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아·이경주·김지영] 역사 교사 삼총사의 방학숙제



▣ 히로시마=글·사진 황자혜 전문위원 jahyeh@hani.co.kr

일본 오사카 재일동포 집단 거주지역 쓰루하시와 이쿠노에서 그들을 만났다. 고대 한-일 교류의 유산인 다이센 고분에서도, 히메지성과 오카야마 기노성에서도, 그리고 히로시마 원폭 평화기념자료관에서도 그들을 볼 수 있었다. 한국에서 온 역사 교사 ‘미녀 삼총사’ 조정아(33·고양 백양고)·이경주(30·남양주 퇴계원고)·김지영(31·부천 북여중) 교사(사진 왼쪽부터)가 일본 열도를 휘젓고 있다.



△ 조정아(33·고양 백양고)·이경주(30·남양주 퇴계원고)·김지영(31·부천 북여중) 교사(사진 왼쪽부터)





대학 선후배 사이인 ‘삼총사’가 일본을 찾은 건 전국역사교사모임에 딸린 ‘한-일 교류위원회’가 ‘전쟁과 평화-바다를 건너간 사람들’이란 주제로 마련한 겨울방학 연수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교류위는 지난 2001년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사태를 계기로 한-일 두 나라 역사 교사들이 6년여 작업 끝에 내놓은 <마주 보는 한일사 전근대편 1·2>(사계절출판사)의 산파 구실을 했다. 이번 연수는 “두 나라 역사 교사들이 고민을 나누는 자리”였단다.
“우리가 쓰는 교과서가 일본 학생들이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게 만들거나, 일본에서 쓰는 교과서가 한국 학생들을 분노하게 해선 안 된다.” 맏언니 조정아 교사는 “역사를 가르치는 교사이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일본 하면 제국주의와 등치시켜버리곤 했다”며 “두 나라 학생들이 아시아 지역 공동체란 관점에서 마주 볼 수 있는 책이어야 한다는 일본 쪽 교사들의 지적에 적극 공감했다”고 말했다.
자이니치(재일동포) 시민운동가들도 만나고, 민족학교도 둘러봤다. 김지영 교사는 “실제 자이니치를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그는 “일본 사회의 차별과 민족 정체성에 대한 자이니치의 고민을 들으면서 ‘민족’이란 틀을 넘어 ‘인권’을 떠올리게 됐다”며 “우리나라도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이 많아지는 상황에서, 역사 교사의 역할이 무엇인지 새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막내 이경주 교사는 아예 민족학교 강단에 섰다. “역사 교사임에도 자이니치에 대해 잘 모른다고 학생들에게 털어놓고 수업을 시작했다. 제주 4·3 항쟁 등 해방공간에서 시작해 4·19 혁명과 5·18 광주항쟁, 그리고 1987년 6월항쟁까지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 대해 얘기를 이어가자 아이들의 눈망울이 초롱초롱해졌다.” 한겨울 추위를 함박웃음으로 녹이며, ‘삼총사’가 학생보다 열심히 ‘방학숙제’에 열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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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조기를 든 민족주의



일본 새역모와 한국 뉴라이트의 공통점과 차이점… 일본은 적어도 외세 ‘수용’을 ‘자학사관’이라는데…

▣ 한승동 한겨레 선임기자 sdhan@hani.co.kr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으로 상징되는, 1990년대 이후 일본 역사 및 역사 교과서 왜곡 논쟁 중심에 후지오카 노부카즈란 인물이 있다. 1943년 일본 북부 홋카이도에서 나서 그곳 홋카이도대학 교육학부를 나오고 박사학위까지 받은 뒤, 그 대학 조교수를 하다 1991년부터 도쿄대 교육학부 교수가 됐다. 4년 뒤인 1995년 그는 ‘자유주의사관연구회’란 조직을 만드는데, 여기야말로 바로 그 다음해부터 구체화한 새역모 결성 등 일본 우익들의 민족주의·국수주의 역사 날조의 소굴이었다.




