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찾아서] ‘신여성’ 어머니의 ‘아들 구출작전’
세상을 바꾼 사람들 10-4
 
 
한겨레  
 








 

» 우리나라 첫 여성 항일구국운동단체인 근우회의 1927년 창립 총회 장면. 필자의 어머니는 이 단체에서 잡지를 편집한 ‘신여성’이었다. <우리 여성의 역사> 중에서
 

1983년 하버드대학의 국제문제연구센터(CFIA) 연구원으로 1년간 미국에 갔던 때의 이야기를 쓰려 하니 돌아가신 어머니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해방 뒤에 일반화된 진보 혹은 좌파 이미지의 하나는 육친의 정을 외면하는 비인간적 냉혹함이다. ‘일반화’란 어디까지나 중성적인 표현이고, ‘냉혹함’은 보수 우파가 의도적으로 부각시킨 결과라 해야 진실에 가깝다. 박정희와 전두환 군사독재에 대항하여 싸우다 여러 차례 옥고를 치른 ‘진보파’ 성직자의 대표적 두 인물, 박형규 목사와 함세웅 신부를 저널리스트로서 관찰하면,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과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보통 가족들보다 지극했다. 어머니의 속을 썩이며 사지(死地)에 뛰어들었던 그들의 행동이 유교가 지배하던 시대의 사대부 계층에서 말하는 불효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두 분의 어머니는 아들의 행동이 옳다는 확신을 갖고 자식을 위해 기도했다.

우리 모자의 관계는 조금 유별나다. 어머니(1908~94, 장규선)는 미션계 초등학교(평북 영변의 숭덕학교)를 거쳐 서울에 와 중학교를 마치고 일본에 유학을 가 전문학교 물을 먹은 이른바 ‘신여성’. 하지만 그 시대의 보통 신여성과 다른 점은 어머니가 일제하의 중도좌파 독립운동 조직인 ‘신간회’의 자매 여성단체 ‘근우회’(槿友會)의 열성 회원이었던 것이다. “근우회에서 어머니가 한 일은 어떤 건데요?” 하자 “근우회 평양지부에서 발행하는 <새동무>라는 잡지의 편집 일을 했디. 그때 고무신 공장 여공들이 <새동무>를 많이 읽드구나. 소설가 리기영(월북 작가, 대표작 <고향>, 작고)의 글을 받아 오곤 해서”라는 거였다. 십대 초반 나는 책이나 신문이 아니라 어머니한테서 ‘카를 마르크스’란 이름을 처음 들었다. 그러나 사상적으로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다고 믿지는 않는다. 왜냐고? 어머니는 나의 대학 문과 진학을 극구 반대했으며 법과대학을 가서 판검사나 관리가 되는 것을 바랐으니까. 해방 이듬해 강원도 김화에서 월남한 우리집 형편이 한동안 어려웠던 것과 좌절한 진보파 신여성의 ‘현실 선회’가 복합된 결과라 보면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어찌되었거나 1980년 여름 나의 실업과 감옥행을 걱정한 정도가 ‘열성 근우회 멤버’였다 하여 초등학교 졸업의 어머니들보다 더했다고 절대 말해서는 아니된다. 차이가 있다면 고등교육을 받은 어머니가 그러지 못한 이들보다 세상 돌아가는 통빡을 잘 짚어 꾀를 내는 데 능할 뿐이다. 그해 봄 서울에 잠시 돌아와 있던 어머니가 내 친구 ‘파격’ 채현국을 찾아가 정세 탐색을 했던 모양. 그때 채현국 집에 피신해 있던 민주운동가 장기표를 만나 자식 걱정을 하던 내 어머니의 인상을 전하면서 그는 “대단한 분”이더라고 했다. 당신이 내린 정세 판단으로는 미국에 가서 아들을 빼내는 구출운동을 벌이는 게 더 효과적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미국 정부의


 

» 임재경/언론인
 
힘을 빌리는 방법인데, 미국 시민권 소지자인 큰아들과 셋째아들이 각각 살고 있는 주 출신 상원의원에게 편지를 보내 “납세자들로부터 거둔 돈으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미군이 주둔하는 한국에서 언론 자유가 박탈당하고 인신의 자유가 유린되는 상황”을 항의토록 한 것이다. 몇 해 뒤 아우가 보여준 서류 뭉치에는 상원의원이 미 국무장관에게, 국무장관이 한국 외무장관에게, 외무장관이 계엄사 합수 본부장에게 보낸 공한들이 차곡차곡 철해져 있었다. 미국 정부의 영향력을 이용하려 한 어머니의 꾀에는 감복했으나 실효는 별무였다.

