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도에 묻히다 - 독립영웅, 혹은 전범이 된 조선인들 이야기
우쓰미 아이코.무라이 요시노리 지음, 김종익 옮김 / 역사비평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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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에는 대외적으로 정국이 어수선하고 무기력했던 시절이었다.국권을 통치하던 왕조부터 부패한 관료에 피폐한 민심까지 나라의 앞날은 말그대로 '오리무중(五里霧中)'이었다고 생각한다.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면서 일본에 빌붙어 살아 가려던 친일세력과 나라의 독립을 위해 분연히 싸웠던 항일운동가 및 민족주의자들이 분열이 되고 일제에 의한 창씨개명과 더불어 일본이 진주만 기습 공격에 의해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일본은 군수물자와 군 인력을 확보한다는 차원에서 조선의 젊은이들을 강제징용하면서 전장의 총받이로 어쩔 수 없이 나서야 했던 막막하고 암울하기만 했던 시절을 이 글은 생생한 증언과 기록으로 전해 주고 있으며 역사의 교훈을 되새김질 해보는 유익한 시간이 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고 일본은 조선에 내선일체,대동아공영권이라는 명목으로 조선의 젊은이들을 인도네시아 암본섬과 타이-버마간 철도 건설 등에 내몰리게 한다.조선의 젊은 노무자들은 당연히 일본인 이름으로 징병생활을 하면서 당시 남양만과 동남아는 영국,네덜란드 등이 제국주의에 혈안이 되어 식민통치를 공고히 하려고 했기에 일본과 잦은 국지전과 마찰이 일어나곤 했는데 조선,일본,대만의 젊은이들이 연합군의 포로가 되면서 조그마한 실수를 저질러도 억류소 생활을 거친 다음 극형에 처해지는 일도 부지기수였으며 극형에 처해지는 것이 두려워 제3국인 인도네시아 독립에 지원하려던 젊은이들도 있었다.이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힘겨운 노동을 하다 보니 풍토병(말라리아)에 걸리다 약 한 번 제대로 써보지도 못한 채 생을 이국에서 마감해야 해야만 했다.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에 의해 승리를 하고 조선은 해방을 맞이하지만 일본은 조선의 노무자,군무원 등의 귀국이 미루어지는 가운데 생의 위협을 받는 불안하고 초조한 나날이 이어지면서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간에 영토 분쟁이 일어나고 인도네시아는 자국의 독립을 위해 그곳에 와있던 조선,일본,대만의 젊은이들에게 독립운동에 동참해 줄것을 요구한다.그 대표적인 예가 조선의 양칠성,일본인 아오키,하세가와였다.네덜란드 군당국은 이들을 대동아전쟁의 전범으로 간주하면서 처형에 내린다.계약직(2년) 군무원으로 일본군 소속으로 몰리게 된 것도 억울한데 대동아전쟁의 전범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때는 참 나라 잃은 설움에 무법천지라는 생각마저 들게 되었다.

 

우쓰이,무라이 등 일본인 공저자가 인도네시아에서 유학을 하면서 2차 세계대전 당시 상황과 희생자들의 문서,증언 등이 이 글의 토대가 되었는데 조선인 군무원으로 활동했던 분들은 대부분 고인이 되었고 유일하게 이상문옹(翁)만 생존해 있다고 한다.당시 그곳에선 징용으로 끌려가고 일본에 조력하기도 했지만 뜻있는 조선의 젊은이들은 '고려독립청년당'을 결성하여 조선의 독립을 위해 분연히 투쟁을 했지만 그 뜻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안타깝게도 대표적인 인물들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마는 사연도 전해 들을 수가 있었다.

 

일본제국에 의해 조선의 젊은이(노무자,군무원,위안부 등)들이 젊음을 누리지도 못하고 머나먼 적도 남양만에서 인간 이하의 처우와 영양 실조,포로,억류소,형장의 이슬 등으로 사라져 갔던 비극적인 역사는 다시는 발생하지 않아야 한다.특히 살인 및 집단 살인,조직적 폭력 및 학대 행위,인질의 살해,시민의 고문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조선의 젊은이들이 전쟁범죄로 몰려 희생이 되었다는 것은 매우 안타깝고 비극이다.제국주의 일본이 과거 심대한 고통을 안겨 주었던 식민 통치에 대해 쿨한 사과(전후 보상,야스쿠니신사 합사,위안부 불인정,지문 날인,조선학교 문제,교과서 왜곡 등)도 없고 답답하기만 할 뿐이다.질질 끌고 있는 일본의 속셈은 무엇일까? 국가간의 관계는 힘의 논리이고 역학관계에서 오는 것은 아닌지 새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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