△ ‘혼돈이 보수?’ 일본의 보수는 외세가 강요한 틀을 수용한 것을 ‘자학’이라 말하지만, 한국의 보수는 이를 거부한 것을 ‘자학’이라고 말한다. (사진/ 연합)




후지오카 “세상에! 일제가 악행을 저질렀다고?”

그가 쓴 <자유주의사관이란 무엇인가>(1997, PHP문고판) 서문에서 그는 대뜸 일본 교육현장에서 ‘자학사관’이 활개치고 있다고 개탄하면서 이렇게 얘기한다. “근대 일본은 일관되게 아시아 제국을 침략한 악한이라는 관념이 어린아이들 두뇌에 주입되고 있다.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 일제히 들어가게 된 일본군에 의한 ‘위안부 강제연행’설은 아무런 증거가 없음에도 버젓이 통용되고 있다. 자유주의사관이란 이런 역사 교육 현상을 개혁하려는 문제의식에서 시작됐다.” ‘세상에! 일제가 악행을 저질렀다니, 말이 되는 얘길 해야지’ 하는 기분이 느껴지지 않은가. 곧바로 뒤에 그는 일제가 아시아 유일의 빛나는 근대화 성공사례이고, 결과적으로 아시아 민족 해방에 기여한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늘어놓는다. 그러면서 그는 ‘위안부 강제연행설’ 따위의 ‘잘못’이 일본 역사 교육을 지배하게 된 것이 ‘도쿄재판사관’ 탓이라고 주장한다. 도쿄재판은 알다시피 일본 패전 직후 미국이 연합국의 이름으로 일본의 아시아·태평양전쟁을 범죄행위로 규정하고, 그 전쟁을 주도한 도조 히데키 등을 전범으로 처단한 국제전범재판을 말한다. 그것은 이후 일본 점령을 축으로 한 미국 동아시아 정책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된다.
후지오카는 그 도쿄재판이 전승국 미국이 패전국 일본에 부당하게 강요한 것이라며 그것을 기준으로 구성된 역사 관념과 교육에 ‘도쿄재판사관’이란 이름을 붙였다. 그는 곧 객관성을 가장한 교묘한 논리를 동원한다. 우선 패전 전 일제의 침략 행위를 모조리 긍정하는 군국주의 황국사관을 ‘대동아전쟁 긍정사관’이라 이름 붙이고는, 그때까지의 도쿄재판사관 비판론이 설득력이 약했던 것은 주로 이 대동아전쟁 긍정사관에 입각해 있었기 때문이라 지적한다. 그 다음 수순은 뻔하다. 그는 도쿄재판사관도 나쁘지만 대동아전쟁 긍정사관도 나쁘다고 양비론을 펼친 뒤 그 양쪽의 결함을 극복한, 즉 양쪽 시각 어디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역사관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자유주의사관이 거기서 나왔다. 후지오카는 폐기 처분된 황국사관을 슬쩍 들고 나와 도쿄재판과 등치시키고는 ‘양쪽 다 나빠!’ 하는 트릭을 써서 사실상 일제를 드러내놓고 정당화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군위안부 문제는 실은 도쿄재판에서도, 그 뒤의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도 제대로 다뤄진 적이 없다. 일본이야 당연히 피하고 싶었겠지만 미국도 자신의 일본 점령을 정당화하는 데만 주력해 군위안부 문제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미국은 또 1931년 만주침략 이후 일제 패전까지의 이른바 ‘15년 전쟁’만 문제 삼았을 뿐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일제의 조선, 대만 침략과 식민화, 그 과정의 엄청난 학살과 파괴에는 눈감아버렸다. 후지오카는 그런 엉성한 ‘도쿄재판사관’을 ‘자학사관’이라며 이를 갈았다.

