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문학' 부활의 기지개 켜나

촛불집회·용산참사등 계기 새로운 형식의 작품 속속 등장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







1-21일 용산 재개발 지역 참사 현장을 찾은 난쏘공 조세희 작가가 현장을 둘러 보고 있다. /조영호기자voldo@hk.co.kr
2-시인 백무산
3-소설가 김숨 / 홍인기기자 hongik@hk.co.kr
4-소설가 김사과
5-소설가 이시영




지난해 촛불 집회 현장 / 류효진기자 jsknight@hk.co.kr
지난 달 용산 철거민 사태로 30여 년 전 발표된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회자되고 있다. 조세희 작가가 쓴 이 작품은 도시 재개발 뒤 숨겨진 저소득층의 처절한 삶을 그린 단편 소설. 조세희 작가는 아픈 몸을 이끌고 용산 현장에 나왔고 언론은 조세희 작가의 발언과 용산참사 현장을 앞다투어 보도했다.

이시영 시인이 1986년 발표한 시 '공사장 끝에' 역시 386세대를 중심으로 다시 애송된다. 국어 교사 김유정(36) 씨는 "용산 참사 후 이시영 시인의 시를 다시 읽는데 울컥하는 마음에 한동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고 말했다.

지난 해 촛불집회와 최근 용산참사 등을 계기로 참여문학이 다시 주목 받고 있다. 80년대 문인들의 작품을 비롯해 2000년대 발표된 작품 중 현실 참여의식이 뚜렷한 작품들이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2009 참여문학

용산 참사로 주목을 받는 것은 조세희 작가 뿐만이 아니다. 80년대 저항시인들은 새로운 경향의 참여문학을 선보이고 있고, 2000년대 한국사회의 한계를 지적한 젊은 작가들의 작품도 새삼 거론되고 있다.

중견 작가인 이시영 시인은 최근 용산 참사를 그린 시 '경찰은 그들을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를 창비 주간 논평에, 가자지구 사태를 비판한 시 '아, 이런 시는 제발 그만 쓰고 싶다'를 현대문학 2월호에 발표했다.

'불길 속에서 뛰쳐나온 농성자 3, 4명이 연기를 피해 옥상 난간에 매달려 살려달라고 외쳤으나 아무도 그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들은 결국 매트리스도 없는 차가운 길바닥 위로 떨어졌다. 이날의 투입 작전은 경찰 한명을 포함, 여섯구의 숯처럼 까맣게 탄 시신을 망루 안에 남긴 채 끝났으나 애초에 경찰은 철거민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철거민 또한 그들을 전혀 자신의 경찰로 여기지 않았다.'

(시 '경찰은 그들을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중에서)

이시영 시인 이외에도 80년대 대표적인 저항시인 백무산 씨가 지난 해 말 시집 <거대한 일상>을 출간했고, 장경린 시인은 '재개발 지역'이란 연작시를 2005년 잇따라 내놓은 바 있다.

2000년대 작가 중에는 박민규, 김애란, 손홍규, 김사과 씨 등이 부각된다. 모두 외국인 노동자, 청년실업, 사교육 문제 등 한국사회 다양한 문제들을 세련된 언어로 다듬은 작품을 선보인 작가들이다.

왜 다시 참여문학인가?

순수문학과 대치되는 참여문학은 흔히 '현실 참여의 정신을 강조하는 문학'성향을 일컫는다. 국내에서는 1950년대 전후세대 문학과 1980년대 민중문학(민중의 이익을 이념적으로 반영하는 문학)이 대표적인 참여문학으로 분류된다.

박수연 문학평론가는 "90년대 들어서면서 참여문학의 문학적 미학이 한계로 지적되고, 또 한편으로 참여문학을 하는 문인들이 주장했던 '문학이 정치적이어야 한다'는 논리가 미학적으로 완성되지 못한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을 포장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 쓰였다는 지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80년대 참여문학의 미학적 한계가 드러나면서 쇠퇴의 길을 걷게 됐다는 것이다. 90년대 동구권 붕괴나 소련의 해체 등 사회 변화도 참여문학 쇠퇴를 가져왔다.

