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마노아 > 위즈덤 하우스 도서평가단 모임

4기 도서평가단으로 활동 중이다.

우연히 도착한 메일을 열어보고 클릭클릭 하다가 평가단이 되었는데, 1월, 2월, 3월까지는 모두 미출간 역사책이었는데 만족도가 참 높았다.  (4월 도서는 아직 못 읽었다. 내일 마감이다. 쿨럭...;;;;)

이곳은 독특하게도 회원들과의 만남의 장을 마련해 주었는데, 대학로의 한 레스토랑에서 오늘 모임을 가졌다.

전날 합숙훈련을 가장(?)한 극기훈련을 다녀왔다는 직원분들은 피곤한 내색도 없이 우리를 반겨주셨고, 살갑게 말도 걸어주셔서 참 좋았더랬다.

위즈덤하우스의 전년도 매출액의 빠방함에 놀라며...;;;;

여기 꽤 큰가 보다 잠깐 감탄을...

늦게 오신 아프락사스님이 옆자리에 착석.  내가 불러서 그렇게 된 건가?

알라딘의 꽃미남이란 소문을 듣긴 했지만 정말 미남이시더랑.ㅎㅎㅎ

목소리도 좋아서 학생들에게 인기 좋을 것이라 예상 됨..

엘신님의 정체를 두고 나는 여자라 하고, 아프님은 남자라 하고, 결론은 일주일 뒤에 밝혀질 거라고 예상.

그랬는데 '외계인'으로 판명되면 어쩌지?(ㅡㅡ;;;)

맛있는, 게다가 고급스런 스테이크를 배불리 먹고...

(남기고 싶을 때마다 우리는 5초에 한명씩 굶어죽고 있는 어린이들을 생각하며 접시를 깨끗이 비웠다...;;;)

기념 사진 한 방 찍고, 다급히 SH클럽으로 이동.

오늘의 2부 순서는 뮤지컬 '헤드윅'

작년 내 생일에 혼자 보러 갔다가 피곤에 쩔어 졸다가 나온 그 뮤지컬.

오늘은 그 보복전(?)이랄까.

내 자리가 맨 앞 오른쪽 끝이었는데 목 부러지는 줄 알았다..;;;;

작년에 조정석 헤드윅보다 연기가 더 자연스러웠고 노래도 좋았다.

이츠학은 작년의 안유진씨가 더 좋았던 듯.

3차로 다들 생맥주집으로 이동.

술 못하는 나는 집으로 이동. 조카와 놀고 있음^^

알라딘 분들도 꽤 있는 듯 보였는데 잘 모르는 이름들이어서 우리 테이블을 제외하고는 말도 별로 못 나눈 게 아쉽다.

아프님과 나란히 앉아서 즉석 사진을 찍어주셨는데, 사진 속에 왠 달이 떠 있음.

챙겨가실까 봐 얼른 내 가방에 넣었다.  흔적을 없애야 해...(ㅡㅡ;;;)

즐거운 하루를 보냈는데 무지 피곤.

4기 평가단 도서는 내일 읽기로 결심..... 쿨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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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2030’ 빈털터리 세대
[신동아 2007-04-25 10:51]
프랑스에서 출간된 ‘프로실업자’ 자서전 ‘나는 24년간 배부른 백수’ 표지 이미지와 일러스트.

1998년 국내 중견기업 이사직을 끝으로 명예퇴직한 박모(59)씨는 올초 셋째딸(26)로부터 각서 한 장을 받았다. 내용인즉 “영국 유학을 다녀온 뒤에도 최소 5년은 직장생활을 하겠다”는 것.

“대학 마칠 때까지 등록금에 용돈까지 대주고 동남아 영어연수도 보내줬는데, 취업한 지 겨우 2년 만에 불쑥 외국으로 떠난다니 선선히 보내줄 수 없죠. 실컷 돈 들여 공부하고 돌아와 곧장 시집가겠다고 하면 우리집 기둥뿌리 뽑는 것으로도 모자라 지붕마저 내려앉을 테니까요.”

박씨는 딸 넷을 뒀다. 맏이가 대학생이고 나머지 셋은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명예퇴직해 의류소매업으로 네 딸을 어렵게 공부시켰다. 지난해 막내딸이 대학을 졸업하면서 마침내 무거운 짐을 좀 더나 싶었다. 그런데 졸업 직후 결혼한 맏이를 제외하곤 세 딸 모두 사실상 그의 울타리를 못 벗어나고 있다. 2001년 수도권 소재 4년제 대학을 졸업한 둘째딸은 1년 넘게 구직에 매달리다 포기한 뒤 그와 함께 옷가게를 운영하고, 서울에 있는 대학을 나온 막내딸은 2년째 구직 중이다. 셋째딸이 유일하게 졸업과 동시에 취업했는데, 지난해 말 사표를 내고 영국 유학을 준비 중이다. 박씨는 “요즘 매일 누군가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다”고 말한다.

“10년 전 퇴직금과 아파트 담보 대출금으로 사업을 시작할 땐 그래도 자신감이 있었어요. 지금보다 젊었고, 10년만 고생하면 아이들도 제 밥벌이를 할 테니 그때까지만 뒷바라지 하고 그 뒤엔 우리 부부와 어머니 노후 생활비나 벌면 되리라 생각했죠. 노후자금은커녕 빚만 늘어서 아파트마저 팔고….”

지방의 가난한 집안 외아들로 태어난 박씨는 어릴 적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머니가 남의 집 살림해서 번 돈으로 서울에서 대학을 마치고, 대기업은 아니지만 이름만 대면 알 만한 회사에 들어갔다. 홀어머니는 고생하며 아들을 대학까지 공부시킨 걸 자랑스러워했다. 1990년대 초 서울 강북의 50평형대 아파트로 이사할 때, 어머니는 아들의 대학등록금 낼 돈이 부족해 죽은 남편의 형제들에게 손 벌려야 했던 마음고생을 다 보상받았다며 기뻐했다. 그런데 지난해 박씨 가족은 아파트를 팔고 평수를 줄여 빌라로 이사했다. 박씨는 그날 어머니가 눈물 훔치는 걸 몇 번이나 목격했다.

“지 애비 등골 다 빼먹고…”

“사업을 했지만 벌이가 신통치 않았어요. 아이들 교육비에 생활비를 감당하려니 대출금과 카드 빚만 불어나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것처럼 불안했어요. 더는 안 되겠다 싶어 아파트를 팔아 되는 대로 빚을 정리했지요. 어머니가 지금도 속상해하세요. 저야 아이들이 더 좋은 대학에 못 간 게 꼭 제 무능력 탓인 것만 같아 미안하지만, 어머니는 다르죠. 아이들과 어머니 사이에 골이 깊어졌어요.”

팔순을 넘긴 노모로선 대학까지 나온 말만한 손녀들이 밥값을 못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 “지 애비 등골 빼먹다 시집가면 그만이지.” 둘째딸(29)은 “할머니가 입버릇처럼 하시는 말씀이 가슴을 후벼 판다”고 말한다.

“할머니는 아버지 고생하시는 게 마음 아파 그런다는 걸 알지만 속상하죠. 할머니가 아버지를 대학 보내셨을 땐 4년제 대학 졸업장이 ‘취업 허가증’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지금은 구직자 중에 4년제 대학 안 나온 사람 있나요? 대학 졸업장은 이제 아무것도 아닌데…. 저나 동생들이나 답답하죠. 고등학교만 졸업한 엄마는 제 나이에 자식을 넷이나 낳았는데 전 아직 미혼에다 모아둔 돈도 없으니까요.”

실제로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국내 대학생수(전문대, 일반대, 교육대, 대학원 포함)는 1975년 23만5000여 명에서 2002년에는 300만명을 넘어섰다. 인구 1만명당 대학생수는 1975년 66.7명에서 지난해 623.2명으로 10배 가까이 늘었다. 매년 50만이 넘는 대학졸업자(전문대, 교육대, 일반대 포함)가 사회로 쏟아져 나오는 실정이다. 박씨가 대학생이던 시절 전체 대학생 수의 2배를 넘는 규모다.