그 다음에 어머니가 한 일은 83년 나를 미국으로 불러내는 거였다. 전두환 정권이 여권을 내주지 않을 수 없는 명문대학에서 초청장을 보내도록 하는 방법, 그게 하버드대였다. 그것도 두 아들에게 분업을 시켜 여유가 있는 맏아들은 비용을, 막내에게는 섭외를 맡긴 것이다. 자랑거리는 못 되지만 나는 이력서 한 가지를 빼놓고는 관련 서류를 내 손으로 쓴 것이 없다. 내 아우는 미국의 저널리스트와 대학교수 가운데서 반한 진보파로 분류되는 사람들과 접촉을 했는데 내 미국행에 도움을 준 두 사람을 꼽자면 하버드-옌칭연구소의 부소장 에드 베이커와 <한국전쟁의 기원>을 쓴 한국사 연구가 브루스 커밍스. 하지만 하버드대의 초청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하버드 박사이고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인문학자이며 동시에 실천가인 백낙청의 추천이다.


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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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찾아서] 겨울산 잠깨운 민주인사들 ‘연애담’
세상을 바꾼 사람들 10-3
 
 
한겨레  
 








 

» 임재경/언론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분도수도원 모임 이후 거주지 관할 용산경찰서의 정보과 경위가 케이크를 사 들고 내 집을 찾아왔다. 숙명여대를 담당하는 관계로 바쁜 나머지 자주 찾아뵙지 못해 미안하다며 ‘어려운 민원이 있으면 도와줄 터이니 사양하지 말라’는 알 듯 모를 듯한 인사를 남기고 돌아갔다. ‘당신에게 전담자가 붙었으니 그리 알라’는 통고인데, 남영동 패들을 만날 때보다 긴장감은 덜했으나 관할 경찰서의 상시 관찰 대상이 됐다는 것은 찜찜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한국일보>에서 파면될 무렵인 1980년 7월 계간 <창작과 비평>은 전두환 일당에 의해 폐간되어 사무실을 종로에서 마포의 허름한 데로 옮겼다. ‘조투’, ‘동투’는 말할 나위도 없으려니와 80년 해직기자들 대부분은 생계를 꾸리느라 사방으로 흩어진 상태. 현대그룹에 취직한 백기범(조선투위 회원, 문화일보 편집국장 역임)이 늘 앞장선 덕분에 주말마다 작당하여 산에 오르는 것이 즐거움이자 동시에 정보교환의 기회였다. 기존의 산행 멤버에 <경향신문> 해직기자들이 합류하여 서울 주변은 말할 것도 없고 강원도의 큰 산 여러 군데를 섭렵했다. 범하가 이끄는 산악회 ‘거시기’와 합동으로 계방산을 등반한 적도 있는데, 그때 변형윤(서울대 상대학장 역임, 해직교수), 박현채(조선대 교수 역임, 작고), 백낙청·김정남이 같이 갔다. 81년 11월 해직기자 산행그룹(이름은 ‘머사니’)은 야심적인 목표를 세워 강원도 오대산 정상을 타되 내륙의 서편 능선에서 올라 동쪽으로 내려가는 코스를 택했다가 큰 변을 당할 뻔했다. 백기범·신홍범·정태기·성한표·이경일·표완수·박우정, 그리고 나 여덟 사람은 동편 능선 길이 초설로 덮인 것을 모르고 긴 소금강 계곡으로 하산을 시도했던 것. 예상 밖으로 시간이 지체됨으로써 눈 덮인 산속을 헤매다가 결국 비박을 하게 되었는데, 기온은 영하고 캄캄한 야심이라 잠들면 조난당할 위험이 있다고 했다. 이글거리는 모닥불 앞에 둘러앉아 각기의 첫 이성 접촉 경험담을 토로하며 밤을 꼬박 샜다. 잠을 쫓으려는 일념으로 재주껏 이야기 솜씨를 발휘했겠으나 오대산 비박의 ‘데카메론’ 금상은 표완수에게 가야 한다는 것이 중론.