90년대와 2000년대에는 '문학의 미학적 실험'이 문단의 화두로 떠올랐다. 문장과 단어 형식을 파괴한다든지, 서사를 파괴한 채 개인의 내면에 집중하는 작품이 등장하는 등 다양한 형태의 문학이 주목을 받았다.

최근 다시 현실 참여적 문학이 이목을 끌게 된 것은 새로운 형식의 현실 참여적 문학 작품이 속속 등장하는 것이 원인으로 꼽힌다. 80년대 참여문학이 문인들의 현실참여에서 비롯된 '사회 고발'적 성격이 강했다면, 2000년대 젊은 작가군은 현실의 문제를 소재로 빌려와 문학적 성취로 연결시킨 특징이 엿보인다.

박수연 평론가는 "과거 참여문학은 현장의 목소리를 얼마나 담아내느냐가 관건이었지만, 현재 작가들은 자신의 미적 완성도에 포커스를 맞춘다"고 분석했다. 그는 "기륭전자 투쟁현장에서 목소리를 내는 송경동 시인과 같은 몇몇을 제외하면 현장보다는 미학적 상상 속에서 작품을 쓰는 것도 최근 작가들의 특징"이라고 덧붙였다.

예를 들어 지난 해 말 출간된 김숨의 <철>은 '철'로 상징되는 산업사회 이면의 어두운 기억을 기록한 소설이다. 조선소 노동자들은 오로지 철선의 완성을 위해 도구처럼 쓰이다가 마모되고 쓸모없어지면 가차 없이 버려진다.

자본을 통한 물신화 과정과 자본주의 발전사 등 다분히 현실 고발적인 성격을 지니지만, 파편화되고 도구화된 개인을 주목한다는 점에서 80년대 참여문학과 차이를 보인다. 산업화의 어두운 이면을 고발하는 방식도 사실적인 묘사보다는 우화적 비유를 주로 쓴다.

얼마 전 2009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김연수의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은 촛불 집회의 단상을 드러냈고, 역시 이상문학상의 최종 후보로 같이 올랐던 조용호의 '신천옹'은 재개발지역을 무대로 펼쳐지는 소설이다. 그러나 이 역시 촛불집회와 재개발지역을 소재로 현대를 살아가는 개인의 고통과 일상을 드러낸다.

김형수 문학 평론가는 "80년대 참여문학은 연대기적 정체성을 드러낸다. 공동체, 집단에 대한 과제에 몰두하다 개인의 숨결을 손상시킨 부분이 있었다. 최근 젊은 작가들은 그런 강박관념에서 자유롭다. 현실과 접촉 속에서 소재를 찾아 건강한 미학적 소통을 만들어 내고 있다"고 말했다.

김사과의 소설 <미나>는 고등학생을 주인공으로 입시지옥으로 변한 오늘의 교육문제와 그들의 아버지인 386세대의 모순을 날카롭게 꼬집고 있다. 작가는 386세대의 지적, 윤리적 허영심을 '발가락만한 케이크'라고 묘사한다.

'그들은 없는 돈에 쪼들려가며 기어코 값비싼 디저트케이크를 가득 사서 대문에 덜어놓는 것으로 자신들의 하층계급의 삶을 감추고 기만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케이크는 천사의 날개같이 달콤하여 황홀하게 혀끝에서 녹으나 그 발가락만한 케이크만 빼면 아무것도 없다.' (소설 <미나> 중에서)

박민규의 소설 <지구영웅 전설>은 '겉은 노랗지만 정신은 하얀' 바나나맨을 통해 미국의 슈퍼특공대의 들러리가 된 친미주의자를 꼬집는다.