자학을 좌파와 연결시키는 것까지도 비슷

요즘 나온 <한국해방 3년사>(이완범 지음, 태학사 펴냄)에서도 간만에 자학사관이란 말을 만났다. 지은이는 통일민족국가 수립이 좌절된 한반도 현대사를 극복 대상으로 보는 “분단시대 역사인식”을 좌파적 시각이요, 경제성장 등 분단 이남의 놀라운 성과를 무시한 자학사관이라 비판하는 뉴라이트 입장을 거론하면서 양극단을 지양한 중간론을 얘기한다. 분단 과정도 외인론과 내인론 양극단을 피한 양자 복합적인 사건으로 파악한다. 중간과 중립·객관은 엄연히 다를 텐데, 어쨌든 현실의 이해에 함몰되지 않으려는 초당파적 자세가 인상적이다.
그런데 그 자학사관 얘긴데, 한·일 우파들이 주장하는 자학사관은 비슷하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게 있다. 우선 양쪽 모두 좌파를 극도로 싫어하면서 자학사관을 ‘좌파’사관(이른바 ‘빨갱이’사관인데, 후지오카는 이를 반천황제의 일본공산당이 신봉한 ‘코민테른사관’이라 이름 붙였다)과 결부시키는 게 비슷하고, 일본제국주의의 만행을 입에 올리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는 점도 비슷하다. 일본 우파야 당연하지만, 한국 우파도 식민지 유제와 친일파 청산 문제를 “언제까지 과거사에 연연할 거냐”며 얼마나 싫어하고 경계하는가. 그래서 해방 직후 반민특위도 허망하게 박살나지 않았나. 한국 우파들의 대단한 민족주의는 세상이 다 알아주는데, 이 부분에만 가면 어찌 ‘원수’ 일본 우파의 그것과 이해가 일치하는 ‘탈민족’으로 바뀌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자학사관이란 말 자체부터 일본 우파한테서 직수입한 것 아닌가!
다른 점은 이거다. 일본 우파는 외세가 강요한 틀의 ‘수용’을 자기학대(자학)로 인식하는 데 반해, 한국 우파는 외세가 강요한 틀의 ‘거부’를 자학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1993년 자민당의 장기 집권을 보장한 ‘55년 보수합동’체제가 붕괴된 뒤 본격 등장한 일본 우익 자유주의사관파의 자학사관론은 미국에 모든 걸 의탁하는 냉전 구조 탈피와 일본 홀로서기(재무장 대국화)를 외치는데, 한국 우파 자학사관론은 서울시청 앞 3·1절 행사에 대형 성조기를 펼쳐들고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절대 불가를 외치며 자주국방론을 비판하는 데서 보듯 그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 적어도 우파라면 어느 쪽이 본연의 자세에 더 충실한지 모를 리 없을 텐데. ‘보국안민 척왜양창의’(輔國安民 斥倭洋倡義)는 어디로 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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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력 vs 글쓰기 기술



▣ 김창석 한겨레 교육서비스본부kimcs@hani.co.kr

외부에 잘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대학 안에서는 해마다 치러지는 논술고사를 둘러싸고 일종의 암투가 벌어진다. 권력투쟁까지는 아니지만, 영역싸움 수준은 뛰어넘는 소동이다. 그것은 논술고사의 출제와 채점에서 어느 학과, 어느 전공 과목이 주도권을 쥐느냐 하는 문제다.



