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출판사를 찾아서 (3)] “출판을 통해 세상을 바꾼다”
10여년간 수소문제 다뤄온 `연매출 1억원` 미니 출판사... "현실 어려워도 타협 안할 것"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1933~), 존 홀러웨이(John Hollaway·1947~),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1960~), 펠릭스 가타리(F. Guattari·1930~1992), 질 들뢰즈(Gilles Deleuze·1925~1995)….

▲ `갈무리`의 조정환 공동대표
생소해보이는 이름의 주인공들은 현 시대를 대표하는 좌익 이론가들이다. 이들은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와 차별화를 선언, 여성·마이너리티·실업·금융자본 등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연구해온 유럽의 학자이자 행동가들. 도서출판 ‘갈무리’는 이들과 함께 호흡하는 진보주의 전문 출판사다.

“우리는 이탈리아나 영국의 진보주의를 국내에 소개·적용하고, 한국 사회를 변화시키는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전통적 마르크스주의를 재구성하는 새로운 실험을 책을 통해 담아내고 싶은 것이죠. 마르크스 사상의 한계를 넘어서는 또 다른 무엇을 찾아보려는 시도입니다.”

‘갈무리’의 조정환(50) 공동대표가 말했다. “저희는 형식적으로 독립출판사를 지향합니다. 여기서 독립이란 자본과 국가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합니다. 좀 어려운 점이 있더라도 이윤추구로부터 벗어나서 표현하고 싶은 것을 표현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사실 1980년대만 하더라도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 사이엔 ‘당(黨) 출판’을 지향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노동자 정당을 건설하기 위한 이념적 준비과정으로 출판을 바라본 결과였죠. 그런데 1991년 소련 사회주의가 붕괴되지 않았습니까? 이를 계기로 ‘당 출판’에 대해 부적절하다는 인식이 공감을 이루게 됐습니다. 차라리 민중의 삶 속으로 들어가자, 그래서 그들의 고민과 쟁점을 담아내는 ‘삶 출판’ 쪽으로 전환하자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배적 위치를 갖고 있는 대형 출판사와는 성격을 달리하는, 소수 마이너리티 출판사가 필요했습니다. 민중의 자기표현을 제대로 담아내는 독립 출판사가 돼야 했던 것이죠.”

조 대표는 “갈무리는 노동자의 목소리를 육성 그대로 담아내려 한다”며 “소수의 목소리를 싣는 ‘마이너리티 총서 시리즈’를 내는 것도 이러한 노력의 하나”라고 말했다. 그는 “시장성은 없지만 지식인의 필터링(filtering)을 거치지 않고, 소수의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전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사노맹’ 관련 9년간 수배생활

서울대 국어교육과 75학번인 조정환 대표는 2개의 이름을 갖고 있다. 조정환은 그의 본명. ‘소련의 해체와 그 이후의 동유럽’ ‘오늘의 세계경제’ 등 여러 권의 책을 번역한 역자 이원영은 그의 또 다른 이름이다.

“1990년 사노맹 사건과 관련해 수배됐었습니다. 당시 저는 ‘노동해방문학’이란 월간지 주간 겸 편집위원을 맡고 있었는데, 공개수배로 활동이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이원영이란 가명으로 번역 작업을 했죠. 그러다가 후배 서창현과 함께 ‘출판을 통해 의미있는 작업을 해보자’며 의견의 일치를 봤고, 그 결과 1994년 출판등록을 하게 된 것입니다.”

사노맹 사건이란 1990년 10월 30일 안기부가 발표한 것으로,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이란 혁명조직이 무장봉기를 통한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고, 사회주의 노동자계급의 전위정당 건설을 추진했다’는 사건. 당시 안기부는 “사노맹은 노동자계급전위당 건설을 위한 1차 단계로 포항제철 등 전국 50여개 공장 및 노동자단체에 230여명의 소조원을 침투시켰으며, 서울대 등 40여개 대학에 침투해 1000여명의 조직원을 확보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박노해’란 필명으로 유명한 박기평씨, 백태웅씨 등 50여명이 구속된 이 사건과 관련해, 조 대표는 1999년 12월 수배가 해제될 때까지 9년 남짓 도피생활을 했다.

“조금씩 돈을 모아 500만원을 마련했습니다. 출판사를 차리기엔 부족한 금액이었죠. 보수는 없었습니다. ‘노동해방문학’ 식구들이 한푼도 받지 않고, 오히려 필요한 물품은 각자 알아서 조달해가며 일을 했습니다. 자금은 오로지 제작에만 투여됐습니다. 그랬는데도 딱 3권을 찍으니까 돈이 떨어집디다. 그때 후배 서창현의 장인께서 소를 팔아 4권째 책을 찍을 비용을 대주셨습니다. 그렇게 찍어낸 책이 ‘소련의 해체와 그 이후의 동유럽’입니다.”

지금까지 ‘갈무리’가 낸 출판물은 약 80종. 조 공동대표는 “공식 출판한 단행본이 60~70여종, 출판사 이름을 넣지 않고 펴낸 운동권 서적이 약 20종 된다”고 말했다.

“돈이 최고”라는 주장에 동의 못해

현재 ‘갈무리’의 연매출 규모는 1억원이 채 되지 않는다. 6명의 식구(6명 중 장민성 공동대표와 정남영 이사는 다른 직업을 갖고 있다)가 출판업을 지속하며 생계를 꾸려가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나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적자죠, 뭐. 처음 3년 정도는 돈을 가져가지 않고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1997년부터 또 한 3년 동안은 학원교재 제작 등의 아르바이트를 통해 적자를 메웠습니다. 그러다가 ‘아우또노미아’가 좀 팔려나가면서(약 2000부) 출판방식에 변화를 줘서 약간이나마 활동비를 가져가고 있습니다.”

‘갈무리’에서는 월급이라는 말 대신 ‘활동비’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조 대표가 말을 이었다. “그래도 많이 좋아진 것입니다. 500만원을 갖고 시작한 것이 지금은 전체 자산규모가 6억~8억원 가량 되니까요. 2003년부터 지금까지 투자한 것이 1억원 가량 됩니다. 저희 책의 성격이 학술·철학적 성향이 강한 만큼 매출은 높지 않습니다. 넉넉하진 않지만 다른 사회과학 출판사처럼 경제·경영서를 낸다든가, 아동·참고서를 내는 쪽으로 방향을 돌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돈을 벌기 위한 것이 목적이라면 굳이 출판업을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니까요. 저부터 그렇습니다. 다른 출판사에 가서 번역을 하면 번역 원고료를 받거든요. 하지만 여기서 내면 제게 돌아오는 원고료는 전혀 없습니다.”

조 대표의 목소리가 강해졌다. “그렇다면 ‘출판을 왜 해야 하느냐’ 하는 질문이 나옵니다. 요즘 대중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대중성이 높은 책 중에는 세상에 큰 도움이 못되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돈이 최고라고 한다거나, 출세가 전부인 것처럼 주장하는 책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의 대중성은 추구하고 싶지 않습니다.”

조 대표는 “인문사회과학은 인간을 성장시키는 자양분”이라며 “이 자양분을 키워가려는 사회의 노력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그는 그런 의미에서 “각 자치단체 단위의 도서관에서 사회과학 분야의 출판물을 활발하게 구입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범진 주간조선 기자(bomb@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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