'내 이름은 바나나맨.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 아쿠아맨과 함께 이 지구를 지키는 슈퍼특공대의 일원이다!' (소설 <지구영웅 전설>중)

미국이 창조한 만화 속 영웅의 심부름을 하면서 뿌듯함을 느끼는 한국의 초등학생 '바나나맨'을 통해 반미(反美)의식을 선보인다. 무거운 주제를 담되 가벼운 그릇을 택했다.

참여문학 계속 될까?

그렇다면, 주목을 받기 시작한 2009년 참여문학이 과연 주류를 형성할 수 있을까?

전문가들의 의견은 분분하지만, '세태가 이렇게 전개된다면' 새로운 형태의 참여문학이 나올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김형수 평론가는 "그동안 미학적 실험과 모험이 핵심 주제였지만, 이명박 정부 들어서면서 '작가들의 미학적 실험이 공동체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동시대인과 호흡이 가능한 것인지 작가들이 질문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즉, 촛불시위와 기륭전자 시위, 용산 참사 등 잇따른 사회문제가 계속 출현하면서 작가들이 다시 현실 사회문제를 직시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다만 작가들이 갖는 사회 문제의식을 80년대와 같은 '주류 문학 경향'으로 연결시킬 수 있느냐는 아직 미지수다.

박수연 평론가는 "사회문제를 인식하는 것과 그것에 자신의 가장 절실한 삶의 영역으로 들어올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촛불에 대해 수많은 문인이 말했지만, 작품으로 확장시키는 문인은 보지 못했다. 아직까지 현재 문인들은 정치적 소신과 문학세계를 분리시켜 보지 않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시영 시인 인터뷰
"내가 시를 쓴 것이 아니라 현실이 시를 부른 것이다"

이시영 시인은 1969년 작품 활동을 시작한 중진 작가다. 1980년부터 24년간 (주)창비에 몸담으며 대표적인 민족문학 작가로 꼽힌다. 1982년도에 김지하 시선집 <타는 목마름으로> 출판으로 안기부에 연행되기도 하고, 1989년 <창작과 비평>이 복간된 이듬 해, 황석영 작가의 방북기를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실었다가 구속되기도 했다.

최근 용산 참사를 비판한 시 '경찰은 그들을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를 창비 주간 논평에, 가자 지구에서 펼쳐진 이스라엘 사태를 비판한 시 '아, 이런 시는 제발 그만 쓰고 싶다'를 현대문학 2월호에 발표했다.

- 80년대 작 '공사장 끝에'가 최근 다시 애송되고 있다. 당시 이 작품의 모티프가 됐던 사건이 있나?

= 그때는 철거가 많았다. 철거 현장의 단상을 쓴 것이지 특별히 어떤 사건을 염두하고 쓴 것은 아니다. 그 작품은 이미 20년 전의 작품이다.

- 시 '경찰은 그들을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를 비롯해 현대문학 2월호에도 시 '아, 이런 시는 제발 그만 쓰고 싶다'를 발표했다. 계기가 있나?

= 나 나름대로 새로운 시도를 한 것이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새로운 시도를 한 것이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새로운 민중시가 필요하다고 보았고 그런 시도를 해왔다.

- 최근 용산 참사와 관련해 철거민 문학, 참여문학이 다시 각광받는다고 말한다. 동의하는가?

= 한미 쇠고기협상, 용산 참사 등 민주주의의 퇴행을 보면서 지금 이 시점에 리얼리즘 문학이 더 필요하게 된 것 아닌가 생각한다. 문학이란 시대정신과 호흡 속에서 탄생한다. 시대와 함께 가는 것이다.

- 오랜 기간 창비의 주간으로 재직하며 누구보다 참여문학의 부흥과 쇠퇴를 지켜본 장본인이다. 20년 전의 참여문학과 지금의 젊은 작가들이 추구하는 문학, 차이가 무엇이라고 보나?

= 시대가 달라졌으니 민중문학 역시 정교해져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단순한 고발문학이 아니라 정교하게 정치 고발적인 문학이 탄생해야 할 시점이라고 본다.

