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박퇴진] 어제 부산은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95]

  • 봉두난발봉두난발님프로필이미지



    • 번호 1904430 | 2008.08.29 IP 125.14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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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년전이면 어땠을까요.


    철도에 다닌다하면 그냥 다 철도청 직원인 줄 알았던 그 시절에


    누군가들이 한꺼번에 400명쯤 짤렸다면 그랬다면 우린 어땠을까요.


    그때도 KTX가 저렇게 하루도 멈추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달릴 수 있었을까요.




    10년전이면 어땠을까요.


    정규직이라는 사람들마저 언제 짤릴지 모른다는 불안에 하루하루 가슴 졸이는


    상황이 아니라면 누군가 911일을 저러고 있도록 내버려 두었을까요.


    한번 입사하면 사직서를 쓰기 전까진 그냥 그 직장에서 정년퇴직하는 게


    누가 봐도 자연스러운 10년전쯤이었다면 우린 내 밥그릇보다는 정의를 먼저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어용노조 수십년의 굴레를 마침내 벗어던지고 민주노조의 깃발을 꽂고


    감격에 겨웠던 10년전쯤이었다면 우린 당연히 억울한 자들과 함께 목이 쉬고


    그들과 함께 거리에 서지 않았을까요.




    정규직 비정규직이 따로 없이 같은 공간에서 일하면 같은 직원이고 같은 일을 하면


    같은 대우를 받는 게 상식이었던 그때였다면 차별에 함께 저항하는 것도


    상식이지 않았을까요.




    굳이 정의를 소리높여 외치지 않더라도 손짓만으로도 기차가 멈추고


    눈빛만으로도 한곳에 모일 수 있었던 그때였다면


    우린 지금보단 마음이 좀 더 편하지 않았을까요.




    같은 일터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수백명이 짤리는 걸 막아낼 수 있었다면


    우리가 일하는 이 삶의 터전은 지금보단 인간적이지 않았을까요.


    노동자는 하나다 굳이 목청 높이지 않더라도 10년전이었다면


    그들만 짤리고 그들만 싸우고 그들끼리 끌려가고 그들끼리만 울어야 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요.








    비정규직은 생존을 유린당하고 정규직은 용기를 유린당한 10년.


    비정규직은 목숨이 흔들리고 정규직은 양심이 흔들리던 10년.


    비정규직은 일자리를 잃어버리고 정규직은 영혼을 잃어버린 10년.


    비정규직은 악만 남고 정규직은 눈치만 남은 10년.




    정규직은 철로에서 죽어가고 비정규직은 천막에서 시들어 가야 했던


    그 세월은 우리 모두에게 상처였습니다.


    철비철비 철철비는 없어졌다는데도 우린 왜 행복하질 않은걸까요.


    신이 내린 직장 철밥통들의 가슴을 짓누르는 이 불안감은 도대체 뭘까요.


    넘어진 비정규직을 우리가 일으켜 세워 줬다면 우리가 넘어질 일은 없을 겁니다.


    울고 있는 비정규직의 눈물을 우리가 닦아줬다면 우리가 울게 될 일은 없을 겁니다.







    올림픽 성화가 피워오르던 날 이땅 공영방송엔 공권력이 투입됐습니다.


    누군가 금메달을 따서 시상대에 올라간 날 기륭전자 옥상엔 관이 올라갔습니다.


    4년을 피눈물 나게 연습하면 금메달도 따는데 4년째 피눈물을 흘리는


    기륭전자 노동자는 왜 시시각각 임종을 맞아야 하는 겁니까.


    금메달 13개를 딴 조국은 이제 자랑스런 선진국이 됐다는데 비정규직임이


    부끄러운 860만 의 노동자는 어느 조국의 백성입니까.




    연대가 아닌 펀드가 우릴 지켜줄 거라는 믿음과 집에서 살고 싶은 게 아니라


    부동산에서 살고 싶은 욕망이 이명박이라는 괴물을 만들어냈습니다.


    지난 밤 다다를 수 없는 욕망의 빈자리를 과음으로 채워넣고 그 욕망의


    정직한 토사물이 이명박입니다.


    밤의 욕망은 유혹적이나 그 욕망이 토해놓은 토사물을 아침에 확인하는 일은


    이렇게 곤혼스럽습니다.


    촛불들이 지켰던 광장을 올림픽의 환호성이 뒤덮으면서 올림픽의 진정한 승자는


    박태환도 아니고 장미란도 아니고 이승엽도 아닌 이명박입니다.







    잔칫집에 든 도둑처럼 올림픽을 틈타 공영방송을 훔쳐 간 이명박은 이제


    공기업 민영화를 밀어부칠 겁니다.


    만사는 형님으로 통한다는 만사형통의 형님께서 고문으로 있는 코오롱 그룹은


    이미 코오롱워터라는 회사까지 차려놓고 수돗물 민영화를 진행하고 있고


    매출 1조원에 영업이익만 4606억원의 알짜배기 인천공항은 그 아들을 위한


    민영화랍니다.


    그 거대한 인천공항에 정규직은 869명에 불과하고 38개 업체에


    6천명이 아웃소싱이라는 이름으로 하청화됐습니다.


    민영화라는 이름은 그 869명마저 비정규직이 된다는 말입니다.


    1인 승무를 막아내지 못했던 지하철은 공사로 넘어가는 걸 막아내지 못했고


    매표소가 용역이 되는 걸 막아내지 못했고 그렇게 용역으로 넘어간 매표소는


    결국 폐쇄됐습니다.


    이제는 정말 더 이상 자를 사람이 없다고 믿었던 정규직들을 향해


    지금은 서비스지원단이란 이름의 퇴출절차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퇴출후보들로 구성된 서울시 현장시정추진단에 배치받은 공무원은


    또 한사람이 죽었습니다. KTX,새마을여승무원 동지들의 투쟁이 패배하면


    철도공사의 머잖은 장래가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들 대학보내서 내처럼 안살게 하겠다는 걸 삶의 목표로 삼고


    인생에 유일한 낙이 잔업이었던 한진중공업 아저씨가 있었습니다.


    몇 년전 이 아저씨 명퇴로 짤리고 결국 아들이랑 같은 하청공장에 다니게 되면서


    이제 인생에 유일한 낙이 술 마시는 게 되어버렸답니다.




