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인간 연습
조정래 지음 / 실천문학사 / 2006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가끔 말 그대로 '大河'에 빠지고 싶은 충동이 일 때, 붙잡게 되는 책들이 있다. <임꺽정>, <장길산>, <태백산맥> 3부작 등... 한 열흘 정도는 항상 토끼눈을 하고, 그래도 또 날밤을 새우게 하는 책들...
<한강> 이후 오랜만에 조정래의 장편을 만났다. 분량만으로 장편은 하나의 '큰' 업적으로 평가되기는 하나 작가 조정래에게 장편은 외려 가벼운 '외출'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는 이미 질곡의 현대사를 방대한 분량의 대하소설로 일궈낸 작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1993년 남북 정권의 합의에 의해 북송된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선생. 이 작품은 그러한 과거 치유(현실적 계산도 물론 고려된 조치이긴 하지만)의 뒷그늘에서 더욱 고통스러웠을 '전향' 장기수를 통한 현실읽기이다. 수감기간만으로도 이미 세계 최장기 양심수들을 배태한 분단현실의 암울한 그림자이다.
기존의 고정간첩과의 접선계획도 없이, '서점'을 차리기 위해 남파된 윤혁. 순진하게 학교동창에게 접근했다가 어떠한 실적도 내지 못하고 잡혀서, 모진 고문 속에 무기수 판결을 받고 투옥된 주인공. 살인적인 전향공작에 떠밀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전향서를 날인을 하고, 그로 인해 주어진 한정된 자유공간에서 아이들을 통해 새로운 '희망'의 싹을 본다는 줄거리는 그들의 순결한 '생애'에 비해서는 다소 긴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러나...
"알아요, 다 알아요. 강제로 그렇게 된 것, 아니 거짓말로, 그게 아니고, 그걸 뭐라고 해야 되나, 그래요, 그놈들이 가짜로 만든 것 다 알아요. 박 동지가 꺽이지 않고, 항복하지 않았다는 것도 다 알아요. 설령 박 동지를 오해하고 멸시하는 사람들이 있어도 그건 그 사람들 잘못이에요... 나 같은 놈도 사니까, 그 일 다 잊어버려요."(22~23)
생을 마감하면서도 '전향서에 손도장을 누른'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그러나 자신의 순결한 정신을 훼절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누군가로부터 확인받고자 하는 그 의식은 분단이 개인에게 강요한 가혹한 희생을 대변한다.
'몸이 그렇게 되는 동안 주인 여자가 말한 사흘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전혀 시간 감각이 없었다. 차라리 그대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문득 스친 생각이었다. 죽음..., 인생의 끝..., 별로 두려운 생각이 없었다. 북쪽을 떠나면서부터, 남쪽에 침투하고, 검거되고, 조사 받고, 긴 세월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 얼마나 많이 생각했던 것인가. 이 세상에서 죽음을 가장 많이 생각하고 언급하는 직업이 철학가고 종교인들이겠지만 그 절박함과 밀도에 있어서 자신들을 당할 수 있을 것인가. 어쩌면 자신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급박하고 절실하게 죽음을 생각한 부류들이 아닐까. 그렇게 해서 정리된 죽음은, '영원한 잠'이었다. 그 영원한 잠을 혼수상태와 다름없었던 지난 사흘 동안에 얻을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61~62쪽)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삶의 조건 앞에서, 한 평이 채 안되는 독방에 갇인 무기수에게 남겨진 '시간'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세계적으로 최장기 수감기록을 남긴 이 땅의 '비전향 장기수'는 과연 그들만의 상처인가, 분단의 상황이 종결되기까지 우리는 그러한 상처를 보듬고 치유하며, 아직도 가려진 어둠의 그늘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는 숙명임을 새삼 깨닫게 하는 책읽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