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조기를 든 민족주의
일본 새역모와 한국 뉴라이트의 공통점과 차이점… 일본은 적어도 외세 ‘수용’을 ‘자학사관’이라는데…
▣ 한승동 한겨레 선임기자 sdhan@hani.co.kr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으로 상징되는, 1990년대 이후 일본 역사 및 역사 교과서 왜곡 논쟁 중심에 후지오카 노부카즈란 인물이 있다. 1943년 일본 북부 홋카이도에서 나서 그곳 홋카이도대학 교육학부를 나오고 박사학위까지 받은 뒤, 그 대학 조교수를 하다 1991년부터 도쿄대 교육학부 교수가 됐다. 4년 뒤인 1995년 그는 ‘자유주의사관연구회’란 조직을 만드는데, 여기야말로 바로 그 다음해부터 구체화한 새역모 결성 등 일본 우익들의 민족주의·국수주의 역사 날조의 소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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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돈이 보수?’ 일본의 보수는 외세가 강요한 틀을 수용한 것을 ‘자학’이라 말하지만, 한국의 보수는 이를 거부한 것을 ‘자학’이라고 말한다. (사진/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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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오카 “세상에! 일제가 악행을 저질렀다고?”
그가 쓴 <자유주의사관이란 무엇인가>(1997, PHP문고판) 서문에서 그는 대뜸 일본 교육현장에서 ‘자학사관’이 활개치고 있다고 개탄하면서 이렇게 얘기한다. “근대 일본은 일관되게 아시아 제국을 침략한 악한이라는 관념이 어린아이들 두뇌에 주입되고 있다.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 일제히 들어가게 된 일본군에 의한 ‘위안부 강제연행’설은 아무런 증거가 없음에도 버젓이 통용되고 있다. 자유주의사관이란 이런 역사 교육 현상을 개혁하려는 문제의식에서 시작됐다.” ‘세상에! 일제가 악행을 저질렀다니, 말이 되는 얘길 해야지’ 하는 기분이 느껴지지 않은가. 곧바로 뒤에 그는 일제가 아시아 유일의 빛나는 근대화 성공사례이고, 결과적으로 아시아 민족 해방에 기여한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늘어놓는다. 그러면서 그는 ‘위안부 강제연행설’ 따위의 ‘잘못’이 일본 역사 교육을 지배하게 된 것이 ‘도쿄재판사관’ 탓이라고 주장한다. 도쿄재판은 알다시피 일본 패전 직후 미국이 연합국의 이름으로 일본의 아시아·태평양전쟁을 범죄행위로 규정하고, 그 전쟁을 주도한 도조 히데키 등을 전범으로 처단한 국제전범재판을 말한다. 그것은 이후 일본 점령을 축으로 한 미국 동아시아 정책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된다.
후지오카는 그 도쿄재판이 전승국 미국이 패전국 일본에 부당하게 강요한 것이라며 그것을 기준으로 구성된 역사 관념과 교육에 ‘도쿄재판사관’이란 이름을 붙였다. 그는 곧 객관성을 가장한 교묘한 논리를 동원한다. 우선 패전 전 일제의 침략 행위를 모조리 긍정하는 군국주의 황국사관을 ‘대동아전쟁 긍정사관’이라 이름 붙이고는, 그때까지의 도쿄재판사관 비판론이 설득력이 약했던 것은 주로 이 대동아전쟁 긍정사관에 입각해 있었기 때문이라 지적한다. 그 다음 수순은 뻔하다. 그는 도쿄재판사관도 나쁘지만 대동아전쟁 긍정사관도 나쁘다고 양비론을 펼친 뒤 그 양쪽의 결함을 극복한, 즉 양쪽 시각 어디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역사관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자유주의사관이 거기서 나왔다. 후지오카는 폐기 처분된 황국사관을 슬쩍 들고 나와 도쿄재판과 등치시키고는 ‘양쪽 다 나빠!’ 하는 트릭을 써서 사실상 일제를 드러내놓고 정당화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군위안부 문제는 실은 도쿄재판에서도, 그 뒤의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도 제대로 다뤄진 적이 없다. 일본이야 당연히 피하고 싶었겠지만 미국도 자신의 일본 점령을 정당화하는 데만 주력해 군위안부 문제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미국은 또 1931년 만주침략 이후 일제 패전까지의 이른바 ‘15년 전쟁’만 문제 삼았을 뿐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일제의 조선, 대만 침략과 식민화, 그 과정의 엄청난 학살과 파괴에는 눈감아버렸다. 후지오카는 그런 엉성한 ‘도쿄재판사관’을 ‘자학사관’이라며 이를 갈았다.
자학을 좌파와 연결시키는 것까지도 비슷
요즘 나온 <한국해방 3년사>(이완범 지음, 태학사 펴냄)에서도 간만에 자학사관이란 말을 만났다. 지은이는 통일민족국가 수립이 좌절된 한반도 현대사를 극복 대상으로 보는 “분단시대 역사인식”을 좌파적 시각이요, 경제성장 등 분단 이남의 놀라운 성과를 무시한 자학사관이라 비판하는 뉴라이트 입장을 거론하면서 양극단을 지양한 중간론을 얘기한다. 분단 과정도 외인론과 내인론 양극단을 피한 양자 복합적인 사건으로 파악한다. 중간과 중립·객관은 엄연히 다를 텐데, 어쨌든 현실의 이해에 함몰되지 않으려는 초당파적 자세가 인상적이다.
그런데 그 자학사관 얘긴데, 한·일 우파들이 주장하는 자학사관은 비슷하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게 있다. 우선 양쪽 모두 좌파를 극도로 싫어하면서 자학사관을 ‘좌파’사관(이른바 ‘빨갱이’사관인데, 후지오카는 이를 반천황제의 일본공산당이 신봉한 ‘코민테른사관’이라 이름 붙였다)과 결부시키는 게 비슷하고, 일본제국주의의 만행을 입에 올리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는 점도 비슷하다. 일본 우파야 당연하지만, 한국 우파도 식민지 유제와 친일파 청산 문제를 “언제까지 과거사에 연연할 거냐”며 얼마나 싫어하고 경계하는가. 그래서 해방 직후 반민특위도 허망하게 박살나지 않았나. 한국 우파들의 대단한 민족주의는 세상이 다 알아주는데, 이 부분에만 가면 어찌 ‘원수’ 일본 우파의 그것과 이해가 일치하는 ‘탈민족’으로 바뀌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자학사관이란 말 자체부터 일본 우파한테서 직수입한 것 아닌가!
다른 점은 이거다. 일본 우파는 외세가 강요한 틀의 ‘수용’을 자기학대(자학)로 인식하는 데 반해, 한국 우파는 외세가 강요한 틀의 ‘거부’를 자학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1993년 자민당의 장기 집권을 보장한 ‘55년 보수합동’체제가 붕괴된 뒤 본격 등장한 일본 우익 자유주의사관파의 자학사관론은 미국에 모든 걸 의탁하는 냉전 구조 탈피와 일본 홀로서기(재무장 대국화)를 외치는데, 한국 우파 자학사관론은 서울시청 앞 3·1절 행사에 대형 성조기를 펼쳐들고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절대 불가를 외치며 자주국방론을 비판하는 데서 보듯 그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 적어도 우파라면 어느 쪽이 본연의 자세에 더 충실한지 모를 리 없을 텐데. ‘보국안민 척왜양창의’(輔國安民 斥倭洋倡義)는 어디로 갔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