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승전결 중 ‘전’에서 뚝심 밀어붙이죠”
이야기는 물론 칸 나누고 말풍선까지 콘티작업
만화작가가 영화감독이라면 만화가는 배우
‘타짜’ 치밀한 구성은 물흐르는대로 쫓아간 결과
‘콤비’ 허영만씨와는 세번째 헤어진 거예요
한겨레 구본준 기자 강재훈 기자
» 만화작가 김세영씨의 서재. 그러나 김씨의 실제 작업공간은 바닥에 깔린 요 위다. 김씨는 엎드린 자세를 가장 좋아한다. 배를 깔고 누워 아이디어도 구상하고 수작업으로 원고도 쓴다. 사진속 웅크리고 있는 개는 김씨가 자기 가족을 모델로 지은 만화 <사랑해>에 나오는 바로 그 털복숭이 개다.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한국의 글쟁이들/⑭‘국가대표 만화작가’ 김세영

“만화작가는 만화에서 어디까지 합니까?”

지난 여름, 추석에 개봉하는 영화 <타짜>를 제작하기로 한 싸이더스FNH 차승재 대표는 원작 만화의 작가 김세영(53)씨를 만난 자리에서 질문을 던졌다. 김씨가 “콘티까지 짜서 넘긴다”고 말하자 차대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면 한마디로 감독이네요? 만화가가 배우인 것이고.”

관객 670여만명을 동원하면서 올 하반기 최고 흥행작이 된 영화 <타짜>는 만화가 왜 ‘원 소스 멀티 유즈’ 시대의 총아인지를 다시 한번 보여줬다. 그리고 모든 문화상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이야기’의 힘이란 것도 입증했다. 그러나 이처럼 만화의 가치가 높아지고 있어도 정작 만화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는 아직 모르는 이들이 많다. <타짜>만해도 원작자를 만화가 허영만씨로 아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원작자는 분명 이야기를 지어낸 만화작가 김세영씨다.

만화작가들이 만화 스토리를 쓰는 방식은 크게 시나리오식과 콘티식 두가지. 김씨는 늘 콘티 형태로 쓴다. 칸을 나누고 말풍선에 대사를 넣고 지문도 넣으며, 개별 장면의 이미지 배치까지 직접 연출한다. 그렇게 원고를 넘기면 만화가가 칸 안에 그림을 그려 넣는다. 만화작가가 작품의 아이디어 등 초기 단계까지만 맡는 것으로 여기기 쉽지만, 실제로는 만화 구성의 상당 부분-김씨의 경우는 거의 대부분-을 책임지는 것이다. 차승재 대표의 질문은 이런 일반적인 인식을 대신하는 물음이었고, 김씨의 설명을 들은 차씨가 “만화작가란 ‘영화감독’같은 사람”이라고 정의한 것은 만화작가가 하는 일에 대한 명쾌하고 정확한 비유라고 할 수 있다.

한국 만화작가계에서 김세영씨가 가지는 상징성은 실로 크다. 만화판에서 만화가가 아닌 만화작가가 개인 브랜드를 지닌 경우는 그가 유일하다. 김씨는 스무살 만화가 지망생이던 1973년 우연히 만화 스토리를 보고 ‘나도 써볼 수 있겠다’ 싶어 한 번 지어본 습작이 작품으로 채택되면서 만화작가가 됐다. 올해로 33년째, 지금까지 5만~6만쪽 분량의 이야기를 썼다.

33년째…5만~6만쪽 이야기 써

김씨가 필명을 얻은 것은 허영만씨와 같이 한 첫 작품인 <카멜레온의 시>(1986)이 인기를 얻으면서 부터다. 이 만화에서 인용한 프랑스 초현실주의 시인 로트레아몽의 시집이 복간돼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르기까지 했다. 이후 김씨는 허영만씨와 명콤비를 이뤄 <고독한 기타맨> <오! 한강> <사랑해> <미스터Q> 등 히트작을 줄줄이 내놓으면서 만화작가계의 간판스타가 된다.




그러나 만화작가의 위상은 항상 열악했다. 출세작 <카멜레온의 시>에 정작 그의 이름은 없었다. <오! 한강>이 잡지에 연재될 때 처음 이름이 들어갔지만 단행본에서는 이름이 다시 빠졌다. 만화계의 관행 탓이었다. 허영만씨와 <사랑해> <타짜>로 다시 만났을 때 그가 내 건 조건은 “이름 좀 알아볼 수 있게 내달라”는 것 하나였다. 그러나 <타짜>에서도 그의 이름은 표지 한 구석에 숨은 그림처럼 작게 들어갔다. 최근 다시 나온 <타짜>에서야 마침내 김씨의 이름 석자가 알아 볼 수 있게 표지에 나왔다. 가장 가슴 아팠던 기억은 딸에게 “이 책이 아빠가 쓴 거야”라고 보여줬는데 “그런데 왜 아빠 이름은 없어?”라고 되물었을 때였다. 오랜 세월 쌓인 이런 상처 때문에 그는 더욱 ‘만화스토리작가’라는 말 대신 ‘만화작가’란 이름을 강조한다. 스토리 작가란 말 자체가 실제 역할을 축소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는 일본처럼 ‘아무개 지음, 아무개 그림’으로 가야 한다고 믿는다.

만화계에서 김씨는 철저하게 집안에 틀어박혀 작업하기로 유명하다. 여권은 한번도 쓴 적이 없다. 대신 집안은 모두 그가 즐기는 것들로 꾸며놓고 산다. 넓은 마루벽 전체가 영화 디브이디이고, 음악시디와 책이 곳곳을 채우고 있다. 정작 만화는 잘 보지 않아 거의 없다. 20대에는 소설에, 30대에는 시에 빠져 살았는데 지금은 ‘잡독형’ 독서를 한다. “그냥 좋아서 영화보고 책봐요. 목적을 갖고 보면 재미가 없잖아요. 작품 쓸 때도 내가 좋아하는 걸 쓰는 것이고. 모르면 못쓰니까.”

김씨의 서재에는 항상 한 가운데에 요가 깔려 있다. 그 위에 엎드려 누워 구상도 하고 손으로 원고를 쓴다. “수평 자세일 때 가장 창조성이 샘솟는 듯하다”고 웃는다. “콘티는 칸 변화가 많고 말풍선이 다양해 컴퓨터보다는 수작업이 편해요. 의성어 넣거나 하기에도 효과적이구요.”

작업 특성상 만화 스토리를 쓰는 것은 이야기와 영상을 동시에 생각하며 화연 연출까지 구상 해야 한다. 치밀한 구상이 필요할 듯한데 정작 김씨는 “그때 그때 생각 나는대로 쓴다”고 답했다. 심지어 작품 전체 구성도 미리 짜지 않는다고 한다. 치밀한 전개와 반전이 돋보이는 <타짜>를 비롯해 거의 모든 작품이 구상하지 않고 시작해 생각나는대로 이야기를 이끌어갔다는 것이다. 취재? “<타짜>를 준비할 때 전문도박사를 이틀 동안 만난 것이 일생 동안 처음 해본 취재였어요.”

