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희망의 문화인 ⑷] 그물코 출판사 장은성 사장
[국민일보 2005-01-13 17:56]

“4년전 첫책을 낼 때에 비하면 시장이 많이 달라졌어요. ‘녹색시민 구보씨의 하루’같은 책은 1만부가 팔렸지만 지금 그 책을 낸다면 1000부나 나갈려나. 출판계가 전반적으로 힘들지만 특히 인문시장은 거의 죽어버렸어요.”

국내에서 보기 드문 생태환경 전문 출판사 ‘그물코’의 장은성(36) 사장. 출판사 창고에서 재고정리 담당으로 출발한 그는 8년만에 선배가 운영하는 사무실 한켠을 빌려서 독립했다. 2002년 3월에는 첫책 ‘녹색시민…’을 냈다. 폭발적인 베스트셀러는 아니어도 해마다 꾸준히 7∼8권씩 알찬 책을 만드는 곳으로 입지를 굳히는가 했더니,그만 지난해 중소규모의 출판사들을 덮친 사상 최악이라는 쓰나미에 휩쓸려버렸다.

처음에는 집에 가져가는 생활비가 줄더니,달랑 한명 있는 직원의 월급도 제때 나가기 어려워졌고,전화요금을 못내 사무실 전화가 끊겨버렸다. 종이 살 돈이 없어서 준비해둔 신간이 늦어지는 일도 있었고,아예 책을 못찍는 경우도 생겼다. 지난해 봄 생태주의 생물학자 레이철 카슨의 평전을 원고까지 모두 끝내놨지만 종이값이 모자라 미적거리고 있던 차에 다른 출판사가 그만 먼저 출판해버린 것.

결국 지난해 8월에는 아예 서울 사무실을 비우고 충남 홍성으로 내려갔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졸지에 ‘빈민’이자 ‘생태난민’이 된 것이다. 도시에서의 삶에 진력이 나기도 했지만,역시 가장 큰 원인은 자금문제였다.

“소규모 출판사의 운명이죠. 하지만 시골에서도 출판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또다른 시도이기도 했어요.”

아내와 아이를 서울에 남겨두고 그와 함께 기획부터 편집,교정·교열까지 온몸으로 때우는 단 한명의 직원과 함께 보따리를 쌌다. 그래도 그보다 더 맹렬하게 환경사랑을 실천하는 직원인지라 ‘같이 도 닦는 심정으로’ 일하고 있다. 이번 겨울에는 제대 후 처음으로 내복을 꺼내입었다. 홍성이 추워서가 아니라,환경서 출판의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서다.

출판사 설립 3년 만에 이익은 커녕 ‘빚방석’에 오를 지경이지만 주위의 도움으로 그나마 버텨나갈 힘을 얻는다. 변변하게 생활비를 주는 것도 아니고 난데없는 생과부 노릇이지만 남편이 하고 싶어하는 일임을 알기에 바가지 한번 안긁는 아내가 있고,사정을 알고 인세나 번역료를 받지 않는 저자와 번역가도 있다. 심지어 좋아지면 갚으라며 그의 주머니에 돈을 찔러준 저자도 있었다고. 하지만 굳이 이런 고생을 감수할 만큼 출판이 가치있는 일일까.

“그건 제가 아니라 독자들이 판단할 문제예요. 독자들이 사주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끝나겠죠. 제가 만드는 책들이 한번 찍어서 휙 없어지는 책들은 아니더라고요. ‘자발적 가난’ 같은 책은 무수한 재테크 책들 틈에서 계속 주문이 들어와요. 그래서 우리끼리 ‘잡초같은 책’이라고 부르죠. 그게 출판을 계속하게 하는 재미예요. 많이 나가지는 않지만 죽지는 않는거지요.”

그는 지방생활에서 통해 자금난을 극복할 지혜를 얻고 있다. 지난 해에는 처음으로 배추를 심었고,장기적으로는 자급농을 할 생각이다. 적어도 굶지는 않을 수 있을 테고,생기는 돈으로는 책을 찍을 수 있을테니.