최근 현대경제연구원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체감 청년실업률’이 15.4%에 달한다. 지난해 통계청이 집계한 청년실업률은 7.9%인데, 이는 청년층 경제활동인구(463만4000명) 중 실업자(36만4000명)만 감안한 수치고, ‘체감 청년실업률’은 비경제활동인구로 분류되는 취업준비자까지 실업자에 포함시켜 계산한 것이다. 현대경제연구원은 “구직 포기자까지 합하면 청년실업자(15~29세)가 100만명이 넘고, 청년실업률은 19.5%까지 올라간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높은 청년실업률이 장기간 지속되는 원인으로 ‘노동시장의 수급 불일치’를 지목한다. ‘산업 고도화에 따라 기업의 고용 유발력이 축소(노동 수요 감소)되고 있는 한편, 대학 졸업자가 꾸준히 증가(노동 공급 증대)하는 학력 인플레이션이 전반적으로 직업에 대한 기대 수준을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 한 마디로 일자리가 새로 만들어질 가능성은 작아지는데, 구직자의 눈높이는 점점 높아진다는 얘기다.

현대경제연구원 표한형 연구위원은 “학력 인플레도 문제지만, 산업 전반에서 자본집약도가 높아짐에 따라 ‘고용 없는 성장’이 지속되는 것이 높은 청년실업률의 결정적 요인”이라고 지적한다. 실제로 보고서에 따르면 ‘괜찮은 일자리(decent job)’가 줄어들고 있다. ‘괜찮은 일자리’란 ‘정규직이고, 평균임금의 1.5배 이상을 받으며 주당 근로시간이 18~50시간인 일자리’를 뜻하는데, 2002년 71만4000여 개에서 2005년 67만2000여 개로 감소했다.

정부 창출 일자리, 오히려 毒

지난해 한국개발연구원(KDI)이 펴낸 ‘양극화 극복과 사회통합을 위한 사회경제정책 제안’ 보고서도 ‘양질의 일자리 감소’를 사회 문제로 지적한 바 있다. KDI는 ‘노동부 고용보험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해 분석한 결과, 30대 대기업 집단 소속 계열사와 공기업, 금융회사 등의 종업원 수가 1997년 157만9000명에서 2004년 130만5000명으로 줄어들었다’고 밝혔다. 이들 기업의 종업원 수는 외환위기를 거치며 134만3000명(1999년)으로 급감한 뒤 2002년 124만5000명까지 감소세를 유지하다 2003년 127만1000명, 2004년 130만5000명 등 회복세로 돌아섰지만 미미한 수준이다.

KDI 김용성 연구위원은 “고임금 일자리는 대체로 제조업, 특히 대기업에 많은데, 제조업 분야의 대기업들이 생산기지를 해외로 옮기는 추세라 제조업 분야 일자리가 창출되지 않는다”며 “서비스 분야에서 일자리를 창출해 이를 보완해야 하는데, 서비스 분야 생산성이 OECD 국가 중 최저 수준에 머물러 있어 20~30대 고학력자의 노동시장 진입이 상당히 어려운 상태”라고 분석했다.

김 연구위원은 “20~30대의 실업이 장기화하면 ‘로스트 제너레이션(Lost Generation)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외국의 경우 실업자가 저학력층에 몰려있는 반면 우리나라는 고학력 실업률이 월등히 높은 데다 이들이 장기적으로 사회에 진입조차 해보지 못한 상태에서 아예 구직을 포기하고 비경제활동인구로 빠져버릴 것”을 염려하는 것. 그렇다고 ‘정부의 직접적인 일자리 창출’이 해결책이 되는 건 아니다. 김 연구위원은 “정부가 창출하는 일자리가 대부분 단기적인데다 민간기업에서 요구하는 역량 획득에 전혀 도움이 안 돼 오히려 취업에 약점으로 작용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분석했다. 공공근로 경험이 오히려 ‘실업자 경력’을 확실하게 부각한다는 이유로 구직자들이 기피한다는 것.

현대경제연구원은 청년실업 대책으로 “산업수요와 성장산업의 소요인력을 고려한 종합적 직업·대학교육 체계 개편, 지속가능한 일자리에 재정지원 집중, 일자리 창출 동력 강화를 위한 투자 확대, 중소기업에 취업하는 고학력 청년층에 인센티브시스템 확립 등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3명 중 1명은 대졸자

1980년엔 대졸자가 25세 이상 인구 전체의 7.7%에 불과했다. 하지만 2005년엔 31.4%가 대졸자다. 25세 이상 성인 3명이 모이면, 그중 1명은 대졸자인 셈이다. ‘대학을 나오면 안정된 직장을 얻을 수 있다’는 건 옛말이 되어버렸다.

‘대학졸업장’이 아무런 프리미엄 효과를 내지 못하니 취업희망자들은 새로운 프리미엄을 강구한다. 그래서 구직자들 사이엔 취업 ‘5종세트’ ‘7종세트’란 말이 나돈다. 명문대 졸업장, 외국어 성적, 해외 경험, 기업체 인턴십, 각종 자격증, 봉사활동…. 취업 준비를 위해 졸업을 미루고 휴학 중인 서모(26·남)씨는 “여기에 ‘능력 있는 부모’를 더하면 최상의 ‘스펙’이 된다”고 말한다.

‘스펙’이란 명세서란 뜻의 specification을 대졸 구직자들이 줄여 쓰는 말로, 입사지원서에 기입하는 내용을 가리킨다. 부모의 학력이나 경제력이 자녀의 학교성적에 적잖은 영향을 끼친다는 얘기가 공공연한데다, 어학연수나 각종 자격증 획득을 위해선 등록금 외에 추가 비용이 들고, 그 비용으로 ‘스펙’이 차별화되는 데서 나온 얘기다. 이력서 및 자기소개서를 ‘환상적으로’ 만들어주는 업체며 ‘취업 족집게 과외’도 성행한다고 하니 부모의 경제력이 취업의 지름길이라 생각될 수도 있겠다.

기자가 취재 중에 만난 10여 명의 미취업 대졸자 및 대졸예정자 중 1명을 제외하고 모두 6개월 이상의 해외 어학연수 경험이 있었다. 연간 등록금이 사립대 인문계의 경우 1000만원에 육박하는 상황에서 해외 어학연수까지 대학생이 으레 거쳐야 할 과정으로 자리잡아 대학생 자녀를 둔 부모는 허리가 휠 지경이다.

허리가 휠 망정 부모가 경제적으로 뒷받침할 여력이 있으면 그나마 나은 편이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대학등록금에 어학연수비용까지 감당하느라 사회에 진입하기도 전에 채무자 신세가 되는 젊은이도 적잖다. 수도권의 한 사립대에서 스페인어를 전공한 김모(28)씨는 가정 형편이 여의치 않아 졸업 전 네 학기 등록금을 학자금 대출로 충당했다. 두 학기는 생활자금까지 대출받아 총 1500만원 가까운 빚을 진 상태로 졸업했다. 이게 다가 아니다. 꼭 취업을 해야 하는 김씨는 ‘in 서울’ 대학이 아니라는 ‘약점’을 만회하기 위해 6학기를 마치고 멕시코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1년 학비와 체류비 1000만원은 친척에게서 빌렸다.

실제 임금보다 높은 유보임금

2003년에 대학을 졸업해 취업전선에 나선 김씨는 암담한 현실과 맞닥뜨렸다. 김씨는 해외영업 및 마케팅 업무에 관심을 가졌으나 스페인어 전공자를 원하는 기업이 드물뿐더러 있다 해도 ‘경영학 전공’ ‘토익 고득점’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김씨는 결국 한국무역협회의 무역 실무 1년 과정과 영어학원 토익반에 등록했다. 그러던 중 ‘보험용’으로 지원한 소규모 무역회사에서 출근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김씨는 한참을 고민했다.

“고작 영세한 무역회사에 들어가려고 그렇게 무리하게 돈을 들여 공부한 건 아닌데, 당장 학자금 대출 이자에 카드대금을 내야 하고, 친척들 보기도 민망해 결국 첫 출근을 했어요. 곧 더 좋은 곳으로 이직하자는 생각이었죠. 그런데 막상 취직하고 나니 다른 데 또 원서내고 면접 보러 다닐 엄두가 안 나더라고요. 그러다보니 벌써 4년이나 다녔어요. 이젠 다른 곳으로 옮기고 싶어도 갈 수가 없어요. 요즘은 중소기업에 다닌 경력이 별 인정을 못 받는다고 해요.”

KDI 김용성 연구위원에 따르면 “1990년대 대학설립이 자유화하면서 우리나라 대학 진학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최고 수준이 됐고, 대졸자들은 ‘대학을 나왔으니 이 정도 이상은 받아야 한다’는 유보임금(reservation wage)을 기업이 생각하는 것보다 높게 잡는 경향이 있다.” 이런 막연한 기대 수준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기업엔 아예 지원하지 않거나 설사 지원해 합격하더라도 입사를 하지 않으니 구직 기간이 길어진다.