누운 수평자세일 때 창조성 샘솟아

그럼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샘물 퍼내듯 써내는 것일까. “그릇에 물이 있다고 쳐요. 물을 쏟아서 흘러가는 것을 저는 쫓아가는 거에요. 물이 여러 갈래로 나뉘면 하나를 고르는 거죠. 쏟을 물을 채우는게 주인공 캐릭터를 만드는 거에요. 어떤 성격인지 어떤 일 하는지 정하면 그 다음에 이야기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아요.” 이야기를 푸는 한가지 요령이 더 있다면 “사실은 거짓처럼, 거짓은 사실처럼, 없었던 일은 있었던 것처럼, 있었던 일은 없었던 것처럼” 쓰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씨는 만화작가란 직업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 스타일도 아니다. 만화작가가 된 것도 “쉽게 돈벌 수 있어서, 조금 일하고 계속 놀 수 있어서”였다고 털어놓는다. 허영만 화백이 그에게 가장 불만스러워했던 것도 김씨가 만화를 생업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사실 주업은 없고 알바하는 기분으로 일했어요. 물론 할 때는 잘하려고 했지만. 지금도 내가 원하는 대로 그림이 안나올 때는 내 직업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나치게 빠져들어 허우적 대지 않는 그런 방식이 그의 성공비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화계가 꼽는 김세영의 가장 큰 성공요인은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스토리의 완결성을 유지하는 뚝심이다. 용두사미가 일반적인 한국 만화판에서 극히 드문 경우다. 이런 뚝심은 바둑에서 배웠다고 한다. 백수 시절, 김씨는 도피하는 심정으로 기원에서 바둑만 두고 살았다. 1급이긴 했지만 책보고 배운 김씨의 바둑은 온실속 화초였고, 그래서 모양을 잘 만들어놓고도 급소 한방에 무너지기 일쑤였다. 악을 쓰고 실전에 매달려 두들겨 맞아도 다시 일어나는 바둑으로 스타일을 바꿨다. “이야기를 쓸 때는 기승전결에서 ‘전’이 가장 어려워요. 전에서 뚝심을 잃지 않고 밀어붙이는 데 바둑에서 버티는 허리힘을 익힌게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유명해진만큼 경제적으로 그는 상당한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한 분야를 대표하는 위상에 견줘보면 그리 대단한 편은 아니다. <타짜> 이전에는 이름을 알렸어도 빚쟁이로 살았다. <타짜> 하나로 10억원 넘게 벌면서 비로소 살림에 볕이 들었다고 한다.

만화팬들이 김씨에게 가장 아쉬워하는 것은 히트 보증수표인 파트너 허영만 화백과 헤어진 점이다. 김씨는 “서로 나름대로 일해보려고 헤어진 것”이라고 웃으며 설명한다. “이번이 세 번째 헤어진 건데요? 영화감독과 배우도 찍고나면 헤어지는 거과 비슷한 거에요.”

이름을 얻고, 허영만 화백과 떨어져 홀로 서기에 나서면서 그의 작업 방식도 바뀌었다. 그의 이름을 앞에 세우고 신예작가를 기용해 만화를 내놓고 있다. 그러나 바로 지금이 그의 만화인생에서는 중대한 고비가 될 전망이다.

실험적인 만화 해보고 싶어

출판사들이 그에게 신예급을 붙이는 것은 고료는 정해져 있는데 김씨가 유명하니 비용이 싼 만화가로 생산비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타짜> 이후 그의 작품들은 “재미는 확실하다”는 평을 들었지만 완성도면에서는 모두 실패에 가까웠다. 공전의 히트작 <타짜>도 오히려 그에게 족쇄가 되고 있다. 매체들과 출판사는 도박만화만을 집요하게 요구해댄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그의 브랜드도 약해질 수밖에 없다. 스스로 그걸 잘 알지만 열악한 한국 만화시장 현실속에서 뾰족한 대안을 찾기란 쉽지 않다.

김세영의 현실은 곧 한국 만화의 현실이다. 그래서 이 ‘국가대표 만화작가’의 행보는 눈여겨 볼 수 밖에 없다. “개인적으로는 실험적인 만화를 해보고 싶은데, 생업을 떠난 작품은 발표할 지면도 없어요. 그래도 앞으로는 조금씩 그런 작업을 해보고 싶어요.”

글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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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경제주권’ 챙긴 뒤 당당히 만나라 / 백낙청
남북정상회담과 한-미 FTA
한겨레 김진수 기자
» 백낙청 /문학평론가·서울대 명예교수
“한-미 자유무역협정의 실리적이고 상식적인 협상 바탕 위에 성사되는 남북 정상회담이야말로 금상첨화-비단 천에 꽃을 수놓은 격이 되지 않겠는가.”

남북 정상회담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라는 두 굵직한 현안이 임기 막바지의 노무현 대통령 앞에 놓여 있다. 둘 다 아직 성패를 예측하기 어렵지만 이들 현안 처리 결과에 따라 참여정부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크게 갈릴 것이며, 두 과제만 잘 풀어도 노 대통령이 다짐한 대로 ‘레임덕’은 없을 공산이 크다.

남북 정상회담은 6·15 남북 공동선언이 남긴 숙제 가운데 하나다. 햇볕정책 계승과 한반도의 화해·협력을 추진해 온 참여정부로서는 당연히 겨냥할 목표이기도 하다. 회담을 위한 여건 또한 최근에 부쩍 좋아졌다. 무엇보다 북-미 관계가 획기적으로 개선되기 시작했으며, 국내 지지여론이 과반수를 훨씬 넘는데다 얼마 전까지 ‘정략적’인 정상회담 기도를 규탄하던 한나라당 지도부조차 반대의사를 거둬들이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노 대통령의 정치적 입지가 강화되었고, 비록 곡절은 있었지만 참여정부가 공들여 온 한반도 평화·번영 정책 및 ‘한반도 문제의 한국 주도’ 노선이 정당성을 인정받게 된 셈이다. 결과적으로 남북 정상회담에 정략을 개입시키려는 유혹이 오히려 감소했으며, 이 문제에 신중하게 접근할 여유를 갖게 된 것이다.

레임덕 없애줄 역사적 과제
북-미 관계 획기적 개선
한나라도 반대 철회한 호기

실제로 북-미 관계가 급박하게 진전하는 도중의 어느 대목에 남북 정상회담을 끼워넣는 것이 마땅할지는 치밀한 계산이 필요하다. 너무 서둘러서 북-미 관계 진전에 혼선을 일으킬 필요는 없지만, 미국하고 다 잘 풀린 뒤에나 움직이려 해서는 북한과 미국 어느 쪽에서도 옳은 대접을 못 받게 된다.

여기서 정부가 최적의 시기를 찾아내어 정상 사이 만남을 성사시킬 때 적어도 한반도 평화문제에 한해서만은 뚜렷한 성과를 남길 것이다. 그 만남이 김정일 위원장이 일찍이 (막연하게) 약속했던 ‘서울 답방’일 필요는 없고, 2000년 평양회담에 견줄 획기적인 내용을 갖추지 않아도 좋다. 오히려 굳이 획기적이지 않아도 되는 남북 정상 사이 만남들을 정착시켜 간다는 데 더 큰 의미를 둘 수 있다.