- 용산 참사에 대한 본인의 시를 '새로운 형식의 참여문학'이라고 말했다. 2000년대 새로운 민중문학의 길이 열릴 것이라고 생각하나?

= 그런 문학이 나올 수밖에 없다. 본인이 시를 쓰겠다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시를 부른 것이다. 6명의 목숨을 앗아가고도 아무렇지 않은 이런 정권 하에서 시인들이 분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그런 작품이 많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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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행 - 정희성 

 

눈이 내린다 기차 타고 

태백에 가야겠다 

배낭 둘러메고 나서는데 

등 뒤에서 아내가 구시렁댄다 

지가 열일곱살이야 열아홉살이야 

 

구시렁구시렁 눈이 내리는 

산등성 숨차게 올라가는데 

칠십 고개 넘어선 노인네들이 

여보 젊은이 함께 가지 

 

앞지르는 나를 불러 세워 

올해 몇이냐고 

쉰일곱이라고 

그중 한사람이 말하기를 

조오흘 때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 한다는 

태백산 주목이 평생을 그 모양으로 

허옇게 눈을 뒤집어쓰고 서서 

좋을 때다 좋을 때다 

말을 받는다 

 

당골집 귀때기 새파란 그 계집만 

괜스레 나를 보고 

늙었다 한다 

 

 

- <돌아다보면 문득>(창비,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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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속 아버지는 항상 소와 함께였다”
이충렬 감독이 말하는 ‘워낭소리’
 
 
한겨레 이재성 기자
 








 

» 이충렬(43) 감독
 

이충렬(43) 감독은 “실감이 안 난다”고 했다. 3만~4만명이면 대박, 5만명이면 초대박인 독립영화계에서, 그의 다큐멘터리 영화 <워낭소리>는 3주 만에 15만명을 돌파했다. 이대로라면 50만명도 바라볼 수 있을 듯하다. 극장 관계자들은 “평일도 자리가 없어 보조석을 놓아야 할 판”이라며 즐거운 엄살을 떨고 있다.

이 감독이 영화의 인기를 실감하지 못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프리랜서 방송 피디였던 그가 애초 방송용으로 기획한 <워낭소리>는 방송사로부터 퇴짜를 맞은 작품이다. 제작자들도 “소 찍어서 돈 되겠냐”며 박대했다. 어렵게 나선 제작자마저 막판에 방송이 불가능해지자 손을 털고 떠났다. (그렇게 남들이 버린 작품의 가치를 알아본 이가 다큐 영화 <우리 학교>의 고영재 피디다.)


TV용으로 기획했다 퇴짜 맞아
제작자도 막판 손털고 떠나
설움딛고 3주만에 15만명 돌파
“아버지 향한 자식의 마음이죠”


이 감독이 방송사 입맛에 맞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이었다면 <워낭소리>는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 감독은 스스로를 “실패한 피디”라고 불렀다. 방송사와 좋은 관계를 맺지 못했다. 방송사가 보기에 그는 심각한 다큐만 만드는 사람이었다. 강원랜드를 배경으로, 폐광이 된 사북탄광 광부들의 뿌리 뽑힌 삶을 담은 다큐는 “선악 개념이 너무 강하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이 밖에 비전향 장기수, 종군 연예인 등을 찍은 수백 개의 테이프가 그의 집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여기에 들어간 돈만 1억원가량 된다.

미대를 가고 싶었던 이 감독은 “부모님께 효도해야 한다는 생각에” 꿈을 접고 고려대 교육학과에 들어갔다. 그러나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했다. 대학 졸업 뒤 애니메이션 일을 하다 방송으로 넘어왔다. “프리랜서 피디라는 게 쇼든 뭐든 닥치는 대로 찍어 납품해야 하는 처지”였다. 갈수록 감동적인 대작을 만들고 싶은 욕망이 커졌다.

몸과 마음이 피폐해져 있던 30대 중반, 그는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해보겠다고 결심했다. “나이 먹도록 결혼도 못하고, 돈도 못 벌고, 자주 떠돌아다녀 아버지께 늘 죄송스러웠다.”




