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인민공화국 50년사
아마코 사토시 지음, 임상범 옮김 / 일조각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중국의 현대사에 대한 이야기는 중국식 사회주의라는 관점에서 풀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쑨원에 의한 신해혁명이 도중에 하차하고 마오쩌뚱과 장졔스의 국공합작이 실패로 돌아갔지만 마오가 이끄는 공산당이 승리를 함으로써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고 후진타오가 주석 자리에 오르기 직전까지의 50년간의 중국 현대사를 되짚어 보는 시간이 되어 중국의 정치,경제 등의 전반적인 얼개를 직시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마오는 중국 인민을 위한 정치를 내걸으면서 프롤레타리아 정신에 입각하여 중국 정치를 이끌어 간다.토지개혁법,한국전쟁 등을 거치고 1953년 사회주의 건설에 따른 5개년 계획이 시작되고 <농업생산합작사의 발전에 관한 결의>를 채택되고,1954년에는 전인대(전국인민대표회의)가 개최된다.이어 농업합작사화의 문제에 관하여를 보고 하고,백화제방과 백가쟁명을 1956년에 발표하기도 하며,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이 중앙정치 무대에 등극하게 된다.

 

 

1958년에는 피폐해진 농촌과 농민을 살리기 위해 <대약진운동>이 시작되지만 실정에 의해 결국 식량난과 일용품 부족에 시달리게 되면서 1962년에는 농가 생산청부제를 확산하고 그해 덩샤오핑은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상관없다'는 주장을 하게 되는데,개혁개방 정책에 이를 실질적으로 활용하게 한다.문화대혁명이 없었더라면 덩샤오핑의 흑묘백묘 주장이 중국 경제정책에 즉각 실천으로 옮겨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야오원위안이 신편 역사극 <하이루이파관>의 평이 문제가 되어 장칭 등의 4인방들이 중앙정부체제를 비판하면서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는 중국의 역사를 후퇴시키게 만드는데,당시 홍위병에 의한 지식인,부농,지주,반사회적 인사들이 무차별 인권 탄압과 숙청,하방운동이 일어나게 되고 그 후유증은 마오가 사망할 때까지이다.마오의 사망 이후 4인방에 대한 숙청은 당연한 귀결이다.이어 화꿔펑이 중앙정부를 통제하는 실질적 리더역할을 하지만 권력의 역학에 밀려 덩샤오핑이 새롭게 중앙무대에 등극하게 된다.

 

 

1978년 일본 신일본제철을 방문한 덩샤오핑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매료되어 중국 동부 연안 14개 도시를 개방정책의 전위대로 삼고 외자 및 기술도입을 점진적으로 실행하면서 경제성장을 한층 더 끌어 들인다.그러나 그간 정치적 자유,언론탄압 등은 지식인과 뜻있는 인사들의 불만이 후야오방의 서거를 기화로 촉발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텐안먼 사건>이다.중국 중앙정부는 획일화된 사회주의체제는 고수한다는 방침 아래 수많은 민주인사들이 투옥되고 망명하는 사태에 이르고 있다.대표적인 예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류샤오보이다.

 

 

1992년에는 한중수교가 이루어지면서 한중무역 관계가 직간접 투자형식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1997년에는 덩샤오핑의 사망이 있었으며,100년간 영국에 할양한 홍콩을 반환받게 되고,1999년에는 후진타오가 중앙군사위 부주석이 되고 동년 중국은 WTO과 관련하여 미국과 합의가 이루어진다.마카오가 중국에 반환되는 것도 그 해이다.

 

 

마오에 의한 공산당이 창립되고 인민을 위한 사회 계획도 수립되었지만 오랜 세월 구시대적 봉건적 인습과 사회주의 체제가 갖고 있는 제도 및 시스템의 한계,그리고 당권과 권력을 둘러싼 공산당 내부의 권력 암투(대표적인 것이 린뱌오) 등이 중국 정치후퇴를 가져 오게 되었던 것이다.다행히 덩샤오핑의 자본시장 도입으로 중원의 '잠자던 사자'는 늦게나마 기지개를 켜고 지구촌의 치열한 생존경쟁에 뛰어 들면서 괄목할 경제성장,파워 있는 정치 권력을 보여 주고 있다.사회주의 체제를 고수하고는 있지만 북아프리카마냥 민주화의 조류가 중국에도 태동할 날이 올거라는 기대를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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