    2003년. 수십미터 크레인 위를 혼자 올라갔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비가 내리는 날은 비처럼, 바람이 부는 날은 바람처럼, 미치도록 하늘이


    푸르른 날은 한점 구름처럼 129일을 그 자리에 찍혀 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밑에서 올려다 보기만 했던 사람들은 그 까마득한 높이를 잘 몰랐습니다.


    땅에 발 딛고 선 사람들은 바람이 그렇게 무섭다는 것도 잘 몰랐습니다.


    비를 피할 곳이 있었던 사람들은 비가 사람의 영혼까지 적실 수 있다는 것도


    그땐 잘 몰랐습니다.




    그 꼭대기까지 올라간 건 투쟁전술 중에 하나가 아니라 계단 하나를 오를 때마다


    목숨 한줌씩 내려놓는 일이라는 걸 그가 밟아 올라간 계단을 뒤늦게 밟아보고야


    알았습니다.


    그 까마득한 꼭대기는 땅보다는 천국이 훨씬 가까운 거리라는 것도 뒤늦게야 알았습니다.


    그가 섰던 자리에 서 보고야 거기가 얼마나 아득한 높이였는지


    129일을 거기 그렇게 매달려 있었다는 게 어떤 의미였는지


    그가 지고 간 절망의 부피가 얼마만한 것이었는지를 그가 떠나고야 비로소


    알았습니다.




    그때는 그 엄청난 절망의 무게를 그가 다 짊어지고 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짊어지고 갔다고 생각한 절망이 산자의 몫으로 남는 다는 걸


    깨닫게 해준 건 세월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잊혀지는 게 아니라 선명해지는 것도 있다는 걸 시시각각


    일러주는 것도 세월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가벼워지는 게 아니라 무거워지는 짐도 있다는 걸


    영악스럽게 깨우쳐주는 것도 세월이었습니다.







    지회장의 부음을 듣고 달려 온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었어도


    크레인에서 끄집어 내렸어야 했다고 엉엉 울었습니다.


    잠긴 크레인의 문을 부수고라도 끌어내렸어야 했다고 자기의 멱살을 부여잡고


    통곡을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을 되돌려 그런 상황이 다시 온다하더라도 그럴 수 없다는 걸


    우린 압니다.


    그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크레인에 올라간 사람을 끄집어 내리는 일이 아니라


    조합원들을 만나고 설득해서 크레인 밑에 다시 모이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김주익.그의 목숨이 회장님의 손안이 아니라


    우리의 손안에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건 재규형마저 보내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되돌릴 수 없을 땐 후회마저 사치가 된다는 걸 알려준 것도


    세월이었습니다.







    이제 김소연은 김주익이 되어가고 오미선은 김소연이 되어갑니다.


    정규직이 되고 싶다는 말은 정규직의 것을 나누자는 말이 아니라


    자본의 것을 나누자는 말이었습니다.


    정규직이 되고 싶다는 말은 그래야만 우리가 강해진다는 말이었습니다.


    정규직이 되고 싶다는 말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이었습니다.


    천막농성을 하고 노숙농성을 하고 끌려가고 짓밟히고 단식을 하고


    어딘가 꼭대기로 기어오르는 일이 아니라 저들도 사람처럼 살고 싶다는 말입니다.


    10년전에 우리가 내밀었던 손을 저들이 간절히 내밀고 있는데 우리가


    그 손을 잡아줘야 되지 않겠습니까.


    10년전에 우리가 외쳤던 절규를 저들이 저토록 목놓아 외치는데 그 외침을


    우리가 들어줘야 되지 않겠습니까.





    추석명절에 고향에도 못가시는 철도동지 여러분.


    나날이 허물어져 가는 부모님을 명절 때도 찾아뵙지 못하는 철밥통 여러분.


    오미선,정미정,장희천,하현아,황상길 저들을 부디 잘 지켜주십시오.






     
     
     
     
    출처 :전국철도 비정규직노동자 권리찾기 원문보기 글쓴이 : 물병자리
     
     
     


    지지방문을 부탁드립니다.



    철탑농성장소, 여기가 대충 맞을 겁니다.

     

    서울역 서부역으로 나오시면 맞은편에 소화병원이 보입니다. 계단을 내려오자마자 왼쪽으로 돌아서서 30미터만 오시면 하얀색 건물이 있습니다. 서울고속철도 열차승무사업소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오시는 길에 공사팬스가 쳐져있는데 쭉 따라 들어오시면 됩니다. 끝까지 들어오시면  철탑과 그 아래 천막이 보입니다.

     

     

     

    ktx 승무원 블로그입니다. 지지하는 댓글을 달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http://blog.daum.net/ktxcrew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30일 오전 11시 철탑아래에서 집중집회가 있습니다.

     

     

    기륭, KTX여승무원, 코스콤! 비정규직 싸움의 마직막 보루입니다. 참고로 철탑위에는 철도의 정규직 조합원 2명도 함께 올라가 있습니다. 해고를 각오하고 올라갔습니다. 더 많은 정규직 노동자들의 관심과 연대를 바라는 마음에서겠죠.

     

    아무튼 지속적인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KTX, 새마을 승무원 철탑 고공농성 2일차 방문후기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003&articleId=1904273

     

    KTX, 새마을 승무원 철탑 고공농성 1일차 방문후기(동영상포함)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003&articleId=1899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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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을 변화시키는 책읽기, 타인과 소통하는 책읽기!
    -도서평론가 이권우가 제안하는 책읽기 인생역전 프로젝트!!


    사용자 삽입 이미지
    『책읽기의 달인, 호모 부커스』

    이권우  지음 | 도서출판 그린비 | 갈래 : 청소년, 인문
    발행일 : 2008년 8월 25일 | ISBN : 9788976828002
    신국판 변형 (220×150)|224페이지

    지식 습득을 위한 책읽기를 넘어, 자신의 인생을 변화시키고 사회적 소통을 위한 책읽기를 새롭게 제안하는 책. 도서평론가 이권우는 이 책에서 책읽기에는 우리의 내면을 성장시킴과 동시에 통용되는 기성가치에 의문을 불러일으켜 더 나은 세계를 상상하게 하는 힘이 있고,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타인의 아픔과 고통, 기쁨에 대해 공감하게 하는 힘이 있다고 말한다. 책읽기의 달인이 되기 위해 저자는 느리게 읽고, 깊이 읽고, 겹쳐 읽고, 토론하고, 글을 쓰라고 말한다.