한반도 평화체제 선포를 위한 부시 대통령과의 3자 정상회담(또는 중국을 포함한 4자 회담)도 이를수록 좋지만, 만약에 연내 실현이 어려울 경우 미국에서는 부시의 임기 중이지만 한국에서는 새 대통령 취임 이후가 될 내년 상반기쯤으로 일정을 잡는 데 남북 지도자가 공감하는 것 자체가 특별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평화체제 구축에 한 발 다가가는 동시에 미국 쪽과 국내 대권주자들의 협력의지를 북돋우는 데 일조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상회담 문제가 정교한 판단을 필요로 하면서도 전반적으로 노 대통령에게 편한 국면으로 진전해 왔다고 한다면,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그것과 사뭇 대조적이다. 한편으로 4월 초 시한을 어떤 식으로 넘기건 대통령이 편해지기는 어려우리라는 점에서 대비가 되고, 다른 한편 대통령의 판단이 의외로 그다지 정교할 필요가 없을지 모른다는 점에서도 대조적이다.

» 백낙청 /문학평론가·서울대 명예교수
최적의 시기 선택 중요
‘내년 상반기’ 합의할만
‘새 대통령+김정일+부시’도

판단의 기준은 사실 노무현 대통령 자신이 명쾌하게 정리한 바 있다. “철저하게 경제적으로 실익 위주로 면밀하게 따져서 이익이 되면 체결하고 이익이 안 되면 체결 안 할 것”이며, “(미국 행정부에 부여된) 신속절차 안에 하면 아주 좋고, 그 절차의 기간 내에 못하면 좀 불편한 절차를 밟더라도 그 이후까지 지속해서 갈 수 있다”라는 지난 13일 국무회의 발언이 그것이다.

이 말이 한갓 면피용이 아닌 한, 여기 제시된 기준이야말로 우리의 외교와 국방에서 ‘자주 대 동맹’ 같은 이념적 구도를 배격하고 실익 위주의 자주성과 동맹관계를 추구해 온 정부 노선의 재현이 아니겠는가. 아울러 한반도 문제 해결에는 한국이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원칙과도 정확히 맞아드는 것이다.

이 점을 새삼 강조하는 것은 그동안의 한-미 자유무역협정 협상이 “철저하게 경제적으로 실익 위주로 면밀하게 따져서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진행돼 왔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세부사항으로 들어가면 전문적인 식견 없이 뭐라고 말하기 힘든 대목이 많다. 그러나 첫째, 협상 내용 대부분을 전문가들에게조차 비밀에 부쳐온 그간의 과정이 우리 쪽의 협상력을 상대국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대외적인 목표보다 협상팀을 국내 제약으로부터 좀더 자유롭게 해 주겠다는 대내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바 큰 것 같다. 동시에, 알려진 내용만으로도 수많은(결코 쇄국주의자도 교조적인 진보주의자도 아닌) 전문가들이 협상이 우리 실익에 위배됨을 거듭 지적해 왔다. 이들의 지적이 다 맞는다는 보장은 없고 설혹 맞는다 해도 번번이 우리의 실익을 챙기기를 기대하는 건 무리다. 하지만 그 정도로 문제점이 지적되고 사회적 논란이 뜨거워졌으면 미국 정부의 일정에 맞추기보다 “좀 불편한 절차를 밟더라도 그 이후까지 지속해서” 점검하고 토론하면서 진행하는 것이 상식일 터이다.

‘철저한 실리 협상’ 기대
졸속강행 타결땐 ‘정략’ 낙인
‘평화·개혁·진보’ 신명나게

남북 정상회담과 연관시켜서 살피면 이런 상식의 중요성은 더욱 명백해진다. 전시 작전통제권이 없는-최소한 그걸 넘겨받을 약속조차 못 얻어낸-남쪽 대통령이 북쪽 정상과 만나서 한반도 평화체제를 논의하기가 면구스러울 것이듯, 정부의 공공정책 수행이 미국의 투자자한테 언제든 제소당할 수 있는-더구나 그랬을 때 자국 사법부의 판결을 받아볼 기회마저 박탈당한-나라의 지도자가 ‘민족경제의 균형적인 발전’이라든가 ‘한반도 경제통합’을 자신있게 토론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정상회담은 국민적인 지지 속에 이뤄져야 제대로 힘을 받는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의 평화·번영 정책을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해 온 국민들이 ‘한-미 자유무역협정 빅딜’ 타결에 맞선 투쟁을 벌이는 형국이라면 회담은 이 난국을 돌파하기 위한 ‘정략’의 혐의를 다시금 뒤집어쓸 것이고, 실제로 국면 전환에 큰 성과도 없을 것이다. 자칫하면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고도 참여정부는 “평화·번영 정책 하나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한 정권으로 낙인찍힐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스스로 표방해 온 참여 민주주의에 대한 훼손이 점점 더 심각해질 것 또한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다.

끝으로 노 대통령은 “경제외적 문제는 고려하지 말라”고 강조했지만, 나로서는 그가 한-미 자유무역협정 협상을 상식에 맞게 해결해서 장기적인 과제로 끌고 갔을 때 펼쳐질 신명나는 판국을 꿈꾸지 않을 수 없다. 유독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관해서만 대통령에게 지지를 보내면서 한-미 경제통합 달성과 ‘레임덕’ 촉진이라는 일석이조의 단꿈에 젖었던 보수언론은 당연히 실망할 것이다. 협정 강행·타결의 결과로 극단적인 진보주의가 유일한 대안으로 부각되기를 은근히 기대하던 일부 세력도 그러리라 짐작된다.

하지만 시민사회의 광범위한 연대운동, 일부 관료 및 국회의원들의 분발, 여기에 대통령의 자주실리 외교 노선에 따른 소신있는 결단이 합쳐 협정의 졸속 타결을 방지하는 데 성공한다면 우리 역사는 또한번 진정한 의미의 진보와 선진화를 이룩할 것이다. 평화·개혁·진보를 추구해 온 우리 사회의 다수는 용기백배할 테고, 각자의 강조점이 다른 것이 지리멸렬의 원인이 아니라 화이부동(和而不同)의 계기로 바뀔 것이다.

이럴 경우 미국은 어떻게 나올까? 참여정부 초기의 자주성 강조가 한-미 동맹의 파탄을 가져왔다고 한숨짓던 이들의 우려와 달리, 미국이 옛날만큼 고분고분하지 않은 한국에 대한 일시적인 불쾌감을 떨치고 새로운 현실에 점차 익숙해진 경험을 상기하면 그 답은 명백하다. 당장에 어떻게 반발하건, 협정 졸속강행 실패에 대한 불만을 조만간 삭여낼 것이다. 우리가 미국과의 협정을 아주 안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좀 불편한 절차를 밟더라도 (4월) 이후까지 지속해서 갈” 작정이라는데 세계 10위권에 근접한 경제대국을 쉽사리 등질 수는 없을 테니까. 아니, 그렇게 또 한번 우리 사회의 저력과 자주성을 과시한 뒤에야 비로소 한국에 대한 존중심을 제대로 보여주기 시작할지 모른다. 이런 바탕위에 성사되는 남북정상회담이야말로 금상첨화-비단천에 꽃을 수놓은 격이 되지 않겠는가.