 

» 해직당한 뒤 ‘낭인’으로 살아야 했던 기자들과 민주인사들은 어쩔 수 없이 ‘주유천하’를 하며 시대를 견뎌야 했다. 1986년 4월 어느 날 ‘조선투위’ 사람들과 북한산에 올랐다. 왼쪽부터 신홍범, 조건영, 문창석, 김유원(작고), 필자, 박세원(작고), 최병선씨.
 


실업자에다 경찰의 감시 대상이었던 터라 도리 없이 천하를 주유했다고 하면 낯뜨거운 소리고, 나는 천성으로 글쓰기 같은 일보다 놀러 다니기를 즐기는 쪽. 이럴 때 써먹기 좋은 말이 있지 않은가, ‘호모 루덴스!’ 등산만 한 것이 아니라 바다와 섬으로도 갔다. 82년 여름 대구의 해직교수 ‘두목’으로 자처했던 이수인(영남대 교수, 국회의원 역임, 작고)이 놀러 오라는 연락을 해 왔다. 대구에는 김윤수·염무웅·박현수(민속학자, 영남대 교수), 정지창(영남대 교수), 김종철(영남대 교수 역임, 녹색평론 발행인), 최원식(문학평론가, 인하대 교수, 창비 주간 역임) 등 일당의 ‘몰지각 지식인’이 진을 치고 있었는데, 울릉도에 간다는 거였다. 2박3일의 울릉도 주유는 전두환의 철권 지배와 지식인 대량 추방이 아니었더라면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을 추억이다. 해발 제로인 백사장에서 새우튀김을 해 먹고 그날로 해발 1천미터 성인봉에 올랐으니 하는 말이다.

그즈음 조그마한 탄광회사를 경영하던 ‘호협’ 박윤배는 강원도 소재 채탄 현장에 갈 때마다 나한테 같이 가자고 했다. 군소 탄광업자들과 어울리는 술자리는 물론이고 그 다음의 노름판에도 나를 끼워줬다. 도박은 ‘고스톱’이었는데 이 게임의 간단한 규칙과는 달리 돈을 따는 것은 전혀 달랐다. 그가 준 밑천을 서너 판만 지나면 홀라당 잃었고, 그러면 박윤배는 “넌 지금부터 자릿돈을 떼는 거다. 사장님들 이의 없지요?” 하며 판마다 일정한 비율의 자릿돈을 떼어 내 앞에 놓는 거였다. 강원도 일판에서 ‘호협’의 우악스러움이 통하던 시절의 이야긴데, 한번 박윤배를 따라 강원도에 갔다 오면 서울에서 보름 동안 용처를 해결할 만한 돈이 생겼다. 세도가들의 등쌀에 밀려 노름판의 자릿돈을 뜯어 살았다는 조선조 말 흥선 이하응의 처지가 떠올랐던 것도 무리가 아니다.

미국의 큰아들(내 형) 집에서 살던 어머니는 둘째인 내 처지가 궁금하였던지 그해 겨울 셋째인 아우를 서울에 보냈다. 친구들과 자주 만나는 데를 보고 싶다고 하여 종로 관철동의 ‘한국기원’으로 아우를 안내했더니 “담배 연기 자욱한 곳에서 노인들하고 바둑을 두면 폐인 돼요!” 하는 거였다. 이듬해 여름 미국을 가게 된 배경이다.


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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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찾아서] 정부는 그자를 빨갱이로 보고있소
세상을 바꾼 사람들 10-2
 
 
한겨레  
 








 

» 1974년 11월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민주회복 국민선언대회’에 참석한 천관우(점선 안) 전 동아일보 주필. <보도사진연감>
 
내가 ‘서대문’에서 빨리 풀려나도록 애써준 채현국과 박윤배 앞에서 내색은 안 했을망정 같은 시기에 들어갔던 해직언론인들을 놔두고 혼자 나온 것을 후회할 만큼 마음이 무거웠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열 살 연장의 청암이 거기서 겨울을 나야 한다는 것이 몹시 안쓰러웠다. 범하(인권변호사 이돈명의 아호)를 찾아가 청암 이야기를 했더니, ‘김대중 내란음모’에 얽힌 사람들은 어차피 정치적으로 일괄처리될 터이니 너무 괘념하지 말라고 했다. 범하는 광주의 원로 변호사 홍남순(작고)이 ‘5·18 광주 폭동의 수괴’로 군법회의에 기소된 것이 예삿일이 아니라며 속을 태웠다.