△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시험 문제를 내본 경험이 있다는 서울의 한 대학 교수는 “출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교수들의 싸움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극한투쟁인데 서로의 전공 분야 특징을 문제 삼는 등 감정적인 양상으로 번지는 경우도 있다”면서 “결국 중립적인 성격을 지니는 전공 교수들이 중재에 나서야 갈등이 해결된다”고 귀띔했다. 투쟁의 전면에 나서는 이들은 보통 국어 관련 전공 교수와 철학 전공 교수들이다.
“논술은 무엇보다 글쓰기가 아니냐.” 국어 관련 전공 쪽 교수들이 내세우는 주장이다. 맞는 말이다. 이 논리를 받아들인다면 논술 준비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문장력이나 표현력을 갖추는 것이 된다. “세상을 보는 논리와 사고력을 갖추지 못한 얄팍한 글쓰기 기술은 논술에는 무용지물 아니냐.” 철학과 교수들의 대응 논리다. 역시 맞는 말이다. 이 논리를 받아들인다면 논리학 교과서부터 독파해야 한다. 철학사조를 훑는 것도 필수다.
두 가지 주장은 논술고사 출제에서부터 채점 과정까지 팽팽히 맞서고 있지만, 이들의 주장은 모두 일면의 진실만을 담고 있다. 사고력과 글쓰기 능력은 내용과 형식의 관계와 닮았다. 내용이 형식을 규정하는 것이 기본이지만, 형식 자체의 변화가 내용의 질적 혁신을 이끌기도 한다. 논리적 사고력이 글의 깊이와 차별성을 결정하지만, 정교한 글쓰기 기술을 통해 사고의 정치함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다. ‘사려 깊은 글쓰기’와 ‘비판적 사고’의 끊임없는 교호 작용만이 논리적인 글쓰기의 지름길인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고력 또는 논리력을 기르는 공부와 글쓰기 기술을 익히는 공부를 동시에 할 수 있는 곳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그런 매뉴얼을 찾기도 어렵다. 논술고사의 이해당사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 매뉴얼을 만드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 그래야 어느 수준으로 공부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학생들에게 최소한의 기준을 제시할 수 있게 된다. 글의 형식적 측면과 내용적 측면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는 논리적 글쓰기의 기본 원칙도 대중화할 수 있다.
논리적인 글쓰기에 필요한 최소 수준의 논리적 사고법은 굳이 논리학 교과서를 읽지 않고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치명적인 논리적 오류에 빠지지 않고 합리적이고 균형감 있게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귀납법과 연역법은 어떻게 다른지, 삼단논법은 어떻게 구사하는 것인지,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거는 어떻게 제시해야 설득력이 더 높아지는지 등을 가르치면 된다.
논리적인 글쓰기에 필요한 글쓰기 기술도 국어 전공자 수준일 필요는 없다. 물이 흘러가듯 자연스럽게 글이 전개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주장하는 바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방법은 어떤 것인지, 주장하는 바의 명확성을 확고히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문장이나 문단이 왜 전체 글을 위해 일관되게 배치되고 조직되어야 하는지 등을 실제 사례를 통해 익히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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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는 가해자끼리 통하는 법



전범의 회고록과 <요코 이야기> 속에 나타난 일본과 미국의 지독한 동지애

▣ 한승동 한겨레 선임기자 sdhan@hani.co.kr

일제 대본영 작전과와 만주 관동군 참모였다가 패전 뒤 전범으로 11년간 시베리아에 억류됐던 세지마 류조는 귀환 뒤 제국 참모 시절의 경험을 살려 이토추상사 회장 자리에까지 오른다. 국내에도 번역돼 널리 읽힌 야마자키 도요코의 <불모지대>의 주인공 모델이 그였다는 풍설이 있다.

자신에게 달라붙은 전두환·노태우에 우월감



△ 전두환 대통령 부부가 1984년 나카소네 수상일가와 산책을 하고 있다.(사진/ 연합)