백낙청 /문학평론가·서울대 명예교수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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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3000m급 高山 240개 산악국 대만 나무 바다에 잠기다



벚꽃 핀 아리 산 중턱의 삼림철도로 아리 산 등산열차가 오르고 있다. 해발 2500m 주산 역까지 오르는 이 열차는 인도 다르질링의 히말라야 등산열차, 페루의 안데스 고원 등산열차와 더불어 세계 3대 등산열차로 불리는 대만의 명물이다. 사진 제공 대만관광진흥청

《진짜로 가깝고도 먼 ‘나라’는 대만이다. 1992년 한중 수교와 동시에 단교라는 아픈 상처를 안고 외교협정도 없이 ‘대표부’만 둔 채 양국이 교류하는 현실이 그것을 잘 말해 준다. 그러나 여행에 관한 한 대만은 ‘가까운 나라’로 거듭나고 있다. 열대와 아열대, 온대와 한대 등 다양한 기후대를 갖춘 매력 만점의 섬나라. 3년 전 양국 국적기의 재취항으로 2000년 8만3000여 명이던 한국인 여행자가 지난해엔 11만7000여 명으로 늘었다. 딘타이펑(지난해 한국에 진출한 대만의 유명한 딤섬 식당)의 샤오룽바오(딤섬의 한 종류)만큼이나 맛깔스러운 여행지, 대만의 남부 가오슝과 아리(阿里) 산으로 안내한다.》

아리 산? 낯익은 이름인데, 어디서 봤더라. 시내 중심가에 있던 어떤 근사한 중국음식점 같은데, 아닌가?

중식당 간판으로 낯익은 그 이름. 그런데 그게 18개 고봉을 거느린 대만의 거대산맥이라는 사실을 기자도 이번 여행 중에 알게 됐다.

해발 4000m가 조금 못 되는 위산(玉山·대만 최고봉)산맥은 아는 이가 많다. 그런데 옆에 있는 아리산맥(최고봉은 다다 산·2663m)은 잘 모르는 게 현실. 아리산맥은 위산산맥과 나란히 대만을 남북으로 종단하는 산맥(평균고도 2500m·길이 250km)이다. 5개 산맥으로 형성된 대만 산악에는 높이 3000m 이상의 고산이 무려 240개나 있다.

인천공항을 출발한 대만 유니항공의 여객기가 가오슝 국제공항에 착륙한 것은 2시간 30분 뒤. 남부의 가오슝은 국제무역항으로 그 규모가 굉장하다. 컨테이너 처리량으로 세계 5, 6위권이다. 수도 타이베이에 이은 제2의 도시로 한국의 부산쯤으로 보면 된다.

정월대보름을 하루 앞둔 3일 이곳 기온은 23도였다. 이곳은 아열대도 아닌 열대기후. 그 말에 놀랐다. 열대의 가오슝.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팜트리(야자수)가 그것을 증명했다. 아리 산을 향해 북쪽으로 달리던 중 도로변에서 희한한 장면을 목격했다. 비키니 차림의 아가씨가 유리부스에서 나와 멈춰선 차량의 운전사와 객담을 나누며 무언가 거래를 하는 듯 보였다. 간판에는 ‘檳(낭,랑)(빈랑·현지발음은 ‘삥랑’)’이라고 쓰여 있었다.


마취와 흥분작용을 일으켜 사람들이 껌처럼 즐겨 씹는 ‘삥랑’열매. 자이=조성하 여행전문기자
삥랑. 이것은 좀 묘한 열매다. 맛이 아니라 그 효과가 좀 특이하다. 씹어서 그 즙을 빨면 금방 몽롱해지면서 가슴이 쿵쾅쿵쾅 뛰고 몸이 후끈 달아오른단다. 마취와 흥분효과가 동시에 온다는 것이다. 게빈 맨지스가 쓴 ‘1421’이라는 책(15세기 명나라 환관 정화의 세계일주 항해 추적기)에는 15세기에 베트남 등 남쪽에서 중국에 전해진 야자나무의 열매라고 쓰여 있다. 크기는 대추만 하고 모양은 도토리를 닮았다. 아가씨가 파는 삥랑은 석회가루를 바른 푸른 잎에 싸여 있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씹어 침을 한 번 뱉어낸 뒤 그 즙을 빤다. 한 갑(8∼15개들이)에 50위안(약 1500원)인데 좋아하는 사람은 하루에 7, 8갑씩 먹는다고 한다.

열대의 대만 남부는 과일 천국이다. 한국에서 5만∼6만 원을 호가하는 두리안이 8000원밖에 안 한다. 도중에 차를 세우고 들른 길가의 과일가게. 기자도 처음 보는 과일이 많았다. 바나나는 너무 흔해 아예 팔지도 않고 대추는 어른 주먹만 해서 사과로 착각할 정도. 망고, 파파야가 흔하디 흔한 과일이란다. 피부미용을 위해 과일을 즐기는 여성이라면 대만은 ‘머스트 고(must go)’ 여행지다. 여행 내내 과일을 껴안고 지낼 수 있으니까.

드디어 아리 산에 올랐다. 가오슝 공항에서 버스로 무려 4시간 30분이 걸렸다. 캄캄한 밤중. 밤하늘을 보는 순간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휘영청 밝은 보름달도 아랑곳 않고 초롱초롱 반짝이는 별빛의 천상풍경 때문이었다.

한기가 느껴져 온도계를 보니 기온은 12도. 기자가 선 자오핑은 해발 2200m의 고산지대로 온대기후대였다. 여기서 밤을 보낸 뒤 이튿날 새벽에 삼림열차로 주산 산에 올라 위산산맥의 고봉 위로 돋는 아침 해를 맞을 계획이었다. 호텔의 객실에 들자 종업원이 난방기부터 틀라고 당부한다. 웬 난방기? 열대와 아열대의 대만 호텔에는 난방장치가 없는데. 알고 보니 고산지역은 한겨울 눈도 내리는 온대기후대여서 난방장치가 있단다.

오전 6시. 자오핑 역에서 아리 산 삼림열차에 몸을 실었다. 앙증맞을 정도로 아담한 사이즈의 이 열차. 협궤인 데다 지붕도 낮아 마치 놀이공원의 코끼리열차를 연상시킨다. 종착지인 주산 역(해발 2500m)까지는 20분 거리. 아래 역에서 승차한 여행객들로 차 안은 발 디딜 틈조차 없이 붐볐다. 이윽고 주산 역. 산정의 해돋이 전망대인 관일루까지는 15분쯤 걸어 오른다.