    ∎ 지은이
    이권우
    | 책에 눈멀어 책만 읽으며 살아가려는 한심한 영혼. 책만 읽으면 입 안에 가시 돋친다는 시대에 여전히 책의 가치를 옹호하는 바보 같은 사람. 잘나고 뽐낼 것 많았으면 책을 읽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부족하고 모르는 것투성인 데다 외롭고 고통스러워 책만 읽었을 것이다. 그래도 가슴 뿌듯하다. 휘어져서 그러했겠지만 선산을 지키는 나무 되었고, 어리석어 그러했겠지만 산을 옮길 수 있는 사람 되었다 자부하니까.

    1963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나 자라다 초등학교 들어가면서 고향을 떠났다. 책만 죽어라 읽어 보려고 경희대 국문과에 들어갔다. 4학년 때도 대학도서관에서 책만 읽다 졸업하고 갈 데 없어 잠시 실업자 생활을 했다. 주로 책과 관련한 일을 하며 입에 풀칠하다 서평전문잡지 『출판저널』 편집장을 끝으로 직장생활을 정리했다. 본디 직함은 남이 붙여 주어야 하거늘, 스스로 도서평론가라 칭하며 글 쓰고 방송하는 재미로 살고 있다.

    단 한 번도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하지만, 희망을 열어 가는 대열에는 늘 끼어 있고 싶었다. 책 읽어 홀로 우주와 삶의 비의를 알아챈 사람으로 남기보다는, 그 앎을 이웃과 함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기에 책벌레라면 누구나 도서평론가 될 수 있고, 그 자리에 있으면 문화운동가가 될 수밖에 없다 확신하며 살아간다.

    그동안 『어느 게으름뱅이의 책읽기』(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2001), 『각주와 이크의 책읽기』(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2003), 『책과 더불어 배우며 살아가다』(해토, 2005)를 펴냈다. 흰 피를 내뿜으며 쓰러져 갔을 나무의 정령들에 미안할 따름이다.



    ∎ 목 차
    책머리에

    1부 왜 읽어야 하는가?
    1. 책읽기와 ‘공자되기’ 
    2. 조선시대의 책벌레, 이덕무
    3. 마치 칼이 등 뒤에 있는 것 같은 자세로 읽어라!
    4. ‘우격다짐’ 독서론 
    5. 책읽기와 저축하기 
    6. 책은 미래다 
    7.  이제, 거인의 무동을 타자 
    8. 정서적 안정과 치유로서의 책읽기 
    9. 책읽기, 우리 시대의 또 다른 가치 
    10. 잘 쓰려면 잘 읽어야 한다 
    11. 제도로서의 책읽기 고민해야

    2부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1. 『삼국지』 읽지 마라? 
    2. 책읽기와 고향 가는 마음 
    3. 천천히 읽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4. 첨삭으로 알아보는 다치바나식 독서법 
    5. 읽고 토론하기의 힘 
    6. 왕도는 없으나 방법은 있다! 
    7. 깊이 읽으면 길이 보인다 
    8. 책들이 벌이는 전쟁, 겹쳐 읽기 
    9. 눈높이에 맞게, 그러나 눈높이를 넘어 
    10. 각주와 이크의 책읽기
    11. 독후감, 책의 주인이 되는 첫걸음
    12. 책 읽는 학교가 되어야 한다 
    13. 책읽기, 다음 세대에 물려줄 가장 가치 있는 유산

    에필로그  쓰기 위한 읽기 교육을 향해 
    감사의 글





    ∎ 책 속에서

    - '깊고 느리게 읽기'

    "요즘에는 책 읽는 방법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필요한 정보만을 가려내 읽는 독서법도 널리 이야기되고 있다. 이런 것을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예전에 비해 쏟아져 나오는 책의 양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마당에 그에 걸맞는 읽기 방법이 나와야 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기본을 잊어서는 안 되는 법이다. 어떤 독서법이 인기를 끌더라도 결코 훼손되어서는 안 되는, 근본적인 게 있다는 뜻이다. 주자는 그것을, 요샛말로 표현하면, '깊고 느리게 읽기'로 정의했다.  (본문 36~37쪽)
    - '책읽기'의 가치
    책이라는 것은 신성한 그 무엇이 아니다. 그러니까 오락거리 책도 가치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책을 누가 쓰고 무엇을 주제로 삼았건, 그것은 탐식가인 읽는 이에 의해 그 내용과 형식이라는 살과 뼈가 샅샅이 발려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읽는 이에 의해 재구성되어 또다른 무엇인가를 낳는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 나는 책을 단 한 번도 경제적 가치로 재단한 적은 없다. 그러나 나는 늘 책을 통해 무엇인가 얻기를 갈구한다.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싶어 하는 것이며, 하드웨어를 소프트웨어로 바꾸고 싶어 하는 것이다. 책이 이윤을 낳는 것은 내 것으로 만들었을 때다. (본문 190~191쪽)
    - 창조적 독자 되기!!

    독서토론 자체만 해도 생산적이고 창의적인 행동이 된다. 주체적으로 책을 읽어 오고 자신과는 다른 해석과 주장을 경청하고, 이에 논리적으로 맞서고, 서로 논쟁을 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나와 다른 것의 가치를 깨닫게 되고, 서로 도와 새로운 해석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나가기도 한다. 그런데 나는 이것으로 성이 차지 않는다. 그것만으로는 적극적인 차원에서 창조적 읽기라 하기에는 어렵다고 보는 것이다. 책을 읽어 얻은 교양과 지식을 바탕으로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창의적 사고력을 표현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본다. 글을 읽는 사람에서 이제 글을 쓰는 사람으로! (본문 217~218쪽)



    ∎ 책 소개

    삶을 변화시키는 책읽기, 타인과 소통하는 책읽기!
    -도서평론가 이권우가 제안하는 책읽기 인생역전 프로젝트!!