또다른 복안도 있다. 다른 출판사는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고급화를 추구한다지만 둘이 꾸려나가는 회사에서 대형 출판사를 따라할 수는 없는 노릇. 그래서 그는 반대로 올해 ‘작은 책’으로 승부하기로 전략을 세웠다. 문고판을 만든다는게 아니다. 예를 들면 이런 아이디어다. 같은 홍성에 있는 풀무학교 홍순명 선생의 주례를 들었더니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어 한번 하면 사라지고 마는 주례사 몇 건을 모아 책으로 만든다는 것.

“책을 내기 전에 몇부나 팔릴지 계산하지 않아요. ‘필요한 책이면 낸다’는 게 제 철칙이죠. 2월에는 ‘청소년을 위한 간디 평전’이 나옵니다. 올해라고 딱히 사정이 나아질 것 같지는 않지만,그래도 책은 냅니다. 하하.”

희망이 보여서가 아니라 가슴에 희망을 품고 있기에 그는 계속 책을 만든다. 그가 펴낸 책 ‘자발적 가난-덜 풍요로운 삶이 주는 더 큰 행복’이 바로 그의 이야기인 듯 싶다.

권혜숙기자 hskw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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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로 간 ‘생태출판’ 초심을 펴냅니다
‘출판공장’ 자조감에 귀향 홀로 빈 농가에 사무실을 차렸다
‘재생용지 사용, 양장본·광고 사절‘ 내고 싶은 책 맘껏 낸다!
하루에 판매 10여권뿐이지만 천천히 생태홀씨는 퍼져간다
한겨레 권복기 기자
» 생태주의 전문 그물코출판사를 운영하는 장은성 대표는 자신이 내고 싶었던 책을 형편에 맞게 느긋하게 펴낸다. 돈 때문에 쫓기지도 않고, 영업을 위해 억지로 책을 만들 이유도 없다고 한다. 우리나라 유기농업 운동의 본산인 홍성으로 아예 출판사를 옮긴 장 대표는 생태주의 메카인 고향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홍성 그물코출판사 장은성 사장 /
초심을 지키고 사는 이들은 드물다. 일에 파묻히면 잊어버린다. 왜 그 일을 시작했는지도 까먹는다. 잊고 살다 보면 가려던 길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래서 불행한 이들이 많다. 그때부터 스스로 최면을 건다. 내가 젊어서, 철이 없어서, 세상을 몰라서 그랬어. 지금 가는 이 길이 옳아. 저기 봐.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길을 가잖아. 그런데, 그런데 왜 행복하지 않지?

그물코출판사 장은성 대표는 2004년 8월 서울을 떠나 홍성으로 내려왔다. 출판사를 접은 것은 아니다. 출판사를 시작할 때의 그 마음을 되찾기 위해서다. 그 마음을 되찾아 만들고 싶은 책을 편한 마음으로 내고 그래서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다.

1인 출판사라 기획, 편집, 제작, 영업 등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해야 하지만 장 대표는 요즈음이 너무 행복하다고 했다. 꾸준하게 책을 내야 한다는 부담도 없고 제작비와 인건비 때문에 책 판매에 밤낮없이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가장 기분 좋은 점은 그가 처음 출판사를 만들 때 했던 다짐을 지키고 살기 때문이다.

‘생태주의 관련 책을 낸다. 재생용지만을 쓴다. 양장은 만들지 않는다. 신념에 맞지 않는 책은 만들지 않는다. 광고를 하지 않는다. 2천부 이상 팔리면 베스트셀러라고 생각한다.’ 이를 되찾는 데 6년이 넘게 걸렸다. 수업료도 톡톡히 치렀다.

2001년 그는 다니던 중견 출판사를 그만두고 쉬고 있었다. 저녁이면 출판사에서 알게 된 선후배들과 술잔을 기울이곤 했다.

