 어느 곳으로 사라지고 몇 십통만 서랍에 고이 간직하고 있다.그들은 편지를 쓸 때 격식에 맞게 쓰는 것이 몸에 배인듯 예스러우면서도 최상급의 언어를 쓰고 있다.[배계(拜啓):문안인사로 편지첫머리에 씀,경구(敬具):정중하게 물러남]그리고 그들로부터 나는 신세도 지고 아기자기하지만 순수하고 정성어린 선물을 꽤 많이 받았다.일본 성경책을 선물 받게 되었는데 지금은 서가에 다소곳이 꽂아 놓고 있다.성경책의 표피가 상할까봐 두터운 솜을 넣은 헝겁으로 성경책을 포장하여 보내 주었는데 상대는 일본인답고 조신하는 모습의 전형적인 일본여성이었다.그녀는 특별하게도 기독교인으로서 내게 성경의 가르침과 참사랑을 전해 주려는 마음이 성경책에 그대로 담겨져 있다.지금에 와서 성경책을 매만지며 그 시절을 회고하니 그녀는 내게 순수하고도 정성 가득한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일깨워 준 여성이었다.이것이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는 감심(感心)이 절로 일어난다.

 

 황경신작가의 글은 이번이 처음이다.<눈을 감으면> 어느 가사에도 나옴직한 제목이다.인간의 감정에는 수치심,분노,원한,폭력과 같은 악감정의 기제부터 자부심,수용,환희,사랑,평화에 이르는 형이상학적인 경지까지 다양한데 이 글을 읽다 보니 슬픔과 기쁨,사랑과 배신,기다림과 환희 등을 느끼게 하는 감성적이고 섬세한 기류가 물씬 풍긴다.누군가를 만나 지지고 볶던 시절에는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았으며 잡을 수 없었던 소리,희망,사랑이 눈을 감으면 더욱 현현화 되어 생생한 이미지에 사로 잡히게 되는 것 같다.사랑과 이별 그리고 작가가 뽑은 33개의 그림 이야기가 정적으로 다가 오고 있다.화려하고 찬란한 이미지보다는 애잔한 감각을 살린 그림들이 위주가 되고 있어 시간이 정지되어 버린 공간배경과 애수에 놓여 있는 여성의 감정을 잘 포착하고 있다.슬픈 이야기,아름다운 이야기들이 그림 속의 주인공들의 관상이 화제(畵題)에 맞게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사랑은 언젠가 끝이 나는 것이며,우리는 모두 언젠가 떠나야 하는 것이며,그 이후에도 나의 삶은 계속된다는 것을,그는 나를 떠났으나,그를 사랑하던 나는 사랑과 함께 죽지 않았다.나는 살아 남았고,사랑을 위해 슬퍼하고 기뻐하며,살아간다. - 본문 -

 

 

 

사랑은 '화무십일홍'마냥 섭리에 따라 시들어 가고 소멸되어 가지만 삶은 영원하다는 저자의 말처럼 사랑했던 아름답고 슬프고 시린 기억은 영원히 불후할 것이다.영원과 흡사했던 그 한순간만이,하나의 풍경으로 남아,텅 빈 삶의 한쪽 벽에 조용히 걸려 있다는 문구가 묘하게도 가슴을 후빈다.30년 이상이 지난 대학시절의 일본여성을 마음으로 좋아했지만 표현이 서툴어 못하고 그쪽은 성경으로 나를 사랑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그 당시 그녀를 죽자 살자 비행기를 타고 현해탄을 건너고 동해 상공을 날아 그녀를 찾아가 내 마음의 깊은 곳을 전했더라면 나는 국제결혼을 하지 않았을까라는 이뤄질 수 없는 공상을 해 본다.그녀도 이제는 중년의 부인이 되어 흰머리를 감추기 위해 염색을 하고 파마머리를 하고 있을 것이다.다행히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다(?)고 생각을 하니 눈을 감으면 그녀의 따뜻하고 친절한 말씨와 숫기 없었던 나의 수줍음이 이제는 또 다른 모습으로 꿈결에서나마 만날 수 있을 것이다.누군가를 못잊어 보고 싶을 때는 이리 저리 뒤척이던 자취생 시절의 꾸밈없던 대학시절로 되돌아 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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