고산의 해맞이는 색다르다. 이미 지평선 위로 떠오른 해로 인해 주변이 밝혀진 가운데 단지 고봉 위로 떠오르는 해를 보기 때문. 그나마도 십중팔구는 보기 힘들다는데 그날은 용케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광경은 기대만 못했다. 오히려 관일루 아래로 펼쳐진 깊고 넓은 거대한 계곡의 운해가 더 기다려진다. 운해는 가을이 제철이란다.

삼림열차로 오르는 4시간의 아리 산 여행길. 이것은 아주 특별한 산악철도 여행이다. 평지(해발 30m)의 자이(자이 현 중심지)와 아리산맥의 고산역(2500m)인 주산을 잇는 80여 km의 협궤철로가 산자락을 타고 오르내리며 다양한 기후대(열대 아열대 온대 한대)의 숲을 통과하면서 다양한 식물상을 보여 주기 때문. 한겨울에는 눈 내리는 풍경도 선사한다. 그동안 열차는 터널 50개와 교량 77개를 통과한다. 어떤 곳은 나선처럼 산을 감아 돌고, 그렇게도 할 수 없는 가파른 급경사는 지그재그로 오른다.


해발 2200m 이상 고산지대인 자오핑에 발달한 편백나무 숲. 20∼30m 높이로 치솟아 하늘을 가리는 편백나무 숲의 그늘 안을 산책하면서 숲 향기와 함께 수령 2000년 전후의 편백 거목을 감상한다. 아리 산=조성하 여행전문기자
아리산 여행의 백미라 할 만한 고산의 삼림열차. 그러나 이 철도에는 가슴 아픈 역사가 새겨져 있다. 일제강점기(1895∼1945)에 삼림 수탈의 도구로 개발된 것이기 때문. 그 역사는 숲 관광지로 각광받는 자오핑의 편백나무 숲에서 확인된다. 이 숲은 2000년 넘게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는 거대한 편백나무의 군락지. 그러나 상당수의 노거수가 일제에 의해 잘려 일본으로 공출됐다. 지금 일본인들이 머리 숙여 절하는 신사의 기둥감으로.

자오핑 편백 숲에는 그런 노거수를 상징하는 나무가 한 그루 있다. ‘아리 산 향림신목’이다. 팻말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수령 2300년, 수고 43m, 둘레 12.3m.’ ‘신목(神木)’이란 이 숲의 좌장 격인 편백나무에 붙여 주는 이름. 1대 신목이 번개에 쓰러지자 임명됐다.

이런 신목급 편백 노거수가 자오핑 숲에는 아직도 20그루 남아 있다. 그 거목들은 나무보도가 가설된 숲 산책로를 따라가며 감상할 수 있다. 짙은 나무그늘이 드리워진 숲 속은 기온(섭씨 15도)도 알맞고 나무 향까지 상큼해 삼림욕장으로 그만이었다. 일제는 삼림철도까지 놓고 이 나무를 베어 갔다. 그러니 도대체 그 수는 얼마나 많을 것인가.

숲에는 희한한 형태의 편백나무도 많다. 하트 모양의 사랑나무, 세 그루와 네 그루의 뿌리가 얽히고설킨 채 두루 함께 생장하는 세 자매-네 형제 나무 등등. 그중 최고는 3대목(三代木)이다. 죽은 1대를 발판삼아 2대목이 자랐고, 2대목이 죽자 그 위에 뿌리내린 3대목이 한창 자라고 있다. 미물인 나무도 이러할진대 불과 60여 년 전 자행된 일제의 만행이 과연 부인한다고 사라질 것으로 믿는지. 반성 없는 일본인에게 꼭 한번 보여 주고 싶은 나무다.

아리 산=조성하 여행전문기자 summer@donga.com

■여행정보… 열대 아열대 온대 한대 다양한 기후 체험 가능


◇찾아가기 ▽항공편=유니항공(www.uniairkorea.co.kr)이 인천∼가오슝 매일(1회) 운항. 02-756-0015 ▽자이 현=‘대만가오톄(高鐵)’라 불리는 고속철도가 2일 전 구간(타이베이∼가오슝) 개통됐다. 자이 역은 가오슝(쭤잉 역)과 36분 거리. 요금은 NT$410. www.thsrc.com.tw ▽환전=대만달러인 ‘타이비’는 중국어로 읽을 때는 위안(元), 표기할 때는 NT$(뉴타이완달러). NT$100은 약 3300원. 대만 현지에서는 한국 돈을 타이비로 바꾸기 어려우니 출발 전 미리 환전하기를. ▽로밍 폰으로 한국에 국제전화 걸기=002+82+0을 뺀 지역번호+전화번호 ▽시차=1시간. 한국 시간은 1+현지시간.

◇웹 정보 ▽자이 현=www.tbocc.gov.tw ▽대만관광진흥청 △대만: taiwan.net.tw △서울사무소: www.tourtaiwan.or.kr

◇아리산 관광 ▽5대 풍경=일출, 운해, 저녁놀, 삼림, 등산열차(삼림철도) ▽웹 정보 △대만 산림청: www.forest.gov.tw △삼림철도: 이 철도로 운행되는 아리 산 등산열차는 히말라야 고원을 오르는 인도의 다르질링 등산열차, 안데스 고원을 오르는 페루의 등산열차와 더불어 세계 3대 등산열차로 불린다. 자이 시(베이먼 역)∼아리 산(자오핑 역) 3시간 30분, 아리 산(자오핑 역)∼관일루(주산 역) 20분 소요. forestrailway.forest.gov.tw △호텔: 아리산가오다판뎬(閣大飯店). 자오핑 역 옆. www.agh.com.tw


◇가오슝 ▽야경 감상=둥디스85청(層)로(85층 스카이타워) 전망대. ▽맛집 △야시장: 류허와 신쿠장이 유명. 신쿠장에는 젊은 취향의 옷과 액세서리 상점도 많다 △치진해선(海鮮) 거리: 신선한 해물로 요리해 주는 즉석식당이 길가에 즐비. 쓰즈완의 치진페리(요금 10위안) 선착장에서 걸어서 3분. △뷔페식당 ①중식: 한쉬안(寒軒)국제호텔 6층 ‘티볼리’에서는 대만요리 뷔페와 함께 다양한 딤섬을 낸다. ②일식: 조고야(www.jogoya.com.tw)는 회, 초밥, 나베 요리 등 다양한 일본음식을 낸다. 주문 요리도 뷔페에 포함.

◇여행가이드 책자 및 지도 무료제공=종합여행가이드와 지도, 호텔 및 식당가이드, 맛 기행, 차 기행, 온천, 홈스테이 안내서 등. 대만관광진흥청 홈페이지(www.tourtaiwan.or.kr)에서 신청하면 우편(요금은 수신자부담)으로 보내준다. 02-732-235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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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지어선 다랑논 ‘봄의 교향악’
남해 가천 다랭이마을
한겨레 정상영 기자
» 남해군의 왼쪽 섬 끝자락에 앵강만을 마주보고 선 남면 홍현리의 가천 다랭이마을에는 가파른 산비탈에 층층이 쌓아올린 다랑논마다 해풍을 이겨낸 마늘이 파릇파릇한 싹을 피워올리고 있다.
절벽에 둘러앉은 108층 논마다
해풍 이겨낸 마늘 싹이 푸른 목청
쑥·냉이도 쪽빛 바람결에 춤사위

경칩이 지나 땅이 눅눅한 봄 냄새를 뱉어내는 해토머리지만 왕성하던 봄기운이 꽃샘추위 탓에 잠시 숨을 고르고 있다. 이른 봄기운에 취해 다투어 개화를 뽐내던 봄꽃들의 기세가 애꿎은 날씨로 주춤거리고 있으나 시나브로 봄바람이 불어오는 남해는 봄이 무르익고 있다.