    우리나라에도 소개되어 베스트셀러가 된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의 저자 다치바나 다카시는 자신의 책 읽는 방법을 소개하며 ‘속독’과 ‘다독’을 강조한다. 다양하고 많은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다독을 해야 하고, 다독을 하기 위해서는 빨리 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다치바나 독서법의 요지이다. 이런 그의 속독과 다독은 많은 정보를 빨리 얻으려 하는 현대인의 독서 양상과 통하는 측면이 있다. 직장인들은 사회 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 책을 읽고, 학생들은 시험을 위해 책을 읽는다. 그러나 책읽기의 의미가 단순히 이렇게 실용적인 목적에만 있는 것일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책읽기에 몰두하는 동안 우리는 책과 더불어 만나는 '친구들'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그 친구들이 나와 내 삶을 변화 시키죠. '소통의 책읽기'란 이런 것이 아닐까요?

    『책읽기의 달인, 호모 부커스』는 지식 습득을 위한 책읽기를 넘어, 자신의 인생을 변화시키고 사회적 소통을 위한 책읽기를 새롭게 제안한다. 책은 우리의 내면을 성장시킴과 동시에 통용되는 기성가치에 의문을 불러일으켜 더 나은 세계를 상상하게 하는 힘이 있고,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타인의 아픔과 고통, 기쁨에 대해 공감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이 있다. 한마디로 책읽기는 우리의 삶, 우리의 세계를 변화시킨다. 책읽기가 가진 이런 힘을 역설하고 있는 이 책은 부모와 자녀 간에 소통이 잘 되지 않는 현실에서 세대 간 소통을 유도할 수 있고, 입시 너머의 진정한 공부를 추구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어 줄 것이다.

    지은이 이권우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다독가이자 서평과 강연을 하며 현장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도서평론가이다. 단순히 좋은 책을 소개하는 것을 넘어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를 소개해 왔다. 이 책이 말하는 것 역시 크게 보면 이 두 가지 독서론으로 요약될 수 있다.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하고 활동하며 내놓은 그의 산 독서론이 이 책에 집약된 것이다. 그는 속독과 다독이 판치는 책읽기 풍토에 반해, 느리게 읽기, 깊이 읽기, 겹쳐 읽기, 그리고 토론과 쓰기가 어우러진 책읽기를 강조하여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책읽기 방법을 새롭게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삶과 만나는 ‘호모 부커스’의 독서법이다.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세상의 변화를 위한 독서론

    이 책은 책읽기가 자기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한 기초 체력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돌아보고, 내면을 점검하고, 자신과 맺고 있는 다른 모든 것과의 관계를 고민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일상에 파묻혀 있는 우리에게 책읽기는 습관적으로 보내는 일상을 낯설게 보도록 해주며, 삶의 조건들에 대해 거리를 두고 다시 살펴볼 수 있는 깊이를 더해 준다. 이를 밑바탕으로 우리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의 나를 창조할 수 있고, 삶의 조건을 변화시킬 수 있으며, 다른 세계를 만들 수 있는 상상력의 힘을 얻을 수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공자가 살던 당시의 '책'. 공자는 저 죽간의 끈이 떨어질 때까지 책을 읽곤 했다고 합니다.
    공자-되기란 결국 쉬지않고 책을 읽는 것입니다. 책 속에 도道가 있다는 말은 전혀 오버가 아닙니다.
    먼저 이 책은 책읽기는 ‘공자되기’라고 이야기한다. 동양의 대학자 공자가 어떻게 성인의 반열에 올랐을까? 천재이기 때문에? 아니다. 바로 책읽기를 통해서다.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란 공자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성인이 된 것은 열심히 책을 읽고 공부했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책을 열심히 읽으면 공자가 될 수 있다. 책을 읽음으로써 공자처럼 높은 인격과 약자를 위하는 삶의 태도, 타인과 소통하는 능력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책읽기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새롭게 바꾼 많은 사상가들과 성인들처럼, 우리도 책읽기를 통해 그들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왼쪽, 영화 「지옥의 묵시록」포스터, 오른쪽, 조지프 콘레드의 소설 「암흑의 핵심」표지.

    소설의 재해석을 통해 고전의 반열에 오른 영화를 만드 예입니다.  컨텐츠를 만드는 힘은 역시
    책읽기에 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책읽기를 통해 훌륭한 블로그 컨텐츠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이 책은 책읽기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한다고 말한다. 이 책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과 영화의 원작인 조지프 콘래드의 소설 『암흑의 핵심』을 예로 들어 책읽기가 창조하는 가치에 대해 말한다. 현대 영화사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지옥의 묵시록」은 20세기 초반 출간된 『암흑의 핵심』을 새롭게 해석한 것이다. 코폴라 감독은 단순히 책을 영화로 옮긴 것이 아니라, 시대 배경을 베트남 전쟁으로 바꾸고, 미국의 대외 정책을 반대하는 영화로 새롭게 업그레이드했다. 만약 코폴라 감독이 『암흑의 핵심』이라는 책을 읽지 않았다면 「지옥의 묵시록」 같은 걸작은 결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책읽기가 여전히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처럼 새로운 아이디어와 가치를 창조할 수 있게 도와주기 때문이며 이를 통해 현실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안목을 길러 주기 때문이다.

    또한 이 책은 책읽기의 또 다른 의미로 ‘타인의 슬픔과 고통을 상상하는 힘’을 제시한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지만 자신의 바쁜 일상에 매여 타인의 입장을 고려하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책읽기는 이런 우리에게 다양한 경험의 세계를 체험하게 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겪는 어려움을 상상하게 한다. 여행가 한비야의 책을 읽고 국제 봉사활동에 관심을 가졌으며, 결국 봉사단체에서 일하게 되었다는 사람들을 보면 이 책이 말하는 ‘상상력’의 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책을 통해 이 세상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 바로 이것이 책읽기가 가지는 가장 큰 의미라 할 수 있다.