그의 아버지는 지금도 고향인 전남 영암에서 농사짓고 가축을 기르고 있다. 이 감독 세대가 대개 그렇듯, 그 역시 “아버지와 의사소통할 방법을 찾지 못했고, 그런 먹먹함을 작품에 담고 싶었다.” 이 감독을 <워낭소리>로 이끈 동력은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이었던 셈이다. 그는 “이 영화는 결국 나에 대한 질타일 수도 있다”며 “우리들의 아버지에게 바치는 자식들의 마음이라고 생각해 달라”고 말했다.

아버지를 소재로 영화를 만들겠다고 생각하니, 가장 먼저 떠오른 이미지가 소의 워낭 소리였다. 그는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노동에는 언제나 소가 함께 있었다”고 했다. 전국의 우시장을 돌아다닌 지 5년 만에 찾아낸 최원균 할아버지와 소는 “온전치 않은 소소함의 위대함, 황혼의 내리막길을 담고 싶었던” 이 감독이 머릿속으로 그렸던 이미지 그대로였다. 할아버지는 문맹이었고, 다리를 절었으며, 귀도 잘 들리지 않았다. 소는 가장 오래 살았고, 잘 걷지 못했다. 할아버지의 인생은 소와 함께한 인생이었다. 남의 집 소를 길들여주는 ‘소 아버지’ 일을 8년이나 했고, 우시장 중매인으로 일한 적도 있다.


 

» 〈워낭소리〉
 


할아버지가 소와 닮았듯, 이 감독도 소와 닮았다. 우직하고 뚝심 있는 성격은 영화에 고스란히 투영돼 있다. 할아버지를 처음 만난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도록 하는 데만 여섯 달이 지나갔다. 제작 기간은 2005년 3월부터 2007년 봄 무렵까지 햇수로 3년이 걸렸다. 마치 연출한 것처럼, 할아버지와 소가 지나는 길목에서 기다렸다는듯이 ‘멀리 찍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감독이 오랜 기간에 걸쳐 그들의 동선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호흡이 느리지만, 경박한 카메라 움직임으로는 잡을 수 없는 아름다운 영상을 담을 수 있었다. 이 감독은 “일을 방해하지 않고 지켜보자는 전략이 맞아떨어졌다”고 말했다.

그는 얼마 전 할아버지 댁에 다녀왔다. 할아버지는 그새 ‘젊은 소’(영화에서 이 녀석은 늙은 소를 구박하고, 일도 하지 않는다)를 완벽하게 길들였다. 반가워 인사하는 그에게 할아버지는 “그만 때려치워 버려”라며 화를 냈다고 한다. 영화가 입소문을 탄 뒤 언론사뿐 아니라 관광객들까지 찾아와 귀찮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그 모든 사람들을 이 감독이 보낸 것으로 알고 있다. “돈 많이 벌었냐, 돈 안 빌려주면 쳐들어간다”는 협박 전화를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이 감독은 “처음 촬영할 때부터 할아버지 할머니께 누가 되지 않도록 조심했는데, 조용하게 사시던 분들에게 부담을 드려 너무 죄송하다”며 “두 분을 제발 괴롭히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글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사진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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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끊임없이 포르노를 찾는 이유?
<칼럼>한계효용과 포르노 그리고 불황 마케팅
2009-02-10 10:56:10 휴대폰전송기사돌려보기인쇄하기

최근 발간된 경제학 서적을 보니 사람들이 끊임없이 새로운 포르노를 구입하는 이유에 대해서 풀어놓은 대목이 있었다. 그 책은 사람들이 컴퓨터에 포르노물을 잔뜩 저장하고도 새로운 포르노물을 끊임없이 찾는 이유를 설명했다. 이유는 한계 효용 때문이라고 했다.