쪽빛 바다에 물새가 내려앉은 듯 점점이 떠 있는 크고 작은 섬들로 둘러싸인 보물섬 남해는 봄맞이가 한창이다. 고즈넉한 어촌마을 포구마다 등 굽은 할머니들이 따뜻한 봄볕 아래 굴을 까고 있고, 바다를 낀 논과 밭에는 육쪽마늘이 자라고 있다.

창선교를 건너 원시어업 죽방렴으로 잘 알려진 지족마을에서 1024번 지방도를 따라 남해 봄나들이를 떠난다. 마치 나비가 두 날개를 펼친 남해도의 왼쪽 섬을 바라보며 이동면과 남면의 서남쪽 해안가를 감도는 해안도로를 좁혀가면 남해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바다’ 앵강만과 만난다. 남해도의 왼쪽 섬 아래쪽에 오목하게 들어간 앵강만은 활처럼 휜 해안마다 화계, 용소, 두곡, 홍현, 가천, 향촌, 사촌 등 반농반어의 갯마을들을 부드럽게 안았다.

남해도 끝자락이자 앵강만의 들머리와 마주한 남면 홍현리에는 쪽빛 바다를 향해 곤두박질칠 듯 위태로이 서 있는 설흘산의 가파른 산자락에 다닥다닥 엉겨붙어 한 동리를 이룬 가천마을이 있다. ‘다랭이 마을’로 더 알려진 이 어촌에 들어서자 페루의 마추픽추처럼 가파른 산비탈에 돌옹벽을 지지대 삼아 켜켜이 층을 이룬 다랑논마다 겨우내 해풍을 이겨낸 마늘들이 파릇파릇한 싹을 내밀고 있다. 논두렁에는 쑥과 냉이, 동초를 캐는 아낙들의 손길이 분주하고, 남정네들은 지게로 시금치를 캐서 지고 나르기에 바쁘다. ‘다랭이’란 ‘좁고 긴 논배미’를 이르는 ‘다랑이’의 사투리로 논두렁으로 둘러싸인 논의 하나하나의 구역을 뜻한다.

온통 바다로 둘러싸였지만 마을이 자리잡은 가파른 산자락이 추락하듯 바다와 만나는 지형이다 보니 바다 농사는 엄두를 내지 못한다. 따라서 얼른 보아도 이 마을에는 산기슭에 작게는 삿갓을 씌우면 보이지 않는다는 ‘삿갓배미’로부터 크게는 서마지기 정도인 논들이 제각기의 모양으로 108층 계단을 이루는 모습이 진풍경이다. 삿갓배미는 옛날에 한 농부가 일을 하다가 논을 세어 보니 한 배미가 모자라 아무리 찾아도 없기에 포기하고 집에 가려고 삿갓을 들었더니 그 밑에 논 한 배미가 있었다는 일화에서 비롯했다.

» 다랭이마을

요즘 왕성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마늘은 4월20일께면 꽃이 피는데 5월20일께에 수확한 뒤 바로 논을 갈아 모내기에 들어간다. 아직도 이곳에는 농사를 지을 때 소를 몰아 논을 갈고 써레질을 해 모내기를 한다. 또 우리 농촌의 전통풍습인 ‘품앗이’ 문화가 고스란히 살아 있는 곳이다. 척박한 땅과 모진 바닷바람을 이겨내고 터전을 일궈온 남해인들의 억척같고 숭고한 삶의 철학을 읽는다.




“땅의 끝은 어디서나 절벽임을 알겠다/ 그 절벽을 일구어/ 손바닥만한 다랭이논으로 목숨을 이어 온/ 다랭이마을 사람들의 아침은/ 오르막길이거나 내리막길에서 시작되고/ 다랭이마을 사람들의 저녁은/ 저, 막막한 바다로 지는 노을이 아니겠는가/…/절벽을 끌어안고 사는/ 다랭이마을 사람들의 억센 사투리가/ 오히려 정겨운 것은/ 우리들 한 생의 귀퉁이에/ 헛디디면 안될 절벽 한 칸씩/ 껴안고 사는 때문이 아닐까”(최홍걸 〈남해, 다랭이 마을〉)

» 창선교 죽방렴 해넘이 (남해군 삼동면 지족리)

오른쪽 멀리 서포 김만중의 유배지였던 노도가 보이는 마을 바닷가 끝에는 가천 사람들이 미륵불로 여기며 마을의 수호신으로 삼고 있는 암수바위가 서 있다. 남성의 성기를 닮은 높이 5.8미터, 둘레 1.5미터의 거대한 수바위는 수미륵, 그 옆에 만삭이 된 여성이 비스듬히 누워 있는 꼴의 암바위는 암미륵이다. 영조 27년(1751년)에 발견된 것으로 전해지는데 해마다 음력 10월23일을 기해 제사를 지내면서 뱃길의 안전과 풍어를 빈다. 특히 아기를 낳지 못하는 부부가 치성을 드리면 즉각 효험이 나타난다고 한다.

“대한민국 최남단에 자리잡은 우리 마을은 산과 다랭이논과 바다가 정말로 조화가 잘 이뤄진 마을입니더. 자연경관이 잘 보존되어 있고 마을 인심이 전국 최고이지예. 도시 일상에 지친 분들!, 다랭이마을로 오셔가지고 스트레스 팍팍 풀어뿌이소. 재충전해 가이소.”

김주성(51) 마을 이장은 “다랭이마을을 방문하면 다랭이 논두렁에서 쑥과 시금치, 동초, 냉이, 달래 등 ‘봄나물 캐기’와 ‘1일 어부체험’을 즐길 수 있으며, 단체손님들이 원하면 저녁에는 폐교인 가천초등학교에서 시골학교 운동회를 열기도 한다”고 일러준다.

» 남해 최고의 고찰 용문사 법당 안마당에선 100년이 넘은 매화고목을 만날 수 있다

가천 다랭이마을 못지않게 자연과 어울려 살아가는 남해 사람들의 삶과 지혜를 엿볼 수 있는 곳으로 지족리 죽방렴을 들 수 있다. 창선교를 사이에 두고 삼동면 지족마을과 창선면 지족리 사이에 자리잡은 지족해협은 물살이 빠르고 깊이가 얕다. 500년 전부터 이곳 사람들은 바다에 길이 10미터 정도의 참나무 말목 300여개를 브이(V)자 모양으로 박아서 양 날개를 만들고 좁아지는 꼭지 부분에 원통형의 대나무 발을 쳐놓아 물고기를 잡는 죽방렴 어업방법을 지켜왔다. 5월이면 창선교 아래 해안가 음식점에서 죽방렴으로 잡은 멸치회와 조림을 맛볼 수 있다. 특히 이곳은 해질 무렵 창선교 위에서 죽방렴과 멀리 장구섬을 붉게 물들이며 남해 바다로 떨어지는 해넘이의 풍경이 아름답다.