최근 ‘동아일보’와 취업정보업체 인쿠르트가 공동으로 2003년부터 2006년까지 대졸 구직자 이력서 111만5000여 건을 분석한 결과에서도 대졸구직자의 ‘희망 연봉’은 실제 대졸 초임보다 많고, 꾸준히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2003년 1799만원, 2004년 1878만원, 2005년 2041만원, 2006년 2137만원. 반면 연봉 전문 사이트 오픈샐러리가 조사한 국내 전체 기업의 대졸 초임 평균은 2003년 1760만원에서 2006년 1897만원으로 오르는 데 그쳤다.

‘첫 단추를 잘 꿰어야’

소규모 무역회사에 다니는 김씨 역시 ‘일단 취업이 되면 고소득을 보장받을 것’이라고 기대했기에 형편이 안 되는데도 어학연수를 다녀온 것이다.

‘명품’ 바람이 생필품에까지 번져 2030세대를 ‘빈털터리’로 만든다.

“인터넷에 떠도는 3000만원, 4000만원 하는 연봉이 제가 받게 될 액수인 줄 알았어요. 그게 일부 금융회사와 소수 대기업에 국한되는 얘기란 걸 뒤늦게 알았죠. 아직도 학자금 대출금을 갚고 있는 저를 보면서 어머니가 그러세요. ‘난 너희 남매 대학만 졸업하면 우리 집 형편이 금세 필 줄 알았다’고.”

김용성 연구위원은 “유보임금을 낮춰 중소기업이나 서비스업에 취업하더라도 사회경제적 사다리를 타고 올라갈 수 있는 여지가 있어야 하는데 현재 우리 경제가 그렇지 않은 상황에 있다”고 분석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에 근로조건과 임금 격차가 심해진데다 중소기업에서 대기업으로의 이직이 어려워지면서 젊은층이 좌절을 겪고 있는 것. 뿐만 아니라 이러한 노동시장의 경직성은 고학력 청년층의 구직기간을 늘이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첫 단추를 잘 꿰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대기업을 비롯한 고임금 일자리를 고집하고, 소득기회를 포기하면서까지 긴 시간 취업준비에 매달리는 것이다.

그러나 ‘괜찮은 일자리’는 극히 한정되어 있다. 올 초 전국경제인연합이 2005년 매출액 기준 300대 기업을 대상으로 ‘고용동향 및 채용계획’을 조사한 결과 전체 응답기업 201개사 중 140개 기업만이 채용계획인원을 밝혔고, 61개사는 올해 채용계획이 없거나 미정이라고 응답했다. 주요 기업 140개사의 올해 신규 고용계획 인원은 3만4900명. 경력 채용까지 포함한 숫자라 실제 신입채용 규모는 훨씬 작다. 산업별로는 전기전자업종의 신규 고용계획 인원이 1만5397명으로 전체의 44.1%를 차지했고, 음식료 및 자동차, 조선 순으로 조사됐다. 주요 기업들이 밝힌 채용계획 중 눈에 띄는 점은 전체 3만4900명 중 2만595명(59%)을 매출액 순위 50대 기업에서 뽑는다는 점이다.

지난해 지방의 4년제 대학을 졸업한 김모(25)씨는 “취업이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서울의 좋은 대학을 나온 사람들은 1, 2년 만에 거의 다 취업을 한다”며 “지방대 출신이 파고들 틈이 없다”고 말했다. 김씨는 “중도에 학교를 그만두고 다시 대입 수능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이제야 알겠다”고도 했다. 대기업이나 고임금 일자리 창출이 저조한 상황에서 적은 일자리마저 최상의 ‘스펙’이 몰리는 기업들에 집중되어 있다보니 ‘청년실업 대란’ 속에서도 일부 대학 출신자는 2~3군데에 동시 합격하고, 지방대 출신 구직자는 면접 한 번 못 보는 ‘양극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유학과 공무원 시험 중 택일

서강대 중국문화학과 4학년 정모(24)씨는 해외 어학연수로 갈고닦은 유창한 외국어 실력에 우수한 학부 성적으로 무장해도 취업문을 통과하지 못한 청년 백수가 수두룩한 상황을 보고 일찌감치 진로를 바꿔 취업에 성공한 경우다. 내년 2월 졸업 예정인 정씨는 지난해 말 국가공무원 7급 시험에 최종 합격했다. 정씨는 대학 3학년 때인 2004년 8월에 휴학하고 공무원 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최근 공무원 또는 공기업 취업에 ‘올인’하는 ‘공시족(公試族)’이 늘고 있는 상황에 비춰보면 경쟁이 극심해지기 직전에 한 발 앞서 준비한 셈이다. 부모의 현실적인 판단이 크게 작용했다.

“5학기 때 부모님이 먼저 권유하셨어요. ‘요즘은 유학도 다녀오고, 실력이 출중해야 취업할 수 있다는데, 어학연수 1년 다녀올 비용으로 2년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면 어떻겠냐’고요. 공무원집단이 ‘철밥통’이다 ‘우물 안 개구리다’ 하며 비판받지만, 생각해보니 열심히 하면 문화관광이나 통상 쪽에서 전공을 살릴 수 있겠더라고요. 나중에 공부를 더 할 기회도 있고.”

경남 마산 출신인 정씨는 휴학 후에도 서울 신촌 원룸에서 자취를 계속하며 시험을 준비했다. 용돈을 아무리 아껴 써도 집세에 관리비, 생활비까지 더하면 한 달에 50만원으로 부족했다. 학원비며 교재비는 별도다. 정씨는 “신림동에 가면 지방에서 올라와 고시원에서 생활하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이 많다”며 “학원에 등록할 돈이 없어 도강(盜講)하는 사람도 적잖다”고 말한다. 시험 정보며 사교육인프라 면에서 서울과 지방의 차이가 현격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서울로 몰리는데, 준비 기간이 길어지면서 궁핍하게 생활하는 청년층이 많다고 한다.

“부모님 말씀이 저 대학 보내는 데 1억원은 족히 들었대요. 지난해 가을학기에 복학하면서부터는 등록금 전액을 학자금 대출 받아 냈어요. 벌써 1000만원 가까운 빚을 졌답니다. 무거운 짐이에요.”

“누릴 건 누리고 살아야지”

하지만 정씨는 직장생활을 시작하더라도 저축에만 매달릴 생각은 아니다. 전시, 공연 등 문화생활에 대한 욕구를 유감없이 충족시키고 싶은 바람이 있다.

“지금은 용돈이 적으니까 제 돈으로 표를 사는 건 사실 한 달에 한 번도 벅차고, 주로 이벤트에 응모해 당첨되거나 초대권을 가진 친구가 있을 때 공연을 관람해요. 좋은 옷, 명품 가방 같은 건 제 분수에 안 맞다고 생각하지만 문화생활만은 기회 닿는 대로 최대한 누리고 싶어요. 엄마는 나중에 월급 받으면 절반을 뚝 떼서 저금하라고 하시는데, 전 미래도 중요하지만 현재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축하느라 지금 누릴 수 있는 걸 못 누리는 건 좀 그래요. 적금 비율을 좀 줄이더라도 적립식펀드 등에 넣어 효율적으로 재테크를 하면 되잖아요.”

지방대학 교수인 이모(64)씨는 1999년 대기업에서 퇴직한 후 재취업에 성공한 경우다. 비슷한 시기에 직장에서 퇴직한 친구들은 “지금껏 현직에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며 부러워하지만, 이씨는 벌써 내년으로 다가온 정년퇴직 후를 걱정하고 있다. 이씨는 딸 둘에 아들 하나를 뒀다. 군대 간 막내아들(25)은 아직 대학 2학기를 남겨뒀고, 두 딸은 서울의 명문대를 졸업했다. 첫째딸(31)과 둘째딸(29)은 대학원까지 다녔다. 그러나 두 딸 모두 가정경제엔 별 보탬이 안 되는 상황이다. 첫째딸은 줄곧 아나운서 시험을 준비했으나 결국 포기하고 최근 박사과정을 밟기로 마음먹었고, 둘째딸은 지난해 일간지 기자가 됐지만 여전히 꼬박꼬박 용돈을 타 쓰고 있다. 둘째딸이 성남시에서 출퇴근하기 힘들다고 해 지난해 전세로 마련해준 24평형 아파트 관리비며 각종 공과금도 이씨의 통장에서 빠져나간다.

