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철창생활에 관해서는 간단하게 ‘특기사항 없음’이라 해야 옳다. 철창생활이 너무 짧았고 한 번에 그쳤기 때문인데, 남영동에서 취조받을 때보다 뱃속은 확실히 편했다. 거기서 주는 퍼런 색깔의 수인복을 걸친 첫날 ‘서대문(서울구치소)에 5년 동안 묶여 있는 김지하는 지금 나하고는 얼마 거리에 있을까?’, ‘저 멀리 광주교도소에 2년 넘게 갇혀 있는 리영희는 지금쯤 무얼 생각할까?’, ‘두 번 세 번 여길 드나든 이부영은 도대체 무쇠인가, 사람인가?’ 하는 물음으로 뒤숭숭했다.
처음 서대문에 들어온 해직기자들에겐 철창생활이 힘들었던 모양이다. 한번은 ‘소지’(기결수 가운데 청소와 잡역을 맡은 사람)가 내 철창 밖에 서서 “위층에 있는 ‘노랑 딱지’(일반 잡범과 구별하기 위해 가슴에 삼각형의 노란색 비닐 리본을 달고 있었음) 기자가, 지금 미국 국회의원들이 한국에 와 인권문제를 조사한다고 전하래요” 하는 거였다. 새 소식을 알리려는 호의는 인정해야겠지만 여기 있는 우리들에게 미국 국회의원들이 무얼 어쩔 수 있다는 건지 한심했다. 면회 온 아내에게 축농증이 도져 약이 필요하다 했더니 며칠 뒤 얌전하게 생긴 교도관이 약병을 철창 사이로 넣어주며 함세웅 신부(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의 안부를 전하는 거였다. 잊혀지지 않는 고마움이다.
이틀이 멀다 하고 만나던 친구들이 나를 서대문에서 꺼내려 무척 애썼다는 걸 뒤에 알았다. ‘파격’ 채현국과 ‘호협’ 박윤배는 당시 권부에 관계하던 각기의 인맥을 활용하여 나를 빼내려 무던히 뛰어다녔던 것인데 김재익(경제기획원 국장· 청와대 경제수석 역임, 작고)과 이종찬(3선 의원, 국정원장 역임)이 곧 그들의 인맥이다. 채현국과 김재익은 대학 동기이고 박윤배와 이종찬은 고등학교 동기. 이종찬은 육사 생도 1학년 시절(1956년) 김상기(재미 철학자)를 통해 알게 된 사이이며 70년대 초 박윤배의 끈질긴 성화에 감응하여 여러 민주인사를 뒤에서 도왔던 일은 김지하의 회고록에 나와 있다.
같이 오랏줄에 묶였던 ‘동아투위’의 이종욱, 그리고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된 청암과 이호철보다 나는 두 달 앞서 서대문에서 나왔다. 출소하던 날의 조그마한 해프닝. 저녁밥을 먹고 난 뒤 무궁화 꽃잎 새 두 개짜리 교도관이 소지품을 싸 들고 얼른 나오라고 하여 이 시간에 어딜 가느냐고 한즉 출소라는 거였다. 이 구석 저 구석에 널려 있는 과자, 과일 나부랭이를 모포에 싸 담는 걸 보던 교도관은 그런 걸 무엇하러 싸느냐며 내의와 책만 가지고 나오라는 거였다. 교도소에 한 달만 있으면 재소자의 90%가 먹는 것을 가장 중요히 여기더라는 말을 들으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옥문을 나서니 기다리던 짧은 머리의 30대 청년이 나를 검정 승용차에 태우고 이내 워키토키로 “지금 나와 가고 있습니다”라 하는 거 아닌가. 순간, 출소라더니 집이 아닌 다른 데 가서 조사를 하겠다는 건가 하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밖은 이미 어두워 잘 분간은 못하겠으나 서소문의 옛 중앙일보 건물 건너편 빌딩의 지하로 들어가 차가 멈췄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몇 층인가 올라가니 군복들이 오가는 가운데 군 복무 시절의 최전방 관측소(OP)에서 듣던 무전장치의 욍욍하는 전자음이 몹시 귀에 거슬렸다. 제법 큰 방에 안내되어 커피를 마시면서 기다리니 깨끗한 사복 차림의 중년이 들어와 손을 내밀며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특별히 걱정하는 분이 있어 나가게 되었으니 그리 알아 주시오”라는 것이 대화의 전부. 그는 서울지구 계엄사 합동수사본부 책임자였으며, 군법회의에 기소된 사람의 출소(석방)는 절차상 거길 거쳐야 하는데 나는 ‘공소 기각’ 결정이 났다는 것.
서대문에서 나와 처음 만난 것은 인권변호사 홍성우. 내가 잡혀갈 때와 거의 같은 시기에 변호사 자격이 정지되어 구치소로 면회 가지 못한 것을 미안해하며 그는 일식집에 가 점심을 냈다. 인권변호사들의 무료 변론은 외국에 예가 있다고 들었으나 술과 밥을 사주며 무료 변론을 해주는 변호사들은 전 세계를 통틀어 박정희-전두환 시대의 한국이 유일무이한 사례일 것이다. 김태홍이 잡혀갔으며, ‘조투’ 위원장 정태기와 ‘동투’ 위원장 이병주(한겨레신문 상무이사 역임)가 계속 잠항 중임을 귀띔해 주었다.
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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