얼마 뒤 천관우(<동아일보> 주필 역임, 작고)의 불광동 집을 찾았다. 그는 19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후반까지 내가 매해 연초 세배를 빼놓지 않은 언론계 선배. 서대문에서 나온 다음 들리는 소문은 전두환 일당이 그의 성가(聲價)를 자기들 편에 유리하도록 써먹으려 백방으로 공작을 했다는 것이며, 그 성과인지는 알 수 없으되 수백 명의 기자들이 내쫓기는 판국에 거꾸로 천관우는 <한국일보> 이사로 영입되어 기명 칼럼을 쓰고 있었다. 서대문에서 고생하는 청암 이야기가 끝난 뒤 그가 내게 한 말은 덧정이 정말 떨어지는 소리였다. “임형! ‘다방가’(茶房街)에서 무어라 떠들건 간에 적어도 향후 3년간 과거와 같은 행동은 용납 안 될 거요”라 하는 게 아닌가. 어안이 벙벙했다. 우선 ‘다방가’란 말이 귀에 거슬렸다. 반세기 전의 표현이거나 천관우의 조어인 모양인데 전후 문맥으로 미루어서는 야당 정치인과 반체제 인사를 경멸하는 뜻으로 지칭하는 것이 분명했고, ‘과거와 같은 행동’이란 두말할 나위 없이 거리시위를 가리키는 것이다. ‘지식인 134인 선언’으로 구치소에 들어갔던 나에게 이런 표현을 쓰는 것은 ‘당신 역시 한자리 하려고 정치인들과 어울린 거 아냐’란 뉘앙스로 들렸다. 너무 억울했다. 한국의 양심을 대표했던 언론인 천관우가 그 날조된 ‘김대중 내란 음모와 과도내각 명단’을 믿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천관우의 시각은 그의 이해하기 힘든 처신에 얽힌 자기정당화라 하겠으나, ‘김대중 과도내각 명단’에 대하여 많은 오해와 빈정거림, 그리고 어이없는 ‘기대’를 나는 친지들로부터 들었다. 그 이야기는 뒤에 따로 쓰겠다.

광주항쟁 이후 한동안 뜸했던 개신교 진보파 쪽과의 관계는 휴면 끝에 81년 여름 복원되었다. 박형규 목사(민주화기념사업회 이사장 역임)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인권위원회 ‘앙가주망’ 기능을 전두환 정권하에서 최초로 시험한 모임에 나는 또다시 겁 없이 참석했던 거였다. ‘전국인권협의회’란 명칭의 왜관 소재 가톨릭 분도수도원 모임에는 박형규 외에 교계의 서남동(연세대 교수 역임, 작고), 이우정(한국기독교 여신도회장 역임, 작고), 윤숙영(‘동아투위’ 박종만의 부인, KNCC 인권위 간사 역임, 남북평화재단 이사), 그리고 출옥한 지 몇 달 안 되는 청암과 유인호(중앙대 교수 역임, 작고)만이 기억에 남아 있다. 분도수도원 모임에서 나는 ‘이란의 이슬람 혁명’을 주제로 강연을 했는데 논리 전개와 표현에 조심하려고 노력했으나 언제나 그렇듯이 입을 열면 자제하지 못하는 성미 때문에 과격했던 것 같다. 참석자들은 밝은 표정을 잃지 않았으며, 특히 유인호는 점심시간에 목사·신부들을 앞에


 

» 임재경/언론인
 
놓고 좌중의 폭소를 자아내는 진한 우스갯소리를 했다. 특기할 일은 당시 제도언론에서 함구로 일관했던 ‘언론기본법’을 분도수도원 모임에서 ‘당면 10개 중요 인권사항’의 하나로 확인하고 ‘언론 자유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천명한 것. 그때 실정으로는 적잖은 용기가 필요했던 언표다.