“둘째 말이 세금 떼고 통장에 들어오는 월급이 100만원 겨우 넘는데요. 그런데 사회 초년생이 돈 쓸 일이 좀 많나요. 옷 사고, 구두 사고, 가방 사고, 여자들 화장품 값은 또 왜 그리 비싼지. 아내가 딸에게 준 제 명의의 신용카드를 여태 회수하지 못하고 있더라고요. 요새 젊은 애들은 약아서 제 명의의 신용카드가 있을 텐데도 비싼 거 살 땐 꼭 제 카드를 써요. 지금이야 제가 버니까 그럭저럭 버티지만 앞으로가 걱정이죠.”

사회진입장벽이 높은 것과 더불어 ‘돈 쓸 데가 많다’는 것 또한 20~30대를 ‘빈털터리’로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이다. 기성세대는 “버는 돈 없이 사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을 참지 못하고, 모으기보다 쓰는 걸 우선한다”며 젊은 세대를 한심스러워하지만 정작 괴로운 건 ‘쓸 데는 많은데 돈이 없는 그들’이다. 서울대 소비자학과 김난도 교수는 “우리나라 20~30대를 규정하는 가장 적합한 코드는 ‘소비’”라고 말한다.

“20~30대는 이전 세대와 분명히 달라요. 국민소득 1만달러가 넘어선 시대에 태어나 놀이나 유희를 소비로 대체했죠. 어린 시절 또래 아이들과 모여 동네방네 뛰어다니며 놀기보다 전자오락기, 텔레비전, 워크맨을 이용해 혼자 노는 걸 즐겼고, 자라면서 과외나 학원으로 내몰렸고요. 지극히 개인적인 세대로 자라나 성인이 된 다음에도 백화점 구경하고, 인터넷 쇼핑하는 게 그들의 놀이문화죠. 브랜드에 대한 지식과 이해(brand literacy)가 부모세대보다 월등히 높아서 어른들이 모르는 브랜드를 많이 알고, 문화적 정서를 광고로 습득한 세대예요. 그러니 소비에 대한 지식도 많고 열정도 강하죠.”

실제로 얼마 전 부모로부터 독립해 혼자 원룸에서 살고 있는 정모(28)씨는 “사고 싶은 게 너무 많아 돈을 모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 “휴일에 갈 만한 곳은 백화점뿐이고, 잡지에선 매달 새로운 트렌드와 신제품을 알려주고, 인터넷 포털사이트 한쪽에선 쇼핑몰 ‘특가 상품’이 한 번 와서 봐달라며 깜빡거리니 욕구를 억제할 수 있겠냐”는 얘기다.

19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국민소득 수준이 높지 않았을뿐더러 사회적으로 절약과 저축을 강조하는 캠페인이 이어졌다. 국산품을 애용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외제품 소비는 생각 없는 사람들의 사치와 허영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세상은 아주 빠르게 변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생활수준이 급격히 향상된 데 이어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와 1990년대 중반 무역장벽 완화는 소비 범위를 국제적으로 넓혀놓았다. 근검절약을 강조하던 정부는 “소비가 경제를 살린다”며 돈 쓰는 걸 부추겼다.

‘부자 되세요’ 코드

대학생 해외 어학연수 바람도 20~30대의 ‘수준 높은’ 소비를 이끌었다. 해외 유학 경험자는 자신이 머물던 나라에서는 한창 인기지만 아직 한국엔 들어오지 않은 브랜드 제품을 쓰고, 그 나라의 음식을 찾아먹는 것으로 유학 경험을 과시한다. 미국을 본거지로 한 베트남 음식 전문점 체인 ‘포호아’가 강남에 1호점을 낸 게 1998년이고, 이듬해 이대 앞에 ‘스타벅스’가 생겼다. 외환위기로 주춤했던 해외 어학연수 기류가 다시 살아날 즈음 속속 국내에 진출한 이들 해외 브랜드는 유학 경험자들의 입소문을 타고 빠르게 성장했다. 기자는 2004년 ‘크리스피크림 도넛’이 소공동 롯데백화점 지하에 입점했을 때 미국 뉴욕에 어학연수를 다녀온 경험이 있는 동료 기자가 “미국에 있어본 사람은 이 맛을 잊지 못한다”며 길게 줄 선 사람들 대열에 ‘당당하게’ 합류하던 모습을 잊지 못한다.

홍보대행사에 다니는 유모(30·여)씨는 3년째 교제 중인 남자가 있지만 당장 결혼할 생각은 없다. “둘 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을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각자 번 돈으로 결혼해 생활해야 하는데, 지금으로선 계산이 안 나온다”는 게 이유다.

“대학졸업 후 줄곧 직장생활을 했는데, 남은 돈이 없어요. 지금 살고 있는 오피스텔 전세금이 전부인데, 그나마 4000만원 중 2000만원은 부모님이 보태주신 거고요. 그렇다고 사치스럽게 생활한 건 아니에요. 카드 빚 없이 연봉 2800만원으로 예쁜 옷 사 입고, 여름휴가 땐 동남아라도 다녀오고, 면세점에서 갖고 싶던 가방 사고, 친구들과 만나면 맛있는 음식에 와인 한 잔 곁들일 수 있으면 알뜰한 거죠(웃음). 다만 모아둔 돈이 없어 집을 못 산다는 게 흠인데, 6년간 악착같이 모았으면 과연 집을 살 수 있었을까요? 그렇지도 않잖아요. 굳이 먼 미래를 내다보지 않는 한, 지금까지 잘 살아왔다고 생각해요.”

김난도 교수는 “정치적 이슈가 대학가를 지배할 때는 소비에 관심이 있어도 드러내기 껄끄러웠지만, 사회 전반이 소비적으로 바뀐 다음, 특히 외환위기 이후엔 ‘부자 되세요’가 전국민의 열망이자 코드로 자리잡았다”고 말한다.

생필품까지 ‘명품 바람’

“‘소비의 평등화’란 허울을 쓰고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던 사치가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것으로 만연하게”(김난도 지음, ‘럭셔리 코리아’) 된 것도 20~30대를 더 가난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사치품이 외제차, 고급 예물, 양주 등에 국한됐을 때는 자신이 번 돈 안에서 알뜰하게 사는 게 미덕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명품 바람’이 생필품에까지 번지면서 ‘비싼 게 좋은 것’이라는 분위기에, ‘비싸도 좋은 것’을 고집해야 ‘센스 있고 감각 있다’고 평가받는 풍토다.

대형 마트 식품 매장에만 가 보아도 한 종류의 채소가 그냥 채소와 무농약 채소, 유기농 채소로 나뉘어 있고, 분유 코너 또한 일반 분유, 고급 분유, 유기농 분유로 구분해 진열돼 있다. 유기농 분유 값은 같은 용량의 일반 분유 값의 3배가 넘는다. 마트에서 함께 장을 보던 30대 초반의 주부 두 사람은 “그냥 채소에 일반 분유 사가면 계모인 줄 알겠다”며 유기농 분유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네 살 난 딸을 둔 맞벌이 주부 최모(37)씨는 아이 놀이방비와 도우미 아주머니 월급을 주고 나면, 자신의 월급에선 남는 게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유아용품만은 최고를 쓰지 않을 수 없다”며 “전업주부인 친구 중엔 육아비용 때문에 친정에 손 벌리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경기도의 한 초등학교 교사인 조모(34·남)씨는 요즘 고민이 많다. 2년 전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처가로 들어갔는데, 설 무렵 장모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입원하는 바람에 집안이 엉망이 된 것. 10년 전 혼자 된 장모는 쓰러지기 전까지 작은 공장에 다니며 생활비를 벌었다.

“장모님이 그 연세가 되도록 바깥일을 계속 하는 게 마음이 쓰이긴 했어도 집안에 큰 문제는 없어보였는데, 막상 장모님이 쓰러지시니까 집안이 지뢰밭처럼 문제투성이더라고요. 대학 졸업하자마자 결혼해 직장생활을 해본 적 없는 아내가 집에서 아이를 돌보면서 인터넷 쇼핑을 자주 했나 봐요. 집에 아이 옷, 장난감, 갖가지 교구와 책들이 나뒹구는데 그런 것들이 그렇게 비싼 건지 몰랐어요. 이번에 보니 얼마 안 되지만 전에 살던 집 전세금도 다 써버리고, 매달 빠져나가는 할부금이 200만원에 가깝더라고요. 지금껏 장모님한테 생활비 한푼 안 드리고 살았는데 당장 입원비는커녕 생활비도 없으니…장모님 뵐 면목이 없습니다.”

