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 박완서 작가 10주기 에세이 결정판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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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내내 어른, 할머니의 따뜻한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김애란 작가의 에세이를 읽으면서 난 소설가가 쓴 에세이가 나랑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역시나 소설가의 에세이가 나랑 맞는 것 같다. 남다른 글솜씨는 사소한 이야기도 생생하게 만든다. 게다가 이 책은 작가가 젊은 시절부터 쓴 글이 적절히 섞여있기 때문에 정겹다. 회수권, 머큐로크롬(빨간약), 공중전화, 전화카드, 신여성, 덕국(독일) 등 나도 처음 들어본 신기한 단어가 보인다. 이런 단어가 등장할 때마다 아주 어린 시절로 같이 돌아가게 됐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여태껏 만난 수많은 아름다운 것들은 나에게 무엇이 되어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공상하게 했지만 살날보다 산 날이 훨씬 많은 이 서글픈 나이엔 어릴 적을 공상한다.

115쪽

요즘 나는 자주 옛날을 회상한다. 가까운 과거 말고, 먼 과거를. 아직 내 나이가 서글픈 나이는 아니지만,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은 아이러니하게도 과거로 발걸음을 돌리게 한다. 코로나19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 줄어들고, 자연스럽게 하고 싶은 일도 당장은 지우다 보니 자주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정말 이대로 코로나19와 함께, 마스크와 함께 살게 된다면 사는 날 중 유효한 날이 얼마 되지 않을 텐데. 아까운 내 삶을 어떻게 충만하게 살아야 할까? 당장 뾰족한 수는 없지만, 할 수 있는 일 중 뭐라도 하려는 노력만으로도 어떻게 될지 모를 남은 삶을 의미 있게 채울 수 있을까?

그래서인지 내가 어떻게 살았었는지 돌아보고, 그때 이걸 더 해볼 걸 아쉬움을 떠올리기도 한다. 지금까지 괜찮았던 것 같은데. 그런데 뭐 이리 아쉬운 게 많은지.

왜 당신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느냐?

128

박완서 작가님은 남편과 25살의 아들을 1988년에 영원히 이별하게 되었다고 한다. 2011년에 돌아가셨으니 20년 넘는 시간 동안 가슴에 품고 있었을 참척의 고통과 그리움이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아마도 그 시절이었을 텐데, 예비 수녀님이 건넨 저 한마디에 위로를 받으셨던 것 같다.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이 찾아왔을까란 인간적인 고통도 어쩌면 교만일 수 있다고 여길 수 있는 경지는 어느 정도일까? 그 정도 높이의 경지에 다다르려면 그만큼 깊은 골짜기의 바닥을 찍어야 할 것이다. 평범하고 평탄한 인생을 살아온 나도 언젠가 견딜 수 없는 슬픔과 시련이 다가왔을 때, 저 말을 떠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아직은 악보다는 선을 믿고, 우리를 싣고 가는 역사의 흐름이 결국은 옳은 방향으로 흐를 것을 믿을 수 있는 것도 이 세상 악을 한꺼번에 처치할 것 같은 소리 높은 목청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소리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무의식적인 선, 무의식적인 믿음의 교감이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26쪽

이 책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할머니의 일기장을 보게 된 손녀가 일기장 속에서 살아있는 할머니의 과거를 상상하며 풀어가는 이야기였다. 영화였는지 소설이었는지 가물가물해서 독서기록장을 뒤적거렸다. 내 기억처럼 완전히 일치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어렴풋이 떠올랐던 것은 『나의 할머니에게』의 한 단편인 백수린의 <흑설탕 캔디>였다. 할머니의 일기장을 유품으로 간직해온 손녀가 그 일기장을 펼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이다. 흐릿하게 이 이야기가 떠오른 이유는 이 책을 읽는 내내 할머니의 일기장을 읽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들을 잃고 견딜 수 없는 슬픔 속에서 만난 외손자의 이야기(민들레꽃을 선물 받은 날)에서 '나의 할머니'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우리 할머니도 항상 이런 마음으로 날 대해주셨겠구나.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나의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들었다.

소소한 에피소드를 통해 마치 철학책에서 접할 것 같은 인생의 깊이를 아우르는 깨달음까지 전달하는 이야기는 읽는 내내 내 인생 전면에 스며들었다. 어린 시절의 나를 소환하고, 지금의 나를 떠올리고, 노년의 나를 그려보았다. 진솔한 마음이 담긴 어른의 일기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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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9-03 12: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박완서님의 세상을 향한 시선, 우리 이웃들이 모습을 예리하게 포착한
읽다보면 인생의 철학이 담긴 대가의 문장력에 놀라죠

지유님, 화창한 금요일 만끽하시길 바랍니다 ^.^

지유 2021-09-03 22:50   좋아요 0 | URL
네. 여운이 많이 남은 책이었어요. >_<
스캇님도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