광주항쟁 이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테이프를 끊은 반체제 운동을 기관에서 낌새를 못 챌 리 없었다. 모임이 끝날 무렵 토론장에 위장 잠입한 사복 형사가 수도원 사람들에게 적발되어 밖으로 쫓겨나는 일이 벌어졌다. 서울에 올라와 며칠 지난 다음 남영동(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나를 보자는 전화가 와 만약(연행)에 대비해 종로2가 와이엠시에이(YMCA) 커피숍에서 만나자고 했다. 1년 전 나를 연행했던 두 기관원 중에서 젊은 사람이 나왔는데 분도수도원 모임에 대해 이것저것 묻다 “박형규와 같은 좌경 인사들과 만나면 오해받는다”고 주의를 주는 거였다. 연행할 때는 두 사람이 나타나는 게 원칙인데 혼자 나온 것으로 미루어 내가 입건된 것은 아니라는 감을 잡고 나도 한마디 했다. “6·25 때 동경 유엔군 총사령부(UNC)에서 일했고 미국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박 목사를 좌경으로 본다면 한국에 좌경이 아닐 사람이 얼마나 되겠소?”라 하니, 그는 “청와대는 박 목사를 공산주의자로 여긴다는 것을 알아두시오”라고 내뱉듯이 응수했다.


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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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찾아서] 김지하·리영희·이부영은 ‘옥중철인’?
세상을 바꾼 사람들 10-1
 
 
한겨레  
 








 

» 임재경/언론인
 
나의 철창생활에 관해서는 간단하게 ‘특기사항 없음’이라 해야 옳다. 철창생활이 너무 짧았고 한 번에 그쳤기 때문인데, 남영동에서 취조받을 때보다 뱃속은 확실히 편했다. 거기서 주는 퍼런 색깔의 수인복을 걸친 첫날 ‘서대문(서울구치소)에 5년 동안 묶여 있는 김지하는 지금 나하고는 얼마 거리에 있을까?’, ‘저 멀리 광주교도소에 2년 넘게 갇혀 있는 리영희는 지금쯤 무얼 생각할까?’, ‘두 번 세 번 여길 드나든 이부영은 도대체 무쇠인가, 사람인가?’ 하는 물음으로 뒤숭숭했다.

처음 서대문에 들어온 해직기자들에겐 철창생활이 힘들었던 모양이다. 한번은 ‘소지’(기결수 가운데 청소와 잡역을 맡은 사람)가 내 철창 밖에 서서 “위층에 있는 ‘노랑 딱지’(일반 잡범과 구별하기 위해 가슴에 삼각형의 노란색 비닐 리본을 달고 있었음) 기자가, 지금 미국 국회의원들이 한국에 와 인권문제를 조사한다고 전하래요” 하는 거였다. 새 소식을 알리려는 호의는 인정해야겠지만 여기 있는 우리들에게 미국 국회의원들이 무얼 어쩔 수 있다는 건지 한심했다. 면회 온 아내에게 축농증이 도져 약이 필요하다 했더니 며칠 뒤 얌전하게 생긴 교도관이 약병을 철창 사이로 넣어주며 함세웅 신부(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의 안부를 전하는 거였다. 잊혀지지 않는 고마움이다.

이틀이 멀다 하고 만나던 친구들이 나를 서대문에서 꺼내려 무척 애썼다는 걸 뒤에 알았다. ‘파격’ 채현국과 ‘호협’ 박윤배는 당시 권부에 관계하던 각기의 인맥을 활용하여 나를 빼내려 무던히 뛰어다녔던 것인데 김재익(경제기획원 국장· 청와대 경제수석 역임, 작고)과 이종찬(3선 의원, 국정원장 역임)이 곧 그들의 인맥이다. 채현국과 김재익은 대학 동기이고 박윤배와 이종찬은 고등학교 동기. 이종찬은 육사 생도 1학년 시절(1956년) 김상기(재미 철학자)를 통해 알게 된 사이이며 70년대 초 박윤배의 끈질긴 성화에 감응하여 여러 민주인사를 뒤에서 도왔던 일은 김지하의 회고록에 나와 있다.