“술을 마시면 출판에 대해 이야기할 수밖에 없지요. 책 내용을 고민하기보다 껍데기를 화려하게 하는 데 더 신경을 쓴다, 권하기에도 부끄러운 책에 엄청난 광고비를 쏟아붓는다, 초판을 1만부 찍고 7천부를 서점에 깔지만 3천~4천부를 반품으로 받는 일이 다반사라는 등. 출판사가 아니라 출판공장이라고 자조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술자리마다 제대로 된 출판사를 한번 만들어보자는 얘기가 오갔다. 그에게 “네가 한번 해보라. 그러면 내가 도와주겠다”는 말을 하는 이들도 많았다. 그래, 내가 한번 만들어 보자. 2001년 5월 출판사 등록을 했다. 10년 넘게 환경 관련 책만 내고 있는 따님출판사를 모델로 했다. 출판사에서 일할 때 우연히 접한 〈녹색평론〉을 통해 생태주의의 세례를 받은 터라 생태주의 전문 출판사를 만들고 싶었다.




예전에 거래하던 인쇄소 건물의 옥탑방을 빌려서 사무실로 썼다. 이듬해 낸 첫 책이 〈녹색시민 구보씨의 하루〉. 반응이 좋았다. 언론에 소개도 되고 수천 부가 팔렸다. 〈지구를 살리는 7가지 불가사의한 물건들〉도 첫 책 못지않게 잘 팔렸다. 여섯 권의 책을 내면서 자신감이 생기고 욕심도 났다. 생태환경책을 만들고 싶다는 이가 찾아오자 편집자로 채용했고, 영업자도 뒀다.

하지만 직원을 채용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방향은 잃지 않았지만” 출판사 운영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편집자는 자신의 몫을 하느라 정기적으로 책을 냈다. 영업상 필요해 부수도 더 찍어야 했다. 책을 수금하기 위해 썩 내키지 않는 내용의 책도 내야 했다. 어느날 돌아보니 그물코도 신간을 밀어내고 수금하고 반품받는 기존 출판계 관행을 따르고 있었다.

“출판계에서는 그런 현상을 멍든다, 골병든다고 합니다. 그물코도 골병이 든 거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불행은 함께 찾아온다고 사무실도 비워줘야 했다. 새로 사무실을 얻을 돈도 없었다. 친구의 권유로 고향인 홍성으로 내려와 빈 농가에 사무실을 차렸다. 서울을 떠나고 나니 초심이 새록새록 다시 생각났다.

그래. 내고 싶은 책이 생기면 내자. 2005년은 동면 기간이었다. 한 권의 책도 내지 않았다. 하지만 2006년이 되자 다시 힘이 생겼다. 풀무학교와 유기농업으로 이름난 홍동면이 자리한 홍성은 생태주의 출판사를 지향하는 그물코한테 축복의 땅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고 싶은 책도 생기고, 원고를 갖고 찾아오는 단체들도 있었다.

지난해에는 적지 않은 책을 냈다. 〈백성 백작〉, 〈농부의 길〉, 〈오리농법〉, 〈풀무학교 아이들〉, 〈풀무 청소년 특강〉, 〈헌책방에서 보낸 1년〉 등. 유기농 도농직거래 운동을 하는 한살림과 함께 〈땅에 뿌리박은 지혜〉, 〈태양도시〉, 〈스무살 한살림 세상을 껴안다〉 등을 냈고, 환경단체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의 제안으로 〈풀씨〉와 〈간이역〉을 냈다.

여느 출판사처럼 만 권 이상 팔리는 베스트셀러는 없지만 그물코의 책은 생태주의와 생명운동을 하는 이들에게는 조금씩 소문이 나 꾸준히 팔리고 있다. “금융기관의 부채도 거의 다 갚아 출판사는 운영이나 재정면에서 다시 건강해졌다”고 했다. 책을 기획하는 과정에서 만난 여느 생태주의자처럼 그도 소박하지만 마음은 넉넉하게 산다.

지나고 보니 고마운 분들이 있었다. 먼저 부모님이다. 장 대표는 지금까지 빠짐없이 자신이 낸 책을 부모님께 갖다 드렸다. 그때마다 부모님은 그냥 받으신 적이 없다. “내가 먼저 사봐야 마음이 편하다”며 집을 나서는 그에게 책값을 주셨다. 다음으로 대학생 한달 하숙비 정도의 생활비를 받으면서도 잔소리 한번 없이 딸 채원이를 구김살 없이 키우고 있는 아내 이미희씨다. 그의 초심 회복은 그런 이들로 인해 가능했다고 한다.