    느리게 읽기, 깊이 읽기, 겹쳐 읽기!―호모 부커스의 독서법 1

    이 책에서 말하는 책읽기의 의미를 제대로 실현하기 위해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책을 읽어야 한다. 지금까지 현대인들에게 요구되는 책읽기는 ‘속독’과 ‘다독’이었다. 많은 정보를 빠른 시간에 습득해야 한다는 강박증에 사로잡힌 현대인들에게 이 두 가지 방식은 필수 불가결했을 것이다. 다치바나 다카시와 같은 일본의 대표적인 다독가들의 책이 우리나라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것도 이런 현대인의 요구에 잘 맞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은 도리어 느리게 읽으라고 주장한다. 사실 빨리 읽으려는 강박관념 때문에 놓치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인상 깊은 구절도 빨리 읽을 때에는 발견 못 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빨리 읽으면 저자의 생각을 비판하면서 읽을 수 없다. 천천히 읽으며 꼼꼼하게 읽어야 저자의 생각이 갖는 타당성을 독자 나름의 기준으로 판단하게 되고, 비판할 수 있다. 느리게 읽기는 실용적인 책읽기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첫 걸음이다.

    한 권의 책을 느리게 읽는 것만큼 깊이 읽는 것이 중요하다. 깊이 읽기란 한 작가의 책을 모두 찾아 읽는 ‘전작주의 독서법’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깊이 읽기는 이런 전작주의 독서법을 발전시켜, 관련 주제의 책들까지 찾아 읽는 것을 말한다. 한 권의 책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내용도 깊이 읽기를 통하면 한 작가의 세계관이나 한 주제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가 가능해 진다. 가령 최근 한국 경제 상황에 대해 관심이 생겼다고 가정해 보자. 처음에는 간단한 입문서를 찾아 읽게 되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국 경제를 지금 왜 위기라고 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깊이 읽기를 한다면, 좀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경제원리를 다루는 책을 찾아 읽게 된다. 경제학 관련 책을 여러 권 찾아 연속선상에서 읽게 되면, 각각의 책을 따로 읽을 때보다, 또는 한 권의 책만 읽을 때보다 지식의 총량은 수십 배가 된다. 깊이 읽는 독서법은 우리의 지식을 넓히기 위해 꼭 필요하다.

    깊이 읽기가 한 주제에 대해 깊이 있는 지식을 얻을 수 있다면, 겹쳐 읽기는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깨닫게 되는 효과가 있다. 이 책은 겹쳐 읽기의 예로 『로빈슨 크루소』와  『로빈슨 크루소의 사랑』,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을 들고 있다. 험프리 리처드슨의 『로빈슨 크루소의 사랑』은 혈기왕성한 남자였던 로빈슨 크루소가 자기의 성적 욕망을 어떻게 충족시켰을까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한 책이고,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로빈슨 크루소에 내재되어 있는 서구중심적인 사유를 비판하며 새롭게 써 내려간 『로빈슨 크루소』다. 이렇게 겹쳐 읽기를 통해 우리는 자칫 재미있는 소설에 그쳤을 『로빈슨 크루소』의 한계에 대해 고민하게 되고, 새로운 가능성을 알게 된다. 이 책은 겹쳐 읽기를 통해 책읽기를 다양한 사유들이 서로 경쟁하는 전쟁터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읽고, 토론하고, 써라!―호모 부커스의 독서법 2



    사용자 삽입 이미지역사 속의 유명한 책벌레 에라스무스.

    『우신예찬』이라는 불멸의 고전을 남긴 그는 자신이 '쓴' 책을 통해 역사에 이름을 남겼습니다.
    느리게 읽고, 깊이 읽고, 겹쳐 읽는 독서법을 완성하기 위해 이 책은 친구들과 함께 읽고 토론해 보라고 권한다. 책은 읽기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단순히 많은 양의 책을 읽는 것보다는 한 권의 책을 읽더라도 함께 읽고 토론할 때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 함께 읽고 토론하는 과정을 거칠 때 비로소 그 책에 담긴 내용을 비판적이고 창조적으로 수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의 아내이자 2008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섰던 힐러리는 책을 통해 자신을 변화시킨 대표적인 인물이다. 원래 공화당의 열혈 지지자였던 힐러리는 고등학교 시절 열린 모의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 민주당 후보 역할을 맡게 된다. 어쩔 수 없이 민주당의 정책을 다룬 책을 읽던 힐러리는 어느 순간 민주당 지지자로 바뀐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토론을 준비하는 과정은 이처럼 자기 자신의 생각을 다시 정립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 책은 힐러리의 예를 통해 다른 사람과 토론하기 위한 책읽기가 얼마나 많은 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 보여 준다.

    이 책은 책읽기의 완성은 ‘쓰기’에 있다고 말한다. 다양한 사유를 담은 책을 읽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읽은 책의 내용을 자신만의 언어로 쓰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글을 쓰면서 차분히 책의 내용을 정리하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글로 쓸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이 책 내용 중 어떤 부분을 이해 못하고 있는지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책을 읽고 꼭 ‘독후감’을 쓰라고 말한다. 우리는 독후감을 통해 저자의 내면과 만날 수 있고, 책의 내용을 자신의 삶과 연결시켜 더 큰 감명을 받을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학교에서 배워 왔던 딱딱한 ‘독후감’ 형식은 모두 버리라고 이 책이 말한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책을 통해 자신이 느낀 점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 쓰기 편한 방식을 만들면 된다. 만약 저자와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었다면 가상대담의 형식으로 독후감을 써도 좋고, 편지 형식으로 써도 좋다. 딱딱한 형식을 벗어나면 자신의 삶에 진솔한 글쓰기가 가능해지고 이렇게 글을 씀으로써 비로소 책읽기가 완성된다. 


    누구나 책읽기의 달인이 될 수 있다!―제도로서의 책읽기

    이 책은 개인적인 책읽기를 넘어 제도로서의 책읽기도 고민해야 한다고 말한다. 제도로서의 책읽기가 왜 중요한지를 보여 주는 사례가 있다. IMF 이후 늘어나기 시작한 노숙자들은 최근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정부에서는 재활센터를 운영하며 노숙자들이 사회로 복귀할 수 있도록 돕고 있지만 결과가 신통치 않다. 그런데 최근 한국에서 노숙자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치는 클레멘트 코스(Clemente Course)가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클레멘트 코스는 노숙자들을 대상으로 인문학 책을 읽고 강의하는 과정을 말하는 데, 일반 재활 교육을 받는 노숙자들 태반이 다시 길거리로 돌아가는 반면 이 과정을 거친 노숙자들은 대부분 자활을 위한 힘찬 걸음을 내딛는다. 클레멘트 코스에 참가한 노숙자들은 책읽기가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우리 삶에 얼마나 유용한지를 가장 잘 보여 준다. 책읽기를 통해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것. 바로 『책읽기의 달인, 호모 부커스』가 추구하는 책읽기이다.