현금 100만원, 카드 100만원

집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아 2030세대의 ‘실망소비’를 부추긴다.

탤런트 김정은이 “부자 되세요”를 외쳐 화제가 된 광고는 알다시피 신용카드사 광고다. 신용카드는 부자가 아닌 사람도 부자처럼 소비할 수 있도록 소비 패러다임을 바꿔놓았고, 그 패러다임의 전환을 기꺼이 온몸으로 받아들인 세대가 20~30대다. 김난도 교수의 설명이다.

“신용카드는 지급이 편리하다는 것 외에도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어요. 과거엔 100만원짜리 물건을 사려면 100만원을 모아야 했는데, 요즘은 일단 ‘긁고’ 나중에 값을 지급합니다. 일단 소비하고, 나중에 생각하는 거죠.”

100만원짜리 물건에 욕심이 생겨 악착같이 100만원을 모았다고 해도 막상 현금 100만원을 손에 들면 선뜻 돈을 써버리지 못한다. 그러나 신용카드를 사용하면 달라진다. 신용카드로 결제를 하면 돈의 가치가 모호해질 뿐만 아니라, ‘소비의 기억’이 잘 누적되지 않는다. 그러니 당장 현금이 없어도 소비하는 데 주저하지 않고, 카드대금 명세서가 나오기 전까지는 얼마나 많은 돈을 썼는지 계산하지 못한다.

직장생활 3년차에 접어든 신모(29)씨가 술값, 밥값 외에 별다른 지출이 없는데도 매달 카드대금으로 나가는 돈이 생각보다 많다고 생각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기성세대는 소득이 생기면 저축부터 하고 남은 돈으로 소비를 했던 반면, 20~30대는 소득이 완성되기 전부터 지출액을 쌓아놓는다. 우선순위도 다르다. 과거엔 ‘집을 사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고, 모든 욕구 충족을 ‘내 집 마련 뒤’로 미뤘다. 그러나 요즘 젊은이들은 그렇지 않다. “서른두세 살 쯤에 결혼했으면 한다”는 신씨도 “내 집 마련을 미루고 자동차를 먼저 살 수 있다”고 말한다. “내 집 마련을 위해 다른 욕구를 포기하기보다 내 집 마련 시기를 미루거나 전세로 시작하면 되지 않겠냐”는 것이다.

신씨가 생각하는 아파트 전세금은 얼마쯤 될까. 기자가 기억하는 선에서 “구로구의 24평형이 1억3500만원, 마포구의 같은 평수는 1억9000만~2억5000만원, 용산구의 32평형은 1억9000만원 정도”라고 하니 신씨의 눈이 동그래진다. 연봉을 한푼도 안 쓰고 5년 넘게 모아도 마련하기 어려운 금액이기 때문이다.

20~30대를 경제적으로 괴롭히는 또 하나의 복병이 집값이다. 참여정부 최대 골칫거리 부동산문제는 특히 20~30대를 절망하고, 불안하게 만든다.

서울대 석사 출신의 대기업 대리 이모(31·여)씨는 ‘5월의 신부’가 된다. 상대는 지난해 친구 소개로 만난 4년 연상의 직장인. 똑같이 직장생활 6년차에 접어든 두 사람은 각자 모은 돈을 합쳐 마포의 20평형대 아파트를 매입했다. 동료들은 “‘내 집’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하니 얼마나 좋으냐”며 부러워하지만 정작 이씨는 “빚더미 위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한다”며 심란해 한다. 이씨와 예비신랑이 직장생활 만 5년 동안 모은 돈은 1억원이 넘는다. 그중 결혼식 및 혼수비용을 제하고 남은 8000만원이 내 집 마련 비용이다.

“명품 가방 하나 사지 않고 알뜰하게 모은 거예요. 매년 여름휴가 때 해외여행 다녀온 게 사치라면 사칠까. 남편 될 사람도 입사 초기에 중고 자동차를 산 것 말고는 차곡차곡 모은 편이고요. 막상 집을 구하러 다녀보니 8000만원이 턱없이 적은 돈이더라고요. 결국 20년 넘은 아파트를 1억5000만원 대출받고 샀어요.”

빚더미 위의 ‘스위트홈’

가진 돈의 두 배 가까운 빚을 져가며 굳이 집을 사야 할까. 이씨는 “남의 집을 전전하기 싫다”는 일반적인 이유 외에 “집을 손수 예쁘게 꾸미고 싶다” “지금 무리해서 사지 않으면 평생 집을 못 살 것 같다”는 두 가지 이유를 더 댔다. 최근 33평형 아파트 전세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한 권모(37)씨도 “대출금 이자를 내는 것보다는 전세가 낫다고 생각하지만, 아내가 ‘내 집이 아니라 집을 마음대로 꾸밀 수 없다’고 얘기할 땐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했다. 젊은이들에겐 ‘내 집’이냐 아니냐에서 더 나아가 집을 어떻게 꾸미고 사느냐도 중요한 관심사다. 이 때문에 요즘은 신혼집을 마련하는 경우 집값에 인테리어 비용 1000만~2000만원을 더 보태야 하는 추세다.

결혼 적령기로 접어든 자식을 둔 부모도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소 판 돈으로 대학을 다녔을망정 취업해 열심히 모으면 수년 내에 내 집 마련이 가능하던 시절은 간 데 없고, 평생을 저축해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집값이 치솟았기 때문이다.

서울대 졸업과 동시에 언론사에 입사한 김모(52)씨는 1988년 목동의 27평 아파트를 2020만원에 분양받은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월급이 80만~90만원(상여금 별도)이었고, 초등학교 입학 전인 남매를 키우고 있었다. 김씨의 부인 이모(52)씨는 “(남편의 소득 중) 상여금 전액과 월급의 일부를 떼어 모으면 1년에 500만~600만원은 모았다”며 “그때만 해도 월급쟁이가 허리띠를 졸라매면 몇 년 안에 내 집을 가질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재 목동의 27평형 아파트 매매가는 7억~8억원(스피드뱅크 실 구매가, 3월9일 현재). 대학 졸업을 앞둔 아들을 둔 이씨는 “우리 아들이 월급 모아서 집을 살 수 있겠냐”며 “(결혼할 경우) 결혼식을 간소하게 하고, 양가에서 1억원씩 내놓아 전세를 얻으면 다행”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또 “집값이 턱없이 오르는 바람에 젊은 사람들이 아예 돈 모으기를 포기하고 버는 족족 소비해버리는 경향이 있다”며 걱정스러워했다. LG경제연구원 오문석 상무 표현대로라면 ‘실망소비’다. “주택가격이 급증한 탓에 내 집 마련 가능성이 없다고 전망한 20~30대가 실망스러운 마음에 소비하는 경향”을 가리키는 신조어다.

‘집값 급등’이 20~30대에게 미친 여파는 ‘실망소비’ 수준을 넘어서 사회 구성원 간에 깊은 골을 만들었고, 일에 대한 의욕을 저하시킨 것은 물론 직업관까지 바꿔놓았다. 홍보대행사에 다니는 홍모씨(35·여)의 얘기다.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면 으레 부동산 얘기가 나와요. 얼마 전 대학 동기 한 명이 2003년 1억8000만원에 분양받은 33평형 아파트가 요즘 6억원을 넘는다고 자랑하는데, 비슷한 시기에 1억7000만원으로 전세를 얻은 제 자신이 정말 바보 같더라고요. 은행 빚 내기 싫어서 전세 살았는데… 이제 그 친구랑 저는 ‘계층’이 완전히 달라졌죠.”

돈으로 나를 드러낸다

소위 최고의 직장으로 손꼽히는 삼성전자 신입사원도 ‘요즘 같은 추세라면 내 집 마련은 이루기 힘든 꿈’이라고 생각한다. 올 초 삼성전자에 입사한 S(27)씨는 “DTI(총부채상환비율) 적용 이후 내 집 마련은 물 건너갔다”고 말한다.