“하루에 10여 권 가량 책 주문이 들어와요. 제가 만든 책을 사주시는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고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어요.”

홍성/글·사진 권복기 기자 bokki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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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대 신입생 80% 부모 한자이름 못써…'漢盲' 대학생


성균관대 신입생 가운데 다섯 명 중 한 명 꼴로 자신의 이름을 한자로 쓸 수 없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이명학(52ㆍ한문교육과) 성균관대 사범대 학장은 12일 “기초 글쓰기 과목을 수강하는 신입생 384명을 대상으로 5,6일 한자시험을 본 결과 20%인 78명이 자신의 이름을 한자로 쓰지 못했다”고 밝혔다.

특히 부모님의 이름을 한자로 쓰지 못한 학생은 80%에 달했다. 시험결과 아버지의 이름을 쓴 학생은 23%(89명)에 그쳤고, 어머니의 이름을 한자로 옳게 적은 학생은 17%(67명)에 불과했다.

대학에서 일상적으로 쓰는 쉬운 한자어도 제대로 쓰지 못했다. 조사대상의 71%(274명)는 신입생(新入生)을 한자로 쓰라는 문제에 답을 하지 못했고, 60%(229명)는 대학교(大學校)를 못 썼다. 한국어(韓國語)를 틀린 학생은 70%(226명)였다. 다소 어려운 강의(講義)를 한자로 쓴 학생은 2%에 미치지 못하는 5명에 불과했다.

쓰기는 물론 읽기 능력도 형편없었다. 5개 한자어의 음을 다는 문제에서 折衷(절충)을 제대로 읽은 학생은 1%(3명)에 불과했으며 抱負(포부)는 7%(27명), 榮譽(영예)는 4%(16명), 신앙(信仰)은 12%(48명), 變速(변속)은 15%(57명)에 불과했다.

조사에 따르면 신입생들은 ‘恩(은혜 은)’을 ‘思(생각할 사)’로 혼동했으며, ‘宋(송나라 송)’을 ‘字(글자 자)’로 잘못 쓰는 경우가 많았다. 이 학장은 “한자로 제 이름 조차 쓰지 못하는 학생이 20%에 달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며 “전공과목을 공부할 때 개념 파악이 어려울 것으로 보여 대책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손재언기자 chinas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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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변에서 만난 북한 아이들 | 내가 사랑한 풍경 2007/03/12 23:51 
  http://wnetwork.hani.co.kr/lixiangzhu/2493  

 

지난해 10월9일 북한은 핵실험을 했다고 발표했습니다. 그 뒤 세상이 소란스러워진 건 여기서 새삼 다시 적을 필요 없겠지요. 10월9일은 바로 이틀 전인 10월7일 제가 베이징 특파원 임기를 마치고 귀국해 출근한 첫 날이었습니다. 그 주의 금요일인 13일, 바로 그 유명한 13일의 프라이데이에, 저는 동료 사진기자 이정용씨와 함께 베이징을 거쳐 단둥으로 날아갔습니다. 중국까지 대북 유엔 결의안에 찬성하고 나서는 마당에 북-중 국경선에서 북한의 움직임을 관찰하기 위한 출장이었죠.

그 때 <에이피>와 <로이터> 등 세계의 통신사들은 열심히 압록강 건너 북한 땅에 접근해 북한 동포들의 표정을 찍어 올려댔습니다. 저 또한 정용씨와 함께 열심히 압록강 국경지대를 훑고 다녔습니다. 긴장감이 별로 없는 국경 가운데 하나인 북-중 국경 건너 마주친 북한 주민들은 우리를 그다지 경계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손을 흔들면 그들도 함께 손을 흔들며 웃어주었습니다. 물론 외딴 곳에서 만난 한 농부는 우리가 말을 걸자 외면하고 마을쪽으로 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적대적인 행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외국의 통신사들이 올린 사진 속에 찍힌 북한 군인들은 성난 표정으로 카메라 렌즈를 향해 손짓을 하고 있거나 심지어는 돌까지 던지고 있는 겁니다. 저는 곧 그 이유를 알게 됐습니다.