1996년에 나온 그의 회고록 <이쿠산카>(幾山河)(극우 산케이신문사가 냈다)를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1979년 12월12일 쿠데타로 전두환·노태우 신군부가 실권을 장악한 직후인 80년 3월 이병철 당시 삼성회장이 그에게 연락을 해왔다. “한번 조용히 방한해서 군 선배로서 전두환, 노태우 장군을 격려하고 어드바이스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경제관계 문제도 있을 터이니 도큐의 고지마씨도 함께 와주십시오.” 그래서 그해 6월 전·노를 만났다. 그때 전두환은 그들에게 어떻게 나라를 통치할지, 일본엔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등을 물었다. 광주에서 막 숱한 피를 뿌린 두 사람에 대한 인상을 세지마는 “모두 온후하고 관용적이며 시야가 넓은 사람들”이었다고 썼다. 전후를 살피건대, 신군부 쪽에서 일본 지배그룹과 연결해달라고 재계 쪽에 부탁했을 것이다. 그들에겐 돈과 일본, 미국의 지지가 필수적이었다.
세지마는 그 뒤에도 한국을 수시로 들락거리며 한-일 정권유착 밀사로 활약하는데, 나카소네 정권 때 40억달러 차관을 전두환 정권에 제공하는 일을 모사했고 일본 총리로서는 첫 한국 방문이었던 나카소네 방한도 성사시켰다. 그때 일본 외상이 지금의 아베 신조 총리의 아버지 아베 신타로였다. 총리가 된 나카소네가 만사를 제쳐놓고 거금을 들여가며 한국 방문을 서두른 것은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그 뒤 이른바 ‘론-야스’(로널드 레이건-나카소네 야스히로) 관계로 발전한 미-일의 밀착과, ‘넘버원 국가로서 일본’, 미국에 이은 차기 패권국 일본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리지 않을 정도였던 1980년대 일본의 안정과 번영을 위한 방략의 첫 단추였다. 나카소네는 바로 미국에 가서 부마항쟁과 광주항쟁의 피눈물 위에 세워진 한국 쿠데타군을 지원하도록 공작했고, 그 결과 확보된 한국 안보환경의 안정, 곧 친일·친미 군사정권 유지가 미-일 신보수주의의 정권 밀착과 번영의 한 고리가 됐다.
<이쿠산카>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반성’이 없다는 것이다. 반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닌데, 그것은 일제 대본영이 정세 판단과 자기한계 인식, 효율적인 전쟁 수행을 제대로 못했다는 데 맞춰져 있다. ‘좀더 잘했더라면…’ 정도다. 조선과 만주, 또는 조선만이라도 일본 땅으로 만들지 못한 데 대한 유감이 묻어난다. 그런 부류의 인간들이 자신들에게 달라붙은 신군부, 나아가 한국민 전체에 우월감을 느꼈을 건 당연지사. 그 순간 가해자는 시혜자로 돌변한다.
얼마 전 일본 패전 당시 열두 살 소녀가 겪은 ‘조선 탈출기’ <요코 이야기>가 논란을 불렀다. 거기에도 가해자의 반성은 없다. 일제 대륙침략의 핵심범죄 중 하나가 만주침략과 괴뢰국 만주국 건설이었는데, 요코의 아버지는 만주국을 위해 일했다. 말하자면 요코 가족은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가해자의 일원으로 조선 땅 나남에서 살았고 패전하자 본국으로 탈출한다. <요코 이야기>에는 식민지에 군림하던 그들 지배자의 거만과 안락과 만행은 언급조차 없다. 도대체 왜 그런 비극이 일어나게 됐는지, 그들이 왜 나남이란 남의 땅에 살게 됐는지 묻지 않는다. 당연한 듯이. 그들을 공격했다는 공산주의자들을 비난하는 것은 항일 독립군들을 비적이니 마적이니 하며 부도덕한 도둑떼로 몰고 윤봉길을 무도한 테러리스트로 몰았던 시각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미국 중학교가 <요코 이야기>를 교과서로 채택한 것은 어쩌면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행태를 오직 ‘반공’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식민지 가해자들과 동맹했던 미국의 입장, 분위기에 기막히게 부합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가해자는 가해자끼리 통하는 법이다.

<요코 이야기>도 애초에 침략이 없었다면?