같이 오랏줄에 묶였던 ‘동아투위’의 이종욱, 그리고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된 청암과 이호철보다 나는 두 달 앞서 서대문에서 나왔다. 출소하던 날의 조그마한 해프닝. 저녁밥을 먹고 난 뒤 무궁화 꽃잎 새 두 개짜리 교도관이 소지품을 싸 들고 얼른 나오라고 하여 이 시간에 어딜 가느냐고 한즉 출소라는 거였다. 이 구석 저 구석에 널려 있는 과자, 과일 나부랭이를 모포에 싸 담는 걸 보던 교도관은 그런 걸 무엇하러 싸느냐며 내의와 책만 가지고 나오라는 거였다. 교도소에 한 달만 있으면 재소자의 90%가 먹는 것을 가장 중요히 여기더라는 말을 들으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옥문을 나서니 기다리던 짧은 머리의 30대 청년이 나를 검정 승용차에 태우고 이내 워키토키로 “지금 나와 가고 있습니다”라 하는 거 아닌가. 순간, 출소라더니 집이 아닌 다른 데 가서 조사를 하겠다는 건가 하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밖은 이미 어두워 잘 분간은 못하겠으나 서소문의 옛 중앙일보 건물 건너편 빌딩의 지하로 들어가 차가 멈췄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몇 층인가 올라가니 군복들이 오가는 가운데 군 복무 시절의 최전방 관측소(OP)에서 듣던 무전장치의 욍욍하는 전자음이 몹시 귀에 거슬렸다. 제법 큰 방에 안내되어 커피를 마시면서 기다리니 깨끗한 사복 차림의 중년이 들어와 손을 내밀며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특별히 걱정하는 분이 있어 나가게 되었으니 그리 알아 주시오”라는 것이 대화의 전부. 그는 서울지구 계엄사 합동수사본부 책임자였으며, 군법회의에 기소된 사람의 출소(석방)는 절차상 거길 거쳐야 하는데 나는 ‘공소 기각’ 결정이 났다는 것.

서대문에서 나와 처음 만난 것은 인권변호사 홍성우. 내가 잡혀갈 때와 거의 같은 시기에 변호사 자격이 정지되어 구치소로 면회 가지 못한 것을 미안해하며 그는 일식집에 가 점심을 냈다. 인권변호사들의 무료 변론은 외국에 예가 있다고 들었으나 술과 밥을 사주며 무료 변론을 해주는 변호사들은 전 세계를 통틀어 박정희-전두환 시대의 한국이 유일무이한 사례일 것이다. 김태홍이 잡혀갔으며, ‘조투’ 위원장 정태기와 ‘동투’ 위원장 이병주(한겨레신문 상무이사 역임)가 계속 잠항 중임을 귀띔해 주었다.


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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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찾아서] 과도내각? 옷깃도 안스쳤는데…
세상을 바꾼 사람들 9-5
 
 
한겨레  
 








 

» 1980년 7월5일치 <조선일보>에 실린 ‘계엄사의 김대중사건 발표 전문’ 가운데 나오는 ‘과도내각 구상’. 경제담당으로 필자인 ‘임재경’ 이름이 적혀 있다.
 
3주 가까이 집에도 신문사에도 들어가지 않고 동가식서가숙하는데 잡아간다는 뚜렷한 징조가 보이지 않자 내 쪽에서 오히려 시들해져 1980년 6월 중순 정상 생활로 돌아왔다. 6월 말 어느 날 아침밥 먹기 직전 ‘남영동’의 세 사람이 드디어 찾아왔는데 이건 무언가? 집 사러 온 사람처럼 이 방 저 방 기웃거리다 말고 “김태홍을 만난 게 언제요”라 묻는 거였다. “그 친구에게 현상금이 붙었던데 아직 못 잡았소?” 하니 셋 중의 하나가 볼멘소리로 “땅굴을 깊이 파고 숨긴 숨은 모양인데, 안 나오고 배기나요”했다. 셋이 집을 나간 다음 ‘난 아니군’ 하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일렀을 뿐이다.

7월5일 아침 배달된 조간신문의 두 면에 걸친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전모’ 한가운데 ‘김대중 과도내각 명단’이란 별도의 줄친 칸이 눈에 들어왔다. 거기에 ‘경제담당 임재경’이 들어 있었다. 이건 또 무언가? 나는 72년 조선일보 정치부 차장 시절 김대중을 만난 게 마지막이고 10·26 이후 먼발치에서나마 눈도 마주친 적이 없는 판에 그의 과도내각에 들어갔다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걸리긴 된통 걸렸구나’ 하는 두려움에 짓눌리면서 마음 한구석에 ‘김대중은 역시 사람을 알아보는군’ 하는 유치하고 어이없는 공명심이 스쳤다. 이렇게 된 바에야 피신이고 나발이고 할 여지가 없다.