맨 처음 먹는 음식은 맛있지만, 먹을수록 맛이 없고 질리게 된다. 한계효용이 체감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처음에 보는 포르노는 몰입하게 만들지만 갈수록 질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새로운 포르노물을 원하게 되고 그 수준도 더 강력해진다고 본다. 이 때문에 김본좌같은 사람들이 활개를 치는 것이라고 본다. 부분적으로 맞는 풀이일 수 있다. 포르노물에 대한 풀이는 감각을 자극하는 불황기 마케팅과 연결되는 점이 있다.

그렇지만 한계효용만으로 분석되는 것만은 아니다. 다 드러내는 포로노가 아니라 관능적인 콘텐츠가 여전히 극장가에서 화제가 되는 것은 다른 심리적 메커니즘이 작용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포르노물이 넘치는데도 사람들은 은유적이고 관능적인 영화를 찾는 것이다. 욕구의 피드백 현상이다.

즉 사람의 욕구는 음과 양의 욕구가 순환하는 유기체적인 모습을 보인다. 한계효용 이론은 갈수록 질리는 현상만 말을 하지, 질리다가도 다시금 욕구가 생기는 유기체적인 순환의 메커니즘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예컨대 지금 밥을 많이 먹어서 더 이상 밥이 맛이 없어도 몇 시간이 지나면 밥을 애타게 찾는다. 또한 매일 밥을 먹다가 싫증이 나서 라면을 먹다가도 다시금 밥이 생각난다. 무엇보다 마니아 예술이 아닌 대중문화 콘텐츠는 밥과 같은 주식이 아니므로 질리면 아예 버린다. 요컨대, 자극만이 능사는 아닌 것이다.

요즘 대중문화 콘텐츠나 경영마케팅 차원에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웃음과 감동이라고 한다. 불황일수록 감수성이 예민해지기 때문이라는 전제에 따른 것이다. ‘과속스캔들’의 성공, 그리고 ´아내의 유혹´과 ´꽃보다 남자´ 같은 판타지 드라마들이 인기를 끄는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 풀이 된다. 현실이 너무 진지하고 우울하거나 불안하기 때문에 재밌는 것이나 장밋빛 꿈을 현실화시켜주는 내용이 눈길을 끈다는 것이다.

분명 감동과 웃음을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맞다. 많이 볼수록 그만큼 질리게 되고 더 강력한 것을 원하게 된다. 문제는 막차를 타는 것이다. 판타지도 마찬가지다. 판타지가 각광을 받는다고 그것에 뛰어드는 것은 막차를 타는 것과 마찬가지다. 막장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강력한 막장 드라마가 한번 휩쓸고 가면 웬만한 막장드라마가 아니고서는 사람들의 눈길을 잡아두지 못한다. 천만관객을 동원하는 영화 뒤에는 웬만한 작품이 아니고서는 대중의 눈길을 잡아끄는 대박영화가 나올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대박콘텐츠 뒤에 사람들은 더 강한 재미와 감동의 콘텐츠를 원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질리면 더 이상 찾지 않게 된다. 이제는 단순히 감각적이고 감수성을 자극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눈길을 주는 시점은 지났다. 무엇보다 머릿속에서만 만들어진 재미와 감동의 요소 때문에 사람들이 눈길을 주지는 않는다. 현실적으로 제작자들이 따라갈 수도 없다.

자극의 강도를 높이는 것은 한계가 있는 것이다. 감성 자극의 강력함이 아니라 패러다임을 차별화해야 한다. 요컨대, 불황기라고해도 이제는 선정적이거나 자극적인 장면, 단순 코미디 콘텐츠로는 성공하지 못한다. 단순히 끊임없이 새로운 여배우들이 등장시켜 벗기거나 동성애와 같은 새로운 성적인 소재만이 능사는 아니다. 벌써 그같은 콘텐츠는 넘치고 있다.

