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충성 - 충성과 배신의 딜레마
에릭 펠턴 지음, 윤영삼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충성(忠誠)이라는 한자어를 하나 하나 풀이해 보면 충은 마음의 중심이고 성은 스스로 내뱉은 말에 대해 지킨다라는 말이다.아울러 사전적인 의미에서는 진정으로 우러나오는 정성으로 되어 있다.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충성이라는 말이 일반인들 사이에서 쓰이는 빈도보다는 군대와 사회조직 속에서 더 회자되고 있다.즉 상사,상관의 말과 지시,명령에 무조건 복종한다는 집체적이고 강요당하는 느낌이 강한 억제된 단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내 군대시절의 군의 거수경례가 '충성'이었는데 내가 과연 고참,상관들에게 자발적인 충성을 했는가 되돌아 본다.겉으로는 충성을 하지만 괴롭히고 보기 싫은 고참 및 상관들을 만나면 '충성'으로 예의를 표하지만 뭐 하나 꼬투리 잡힐 것이 없나 하고 잔뜩 긴장을 하게 되는데,무사히 지나치게 되면 '충성'이라는 말이 진실이 아니었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곤 했다.

 

 인간은 가족이라는 사회의 가장 작은 단위로부터 국가에 이르기까지 떼어 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다.서로 믿고 배려하고 존중해 나가는 관계에서 삶의 질은 한층 더 고양되고 스스로 느끼는 행복감을 통해 자부심을 넘어 모든 것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면서 이성적인 생활태도,진심으로 우러나오는 이타적인 행위 그리고 한층 더 높은 환희와 평화라는 단계에 이르는 의식을 갖게 되리라 생각한다.바로 인간의 의식작용에 따라 내가 타인과 주위를 어떻게 바라보고 대하는가가 달라지는데 우선 가정,학교,사회라는 환경 속에서 어떠한 학습을 거쳤는냐에 따라 개인의 의식작용은 달라질 것이며 이것이 감정이라는 것으로 승화되어 개인의 성격과 인간관계가 지속되어 가리라 생각한다.좋은 환경과 학습을 통해 개인이 타자와 사회에 좋은 영향을 끼친다면 그 사회는 보다 건실하고 사회구성원간의 융화와 신뢰도는 제고되어 삶의 질도 높아져 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존의 지식과 관념과는 다르게 충성의 의미를 '믿을 수 있는 상태의 미덕'으로 바라보고 있는 에릭 펠턴의 이 글은 궁극적인 문제는 나와 관계를 맺는 사람들과 어떠한 믿음의 기제를 갖고 나아갈 것인가를 되돌아 보게 하는 인문학적 사유의 글이다.매일 마추치고 대화하며 살을 부딪히며 살아가는 부부부터 가족,일과 관계되는 사람들,그리고 믿음 속에 내포되어 있는 기제인 정의와 이상,욕망이 제대로 신뢰할 만한 수준인가를 때론 수용과 때론 이성의 기제로 판단하고 대처해 나가야 할 문제라고 본다.돈과 물질이 인간사회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공동체적인 삶보다는 자신을 기준으로 이해관계를 더 저울질하는 세상이기에 믿음이라는 문제는 어찌보면 세속적인 관점에서 생각하고 고려하는 경향이 다분할 수밖에 없는 것이 실상이라고 생각한다.혈연,지연,학연 나아가 동일민족이라는 말들은 겉으로는 포용하고 배려하며 챙겨주는 힘이 저절로 나올 법하지만 깊게 들어가 보면 진정한 믿음 위에 관계가 성립되는 경우가 있겠지만 실제로는 '동상이몽'의 경향이 더 많다는 것이 솔직한 나의 생각이고 판단이다.