생각해보자. 수백만 명을 죽이고 국토를 고엽제로 뒤덮었던 베트남전의 비극이 어디에서 비롯됐나. 영화 <디어 헌터> 등에서 보듯 그런 식민지배와 침략이 없었다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을 전쟁에서 침략자들은 가족과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던졌던 가난한 베트남인들을 무지막지한 빨갱이로 묘사하면서 자신들을 오히려 피해자로 그리며 ‘우아한 번뇌’에 빠진다. 비극은 비극이되 웃기는 일 아닌가. 12살 식민지배자의 자손 요코가 본 것은 바로 자신들 때문에 피폐해진 식민지 군상이었고, 외부 지배자들을 몰아내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일부 민족주의자들이었다. 그들에게 대든 조선의 민족주의자들이 그들에겐 위험하게 보였을 것이다. 대부분 좌파일 수밖에 없었던 조선의 항일 민족주의자들을 요코는 공산주의자, 즉 ‘빨갱이’로 몰면서 사태의 본질을 얼버무렸다. 지극히 좁은 자기 주변의 에피소드들을 가공해 피해자를 가해자로 뒤바꿔버린 것이다.
마치 납치사건 하나로 식민지배 최대 피해자 가운데 하나인 북한을 가장 악독한 가해자로 뒤바꿔놨듯이. 만일 식민지배가 없었고, 식민군 무장해제를 구실로 미군이 새로운 지배자로 들어와 일방적으로 국토를 남북으로 갈라놓지 않았고, 따라서 한국전쟁과 분단 고착이 없었는데도 일본인 납치사건이 발생했을까.
<요코 이야기>를 문제 삼는 사람들을 두고 민족주의에 눈이 멀어 단순한 가해 사실조차 인정하지 못하고 반성하지도 못하는 덜떨어진 짓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누가 저질렀든 가해 사실은 정당화될 수 없고 가해자는 비난받고 단죄당해 마땅하다. 하지만 민족주의에 대한 과도한 경계 때문에 사실을 오인하거나 덜 익은 코즈모폴리턴으로 행세하는 건 민족주의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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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속에 ‘노동’없다?



7차 교육과정 경제 과목에서 찾기 힘든 ‘노동 문제’, 교과서의 편향성이여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현행 7차 교육과정에서 경제 과목의 노동 관련 대목을 보면, ‘경제성장 요인과 안정화 정책을 설명할 때 △기업경영 혁신 △가계저축 증대 △정부 규제 완화와 정책 일관성 그리고 △노사협력 등을 논의 자료로 사용한다’고 돼 있다. ‘학교 노동교육’에서 가르칠 노동 문제는 일과 직업에 대한 가치관, 직업세계와 직업선택, 노동인권, 실업, 노동조합 등 다양한 측면이 있다. 그런데도 현행 경제 교과서는 노동 문제를 오직 ‘노사관계’ 한 가지로 협소하게 다루고 있다. 게다가 노사관계를 보는 관점도 지극히 편향돼 있다. 노동인권이나 노사 간 힘의 불균형 해소라는 관점은 완전히 빠져 있고, 오직 국가 경쟁력 강화 차원에서만 노사관계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 단병호 민주노동당 의원이 2006년 7월 인천 정보산업고를 찾아 학생들에게 노동인권을 가르치고 있다.(사진/ 한겨레 이종근 기자)




강성 노조 때문에 기업이 해외로?