남해에는 예부터 기도처인 보리암이 널리 알려져 있으나 그에 버금가는 아름다움을 지닌 절집이 또 있다. 호랑이가 누운 형상의 호구산에 자리잡은 남해 최고의 고찰 용문사다. 절 주위를 아름드리 소나무들과 측백나무들이 감싸고 있어 운치와 아름다움이 함께 느껴진다. 요즘 우리나라 3대 지장도량 가운데 하나인 이 절을 방문하면 법당 앞마당에 100년이 훨씬 넘은 매화 고목의 멋들어진 개화를 만날 수 있다.

» 남해 최고의 고찰 용문사 법당

남해/글·사진 정상영 기자 chung@hani.co.kr


여행 수첩

남해에서는 10일부터 남해대교와 노량 투구섬, 이충무공 전몰 유허지, 용문사, 가천 다랭이마을 등 관광지 7곳을 방문해 보물 7개를 찾으면 남해 특산물을 주는 행사를 벌이고 있다. 남해군관광협의회 (055)862-9009. 우리투어네트워크(www.tourtalker.co.kr)

또 지족마을 해안에서는 매일 전통어업인 죽방렴 어장을 볼 수 있고, 4월부터 바닷가재의 일종인 쏙을 직접 잡아볼 수 있다. (055)863-1688. www.es21.co.kr. 특히 오는 20일 오후 3시40분 지족마을에서는 근처 농가섬과 죽방렴까지 물이 빠지는 ‘모세의 기적’이 열린다. 해삼과 굴, 바지락, 개조개, 고둥 등을 채취하는 ‘지족 갯마을 바닷길 갯벌체험’을 즐길 수 있다. (055)867-1996.

한편 피부미용에 관심이 많은 이에게는 고현면 갈화리의 800미터 암반에서 솟아나는 ‘남해 심층수’(055-863-2029)로 하는 미백 체험을 권한다.

▶가는 길

경부고속도로→ 회덕 분기점→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진주 분기점→ 남해고속도로→ 사천 나들목→ 3번 국도→ 사천읍→ 삼천포항→ 창선·삼천포대교→ 3번 국도(1024번 해안지방도)→ 창선교→ 1024번 지방도→ 가천 다랭이마을. 또는 남해고속도로→ 하동 나들목→ 19번 국도→ 남해대교→ 남해읍→ 1024번 지방도로→ 가천 다랭이마을. 남해읍에서 가천 다랭이마을로 군내버스 운행

▶잠자리

다랭이마을 민박집(15채)에서 민박과 더불어 제철에 나는 농산물과 해산물로 만든 이른바 ‘시골밥상’을 즐길 수 있다. 숙박 정보는 마을 이장(011-862-6333)이나 다랭이마을 누리집(darangyi.go2vil.org)에서 얻을 수 있다.

▶먹거리

남해의 싱싱한 해산물을 맛볼 수 있는 남해군청 옆의 한정식집 미담(055-864-2277)과 제철 생선을 막 썰어 각종 야채와 초고추장으로 버무려 만든 물회를 전문으로 하는 서면 서상리의 부산횟집(055-862-1709) 등이 소문난 맛집이다. 또 지족마을 근처에 멸치회·조림과 갈치회·조림 전문 우리식당(055-867-0074), 장어구이 전문 달반늘(055-867-2970) 등 전문식당들이 많다. 삼동면 지족리의 다향(055-867-4819)은 해넘이를 볼 수 있는 운치있는 전통찻집이다.

▶문의할 곳

남해군 문화관광과(www.namhae.go.kr) (055)860-3228. 자세한 정보는 다음카페 ‘남해군자랑’(cafe.daum.net/namhai)

정상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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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림 조장하는 배후세력이 있다
지구촌 10살 미만 어린이가 5초에 1명씩 굶어죽는데
120억명 먹고 남을 식량 왜 폐기처분하는가
식량 생산 폭증할수록 기아도 폭증하는 역설 뒤에
이윤추구 치닫는 자본의 냉혹함 도사리고 있다
한겨레 한승동 기자
»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갈라파고스 펴냄. 9800원
“나는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힘을 갖고 있다. 그들은 우리를 이길 수는 있겠지만 사회의 진전을 범죄나 힘으로 멈추게 할 수는 없다. …머지않아 자유인들이 더 나은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지나갈 위대한 길이 다시 열릴 것이다. 칠레 만세! 칠레 국민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나의 마지막 말이다. 나는 나의 희생이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불의 기억>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1973년 9월11일 이 마지막 라디오 연설 바로 뒤 총을 들고 저항하던 살바도르 아옌데는 사살당했다. 미국 지원하에 피노체트가 주도한 칠레 군부쿠데타가 사상 처음 선거로 집권한 사회주의 정권인 인민전선정부를 무너뜨린 것이다.

장 지글러(73)의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갈라파고스)는 이 사건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본다. 1970년 1월 좌파정당과 노동조합이 연합한 인민전선이 101개항의 행동강령을 발표했다. 그 제1항이 선거에서 승리하면 15살 이하 모든 어린이들에게 하루 0.5리터의 분유를 무상 배급하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아이들 영양실조문제 해결이 칠레사회의 긴급과제였다. 그해 9월 선거에서 소아과 의사 출신 아옌데가 승리했다. 아옌데는 목축업자들과 독점계약을 맺고 생산에서 판매까지 우유산업을 독점한 채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던 스위스의 다국적기업 네슬레에 협력을 요청했다. 공짜가 아니라 제값 주고 사겠다는 데도 네슬레는 거부했다. 미국 때문이었다. 미국은 자국 기업들이 입을 손실과 중남미에 번질 ‘아옌데 도미노’를 겁냈을 것이다. 당시 닉슨 정권의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는 칠레에 대한 지원을 끊고 운수업계의 파업을 배후조종하면서 광산과 공장의 태업도 부채질했다. 사회주의정책으로 황금거위를 잃게 될까 전전긍긍한 네슬레도 이에 가담했다. 피노체트는 대학생, 성직자, 노조 간부, 지식인, 예술가, 노동자들을 숱하게 죽였고 개혁은 좌절했다. “아옌데 정권이 들어서기 전처럼 수만명의 아이들이 다시 영양실조와 배고픔에 시달리게 됐지.”

네슬레, 미국 눈치에 칠레 기아 방조

네슬레의 본고장 스위스 출신으로 제네바대학 교수, 연방의회 의원을 지냈으며 2000년부터 유엔 인권위원회 식량특별조사관으로 활약하고 있는 사회학자 장 지글러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기아문제다.

