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는 가해자끼리 통하는 법
전범의 회고록과 <요코 이야기> 속에 나타난 일본과 미국의 지독한 동지애
▣ 한승동 한겨레 선임기자 sdhan@hani.co.kr
일제 대본영 작전과와 만주 관동군 참모였다가 패전 뒤 전범으로 11년간 시베리아에 억류됐던 세지마 류조는 귀환 뒤 제국 참모 시절의 경험을 살려 이토추상사 회장 자리에까지 오른다. 국내에도 번역돼 널리 읽힌 야마자키 도요코의 <불모지대>의 주인공 모델이 그였다는 풍설이 있다.
자신에게 달라붙은 전두환·노태우에 우월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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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두환 대통령 부부가 1984년 나카소네 수상일가와 산책을 하고 있다.(사진/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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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에 나온 그의 회고록 <이쿠산카>(幾山河)(극우 산케이신문사가 냈다)를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1979년 12월12일 쿠데타로 전두환·노태우 신군부가 실권을 장악한 직후인 80년 3월 이병철 당시 삼성회장이 그에게 연락을 해왔다. “한번 조용히 방한해서 군 선배로서 전두환, 노태우 장군을 격려하고 어드바이스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경제관계 문제도 있을 터이니 도큐의 고지마씨도 함께 와주십시오.” 그래서 그해 6월 전·노를 만났다. 그때 전두환은 그들에게 어떻게 나라를 통치할지, 일본엔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등을 물었다. 광주에서 막 숱한 피를 뿌린 두 사람에 대한 인상을 세지마는 “모두 온후하고 관용적이며 시야가 넓은 사람들”이었다고 썼다. 전후를 살피건대, 신군부 쪽에서 일본 지배그룹과 연결해달라고 재계 쪽에 부탁했을 것이다. 그들에겐 돈과 일본, 미국의 지지가 필수적이었다.
세지마는 그 뒤에도 한국을 수시로 들락거리며 한-일 정권유착 밀사로 활약하는데, 나카소네 정권 때 40억달러 차관을 전두환 정권에 제공하는 일을 모사했고 일본 총리로서는 첫 한국 방문이었던 나카소네 방한도 성사시켰다. 그때 일본 외상이 지금의 아베 신조 총리의 아버지 아베 신타로였다. 총리가 된 나카소네가 만사를 제쳐놓고 거금을 들여가며 한국 방문을 서두른 것은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그 뒤 이른바 ‘론-야스’(로널드 레이건-나카소네 야스히로) 관계로 발전한 미-일의 밀착과, ‘넘버원 국가로서 일본’, 미국에 이은 차기 패권국 일본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리지 않을 정도였던 1980년대 일본의 안정과 번영을 위한 방략의 첫 단추였다. 나카소네는 바로 미국에 가서 부마항쟁과 광주항쟁의 피눈물 위에 세워진 한국 쿠데타군을 지원하도록 공작했고, 그 결과 확보된 한국 안보환경의 안정, 곧 친일·친미 군사정권 유지가 미-일 신보수주의의 정권 밀착과 번영의 한 고리가 됐다.
<이쿠산카>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반성’이 없다는 것이다. 반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닌데, 그것은 일제 대본영이 정세 판단과 자기한계 인식, 효율적인 전쟁 수행을 제대로 못했다는 데 맞춰져 있다. ‘좀더 잘했더라면…’ 정도다. 조선과 만주, 또는 조선만이라도 일본 땅으로 만들지 못한 데 대한 유감이 묻어난다. 그런 부류의 인간들이 자신들에게 달라붙은 신군부, 나아가 한국민 전체에 우월감을 느꼈을 건 당연지사. 그 순간 가해자는 시혜자로 돌변한다.
얼마 전 일본 패전 당시 열두 살 소녀가 겪은 ‘조선 탈출기’ <요코 이야기>가 논란을 불렀다. 거기에도 가해자의 반성은 없다. 일제 대륙침략의 핵심범죄 중 하나가 만주침략과 괴뢰국 만주국 건설이었는데, 요코의 아버지는 만주국을 위해 일했다. 말하자면 요코 가족은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가해자의 일원으로 조선 땅 나남에서 살았고 패전하자 본국으로 탈출한다. <요코 이야기>에는 식민지에 군림하던 그들 지배자의 거만과 안락과 만행은 언급조차 없다. 도대체 왜 그런 비극이 일어나게 됐는지, 그들이 왜 나남이란 남의 땅에 살게 됐는지 묻지 않는다. 당연한 듯이. 그들을 공격했다는 공산주의자들을 비난하는 것은 항일 독립군들을 비적이니 마적이니 하며 부도덕한 도둑떼로 몰고 윤봉길을 무도한 테러리스트로 몰았던 시각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미국 중학교가 <요코 이야기>를 교과서로 채택한 것은 어쩌면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행태를 오직 ‘반공’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식민지 가해자들과 동맹했던 미국의 입장, 분위기에 기막히게 부합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가해자는 가해자끼리 통하는 법이다.
<요코 이야기>도 애초에 침략이 없었다면?
생각해보자. 수백만 명을 죽이고 국토를 고엽제로 뒤덮었던 베트남전의 비극이 어디에서 비롯됐나. 영화 <디어 헌터> 등에서 보듯 그런 식민지배와 침략이 없었다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을 전쟁에서 침략자들은 가족과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던졌던 가난한 베트남인들을 무지막지한 빨갱이로 묘사하면서 자신들을 오히려 피해자로 그리며 ‘우아한 번뇌’에 빠진다. 비극은 비극이되 웃기는 일 아닌가. 12살 식민지배자의 자손 요코가 본 것은 바로 자신들 때문에 피폐해진 식민지 군상이었고, 외부 지배자들을 몰아내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일부 민족주의자들이었다. 그들에게 대든 조선의 민족주의자들이 그들에겐 위험하게 보였을 것이다. 대부분 좌파일 수밖에 없었던 조선의 항일 민족주의자들을 요코는 공산주의자, 즉 ‘빨갱이’로 몰면서 사태의 본질을 얼버무렸다. 지극히 좁은 자기 주변의 에피소드들을 가공해 피해자를 가해자로 뒤바꿔버린 것이다.
마치 납치사건 하나로 식민지배 최대 피해자 가운데 하나인 북한을 가장 악독한 가해자로 뒤바꿔놨듯이. 만일 식민지배가 없었고, 식민군 무장해제를 구실로 미군이 새로운 지배자로 들어와 일방적으로 국토를 남북으로 갈라놓지 않았고, 따라서 한국전쟁과 분단 고착이 없었는데도 일본인 납치사건이 발생했을까.
<요코 이야기>를 문제 삼는 사람들을 두고 민족주의에 눈이 멀어 단순한 가해 사실조차 인정하지 못하고 반성하지도 못하는 덜떨어진 짓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누가 저질렀든 가해 사실은 정당화될 수 없고 가해자는 비난받고 단죄당해 마땅하다. 하지만 민족주의에 대한 과도한 경계 때문에 사실을 오인하거나 덜 익은 코즈모폴리턴으로 행세하는 건 민족주의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