북한 주민이나 경계중인 인민군을 찍기에 가장 좋은 곳은 단둥 나루터입니다. 여기서 유람선이나 쾌속정을 빌려 타고 신의주쪽으로 접근해서 주민들을 찍는 거죠.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외신 기자들은 쾌속정을 빌려서, 신의주쪽 뭍에 거의 닿을 정도로 접근해서, 인민군의 코 바로 밑에 카메라 렌즈를 들이대는 겁니다. 이건 도대체 인간에 대한 예의가 없는 짓입니다. 입만 열면 민주주의와 인권을 부르짖는 나라의 통신사에 고용된 기자들이 북한인의 인권과 초상권에 대해선 철면피처럼 무시하고 있는 거죠. 북한 인민군이 아니라 세계의 그 누구라 해도 그런 식으로 예의 없는 행동을 하면 찍지 말라고 사래질을 치거나 고함을 칠 것입니다. 이라크의 미군은 망원렌즈를 꺼내든 사진기자에 사격을 퍼부어 그를 살해하기도 하지 않았습니까. 그 미군은 나중에 망원렌즈가 ‘무기’인줄 오인했다고 변명했다더군요.

우리는 외신기자들이 그런 비열한 방법으로 북한 주민을 자극해 ‘그들이 원하는 북한의 이미지’를 얻어 단둥으로 돌아오는 걸 보며 화가 치밀었습니다. 사진은 그림과 달리 거짓말을 할 수 없다지만, 저는 단둥 출장 때 사진이 얼마나 고약한 거짓말을 할 수 있는지 새삼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욕심을 내지 않기로 했습니다. 쾌속정 운전사에게 한국 돈 1만원 정도만 더 주면 시키는 대로 신의주 쪽으로 얼마든지 바짝 붙일 수 있지만, 우린 그렇게 하지 않고 운전사가 규정 대로 가는 길만 따라가며 사진을 찍었습니다.

여기 올린 사진은 그 때 찍은 북한 여자아이들의 모습입니다. 이 사진을 보고 있자면 마음 속 깊이 잔잔한 물이 고입니다. 초등학교 고학년, 아니면 기껏해야 중학교 1학년쯤 돼 보이는 이 앳된 계집아이들은, 지금은 정박해 어디로도 가지 않는 배의 갑판 위에 올라와 압록강물을 바라보며 놀고 있었습니다. 배 난간 곳곳에 얼룩진 녹자국은 이 배가 얼마나 오래전부터 항해를 멈췄는지 말해주는 듯했습니다.

당시엔 이 사진을 인터넷에 올릴 생각을 못했습니다. 예민한 시기인지라 이런 얘기를 차분히 할 생각이 나질 않았던 것 같습니다.

지난 2월13일 6자회담에서 초기 이행조처에 대해 합의한 뒤, 북한과 미국의 행보가 이전과는 달라졌습니다. 실낱같은 희망을 조심스레 걸어도 좋을 듯합니다. 북-미 관계는 워낙 될 듯하다가도 결국 실망을 안겨준 적이 너무 많아 여전히 썩 믿음이 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세계에서 마지막 남은 냉전지대인 한반도가 언제까지 이렇게 정박해있지는 않겠지요. 그 때가 되면 압록강 물결을 따라 일렁거리기만 하던 그 낡은 북한 배도 물살을 헤치며 항해하리라고 믿습니다. 떠날 수 없는 배의 낡은 갑판 위에서 놀던 아이들도 더 해맑게 웃을 수 있겠지요. [2007. 3. 12 자정이 가까이 올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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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이 만드는 시인, 시단 홀리다
  • 시집 ‘나는, 웃는다’로 집중 조명받는 유홍준 시인
    고교 졸업후 막노동판 돌다 진주 대표시인 김언희 만나 7년동안 개인교습
    “종이 만들때 청산가리 넣듯 좋은 시에도 독극물 필요해”
  • 진주=박해현 기자 hhpark@chosun.com
    입력 : 2007.03.19 00:07
    • 한국 시단이 요즘 이 한 권의 시집을 탐독하고 있다. 경남 진주에서 제지공(製紙工)으로 일하는 유홍준(45) 시인의 시집 ‘나는, 웃는다’(창비)가 올봄 시단에서 가장 화려한 조명을 받고 있다. 이 시집은 시전문 출판사 ‘천년의시작’이 1000만원이라는 파격적 상금을 내걸고 올해부터 시상하는 제1회 시작(詩作)문학상 수상작이다. 연간지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 2007년 호가 문인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가장 좋은 시집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봄을 맞아 일제히 나온 계간지들도 시집 ‘나는, 웃는다’를 집중 조명했다. 계간 ‘문학동네’가 유홍준 시인 특집을 꾸민 것을 비롯해 10여 개의 문예지들이 서평 혹은 단평을 실었다.

