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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원사의 김분하 편집부장. |
‘빛깔있는 책들’이란 시리즈를 기억하시는지? 짚 문화, 팔도 굿, 옹기, 한국의 석등, 한국의 정자, 한국의 토종개, 꽃담, 토우(土偶), 옛 기와, 전통주, 다비와 사리, 한국의 가사(袈裟), 태껸, 대나무, 중요 무형문화재, 고려청자 같은 ‘돈 될 것 같아 보이지 않는 책들’이 바로 ‘빛깔있는 책들’이다.
전통문화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눈에 알리라. 이런 종류의 책이 얼마나 소중한지, 하지만 얼마나 상업성이 없는지를…. 서울 용산구 후암동, 남산자락에 자리한 대원사는 바로 이 분야에 16년간 천착, 한국의 전통과 문화에 관한 책 400여종을 발행해 온 전문출판사다.
1989년 100쪽 안팎의 분량으로 첫선을 보인 ‘빛깔있는 책들’의 특징은 수려한 사진과 그래픽. 한두 쪽 넘길 때마다 어김없이 들어있는 상세한 사진과 그림은 활자를 읽지 않더라도 책에 담긴 내용이 무엇인지를 쉽게 알 수 있게 해준다. 작년부터 서구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보는 책’의 원형인 셈이다. 매니아들의 정보 욕구를 반영, 최근엔 170쪽 남짓 분량이 늘긴 했지만 화려한 비주얼은 여전하다.
‘빛깔’의 특징은 그것만이 아니다. 2800원(1989년)이란 파격적인 가격이 또 하나다. 인상된 물가와 제작비를 반영, 3500원→ 4800원→ 6400원으로 서서히 오르긴 했지만 아직도 이 책의 가격은 8500원에 머물러 있다. 도감 형태로 나온 비슷한 분야의 책값이 수만원대란 점에 비하면 여전히 싸다.
동국제강 창업자 장경호 회장의 유지
“대원사는 동국제강 창업자 고 장경호(張敬浩) 회장의 유지를 좇아 설립된 출판사입니다. 불교에 관심이 컸던 장 회장은 한국의 불교를 널리 알리기 위해 ‘대원회’란 포교단체를 만들고 ‘대원정사’란 재단을 세워 장학사업을 폈습니다. 대원(大圓)은 그 분의 아호(雅號)입니다.” 김분하(39) 편집부장이 대원사의 설립 배경에 대해 말했다.
“고 장 회장의 2남인 장상문(張相文·작고) 전 사장은 UN대표부 대사를 지낸 외교관 출신입니다. 오랫동안 외국 생활을 한 장상문 전 사장은 ‘한국을 외국에 소개할 자료가 부족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계셨어요. 그래서 선친의 유지를 따라 사재 10억원을 투자해 1989년 대원사를 세웠습니다. 본격적으로 전통문화 알리기에 나선 것이죠.”
현재 대원사를 이끌고 있는 사람은 장상문 전 사장의 장남인 장세우(張世宇) 사장. 그는 입원 중이어서 인터뷰에 응하지 못했다. 김 부장의 말이 이어졌다.
“출판사 설립취지가 ‘널리 알리자’는 것이었으니까 당연히 책값을 비싸게 정할 수 없었어요. 장상문 전 사장은 ‘책값을 1000원으로 하자’고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그 가격으로는 도저히 책을 낼 수 없다’는 반대에 밀려 결국 2800원으로 값이 정해졌죠. 하지만 품질에 대한 요구는 절대 낮지 않습니다. 미술사학자 진홍섭 연세대 교수, 불교미술사학자 황수영 동국대 교수, 한옥문화원의 신영훈 대목장(大木匠) 등 전문가들이 편집위원으로 기획단계부터 참여해 날카롭게 품질을 평합니다.”
기획이 정해지면 다른 출판사와 마찬가지로 저자와 사진작가를 섭외하고, 원고 작업에 들어간다. 그런데 이 과정이 만만치 않다.
