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조선 프린스 - 조선왕실 적장자 수난기
이준호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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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은 부자(父子)간에도 주고 받지 않을 만큼 냉혹한 세계이다.또한 권력을 일단 잡게 되면 세상을 다 거머쥔 듯 선량(善良)했던 지난 날의 포부는 어디론가 가버리고 체제유지를 위해 비정상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국정을 혼란케 하고 민심의 이반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 정치권력의 속성이라고 생각한다.그러한 관점에서 조선시대의 왕권 계승은 『훈요십조』에 의거하여 적장자(嫡長子)가 뒤를 이어야만 마땅한데 조선 왕조 27대 적장자가 왕위 계승을 한 것은 7명의 왕 밖에 없고(문종,단종,연산군,인종,현종,숙종,순종) 나머지는 상왕으로부터 이쁨을 받은 자가 왕의 바톤을 이어받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당시 조선은 명,청 관계에서 힘의 논리,문명의 발달 정도,외교관계에서나 늘 조공을 하고 사대(事大)의 예를 갖추어야 했고,신권(臣權)이 강하다 보니 왕 혼자서 다음 왕을 전적으로 결정할 수가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또한 왕자들 가운데에서는 왕이 되고자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들,이를테면 공신들,친인척들을 매몰차게 숙청 내지 유배를 보내야만 속이 시원했을 정도이다.게다가 왕으로서 자질이 뛰어나다 해도 왕의 귀에 들려오는 소문이나 평가가 좋지 않다면 후대를 위해 일도양단의 과단성을 보여야 할 때도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거하고 조선사의 전문가들의 관심과 격려에 의해 세상에 나온 이 글은 조선왕조 가운데 적장자임에도 불구하고 시대적 상황,개인의 자질,왕과 왕비,친척간의 이권 다툼,부왕의 그릇된 판단 등에 의해 적장자로서 역할과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한 편으로는 안타깝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자업자득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든다.

 

이 군주세습의 방편으로 적장자 계승 원칙은 고려,조선에서 만들어졌는데 중국에서는 아들들이 황권을 노리고 싸우는 꼴이 싫어 '밀건법'을 사용하여 황제가 죽은 뒤 황세자 및 신하들이 황제가 점지한 봉투를 열어 황제를 선정했다는 것이다.조선에서도 밀건법이 있었다면 왕권 다툼으로 왕실 주위가 시끌시끌하지 않았을 터이지만 명,청과의 왕의 책봉문제,왕과 왕비(정비,후궁)와의 관계,신료 및 주변 인물들의 입김 등으로 밀검법은 취지는 좋지만 조선 당대 상황으로는 적합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불노,난언죄로 생을 마친 지운을 비롯하여 여색에 빠지고 세자로서 자질이 좋지 않았던 양녕대군,인수대비의 과한 교육열과 철저한 계산하에 잘산대군(성종)이 왕으로 임명되고 실제 적장자였던 제안대군과 정치적 자질이 부족했던 월산대군,계비에 의해 적장자로 태어났지만 모함에 의해 생을 마감했던 영창대군,볼모로 청국으로 끌려 갔던 소현세자가 귀국 후 급작스런 죽음(부왕의 암묵적인 지시에 의한 독살설) 등으로 왕이 되는 것이 당시의 관례이고 정석이었지만 부왕의 오판,왕와 왕비 간의 알력 및 세력 다툼 등으로 적장자로서 제 역할과 기능을 못하고 초야에 묻혀 버렸던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점은 조선시대의 정치 상황과 현대 정치상황과 제도,시스템 면에서 판이하지만 '국리민복'을 제1의 과제로 삼아 차기 지도자를 선택하고 선진문물을 일찍이 수용해 나갔더라면 사색당파,천주교 탄압,일제강점기라는 어두운 과거는 없었으리라 생각을 해본다.권력은 달콤하지만 누구를 위하여 쓰여지느냐에 따라 사회의 명암이 판가름 난다는 것을 소중한 교훈으로 삼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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