    제도로서 책읽기를 정착하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중고등학교 때부터 책읽기 습관을 길러 주는 것이다. 이 책은 이를 위해 학교에서 책읽기 교육을 제도화해 실행해야 하며, 학교 도서관 역시 예산을 늘려 사서 교사를 통한 체계적인 운영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개인의 자발적인 노력을 도와줄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완성될 때 누구나 쉽게 책읽기의 달인에 등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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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을찾아서] 80년전 캐나다로 유학간 아버지
    문동환-떠돌이 목자의 노래1-3
     
     
    한겨레  
     








     

    » 캐나다 토론토 임마누엘 신학교를 졸업한 뒤 1931년 11월부터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뉴칼리지에서 6개월간 연구하던 시절 아버지 문재린이 그 지역 전통의상인 킬트에 백파이프를 들고 찍은 기념사진. 36살 때 모습이다.
     
    1919년 3월13일 북간도 용정에서도 독립만세 운동을 벌였다. 그날 어머니 김신묵은 30리나 되는 용정까지 걸어가서 만세를 불렀다. 새벽밥을 해 먹고 길을 나서 종일 굶었는데도 배고픈 줄도 모르셨다고 했다. 아버지 문재린도 북간도에서 제일 큰 독립운동 단체인 국민회의 지회 서기직을 맡았고, <독립신문> 기자 일을 하느라 분주히 돌아다녔다. 이때부터 독립운동의 열기는 높아갔지만 일제의 탄압도 더욱 거세어졌다. 이듬해(경신년) 토벌에는 일제가 노루바위라는 곳의 교회당에 교인들을 집어넣고 통째로 불을 지른 뒤 뛰어나오는 사람은 총으로 쏴서 죽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명동교회도 가만히 있다가는 크게 화를 당할 것 같아 문재린을 포함한 대표자 5명을 일본 경찰에 자수시키기로 했다. 아버지는 20년 겨울 일본 영사관에 갇혀 두 달 동안 옥살이를 하고 나왔다. (이것이 아버지의 첫번째 옥고였다. 해방 이후 남쪽으로 나올 때까지 아버지는 세차례나 더 옥살이를 한다) 그때 나를 뱃속에 갖고 있었던 어머니는 과부가 되는 줄 알고 무척 놀랐고, 내가 심하게 태동을 해서 걱정을 하셨단다. 그래서인지 나는 태어나서도 약하고 병치레가 잦았다.

    <독립신문>은 용정민회의 기관보인 <간도일보>의 주필이었던 유하천이 만들었다. 아버지는 기자로 일하면서 신문을 등사판으로 수백 장씩 찍어냈고 학생이나 부녀자들을 시켜서 곳곳에 퍼뜨렸다. 그렇게 뜻있는 청년들이 모두 독립운동을 하느라 빠져나가 교회가 텅 비고 학교에도 선생이 없게 되자 아버지는 스스로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22년 3월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아버지는 졸업한 이듬해 27년부터 모교회인 명동교회와 용정 토성포교회에서 시무했다.

    28년 아버지는 캐나다 선교부의 후원을 받아 토론토의 임마누엘신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1898년 처음으로 한국에 선교사를 보낸 캐나다 선교부는 다른 완고한 선교부들에 비해 재정은 취약했지만 신앙이 새롭고 관대하였다. 예를 들어 한국 선교산업을 선교사들이 독단적으로 집행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27년부터 이사회를 신설하고 선교부 대표와 한국인 대표가 동수로 참석하도록 했다. 또 앞으로 한국 교회는 한국인들이 꾸려나가야 할 것이므로 젊은 학생들을 유학 보내서 세계 교회와 어깨를 나란히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믿었다. 그 첫 유학생이 바로 내 아버지였다. 교회가 정치에 관여하지 말 것을 주문한 다른 선교부와 달리 캐나다 선교부는 항일 독립운동을 후원해 주기까지 했다.



     

    » 문동환 목사
     
    아버지는 내가 11살 되던 32년에 귀국해 용정 중앙교회에서 시무를 하면서 은진중학교, 명신여자중학교, 그리고 제창병원의 이사로 활동하느라 굉장히 분주하였다. 그 덕분에 내 어린 시절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그리 많지 않다. 귀국 이후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밥을 입에 넣은 채로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법’을 정했다. 밥을 입에 넣고 말을 하면 그대로 굶어야 한다는 다소 극단적인(?) 처방까지 내놓으셨다. 하루는 내가 대문을 열고 “학교 다녀왔습니다!” 소리를 질렀더니 아버지가 밥을 입에 문 채로 “무어라고 했어?” 그러는 거다. 그 바람에 입에서 밥알이 튀어나왔다. 나는 “아버지가 밥을 입에 넣고 말씀하셨다!”고 신나게 소리를 쳤다. 그러자 아버지는 “그럼 할 수 없지. 밥을 굶어야지.” 그러시면서 윗방으로 올라가셨다. 이렇듯 아버지는 순수하게 원칙을 지키는 분이었다.

    한번은 밥을 먹다 익환 형과 내가 말다툼을 했다. 아버지는 우리 둘에게 창고에 들어가서 식사가 끝날 때까지 벌을 서라고 했다. 우리 둘은 씩씩거리면서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창고 안에 크리스마스 때 불을 밝히는 초롱이 있었다. 언제 싸웠냐는 듯이 우리는 그 초롱을 들고는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불렀다. 그 노랫소리를 들은 아버지는 “벌을 서면서도 화목하게 찬송을 부르니 용서한다. 와서 밥을 먹어라!” 했다.