 

 근자 항간(巷間)에서는 정의를 부르짖고 사회부조리,국가의 정체성 등에 대해 설왕설래를 하고는 있지만 국가의 지도자들이 깨우치고 실천하지 않는 한 정의구현의 사회는 지체될 수밖에 없다.한국사회가 아직까지는 돈 많고 권력있는 소수층들에 의해 사회제도와 시스템이 좌지우지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에 어찌보면 믿음이라는 의식은 보편적으로 볼 때에는 좋은 현상이고 실현해 나가야 할 과제로서 우선 자신의 의식부터 바꿔 나가는 용기와 실천의 자세가 중요하리라 생각한다.국가 지도자가 누구냐에 따라 그 사회구성원의 의식구조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지도자의 의식수준과 역사관,국가발전을 위한 비전제시 등이 어떠하느냐에 따라 사회전반의 믿음이 제대로 작용되어 가리라 생각한다.정치민주화가 이루어지고 개인의 교육수준,의식은 발달되었다고는 하지만 한국사회가 돈과 물질에 의해 개인을 평가하고 속그룹 단위의 집합체가 강한 사회이다 보니 내가 갖고 있는 믿음은 이성과 합리성에 맞춰 고수하되 남에게 속임과 배신을 당하지 않는 냉정하고 통찰력 있는 마음가짐도 매우 중요하다.정의로운 사회,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가 이상적이고 살기 좋은 사회인 것만은 부정할 수 없겠지만 사회의 상류층에 있는 힘과 권력의 소유자들이 개인의 이해관계에 얽매여 부도덕하고 부정직한 모습을 보여서는 진정한 믿음은 안개 속으로 묻혀 버릴 것이다.

 

 나아가 인간의 의식 속에는 사랑과 환희,평화라는 감정의 기제가 있고 이를 갈망하기도 하고 실현하기 위해 열정에 가득차 있기도 한다.이것은 결국 자신의 삶과 미래를 위해 타인들에게도 영향을 주고 의지할 수 있다는 믿음이 마음 가운데 깔려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한다.믿음은 평화스러운 시절보다는 역경과 위기의 시기에 진정한 우정과 믿음을 찾을 수가 있다고 하는데 인간의 삶의 길이가 매우 유한적이고 운명에 의해 의식작용이 어느 정도 지속되기에 돈과 물질이라는 현실에서 좀 더 나은 삶의 질과 행복지수를 높이기 위해서는 스스로 믿음을 쌓아 나가는 연습으로 달라진 자신의 자화상과 위상을 알게 모르게 심어 줄 필요가 있다고 본다.한 번 배신당하고 버려지는 자신은 상처와 절망의 비극적인 불행의 경험을 안아야 하면서 인간관계에서 가장 소중하다고 보는 '믿음'은 공허할 말로 들리고 모래알 속에서 진주를 찾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

 

 

 "풍요로운 시절은 저울이 될 수 없다.역경만이 누가 진정한 친구인지 가늠할 수 있는 유일한 저울이다."

  - 플루타르코스,본문 -

 

"불안한 시절에 진정한 친구가 나타난다." - 엔니우스,본문 -

 

 내가 알고 있는 또 하나는 빈천지교불가망(貧賤之交 不可忘)이다.살림이 가난하고 천한 신분일 때 사귀었던 친구는 잊어서는 안된다(후한서)로 풀이하는데 진정한 믿음은 삶이 어려운 시절에 자신을 돌보고 챙겨주는 친구가 아쉽기만 하다.며칠 전에 읽은 <통도유사>에는 구하(九河)스님의 예화가 나온다.일제강점기 시절 그는 외친내독(外親內獨)을 보였다.겉으로는 친일행각을 했지만 속으로는 대한독립을 갈구했다.독립지원금이 부족한 지사들을 보호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은 애국행동이 아닐 수가 없다.믿음은 개인적인 관계에서 국가의 안위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와 영향력은 실로 대단하다.현대사회에서 진정한 믿음을 마음과 가슴으로 느끼기에는 아직은 아닌 것 같다.믿음이라는 문제는 누가 시켜서 될 일이 아니고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정성과 열정,희생의 각오까지를 포함하는 높은 단계의 감정의 척도라고 생각한다.또한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자신의 낮은 감정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도 평소에 갖춰 나가는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