2006년 10월 유엔식량농업기구(FAO)가 발표한 2005년도 기아 희생자 보고서를 보자. 10살 미만 아동이 5초에 1명씩 굶어죽어갔고 비타민A 부족으로 시력을 잃은 사람이 3분에 1명꼴이었다. 세계인구의 7분의 1인 8억5천만명, 많게는 65억 인구의 약 20%가 심각한 영양실조 상태다. 기아 희생자는 2000년 이후 1200만명이나 더 늘었다. 아프리카는 전인구의 36%가 굶주림에 무방비상태다.

» 2004년 6월 차드의 이리바 타운에 있는 수단 난민 수용소 급식소에서 힘없이 눕거나 앉아 있는 아사 위기의 아이들. 굶주림이 이토록 비참하게 수단을 휩쓸고 있는 상황임에도 수단 분쟁지역 다르푸르의 반군은 그 지역을 약탈하고 불태운 아랍 전사들에 대한 전쟁범죄 재판을 저지하고 식량지원 활동가들의 자유로운 접근을 막기 위해 비행금지구역 설정을 요구했다. 이리바 타운/ 로이터 뉴시스
지구라는 행성에서 매일 10만명이 기아나 영양실조로 인한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다. 동남아시아 인구의 18%, 아프리카는 35%, 중남미와 카리브해 지역은 약 14%가 굶주리고 있고 ‘심각한 영양실조’ 상태에 있는 사람의 4분의 3은 농촌지역 사람들이다. 우리와는 무관한가. 1995년부터 지금까지 200만명 이상의 북한 주민(대부분은 아이들)이 굶어죽었고 수백만명이 만성적인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다. 15살 미만 북한 아동의 37%, 젖먹이는 엄마의 30%가 심각한 영양실조 상태다.

그런데, 이렇게 굶주리는 것이 식량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지구 차원에서 보자면, 오로지 가격 유지와 이윤극대화를 위해 무더기로 폐기처분되고 할당량 이상의 생산자에겐 벌금을 물리며, 수백만 마리의 육우들을 한꺼번에 도살할 정도로 식량은 남아돌아가고 있다. 1984년에 FAO는 당시의 농업생산력으로도 지구는 120억의 인구에게, 한 사람당 하루 2400~2700칼로리의 먹을거리를 제공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생산력을 갖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뒤에도 생산력은 폭발적으로 늘었으나 굶주림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생산력이 폭발적으로 증대될수록 기아도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역설이 현실을 지배하고 있다.

폭력적 금융자본 식량자급 방해꾼




그렇다고 해서 지글러가 비참한 굶주림이 모두 권력과 부의 불평등, 제국주의 탓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건 아니다. 전쟁, 독재자와 군벌들의 학정, 부패, 자연재해, 사회적 갈등, 낙후한 시설과 기술과 자본, 종교·민족 분쟁 등 수많은 기아원인들을 구체적 사례를 들어 파헤친다. 부패하고 무능하고 야만적인 북한 지배그룹에 대한 지글러의 비판은 가차없다. 어린 아들 카림과의 대화형식으로 진행되는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는 굶주림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간 지글러의 직접체험이 녹아 있는 생생한 사례들과 그런 그만이 알 수 있는 고급정보들로 차 있다. 아주 쉽고 가볍게 썼지만 그 메시지는 결코 가볍지 않다.

하지만 이 지독한 모순, 식량이 남아도는데도 세계의 절반이 굶주려야 하는 비정한 현실의 최대 원인제공자로 지글러가 지목하는 것은 결국 폭력적인 금융자본이 주인행세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체제다. 오직 돈과 이윤이 모든 행위의 동기가 되고 자연재해나 쿠데타, 전쟁, 기아마저도 이윤의 재료로 활용하는 금융과두지배체제하의 자본주의가 이윤 극대화를 위해 벌이는 규제철폐, 민영화, 정부예산 삭감, 국가기능 축소, 사유재산 절대화, FTA, 자본시장 자유화 등 이른바 세계화라는 미명아래 밀어붙이고 있는 양육강식의 시장근본주의(신자유주의) 구조개혁이야말로 그 원흉이다. ‘워싱턴 컨센서스’가 상징하는 강자독식의 신자유주의는 이윤을 위해 인간 및 지구의 미래와 관련된 세계 문제들에 눈감고 있을 뿐 아니라 문제를 새롭게 만들어내고 증폭시키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 164위였던 아프리카 최빈국 부르키나파소를 4년도 되지 않아 식량자급국으로 변신시켰던 젊은 개혁자 토마스 상카라가 외국세력(프랑스)의 조종을 받은 자국 군부의 손에 살해당하고 나라가 다시 과거 굶주림을 대물림하게 된 것이 무엇 때문이겠는가. 유럽이 식민지배하기 전까지 아프리카는 그렇게 굶주리지 않았다.

다국적 자본의 과두지배체제에 저항하는 사회운동·비정부조직, 노조들의 세계적인 연대만이 희망이라고 지글러는 주장한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18.0˚가 독자에게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장 지글러)는 토머스 맬서스가 1798년에 발표한 인구법칙에 관한 논문, ‘세계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25년마다 두 배가 되지만 식량증가는 산술급수적이어서 가난한 자들 산아제한을 해야 한다’는 그 유명한 얘기를 서구 백인 위주의 인종차별적인 약육강식 자연도태설이라 비난한다. “그래서 양심의 가책을 진정시키고, 불합리한 세계에 대한 분노를 몰아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맬서스의 신화를 신봉하고 있어. 끔찍한 사태를 외면하고 무관심하게 만드는 사이비 이론을 말이야.” ‘가난은 나랏님도 어쩔 수 없다’는 정도에서 ‘기아야말로 자연의 생태균형을 유지시켜주는 자동조절장치’라는 기아 예찬론에 이르기까지 모두 책임회피를 위한 비양심적 자기합리화로 보는 것이다.

읽으면서 한미FTA를 생각했다. 한미FTA 추진이야말로 ‘맬서스적 비양심’ 위에 지구적 먹이사슬의 정상 부근까지 밀고 올라온 우리가 이제 다시 이를 발판으로 최고정점의 미국 힘을 빌려 약육강식 먹이사슬 지옥도의 정점에 진입하려는 시도가 아닐까. 아니면 단지 생존을 위해선가. 어떤 결과가 나올까. 몇 가지 가능성이 떠오른다. 하나는 미국과 대등하게 최정상에 군림하는 것. 다른 하나는 무방비로 미국의 먹이가 돼 몽땅 빼앗긴 뒤 지옥도 아래로 추락하는 것. 또 하나는 만년 2류나 3류로 떠도는 것. 미국과의 지난 세월을 돌아보고도 첫번째 가능성을 기대한다면 무지하거나 무모하다 할 것이다. 설사 그리된다 한들 켜켜이 쌓인 신자유주의 희생자들 무덤 위에 자리를 편 우리 양심이 편할까.

어느 것이 됐든 정말 식량이 남아도는데도 세계의 절반이 굶주리는 이 불합리한 세상을, 지글러가 고창하듯 “뒤엎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걸 당연시하고 그 위에서 놀면서 상대적 우월을 즐기겠다는 심사의 연장이 아니겠는가.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인지.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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