영화 ‘워낭소리’의 성공은 진지하면서도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달해주기를 바라는 대중심리를 알 수 있다. ´워낭소리´의 할아버지와 소는 유일무이하다. 대체불가능성이다. 또한 이충렬 감독은 오랜 기간 고향프로그램으로 다진 네트워크를 통해 그 같은 차별화된 콘텐츠를 만들 수 있었다. 그 네트워크도 아무도 흉내낼수있는 것이 아니라 온갖 고생의 축적이다.

사람들은 최양락의 개그처럼 삶이 켜켜이 묻어 있는 생활개그를 원한다. 이러한 개그는 순간적인 재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산전수전 다 겪은 인생 경험이 농축된 어른 개그이다. 아이 개그만 있던 예능판에 희소성의 가치를 발해 인기를 끌었다. 최근 인기를 끈‘차마고도’를 비롯한 텔레비전 다큐들의 특징도 모두 차별화된 아이템과 다년간의 심도 있는 노고의 촬영이 독보적인 컨텐츠를 낳게 했다.

‘과속스캔들’은 재미와 감동이라는 코드만을 생각하고, 오랫동안 고민했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다. 갑자기 불황의 코드에 영합하거나 우연히 맞아떨어졌다고만 할 수는 없다. 이 같은 점은 영화 ‘유감스러운 도시’가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을 내는 이유다.

불황과 경제위기에는 가족이나 아버지에 콘텐츠가 인기를 끌 것이라는 예측이 많다. 그러나 최근 엄마에 관한 작품들이 눈길을 끌고 있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는 베스트셀러 1위 자리에서 내려올 줄 모른다.

강부자와 전미선이 출연하는 연극 ´친정엄마와 2박3일´은 쟁쟁한 경쟁작을 물리치고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작년 연극 ´잘자요, 엄마´도 모녀관객의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낸 바 있다. 봉준호 감독은 ´마더´라는 작품으로 다시 돌아온다.

이같은 엄마 콘텐츠는 엄마의 전생애적인 삶이 잘 형상화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것은 대체 불가능한 차별성을 의미한다. 또한 불황기에 이미 아버지에 대한 콘텐츠가 유행을 했기 때문에 대중은 그것에 덜 눈길을 주었다.

대중이 원하는 것은 단순한 재미와 감동, 그리고 감각성의 강도 높은 수위가 아니다. 포르노물처럼 자극의 강도를 높이면 한계효용을 맞춰갈 수 있는 차원에서 생각하기도 힘들다. 필요한 것은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독자성과 차별성이다. 그것은 불황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한국대중문화콘텐츠가 지상과제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 독자성과 차별성은 결국 우리의 삶 그 밑바탕에서 출발한다.

[김헌식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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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창의성 부르는 ‘오감자극 매체’ / 홍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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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보면서 책장을 넘기며
디자인된 그림이나 텍스트 디자인으로
맛과 냄새, 소리까지 전이돼 오감 열려
북디자인도 오감적 접근 독자마음 잡아야


21세기 감성시대가 되면서 창의성에 대한 관심이 확대되고 있다. 이에 창의성을 키우는 교육이 부각되면서 다양한 교재와 교육 프로그램들이 선보이고 있다. 21세기 창의성은 나만의 독창적인 이야기를 만드는 능력이라 볼 수 있는데, 필자는 여기에 가장 적합한 교육매체가 책이라고 여긴다.

책은 지식과 정보, 감정을 전달하는 삼차원 이상의 시공간적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독자가 책장을 손으로 넘기면서 작가와 소통하는 공간이다. 책을 여는 순간 책의 주제와 작가의 의도, 콘셉트와 분위기가 독자의 감정을 통해 전달된다. 책에선 이미지와 텍스트가 여러 조형요소와 함께 한 편의 이야기를 만든다. 책의 시공간적 성격은 책장을 넘기는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책의 이야기 구조에 빠지게 만든다.

특히 그림책의 경우, 그림의 연속성으로 부분의 합이 전체를 영화 같은 내러티브로 형성한다. 책의 특성인 문학과 예술이 만나 하나의 종합예술적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미지와 텍스트가 서로 보완하여 이야기를 만들고, 또는 독자가 이미지와 텍스트를 새롭게 해석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기도 한다. 독자가 상상력을 동원해 작가의 마음을 읽으면서 다양한 해석을 하는 동안 창의성이 촉발된다.