“재테크는 남이 연 5~7%의 소득을 올릴 때 10~15%를 번다는 의미잖아요. 재테크를 잘해봤자 지금으로선 제 능력으로 집을 갖는다는 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죠. 얼마 전에 본 4컷 만화가 요즘 젊은 세대의 실정을 아주 잘 보여주더라고요. 한 명은 우수인재로 연봉 3500만원 받는 직장에 취업해 1년 만에 2000만원을 모았고, 다른 한 명은 부모 잘 만나 중소기업에 취직하자마자 3억원짜리 아파트를 선물 받았는데 1년 만에 1억원이 올랐다는 얘기였어요. 그게 현실이에요. 열심히 살려는 사람의 의지가 꺾이죠.”

서울대 김난도 교수는 우리나라 20~30대가 “소비에 대한 열망과 소비 가능한 자원 사이의 격차가 큰 세대이며, 다른 세대보다 결핍과 불만에 훨씬 민감하다”고 말한다. 부모세대에 비해 어린 시절을 풍요롭게 보냈지만, 외환위기 당시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는 냉혹한 현실을 목격하며 양극단을 체험한 이들은 성인이 된 뒤엔 ‘로또’와 ‘부동산 광풍’이라는 인생역전의 기회(?)와 마주했다. 부모세대가 전쟁과 산업화, 민주화 시대에 살며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존재했다면, 20~30대는 대체로 자기 자신과 ‘돈’에 집중한다. 다만 돈을 모으는 것보다 돈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목표를 둔다.

그러나 김난도 교수는 “20~30대의 소비성향이 기성세대가 염려하는 것처럼 쓸 줄만 알고 벌 줄은 몰라 생산성을 저해시키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내다본다.

“소비를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일할 겁니다. 갖고 싶은 것, 누리고 싶은 것을 획득하기 위해 투잡(two jobs), 스리잡(three jobs)도 감수할 겁니다. 물질문화에 노출될수록 삶이 더 각박해지죠. 젊은이들이 고소득 직종에 관심이 많고 직업 선택의 중요한 기준이 연봉인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죠.”

소비 욕구가 일할 동기를 제공하면 다행이지만, 직업 선택의 이유가 단지 ‘돈’이라면 청년실업 장기화 문제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유보임금에 밑도는 직장엔 입사를 포기하고, 재수 삼수를 하는 한이 있어도 ‘높은 연봉, 안정된 정년 보장’이 트레이드마크인 공기업 입사를 고집하며, 대학 졸업 후에 다시 치·의대 대학원에 진학하는 현상 등이 그 부산물이다.

“똑똑한 애들은 다 의대 갔는데…”

S씨는 인재들이 의대와 고시로 몰리는 현상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이라며 걱정스러워했다.

“똑똑하다는 애들은 대부분 인문계는 고시, 자연계는 의대로 몰리는데, 우리나라의 법률시장이나 의술은 그다지 나아진 것 같지 않으니 큰일이죠. 제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외고열풍이 불기 시작했는데, 이런 추세라면 앞으론 유치원 때부터 입시준비에 시달려야 할 거예요.”

S씨의 말은 ‘십장생’이란 신조어를 떠올린다. ‘십대들도 장차 백수가 될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비관적인 의미다. 실제로 경제전문가도 비슷한 걱정을 한다. LG경제연구원 오문석 상무는 “고령화시대에 부가가치를 창출해 노령인구를 간접 부양해야 할 20~30대의 경제활동이 활발하지 않은 것은, 지금의 10대가 노동시장에 진입해야 할 시기에 엄청난 사회·경제적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기성세대의 경제활동으로 유지되는 화로가 어느 순간 꺼져버릴 수 있다”는 얘기다. 그는 이러한 위기를 피하기 위해선 “서비스산업에서 다양한 직업군을 창출하는 등 직업 스펙트럼이 확대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대기업 임원은 “요즘 젊은이들이 똑똑하긴 하나, 계산적이고 안정된 것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평가한다. 그는 “우리가 젊었을 때처럼 사회의 앞날을 걱정하던 모습이나 개척정신, 모험심은 찾아보기 힘들다”며 아쉬워했다.

20~30대의 소비성향을 비교적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김난도 교수도 “학생 대부분의 꿈이 돈 많이 벌고 안정된 직장을 갖는 것으로 귀결되는 오늘날의 세태는 분명 제동을 걸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지금 속수무책인 상황이에요. 물질주의는 숙명이지만 과시욕에 치중한 지금의 소비 행태는 분명 비정상적입니다. 소비 외에 젊은이들이 즐길 만한 도락(道樂)이 없는 것도 문제지요. 과거엔 젊은이들이 학교, 장래희망, 가치관 등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했는데, 요즘은 소비욕망이 곧 정체성이에요.”

1970, 80년대까지만 해도 사상지나 문예지, 시사월간지가 젊은이들의 지적, 정서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자극했다. 그러나 요새 젊은이들은 패션·명품 잡지와 인터넷 블로그를 통해 누가 얼마를 벌고, 무슨 옷을 입고, 무엇을 먹는지, 그리고 어떤 집에 사는지에 관한 정보를 수집한다. 세상이 그렇게 변했다.



구미화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hkoo@donga.com / 일러스트레이션·박초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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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백낙청·리영희·최장집…한국사회 가장 큰 영향”
입력: 2007년 04월 29일 18:16:25
 
1987년 민주화 이후 20년 동안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지식인으로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 최장집 고려대 교수가 꼽혔다. 경향신문이 최근 각계 지식인 7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특집을 위한 설문(복수응답) 조사 결과, 24명이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지식인으로 백교수를 꼽았다.

이어 21명이 리전교수, 17명이 최교수, 10명이 강준만 전북대 교수를 꼽았다. 90년대 활약한 강교수가 이례적으로 세 원로 지식인과 함께 나란히 가장 영향력 있는 지식인 반열에 오른 점이 주목된다.

강만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5명),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4명)·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4명)·박현채 조선대 교수(1997년 사망·4명)·박원순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3명)도 민주화 이후 20년간 영향을 끼친 지식인으로 조사됐다.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국내 저술로는 23명이 ‘해방전후사의 인식(송건호·박현채 등)’을 선택했다.

그 다음 15명이 ‘전환시대의 논리(리영희)’, 10명이 ‘태백산맥(조정래)’을 꼽았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최장집·7명)’ ‘인물과 사상(강준만·6명)’ ‘전태일 평전(조영래·4명)’ ‘민족주의는 반역이다(임지현·3명)’도 영향을 미친 저술로 조사됐다.

해외 저술로는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18명)’,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16명)’, 앤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8명),’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7명)’,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6명)’이 꼽혔다.

민주화 이후 20년간 한국 지식인 사회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사건은 ‘IMF 외환위기(22명)’ ‘소련 및 동구권의 현실사회주의 붕괴(21명)’ ‘87항쟁(15명)’ 순서였다. ‘광주민주화항쟁(8명)’ ‘김대중 정부 등장(6명)’ ‘노무현 정부 등장(6명)’ ‘남북정상회담 및 6·15공동성명(6명)’ ‘황우석 교수 사건(5명)’ ‘송두율 교수 사건(4명)’도 지식인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 사건으로 조사됐다.

‘지식인이 위기에 처했다는 주장에 동의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74명 중 51명이 동의(43명)하거나 부분적으로 동의(8명)한다고 답했다. 동의하지 않는다고 답한 이는 19명이었다.

지식인들은 위기의 원인으로 ‘신자유주의 및 세계화(10명)’ ‘현실에 대한 성찰 및 비판 의식 부재(7명)’ ‘비전 및 대안 창출 능력 약화 및 부재(6명)’ ‘정치(국가) 권력 종속 및 결탁(6명)’ ‘지식의 대중화 및 정보화(6명)’ 등을 꼽았다.

〈김종목·손제민·장관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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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1-3. 한국을 바꾼 지식인
입력: 2007년 04월 29일 17:33:48
 
지식인들 사이에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된 지식인은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 최장집 고려대 교수 세 사람이다.

경향신문이 최근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특집을 위해 각계 지식인 7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복수응답) 조사 결과, 24명이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지식인으로 백교수를 뽑았다. 이어 21명이 리전교수, 17명이 최교수, 10명이 강준만 전북대 교수를 꼽았다. 여기에 ‘대중적 글쓰기’로 한국사회의 부조리와 지식인들의 허위의식을 깨는 도전적 작업을 해온 강준만 전북대 교수가 90년대 이후 등장한 지식인으로는 유일하게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리영희(한양대 전 교수·77)는 지난해 9월 “지적 활동을 중단한다”고 밝혔지만 여전히 ‘사상의 은사’로 기억되고 있음이 확인됐다. “시대의 흐름을 이끈 70~80년대 학번들의 이념적·사상적 출발점”(강맑실 사계절 출판사 대표)이나 “한국사회에 보기 드문 보편주의, 국제주의자로 ‘지적 거인과 같은 존재’”(조효제 성공회대 교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왜 아직도 리영희인가. 홍세화(한겨레 기획위원)는 “87년 민주화의 분수령 이후 한국사회는 새 변화를 추동할 세력을 창출하지 못했다”며 “이것이 리영희 선생의 주 활동기가 87년 이전인데도 가장 큰 영향을 준 지식인으로 꼽게 된 배경”이라고 말했다.