“저희는 책의 특성상, 봄·여름·가을·겨울 4계절이 전부 다 지면에 담겨야 합니다. 그러니까 촬영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죠. 공예나 무형문화 같은 경우엔 만드는 과정, 익히는 방식 등 전 과정을 모두 보여주려 합니다. 사진을 강조하는 만큼, 인쇄 후에도 여러차례 사진 교정을 반복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수차례 원고를 수정하고 교열합니다. 원하는 함량을 담을 때까지 이 과정을 계속 되풀이합니다.”
이러니 책 한 권 내는 데 드는 시간이 오래 걸릴 수 밖에 없다. 김 부장은 “그렇게 하다 보니 지난해엔 ‘빛깔있는 책들’을 한 권도 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타이밍과 스피드가 좌우하는 요즘 베스트셀러 시장에서 ‘열외’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아마 베스트셀러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출판인은 거의 없을 겁니다.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저희는 시장성보다는 품질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사실 베스트셀러는 단기 이익을 노리고 기획하는 것입니다. 광고를 크게 내면서 소위 말하는 ‘밀어붙이기’ 작업을 병행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책값을 올려야 하고 제작시간을 단축해야 합니다. 저희들 방식과는 맞지 않습니다.”
대원사는 광고를 하지 않는다. 원가를 줄이기 위해서다. “광고를 내면 한동안 반짝하긴 합니다. 하지만 저희가 내는 책은 특성상 그 효과가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장님도 ‘광고하는 데 드는 노력을 책 만드는 데로 돌리자’고 하셨어요. 그래서 2~3년 전부터 광고를 전혀 하지 않습니다.”
‘빛깔’ 시리즈를 포함해 대원사가 낸 400여종의 책 중 가장 많이 팔린 것은 3만8000부가 나간 ‘약용식물’과 ‘집에서 기르는 야생화’다. 하지만 “가장 적게 나간 것도 7000~8000부는 팔렸다”고 하니, 대부분의 책들이 10년 이상 꾸준히 팔려나가는 스테디 셀러라 할 수 있다.
이훈 관리부장이 말했다. “2003년 총매출액이 6억원, 2004년엔 5억4000만원입니다. 9명의 직원(사장 포함)이 꾸려가는 것치고는 빠듯한 규모입니다만 현상을 유지해 갈 수는 있습니다.”
김분하 편집부장이 말을 받았다. “저희 책은 매년 20만~30만권 가량 꾸준히 팔리고 있습니다. 저희 노력을 알아주시는 독자들이 계셔서 감사할 뿐이지요.”
대원사는 민속, 고미술, 전통음식, 불교예술 등 한국 문화를 분야별로 정리한 ‘빛깔있는 사전(가제)’을 준비하고 있다. 이것 역시 상업성과는 거리가 있다.
“전통문화 관련 용어가 어럽다는 분들이 계세요. 학생들도 그렇고요. 그래서 관련 용어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누구나 손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한 일종의 ‘용어사전’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베스트셀러보다 스테디셀러 추구
대원사의 꿈은 현재까지 나온 256종의 ‘빛깔있는 책들’을 500권으로 늘리는 것. 김 부장은 “요즘엔 인터넷의 영향으로 웬만한 정보는 다 얻을 수 있다”며 “그것과 차별화를 꾀해보려 한다”고 말했다. “인터넷에서 찾을 수 없는 정보를 골라 기대수준에 맞게 책을 내 우리 전통문화를 널리 알리고 싶습니다. 물론 해외 수출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심혈을 기울여 만든 책을 낱권으로 수출하고 싶진 않습니다. 가급적이면 현지 법인을 통해 ‘빛깔있는 책들’ 전체를 외국에 소개하고 싶다는 것이 저희 생각입니다.”
김 부장은 “우리의 문화를 널리 알리자는 것이 대원사의 취지인 만큼 책을 너무 전문적으로 내진 말자는 생각”이라며 “대중성을 고려해 너무 어렵지 않도록 하려 한다”고 말했다. 대원사가 2004년 낸 ‘목가구’(국립민속박물관 지음)는 올 10월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선보일 ‘아름다운 책 100권’ 중 하나로 선정됐다.
이범진 주간조선 기자(bomb@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