(주)교학사, 대한교과서(주), (주)두산, (주)천재교육에서 펴낸 4종의 고교 경제 교과서를 보자. 노동 관련 서술 대목을 살펴보면 할애된 분량이 형편없이 적다(표 참조). 학교 노동교육의 철저한 부재라고 할 수 있다. ‘노동교육의 우파적 편향’을 걱정하기 이전에 노동교육 자체가 아예 없다시피 한 셈이다. 국민공통교육과정(1∼10학년(고교 1학년)) 중 중학교 사회과 교과서는 “근로기준법과 노동조합법이 있다. 헌법에서 노동3권을 보장하고 있다”는 내용, 그리고 ‘근로자와 기업가의 역할’을 간단하게 소개하고 있는데 이것이 전부이다. 노사갈등도 ‘사회 문제의 이해와 합리적 해결’ 소절에 10줄 정도 짧게 설명되고 있을 뿐이다. 노사갈등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편적이고 중요한 사회적 갈등인데도 갈등 해결을 다루는 대목에 제시되는 사례들을 보면, 노사갈등은 아예 빠져 있거나 부정적으로 다뤄지고 있다. 한국노동교육원 송태수 교수는 “우리 학교에서 노동교육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노동이 빠진 국민경제와 사회 공동체, 그리고 노동 없는 미래 사회만 그려지고 있을 뿐이다”고 지적했다.
내용을 보면, 실업 문제는 대부분의 고교 경제 교과서가 다루고 있다. 그러나 ‘실업’ 내용을 제외한다면 ‘경제 안정과 성장을 위해 노사관계 안정과 노사협력을 요구하는’ 내용이 노동 관련 서술 대목의 거의 전부다. 교학사 교과서의 경우 ‘노동’은 ‘Ⅴ-2-(2). 국가 경쟁력 강화를 위한 한국 경제의 과제’ 중에서 ‘② 성숙한 노사관계 정립’을 다루는 단원에 등장한다. 내용은 △임금 상승률과 생산성 증가율 추이를 보여주고 △과격한 노동운동, 고임금, 강성 노조 때문에 일부 기업이 해외로 공장을 이전하고 △기업이 문을 닫거나 외국인 직접투자를 가로막는 요인은 잦은 노사분규와 과격한 노동운동 때문이고 △개방화 시대에 국제 경쟁력 강화를 위해 노조는 무리한 요구를 자제해야 한다고 서술하고 있다. 특히 두산 교과서를 빼면 노동시장의 ‘고용 구조’에 대한 내용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노동시장에서 비정규직이 50%를 넘고 상당수의 ‘예비 노동자’들이 생애 처음으로 노동시장에 진입할 때 비정규직이 될 공산이 큰데도 학교에서 비정규 노동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시장주의’ 강화된 7·8차 교육과정

학교 노동교육은 앞으로 직업세계에 진출할 학생들을 대상으로 노사관계·노동인권 등 노동자로서의 기회와 권리에 대한 의식뿐 아니라 노동문화, 직업선택, 근로계약 체결, 근로의 이행 및 종료까지 포함한 노동세계의 전 과정을 교육하는 것이다. 학교 노동교육은 사실상 사회과 교육과정 수립에 참여하는 사회·경제학자 네댓 명이 결정한다. 이들이 사회·경제 교과서에 ‘노동’을 얼마나, 어떤 내용으로 넣을지를 판단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노동교육은 교과서 편찬에 참여하는 학자들의 우편향, 노동부의 무관심, 교육당국의 보수성, 정치사회적 분위기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근거 없이’ 불온시돼왔다. 물론 노동 문제를 아예 소홀히 취급한 측면도 있고, 노동을 이념적 차원에서 덮어놓고 기피한 측면도 있다. 특히 6차 이후 7·8차 교육과정으로 넘어오면서 ‘시장주의 교육’이 더욱 강화돼 노동교육 내용이 더욱 축소·우편향화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사실 한국 노동자의 경우 노동조합에 대한 탄압 때문이 아니라, 노동조합을 불온시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스스로 위축되고 막연한 두려움이 내면화돼 노조에 가입하지 않는 성향도 강하다. 물론 학교 노동교육의 부재 탓이다.
전국사회교사모임 신성호 교사(중앙고)는 “1980, 90년대에 교육·노동 단체에서도 학교 노동교육을 정부에 적극적으로 요구하지 않았다”면서 “2003년부터 한국노동교육원이 학교 노동교육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민주노동당에서도 노동인권교육을 확대하고 있는 중이다”고 말했다. 한국노동교육원은 2003년 말에 프랑스·영국·독일 등 5개국 학교 노동교육의 실태를 분석한 바 있다. 노동교육원 송태수 교수는 “노사관계 갈등을 해결할 때 기업과 노동조합 쪽 실무자 대상 교육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사회적 환경과 의식도 중요하다”며 “노사관계 균형은 일반 국민이 노동의 가치를 존중하고 노사관계를 이해해야 성공할 수 있으며, 그 토대가 바로 노동교육”이라고 말했다.