      시인·평론가 남진우는 ‘문학동네’에 발표한 유홍준론을 통해 ‘정육점의 시인, 유홍준’이라고 호칭했다. ‘그의 시는 잔혹하고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로 넘쳐나고 있으며 세계의 악마성에 맞서는 일종의 방어기제로서 위반과 전복의 상상력을 극단까지 밀어붙이는 전략을 고수해왔다’는 것.

    • ‘모든 것을 다 들어냈을 때 비로소 평안을 얻는/ 빈 저울의 침묵이여 나는 제로에서 출발한 커다란 고깃덩어리/ 주검을 다는 저울에 올라가 보고서야 겨우/ 제 몸뚱어리 무게를 아는 백열 근짜리/ 사지 덜렁거리는 인육’(시 ‘저울의 귀환’ 부분)

      세상을 도축장이나 정육점으로 바라보는 엽기적 상상력과는 달리 진주에서 만난 시인은 순백의 종이를 사랑하는 서정 시인었다. ‘펄프를 물에 풀어, 백지를 만드는 제지공들은 하느님 같다/ 흰 눈을 내려/ 세상을 문자 이전으로 되돌려 놓는 조물주 같다’는 시 ‘문맹’을 쓴 시인은 종이 앞에서 시에 대한 경건한 성찰에 빠진다. “언젠가 화이트 스노우 종이를 만들던 겨울밤이었어예, 창밖에 눈이 내리길래, 저 눈을 퍼다가 종이를 만들면 어떨까 싶었지요. 그렇게 만든 종이 앞에서 어떻게 함부로 글을 쓰겠어예…”

      유홍준은 남들 앞에 양손 내밀기를 꺼린다. 제방공사와 도로공사 등 막노동판에서 보낸 젊은 날의 이력이 흉터투성이의 투박한 손에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오른 손목에는 지퍼처럼 생긴 수술자국이 있다. 기계덩어리가 오른손 위에 떨어져 대수술을 받았고, 왼손의 손가락 하나는 해머에 맞아 하마터면 잃을 뻔했다. “순백의 종이를 만들려면 청산가리와 같은 독극물을 넣어야 합니다”고 한 시인은 “좋은 시에도 독극물이 필요합니다”라며 그간 겪은 삶의 신산(辛酸)을 엷은 미소로 덮었다. 그러면서 그는 “고급 아트지에는 발암물질이 많으니까 절대 음식을 싸지 말라”고 전문가로서 충고했다.

      경남 산청이 고향인 유시인은 간신히 고교만 졸업한 뒤 노동판을 전전하면서도 독학으로 시를 공부했다. 그러다가 지난 1991년 진주를 대표하는 김언희 시인을 우연히 만나 1998년 대구의 시전문지 ‘시와 반시’로 등단하기 전까지 7년 동안 혹독한 개인 교습을 받았다. “선생님이 됐다고 할 때까지 어느 매체에도 응모하지 않았다”는 것.

      김언희 시인은 “처음에 그의 시를 봤을 때 생래적 가락이 너무 세서 그 가락의 물기를 빼라고 했더니, 점차 그 가락이 변용돼 차분해졌다”고 제자의 시를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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