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분도수도원 모임 이후 거주지 관할 용산경찰서의 정보과 경위가 케이크를 사 들고 내 집을 찾아왔다. 숙명여대를 담당하는 관계로 바쁜 나머지 자주 찾아뵙지 못해 미안하다며 ‘어려운 민원이 있으면 도와줄 터이니 사양하지 말라’는 알 듯 모를 듯한 인사를 남기고 돌아갔다. ‘당신에게 전담자가 붙었으니 그리 알라’는 통고인데, 남영동 패들을 만날 때보다 긴장감은 덜했으나 관할 경찰서의 상시 관찰 대상이 됐다는 것은 찜찜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한국일보>에서 파면될 무렵인 1980년 7월 계간 <창작과 비평>은 전두환 일당에 의해 폐간되어 사무실을 종로에서 마포의 허름한 데로 옮겼다. ‘조투’, ‘동투’는 말할 나위도 없으려니와 80년 해직기자들 대부분은 생계를 꾸리느라 사방으로 흩어진 상태. 현대그룹에 취직한 백기범(조선투위 회원, 문화일보 편집국장 역임)이 늘 앞장선 덕분에 주말마다 작당하여 산에 오르는 것이 즐거움이자 동시에 정보교환의 기회였다. 기존의 산행 멤버에 <경향신문> 해직기자들이 합류하여 서울 주변은 말할 것도 없고 강원도의 큰 산 여러 군데를 섭렵했다. 범하가 이끄는 산악회 ‘거시기’와 합동으로 계방산을 등반한 적도 있는데, 그때 변형윤(서울대 상대학장 역임, 해직교수), 박현채(조선대 교수 역임, 작고), 백낙청·김정남이 같이 갔다. 81년 11월 해직기자 산행그룹(이름은 ‘머사니’)은 야심적인 목표를 세워 강원도 오대산 정상을 타되 내륙의 서편 능선에서 올라 동쪽으로 내려가는 코스를 택했다가 큰 변을 당할 뻔했다. 백기범·신홍범·정태기·성한표·이경일·표완수·박우정, 그리고 나 여덟 사람은 동편 능선 길이 초설로 덮인 것을 모르고 긴 소금강 계곡으로 하산을 시도했던 것. 예상 밖으로 시간이 지체됨으로써 눈 덮인 산속을 헤매다가 결국 비박을 하게 되었는데, 기온은 영하고 캄캄한 야심이라 잠들면 조난당할 위험이 있다고 했다. 이글거리는 모닥불 앞에 둘러앉아 각기의 첫 이성 접촉 경험담을 토로하며 밤을 꼬박 샜다. 잠을 쫓으려는 일념으로 재주껏 이야기 솜씨를 발휘했겠으나 오대산 비박의 ‘데카메론’ 금상은 표완수에게 가야 한다는 것이 중론.
|
» 해직당한 뒤 ‘낭인’으로 살아야 했던 기자들과 민주인사들은 어쩔 수 없이 ‘주유천하’를 하며 시대를 견뎌야 했다. 1986년 4월 어느 날 ‘조선투위’ 사람들과 북한산에 올랐다. 왼쪽부터 신홍범, 조건영, 문창석, 김유원(작고), 필자, 박세원(작고), 최병선씨. |
|
|
|
|
실업자에다 경찰의 감시 대상이었던 터라 도리 없이 천하를 주유했다고 하면 낯뜨거운 소리고, 나는 천성으로 글쓰기 같은 일보다 놀러 다니기를 즐기는 쪽. 이럴 때 써먹기 좋은 말이 있지 않은가, ‘호모 루덴스!’ 등산만 한 것이 아니라 바다와 섬으로도 갔다. 82년 여름 대구의 해직교수 ‘두목’으로 자처했던 이수인(영남대 교수, 국회의원 역임, 작고)이 놀러 오라는 연락을 해 왔다. 대구에는 김윤수·염무웅·박현수(민속학자, 영남대 교수), 정지창(영남대 교수), 김종철(영남대 교수 역임, 녹색평론 발행인), 최원식(문학평론가, 인하대 교수, 창비 주간 역임) 등 일당의 ‘몰지각 지식인’이 진을 치고 있었는데, 울릉도에 간다는 거였다. 2박3일의 울릉도 주유는 전두환의 철권 지배와 지식인 대량 추방이 아니었더라면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을 추억이다. 해발 제로인 백사장에서 새우튀김을 해 먹고 그날로 해발 1천미터 성인봉에 올랐으니 하는 말이다.
그즈음 조그마한 탄광회사를 경영하던 ‘호협’ 박윤배는 강원도 소재 채탄 현장에 갈 때마다 나한테 같이 가자고 했다. 군소 탄광업자들과 어울리는 술자리는 물론이고 그 다음의 노름판에도 나를 끼워줬다. 도박은 ‘고스톱’이었는데 이 게임의 간단한 규칙과는 달리 돈을 따는 것은 전혀 달랐다. 그가 준 밑천을 서너 판만 지나면 홀라당 잃었고, 그러면 박윤배는 “넌 지금부터 자릿돈을 떼는 거다. 사장님들 이의 없지요?” 하며 판마다 일정한 비율의 자릿돈을 떼어 내 앞에 놓는 거였다. 강원도 일판에서 ‘호협’의 우악스러움이 통하던 시절의 이야긴데, 한번 박윤배를 따라 강원도에 갔다 오면 서울에서 보름 동안 용처를 해결할 만한 돈이 생겼다. 세도가들의 등쌀에 밀려 노름판의 자릿돈을 뜯어 살았다는 조선조 말 흥선 이하응의 처지가 떠올랐던 것도 무리가 아니다.
미국의 큰아들(내 형) 집에서 살던 어머니는 둘째인 내 처지가 궁금하였던지 그해 겨울 셋째인 아우를 서울에 보냈다. 친구들과 자주 만나는 데를 보고 싶다고 하여 종로 관철동의 ‘한국기원’으로 아우를 안내했더니 “담배 연기 자욱한 곳에서 노인들하고 바둑을 두면 폐인 돼요!” 하는 거였다. 이듬해 여름 미국을 가게 된 배경이다.
임재경/언론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