“노동교육 배제는 큰 사회적 손실”

교육과정은 그렇다 치고, “전교조 소속 교사를 중심으로 학교 현장에서 교사들이 직접 노동교육을 하면 되지 않느냐”는 말도 나온다. 교사들이 교육과정을 재구성해 수업하면 노동을 학생들한테 충분히 가르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신성호 교사는 “ 사회과 수업 시수는 제한돼 있고, 짧은 시간에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을 모두 가르치기에도 벅차다”며 “교과서에 나와 있지 않은 노동교육을 하면 당장 학생들부터 싫어하고, 학교장과 교육부의 제지를 받게 된다”고 말했다. 노동절 등 계기가 있을 때 교사들이 노동교육을 하더라도 금방 교육부의 금지 지시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근거 없는 우려’와 달리 중·고교 학교 노동교육은 ‘이념’을 넘어선다. 노동조합과 노사관계뿐 아니라 일의 의미, 직업선택과 태도, 직업세계에서 보장되는 권리와 의무 등 포괄적인 내용을 다루기 때문이다. 특히 노동조합과 노사관계를 학교에서 일찍 가르치면 사회적 노사갈등 비용도 줄어들게 된다. 송태수 교수는 “노동교육은 시장경제 체제에서 갈등 해결과 민주주의 능력 함양에 가장 적합하고 필수적인 교육 영역”이라며 “어떤 역사적·정치문화적 배경에서든 학교 노동교육이 배제돼온 건 커다란 사회적 손실”이라고 말했다.


 



“노동자 권리는 인간 존엄성 문제”

중·고교 교과 통해 체계적으로 노동교육하는 프랑스·영국·독일

프랑스의 교육과정 지침서는 노동자 권리와 관련해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기업 내에서 노동자들의 권리는 인간 존엄성의 문제이다. 노동자로서 인간은 (컨베이어 벨트) 체인의 하나 또는 도구가 아니며 권리의 주체로 다뤄져야 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복종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있고, 노동법은 노동관계 속에 존재하는 이런 불평등에 근거를 두어 제정됐다. 다음과 같은 사례 연구를 선택할 수 있다. △기업체의 단체협약을 비교 연구한다 △기업 내에서 노동자들의 집단적 의사표현 사례를 분석한다 △노동자의 권리가 어떻게 보호되는지를 알려주기 위해 판례를 공부한다.”
프랑스의 <시민교육>은 중학교 1∼4학년까지 주 3∼4시간의 필수교과로, 노동자의 권리와 자유, 고용 평등, 주 35시간 노동제 등을 다룬다. 이어 고교 <시민-법률-사회교육> 교과는 빈곤, 일할 권리와 시민권, 근로계약서, 임금, 아동노동, 여성노동, 산업안전, 근로조건, 불법노동, 노동조합과 노동자의 대표, 노동자들의 행위와 집단적 조직, 파업 등을 3년간 체계적으로 교육한다.
영국에서는 10여 년간의 논란 끝에 2002년부터 <시민교육>이 학교 정규교육 과정에 도입됐다. 이에 따라 10∼11학년에서 노동교육을 실시하고 있는데, 노동세계의 권리와 책임을 주로 학습한다. 구체적인 수업 주제로는 사용자와 노동자의 권리·책임, 청소년 노동인권, 아르바이트 노동 때 점검해야 할 목록, 노동자 상담 및 지원센터에 대한 정보, 노동조합, 산업안전, 노사분쟁 등이 다뤄진다. ‘노동사회’로 불리는 독일은 중등 사회 교과서에서 ‘노동’을 매우 중요한 주제로 다루고 있다. 특히 독일의 노동교육은 모든 교과서들이 토론식·유도식·체험식 방법을 채택하고 있고, 서술식 구성을 피하고 있다. 또 자료 취합의 구성을 채택해 단락마다 주제에 적절한 자료들(법규, 성명서, 신문기사, 그래픽, 통계 등)을 엮어 제시하고 있다. 한국노동교육원 송태수 교수는 “독일 교과서들은 내용 면에서도 대비되는 입장을 공정하게 보여주고 객관성을 유지하고 있다”며 “노동세계와 노사관계에서 민주주의적 갈등 해결 원칙을 교육해 독일 사회의 민주주의와 사회통합 구현을 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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