    용정에서 아버지께 자전거를 가르쳐드린 일도 기억난다. 집 뒤 운동장에 나가서 “바른편으로, 왼편으로” 하면서 아버지 뒤에서 자전거를 붙잡고 뛰었다. 아버지는 체격은 꽤 컸지만 운동신경은 둔한 편이어서 그렇게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끝내 용정에서 유일하게 자전거를 타고 심방을 다니는 목사가 되었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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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을찾아서] 잘생기고 착한 익환형에 열등감
    떠돌이 목자의 노래1-2
     
     
    한겨레  
     








     

    » 1930년대 명동촌 동거우의 집에서 찍은 가장 오래된 가족사진이다. 왼쪽부터 13살 때 병사한 동생 두환, 동환(필자), 어머니 김신묵, 할머니 박정애, 맏형 익환, 여동생 선희.
     
    ‘작문시간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말이 없으면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없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명동학교는 민족정신을 심어주는 교육을 했다. 내 아버지 문재린은 1913년 명동중학교를, 어머니 김신묵도 그 이듬해 명동여학교를 졸업했다.

    어릴 때 남몰래 혼자서 한글을 깨우쳤던 어머니는 학교에 다니는 게 소원이었는데, 결혼한 뒤 시아버지가 보내주어 여학교에 다닌 것이다. 그곳에서 아명인 ‘고만녜’를 버리고 김신묵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어머니의 담임은 신간회에서 간도 교육의 사명을 받고 온 정재면 선생이었다. 그때 명동학교의 선생 월급은 턱없이 적었지만 유한양행의 설립자인 유일한의 아버지 유기연씨가 생활비를 대주어 대가족을 부양할 수 있었다. 정 선생은 해방 뒤 서울로 내려와 송추에 있는 작은 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세상을 뜨셨다.

    국어 담당으로 우리 부모님의 주례를 섰던 박태환 선생은 한글학자 주시경 선생의 저서에 서문을 쓸 정도로 실력자였다. 박태환과 정재면은 함께 서울 상동감리교회 안에 있던 기독청년학원에서 공부를 한 동창이었다. 그곳 출신들이 정 선생을 따라 명동으로 들어왔다. 역사학자 황의돈(문교부 편수관, 단국대·동국대 교수), 주시경의 제자로 조선어학회 사건의 주역인 한글학자 장지영(연세대 교수) 등도 차례로 교사로 부임했다. 장지영은 국어학자였지만 박태환이 국어를 가르치니까 대신 영어를 맡았다. 여학교에서는 정재면의 누이인 정신태가 성경을 가르쳤고 임시정부 국무총리이자 국내 사회주의 운동의 시조인 이동휘의 둘째 딸 이의순이 음악·재봉·이과를 가르쳤으며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늘 강조했다.

    우리 가족이 살던 동거우는 명동학교가 있는 학교촌으로부터 약 5리 정도 떨어져 있던 까닭에 우리 형제들은 1학년부터 입학하는 게 무리였다. 우리가 처음 공부를 시작한 곳은 뒷방이었다. 어머니는 밤늦게까지 베틀에 앉아 삼베를 짜면서 우리에게 초등학교 3학년까지 과정을 직접 가르쳤다. 어머니는 늘 주일학교와 야학에서도 학생들을 가르쳤다. 종이가 없어서 목판에 모래를 넣고 나뭇가지로 글을 쓰곤 했다. 한글을 배운 다음에는 구구단을 외웠다. 예수님이 어린 양을 안고 있는 그림이 그려진 달력 뒷면에 어머니는 구구단을 적어놓았다. 늘 진지하고 엄격한 어머니는 애국가와 독립군의 노래도 가르쳐주었다. 을지문덕, 이순신, 홍범도, 김좌진 장군의 이야기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우리들은 집 뒤에 있던 커다란 느티나무를 오르거나, 어머니가 누에를 키우기 위해 심어놓은 뽕나무의 오디를 따먹기도 했다. 배가 고프면 나리꽃의 뿌리를 캐먹기도 하고, 콩을 서리해서 불을 피워 콩을 익혀 먹기도 했다. 여름이 되면 개울가에서 개구리를 잡아 구워 먹었는데 그 쫄깃쫄깃한 맛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우리가 개구리를 얼마나 많이 잡아먹었는지 한여름인데도 동네에서 개구리 소리가 별로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세 살 위인 형 익환은 명동 소학교 3학년으로 입학했다. 후에 같이 신학을 공부해 목사가 되고, 민주화 운동의 동지가 된 형을 나는 어려서부터 많이 따랐다. 그러나 장남인데다가 생긴 것도 시원시원한 형의 그늘에서 나는 열등감에 시달리기도 했다.



     

    » 문동환/목사
     
    이웃집 아주머니들은 우리 형을 보고 “그놈 참 잘도 생겼네” 하고 칭찬을 했다. 그러고는 나를 보면 “눈도 크다. 퉁사발눈이네” 하며 놀리곤 했다. 형은 잘생겼을 뿐만 아니라 심성도 착해 맞으면 맞았지 때리는 일이 없었다. 어린 나에게 양보도 잘해서 어머니의 칭찬을 받았다. 늘 모범적이어서 어른들의 편애를 받았다. 정말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어린 시절 나는 그렇게 느꼈던 것 같다.

    하루는 외삼촌이 우리에게 참나무로 팽이를 만들어 주었다. 형이랑 주거니받거니하면서 팽이를 돌리는 게 너무 신이나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놀았다. 세상에 이렇게 재밌는 장난감이 다 있을까? 그렇게 놀고 있는데 형이 말했다. “동환아, 팽이 돌리기가 너무 재밌어서 예수님을 잊어버리겠어. 팽이를 아궁이에 넣어버려야지 안 되겠어. 예수님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되는 건 모두 우상이랬어.” 그러고는 형은 아직 손때가 타지도 않은 새 팽이를 불 속에 던져 버리는 게 아닌가. 나는 빨갛게 타들어 가는 팽이를 보면서 아깝고 속상해서 내 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형은 명동학교에서 윤동주, 송몽규와 친하게 지내면서 민족주의적인 교육을 받았다. 또 학교가 끝난 뒤에는 외할아버지 김하규에게 찾아가 한학도 배웠다. 하지만 그 유명한 명동학교를 다녀보지 못한 게 나에게는 지금까지도 큰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여덟 살 되던 해 삼촌 문학린이 평양의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용정의 은진중학교 국어 선생으로 오자 어머니가 나를 삼촌한테 보내 영신소학교에 입학시켰던 것이다. 국어나 산수는 3학년에 입학할 수준이었지만 일본어를 전혀 못했기 때문에 2학년으로 들어갔다.