리영희는 1929년 평북 운산에서 지방 말단직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14살 때 혼자 서울의 공업학교로 유학했고, 굶주림에 시달렸다. “해방된 사회에서 동창생이 없다는 것은 나의 삶에 있어서 만사에 불편하였다”고 되뇌곤 했던 그는 평생 누구와 무리지어 세를 만들어본 적이 없다. 강준만(전북대 교수)은 리영희 서재에 걸려 있는 백범의 휘호로 리영희의 꼿꼿함을 설명한다.

“踏雪夜中去 / 不須胡亂行 / 今日我行跡 / 遂作後人程 (눈길을 걸을 때 / 흐트러지게 걷지 말라 / 내가 걷는 발자국이 / 뒤에 오는 이의 길잡이가 될 것이니)”

중국전문가로서의 리영희는 외신부 기자생활을 하며 단련됐다. 합동통신·조선일보에서 해·복직을 거듭하면서도 굵직한 특종들을 남겼다. 특히 그는 베트남전쟁으로 상징되는 미국 대외정책의 추악함과 중국 사회주의의 인본주의적 모습을 서구 지식인들의 입을 빌려 소개하는 방식으로 반공주의에 맞섰다. 리영희는 기자직과 교수직에 있는 동안 다섯 차례 구속되고 모두 1012일 동안 수감생활을 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자신의 몫을 주장하지 않았다.

무지막지한 독재의 시대에 그의 글들은 “아무리 작게 잡아도 몽롱한 의식에 끼얹는 찬물 한 바가지”(강준만)였다. 한국 지식인 사회에서 그가 갖는 힘은 사회적 발언의 중단을 선언할 만큼 스스로 자신의 육체적, 지적 한계를 인정할 때까지 그가 의미있는 비판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윤평중(한신대 교수)이 “비체계적인 인본적 사회주의가 한국사회를 ‘시장맹(盲)’ ‘북한맹(盲)’으로 만들었다”고 리영희를 본격 비판한 것은 불과 4개월 전인 지난해 12월 계간 ‘비평’을 통해서 였다. 그러나 윤평중은 이번 경향신문 설문에서 영향을 미친 지식인으로 리영희를 꼽았다. 그는 말했다.

“리영희 선생은 민주화운동 시기의 젊은 세대 전체에 큰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시대적 패러다임을 형성했고 그 여파는 87년 체제 이후에도 지속됨으로써 현대사의 한 축을 형성했다. 보수진영이나 우파에서는 그 특유의 이론적 빈곤이나 도덕적 결함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그에 대응할 만한 인물이 전혀 부재하다.”

리영희는 민주화 이후 자신의 책들이 더 이상 읽히지 않는 세상이 오길 바란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 그럼에도 한국사회는 계속 그를 필요로 하고 있다. 왜일까. 그 대답은 백낙청, 최장집 등 후배지식인들의 왕성한 지적, 실천적 활동이 요구되는 현 정치적, 사회적 상황이 말해준다.

백낙청(서울대 명예교수·69)이 한국 사회에 영향을 준 지식인 1위로 꼽힌 것은 40년 창비 역사와 함께 해온 그의 실천적 글쓰기 덕분이다.

차병직(법무법인 한결 변호사)은 “한반도 특유의 정치 상황에 대해 민족 문제를 고려하면서 지속적으로 분석해 왔으며 현재와 미래의 대안을 가장 적극적으로 모색한 지식인”이라고 했고, 박명림(연세대 교수)은 “언제나 시대정신에 맞는 화두를 잘 던지며, 그것을 대중들에게 맛깔나는 문체로 풀어내는 데 탁월하다”고 말했다.

백낙청은 55년 경기고 졸업과 동시에 미국으로 가 브라운대, 하버드대에서 영문학 공부를 하고 돌아왔다. 인제대 백병원을 세운 백인제·백붕제가 각각 그의 백부·친부이고, 현 인제대 이사장인 백낙환이 형이다. 스스로 ‘변칙적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고 말한 바 있는 백낙청은 28세 때인 66년 계간 ‘창작과 비평’을 창간하며 한국 사회의 분단현실을 실천적으로 극복하는 데 투신했다. 창비는 정간, 폐간, 판금 처분을 반복하면서도 “지난 40년간 비판적 연구자-문인-저술가 그룹을 한데 묶은 ‘비판지성 클러스터’를 형성하고 유지해오며”(조효제) 백낙청의 실천적 지성 활동을 든든하게 뒷받침했다. 백낙청의 담론 주도력 뒤에는 “유일하게 시장에서 성공한 비판적 지식인 미디어인 창비”(류준필 성균관대 연구교수)가 있었던 것이다.

분단된 한반도의 통일에 문학이 기여해야 한다는 ‘민족문학론’을 펴온 백낙청은 ‘민족문학작가회의’가 최근 그 이름에서 ‘민족’을 떼느냐 마느냐 문제로 논란을 벌일 때 민족의 삭제에 찬성했다. 그러나 그의 사상적 뿌리는 여전히 민족과 통일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그가 최근 이명원(문학평론가)과의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상당수의 진보적 학자들이 어떤 면에서는 보수 논객이나 학자보다 분단문제를 외면하는 경향이 더 강한 것 같습니다. …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상당수 학자들은 마치 이 사회가 분단과는 기본적으로 특별한 관계가 없고, 분단이라는 것이 하나의 부수적인 사실로 있는 것처럼 전제를 깔고, 분단 안된 사회의 척도로 진보 보수를 따지는 경향이 많아요. 최장집 교수도 그런 예의 하나이고, 손호철 교수도 그런 경향이 강하고, 그런 분들이 많아요.”

일관되게 한 가지 주제에 대해 학문적, 실천적 역량을 쏟았다는 점에서 최장집(고려대 교수·63)은 백낙청에 비견된다. 최장집은 강릉의 유복한 집안 출신으로 고려대 재학 시절 한·일회담 반대 투쟁을 주도한 4·19 세대다. 그는 고려대 정외과 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친 후 박정희 대통령의 공보비서실 행정관으로 1년여 일하기도 했으며 잡지 ‘세대’에서 기자생활을 거친 뒤 미국 유학을 떠났다.

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에 만개했던 각종 변혁이론들이 91년 소련 붕괴로 몇 년 못가 시들해졌을 때 최장집은 ‘구원투수’ 역할을 했다. 미국 시카고대에서 1983년 40세 늦깎이 박사를 받고 돌아온 최장집은 한국산업사회연구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80년대 초 대학을 다녔던 이른바 ‘제3세대 학자군’을 이끌며 그람시류의 네오마르크시즘을 비롯한 비판이론을 소개했다.

김호기(연세대 교수)는 “서구의 눈을 빌려오되 한국 현대사를 이끌어왔던 흐름을 꿰뚫어보고 현실 가능한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최교수 정치학의 근간”이라고 말했다.

최장집은 외형적 자유화가 아닌 실질적 민주화를 중시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국 민주주의 이론’(1993) 때부터 피력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장으로 일하다 조선일보의 사상검증에 휘말려 1년 만에 학교로 돌아온 뒤로 그의 공부는 더욱 깊어졌다. “나는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가 질적으로 나빠졌다고 본다”는 도발적인 문장으로 시작하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2002)는 이 책 제목이 하나의 관용어로 정착되는 계기가 됐다.

그는 학문적 천착보다는 사회적 활동으로 유명해진 학자도 아니고, 순수한 학문의 세계에 갇혀 있는 교수도 아닌, 이 둘을 아우르는 이론적 실천가라는 점에서 독특한 지위를 획득하고 있다.