그날 신문사에 출근해 처음 마주친 홍순일(<한국일보> 논설위원, <코리아타임즈> 편집국장 역임)이 “임 선생 한자리 할 뻔했습디다”라 했다. 그날 오전 신문사는 긴급징계위원회를 열어 ‘정치행동 금지의 사규 위반’ 이유로 나에게 파면 결정을 내렸다고 통고했다. 그 순간 ‘참으로 험하게 당하는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언론인을 구속하는 게 아니라 전직 언론인을 구속했다’고 하겠지 하는 예감이 들었다. 몇 시간 뒤 남영동에 붙들려갔을 때 연행보고서를 작성하던 기관원이 하는 말, “당신은 언론인이 아니라 무직이요”라 했으니 예감이 적중했던 것이다. 나는 보따리를 챙기려다 말고 부주필 주효민의 책상 앞에 서서 “파면이라면 직업인으로는 최악의 징계인데 그런 결정을 내리려면 당사자에게 단 1분이나마 소명 기회를 주어야 할 것 아니오”라며 악쓰듯 소리 질렀다. 그는 종잡을 수 없는 답변을 했는데 무슨 내용이었는지 지금 기억에 없다.

한 30분이 지났을까, 4층 응접실에 두 손님이 찾아왔다는 비서실의 전화다. ‘손님 좋아하네, 이제는 신문사 안까지 버젓이 들어와 사람을 낚아채 가니 현행범이 됐군.’ 남영동에 연행되어 보름 가까이 있는 동안 초장 며칠은 어떻게 나를 엮으려는지 짐작이 안 갈 정도로 이것저것 캐물었다. ‘김태홍의 행방을 대라’, ‘김대중의 과도내각 임명장을 집 어느 구석에 숨겨 놨냐’, ‘<좃투>, <똥투> 가운데서 악질 반체제가 누구냐’ 따위의 질문이다. 남영동에서 취조 받고 옥살이한 사람들로부터 듣기로는 소름 끼치는 곳인데, 운 좋게 내 담당자는 ‘골수 남영동 기술자’가 아니었다. 치안본부 외사 담당 요원으로 일하다 5·18 쿠데타로 업무가 폭주하는 바람에 차출되어 왔단다. 가벼운 농담을 건넬 만큼 관계가 누그러지자 “언론 자유를 위해 직장을 잃고 고생이란 고생을 다한 사람들인데 <좃투>, <똥투> 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라 하니, 자기는 그런 조직이 있는 것도 몰랐고 ‘여기 와 보니 그렇게 부르더라’는 거였


 

» 임재경/언론인
 
다. 열흘쯤 지나자, 취조의 핵심은 예상했던 대로 ‘지식인 134명 선언’임이 확실해졌다. 계엄 포고령의 집회-불법 유인물 작성죄로 나를 몰아갔다. 선언문 최종안을 토론할 때 오고간 말을 빼고는 숨길 것이 없었다. 조서 작성을 끝내자 취조관은 반성문을 쓰라고 했다. 74년 ‘민주회복국민선언’ 사건 때 장기영 한국일보 사주와 각서를 두고 설왕설래한 일이 떠올라 “지식인 선언은 신념에서 나온 것이며 언론 분야 대표로 참여한 처지에 더욱 반성문을 쓸 수 없다”고 버텼다. 반성문을 쓰지 않으면 감옥에 갈지도 모른다고 했으나 그 말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구속영장 신청을 해놓고 기다리는 어느 날 내가 조사받는 방의 경비 경찰이 해직기자들이 많이 들어왔다고 했다. 나는 주머니에 있는 돈을 전부 꺼내 취조관에게 “어차피 며칠 있으면 헤어질 모양이니 음식물을 사다 먹자고 했다. 술은 안 된다 하여 포기하고 통닭을 사와 이 방 저 방으로 보냈다.

이때 남영동에 끌려온 해직 언론인은 동투의 장윤환(<한겨레> 편집국장·논설주간 역임), 성유보(한겨레 초대 편집위원장, 방송위원 역임), 박종만(YTN 이사 역임), 안성열, 이종욱(시인, 한겨레 문화부장 역임), 홍종민(동투 총무 역임, 작고)과 조투의 백기범(<문화일보> 편집국장 역임)이다. 이 가운데서 서대문 서울구치소로 넘어간 것은 이종욱과 나 둘이다.


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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