    문동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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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을찾아서] ‘민족운동의 요람’서 운명을 타고나다
    떠돌이 목자의 노래1
     
     
    한겨레  
     








     

    » 나의 아버지 문재린(기린갑이·왼쪽) 목사와 어머니 김신묵(고만녜·오른쪽) 권사 부부, 1951년 제주도 피난시절 모습이다.
     
     19세기가 저물어가는 1899년 2월18일 새벽 다섯 살 고만녜는 졸린 눈을 비비며 집을 나섰다. 30대 후반의 동학도이자 실학자였던 아버지 김하규의 식솔을 비롯해 김해 김씨 가문 63명은 이날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살을 여미는 바람을 뺨에 맞으며 고향 회령을 떠나 북간도로 향했다.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며 고만녜가 자꾸 넘어지자, 우차를 몰던 김하규는 고삐를 큰아들 진묵에게 넘겨주고, 넷째딸을 자신의 짐 위에 앉혔다. 고만녜는 “아바이, 우리 부걸라재 가면 부자가 되능겜둥?” 하며 새로운 세상에 호기심을 나타냈다. “그래 우리는 부자가 될 거다. 거기는 감자도 내 주먹만큼씩 크지.” 아버지의 목을 껴안고 온기를 느끼던 고만녜에게 그 말은 자장가처럼 편안하게 들렸다.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에 고만녜는 눈을 떴다. 두만강 건너편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도착해 불을 피우고 몸을 녹이고 있었다. 멀리 회령의 회바람벽을 한 원님 관사가 눈에 들어왔다. 고만녜의 옆에는 문씨 가문의 한 살 아래 사내아이 기린갑이가 불을 쪼이고 있었다.

    이들 북간도 이주단은 종성의 두민(頭民·한 고을의 우두머리가 되는 어른)을 지낸 학자이자 기린갑이의 증조부인 문병규, 동북쪽 국경을 지킨 무인의 후손인 김약연, 김약연의 스승인 남도천, 그리고 고만녜의 아버지인 회령의 김하규 등 네 가문으로 모두 141명이나 됐다.

     이들이 이날 향한 곳은 두만강변에서 50여리 떨어진, 나중에 ‘명동촌’이라 불리는 부걸라재(중국말로 비둘기 바위)였다. 그로부터 22년 뒤 그 고만녜 김신묵(1895~1990년)과 기린갑이 문재린(1896~1985년)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내가 태어났다.

    명동촌의 아이들은 학교나 교회나 집에서 귀에 뿌리가 나도록 “나라와 민족을 위해 바쳐지지 않는 생이란 무의미한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다. 어머니는 이순신·을지문덕 장군 등 옛 위인뿐만 아니라 청산리 전투의 홍범도 장군을 비롯해 애국가, 독립군 행진가를 가르쳤다. 베갯머리에도 태극기를 수놓았다. 동네에 나가서도 ‘독립군이 말을 타고 달리면서 말의 배에 딱 달라붙으면 아무도 볼 수 없고, 땅에 개미처럼 기어 십리를 간다’는 등 독립군의 영웅담을 늘 들었다.

     조국의 쇠망에 의분했던 네 명의 실학파 선비들이 북간도로 이주한 목적 중에는 이처럼 아이들을 잘 가르쳐 나라를 지킬 인재를 길러보자는 뜻도 있었다. 그래서 만주인의 땅을 사서 돈을 낸 비례대로 나누고, 그 중 가장 좋은 땅을 갈라내어 학교 운영비를 조달할 학전으로 삼았다. 나의 할아버지 문치정은 신임이 두터워 마을의 재정을 맡았다고 한다.

     1905년 을사늑약 뒤 일본의 탄압을 피해 망명한 의정부 참판 이상설은 후에 임시정부 주석이 된 이동녕 등과 함께 함께 용정에 들어와서 서전서숙을 시작해, 간도에는 신학문 바람이 불었다. 2년 뒤 4월 이상설은 헤이그에서 열리는 세계평화회의 밀사로 간다. 그 여파로 서전서숙이 문을 닫은데다, 서울 조정에서 신학문을 하라는 지시가 내려오자, 김약연·김하규·남위언은 자신들이 운영하던 세 서당을 합쳐 명동(明東)서숙을 만들었다. ‘동이족의 후예들을 밝히기 위해 일꾼을 기르는 곳’이라는 뜻으로, 그 때부터 마을 이름도 부걸라재 대신 명동촌으로 불렸다.

     교사로는 이동휘·안창호·김구 등이 조직한 신민회에서 간도 조선족의 교육운동을 위해 파송한 정재면이 초청됐다. 그는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예배를 하게 하는 조건을 내걸었다. 유학자들은 주저했으나, 신학문 선생을 놓치기 싫어 이를 승낙하고, 1908년 김약연을 교장으로 정재면을 교무주임으로 하는 명동학교를 열었다. 일년 뒤 정재면은 신학문의 완성을 위해서는 부모들까지도 기독교를 믿어야 한다는 새로운 조건을 내걸었다. 명동 주민들 사이에서 난리가 났으나, 결국 모두 상투를 자르고 22살의 젊은 선생 앞에서 성경을 배우며 예배를 드렸단다. 이는 신문명을 갈망하는 선각자들의 처절한 몸짓이기도 했다. 민족의 미래를 위해서 서구문명의 정신적 기초가 되는 기독교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특히 동만주와 한반도 동북지방 일대에 포교한 캐나다 북장로회는 평안 남북도에 포교한 미국 장로교보다 진보적이어서, 기독교는 곧 명동촌의 항일 민족주의 의식을 키우는 강력한 도구가 됐다. 명동학교는 곧 민족운동의 요람이 됐다.




    그런 명동촌에서 태어나면서 내 삶의 많은 부분은 이미 ‘규정’되었는지도 모른다. 문동환 목사, 삽화 박재동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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