이렇게 책에서 해석을 하며 이야기를 만드는 동안 그 어떤 매체보다 창의성이 촉발되는 것은 책 매체와 인간의 감성이 가장 밀접하기 때문이다. 책은 인간에게 신체적으로도 가장 친밀하고 오래된 정보매체라는 점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디지털시대의 컴퓨터가 생활의 일부가 되면서 독자들의 책에 대한 요구는 자연히 달라졌다. 독자들은 컴퓨터와는 성격이 다른 책에서 인간적 감성을 더욱 절실히 원하고 있다. 독자들은 책에서 정보만 전달받는 것이 아니라, 책을 넘기면서 느끼는 아날로그적 감성 체험까지 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북 디자이너는 이런 독자들의 감성적 요구를 인식해야 한다. 그런데 감성적 접근을 하기 위해 북 디자인에 필요한 것은 오감이다.

책은 그 어떤 매체보다 오감적이다. 오감이란 인간이 가진 다섯 가지 감각 모두를 말한다. 우리는 책을 눈으로 보면서 손으로 책장을 넘긴다. 적절하게 디자인된 그림이나 텍스트 디자인으로도 맛과 냄새, 소리가 느껴진다. 곧 책을 경험하는 과정에 오감적 활동이 진행된다. 시각에서 청각으로, 청각에서 촉각, 촉각에서 미각과 후각으로의 감각 전이와 혼합으로 오감적 지각경험을 하게 된다.

과거에는 오감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고대에는 오감을 인간에게 매우 유익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오감을 예술의 원리, 철학의 원리의 기초 틀로 사용하였다. 특히 중세시대는 필사본에 시각·청각·촉각을 사용한 결과 아름다운 현대 북 아트의 형태를 탄생시켰다. 이런 이유로 중세시대 필사본은 북 디자인의 르네상스로 평가된다. 이렇게 북 디자인에 시각과 청각, 촉각을 동시에 사용하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학습에 효과적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감각을 많이 사용하게 하면 할수록 이해가 잘되고 기억에 오래 남게 하기 때문이다.




책 중에도 오감과 가장 관련 깊은 것은 바로 어린이 그림책이다. 아이들은 그림책을 눈으로만 보지 않는다. 그림책을 만지면서 보고, 이야기를 들으며 상상하면서 읽는 습성이 있다. 필자는 이러한 오감이 들어 있는 그림책으로 아이들에게 프로그램을 만들어 시험해 보았다. 그 결과, 오감이 들어 있는 그림책은 아이에게 상상력을 촉발해 감각을 향상시키고 어휘력을 증진하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곧 그림책을 통한 아동의 오감 체험은 창의력을 확장시키며 미적 경험까지 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여기에 미적 경험은 아동기 어린이만이 가지고 있는 공감각성을 자극하여 감각의 황금률로 창의적으로 직조하는 능력과 관련된다.

결국 책 매체는 창의적인 생각을 갖게 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잘 직조하는 교육적인 효과가 있다. 이렇게 오감으로 이야기하고 디자인된 책은 독자에게 미적 경험을 하게 하여 강력한 감성을 자아낼 수 있다. 감성시대의 북 디자인은 달라져야 한다. 감성을 주어야 한다고 해서 북 디자인을 단순히 미적으로 디자인하는 것과는 다르다. 독자에게 내용에도 없는 색상이나 장식으로 독자를 혼란스럽게 하면 안 된다. 오감 디자인으로 독자의 취향과 요구를 고려하여 내용과 형식으로 진솔하게 전해 주어야 그들의 감성에 호소할 수 있다. 여기에 독자의 상상력을 통해 해석할 수 있는 오감 스토리텔링으로 재미를 주면 시너지 효과가 높아진다.


홍혜연/계원디자인예술대 출판디자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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