〈손제민·김종목·장관순기자〉

◇ 리영희

1929년 12월 평북 운산 출신. ‘삭주 대관국민학교 개교 이래 몇 천재 중 하나’였다. 42년 경성공립공업학교에 진학하며 서울생활을 시작했다. ‘학비면제, 숙식·제복 국가부담’에 이끌려 한국해양대를 다녔다. 외신부 기자생활을 거쳐 72년부터 한양대 신방과 교수를 지냈다. 2000년 뇌출혈로 쓰러진 후 최근 저작 활동을 접었다.

◇ 백낙청
1938년 1월 대구 출신. 남들보다 2년 일찍 학교에 다녔다. 경기고 졸업 후 미국으로 가 브라운대에서 영문학 학사, 하버드대에서 영문학 석사를 받고 귀국했다. 66년 ‘창작과비평’을 창간한 뒤 72년 미국작가 DH 로렌스 연구로 뒤늦게 박사학위를 받았다. 창작과비평 편집위원을 맡고 있다.

◇ 최장집

1943년 5월 강릉에서 태어나 고려대 정외과를 졸업했다. 같은 과 대학원에서 석사를 한 후 청와대 공보비서실과 잡지사 ‘세대’에 잠시 몸 담았으며 이후 미국 시카고대에 유학했다. DJ 시절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장을 맡았다가 조선일보의 사상검증 때문에 물러났다.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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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1-2. 지금, 그들은 어디에 서 있나
입력: 2007년 04월 24일 17:30:58
 
지식인 사회가 분명한 ‘민주 대 반민주’ 전선으로 양분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지식인 사회는 ‘사상해방’이라고 할 만큼 다양하게 분화됐다. 반공주의자는 냉전적 사회인식이 힘을 잃어가면서 세가 줄었다. 특히 2000년 6·15공동선언 등 남북한 화해무드가 지식사회 내에 큰 영향을 끼쳤다. 우파 지식인들도 반공주의를 배격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민족주의자의 경우 위세는 여전하지만, 인권·시민사회· 탈민족주의자의 부상도 두드러지고 있다. 너도 나도 자유주의를 자처할 만큼 자유주의자가 증가하고 있다. 노동, 성, 환경 등 다양한 주제가 등장하면서 지식인의 분포도는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급격히 부상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동아시아론’ 등 대안 담론의 도전을 받고 있다. 좌파 지식인들의 우파 전향 및 ‘중도선언’이라는 새 경향도 나타났다. 80년대 중반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을 포기한 좌파 경제학자 안병직(뉴라이트재단 이사장·서울대 명예교수)을 비롯해 90년대 소련 등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김영환(시대정신 편집위원), 신지호(자유주의연대 대표) 등 ‘주체사상파 운동권’들이 전향했다. 최근 홍윤기(동국대 교수), 황석영(소설가) 등은 ‘급진적인 좌파나 경직된 우파가 아닌 통합적 대안으로서의 중도’를 천명했다.
2006년 유신체제를 재평가한 역사교과서 편찬을 추진하다 4·19유족회원에게 멱살을 잡힌 서울대 이영훈 교수.

2003년 입국했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기소됐던 재독 학자 송두율 교수.
경향신문은 최근 이들의 사상 궤적을 토대로 ‘2007년 한국사회 지식인 지도’를 작성했다. 정치·경제·사회 이념의 좌우 성향(가로축), 민족주의 성향 여부(세로축)로 한 2차원 공간에 주요 지식인을 배열했다. 두 축의 교차점에서 멀수록 이념적 특성을 뚜렷이 보여준다. 강정구(동국대 교수)와 강만길(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장·고려대 명예교수)은 좌파 성향에 차이가 있지만 민족주의적 특성이 강하다. 강정구는 좌파 민족주의자, 홍세화(한겨레신문 기획위원)는 좌파 탈민족주의자, 복거일(문화미래포럼 대표·소설가)은 우파 탈민족주의자를 각각 대표한다.

김호기(연세대 교수)는 “우리의 지식인 이념 분포 양상은 서구 사회와 다르다. 서구적 틀로는 좌파가 탈민족주의, 우파가 민족주의 중심으로 분포하지만 우리는 좌파민족주의 지식인들이 많다”며 “이는 김구 등 우파 민족주의 그룹이 몰락하고 나서 수십년간 반공체제가 공고해진 탓”이라고 말했다.

#민족주의자

좌우 이념 성향에 따라 북한체제의 포용 및 통일 방식의 개방성에서 차이가 드러난다. 좌파 민족주의자는 ‘분단 국가의 일부’로서 남한이 가진 정체성의 한계를 강조한다.

70년대 ‘분단시대의 역사인식’ 등을 써 통일지향의 필요성과 민족문제에 대한 자각을 일깨운 강만길, 남북한 모두의 내부 모순을 해소하기 위한 통일(분단체제론)을 주장한 백낙청(‘창작과 비평’ 편집인·서울대 명예교수) 등이 진보적 민족주의자다. 급진적 좌파 민족주의 지식인들은 ‘북한도 우리의 일부’란 시각에서 반외세 자주 통일을 지향한다. ‘민중에 의한 통일’을 주장하는 백기완(통일문제연구소장), 강정구, 송두율(독일 뮌스터대 교수)이 있다. 우파 쪽의 대표적 인사로 신용하(독도학회장·이화여대 석좌교수), 서길수(고구려연구회 이사장·서경대 교수) 등이 있다. 남한 체제 우위의 통일을 추구하거나, 통일보다는 대외 영토·역사 문제에 천착한다. 중도적 민족주의자로는 ‘전통 문화·정신’을 강조하는 김지하(시인·한국예술종합학교 석좌교수)를 들 수 있다. 북한을 타도 대상으로 보는 통일지향 세력으로서 극우 민족주의 성향을 보이는 인사로는 97년 월남한 ‘주체사상의 대부’ 황장엽(북한민주화위원회 위원장)을 들 수 있다.

#좌파·진보주의자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 결함을 비판한다. 마르크스주의, 진보적 시민사회론, 근대비판주의 등으로 분화해 있다.

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은 사회 구성과 발전의 주체로서 노동자 계급을 강조한다. 특히 불평등 문제를 주시한다. 민주노동당 진보정치연구소 위원으로 활동 중인 장상환(경상대 교수)은 현실 참여를 통한 사회 개선을 추구한다. 오세철(연세대 명예교수)은 좌파 학자들 위주로 ‘부르주아 체제에 포섭되지 않는 대안학교’인 진보적 사회과학대학원의 설립을 추진중이다. 손호철(서강대 교수)은 계급·민중적 시각의 사회평론에 적극적이다.

포스트 마르크스주의 지식인 그룹으로는 문화주의, 트로츠키주의, 자율주의자가 있다. 문화주의 지식인들은 마르크스주의의 ‘경제결정론’을 비판하는 한편 자본주의 체제 내 문화가 계급 및 불평등 구조를 재생산한다고 본다. 강내희(중앙대 교수)가 대표적이다. 그는 시민단체 ‘문화연대’를 통해 음악 저작권 강화 반대, 18세 선거권 낮추기 운동, 외국인 노동자 문화축제 등을 펼치고 있다. 트로츠키주의자 정성진(경상대 교수)은 국가 단위의 자본주의 극복이 아닌 세계 수준의 혁명을 추구한다. ‘노동계급의 국제연대’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이같은 노선에는 국제사회주의 단체 ‘다함께’가 있다. 자율주의자 조정환(갈무리출판 대표)은 스탈린식의 일당(전위당) 독재를 거부하고 노동자 자율에 의한 혁명과 발전을 추구한다.

진보적 시민사회론자들은 마르크스주의와 달리 사회변화의 주체를 ‘억압 당하는 노동계급’이 아닌 ‘시민’으로 본다. “민중이 자신의 다양한 이익을 체제에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는 최장집(고려대 교수)의 민주주의 담론이 이와 연계된다.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소장 김상조(한성대 교수), 참여연대 운영위원 조국(서울대 교수) 등이 이 범주에 들어간다.

근대비판주의 지식인의 스펙트럼은 넓다. 페미니즘, 생태주의, 탈근대론 등 체제 비판 이론이 다양하게 분포해 있다. 국가주의, 개발론, 민족주의 등 근대적·권위주의적 담론을 거부한다. 페미니즘은 가부장적 사회체제가 가지는 폭압적 구조를 반대한다. 여성운동의 대가 이효재(이화여대 명예교수)로 시작된 페미니즘은 ‘여성의 신체’(조한혜정 연세대 교수)에서 ‘여성노동자’(조순경 이화여대 교수)까지 논의의 폭을 넓혔다.

생태주의는 ‘대안적’ 삶·사회를 꿈꾸는 급진적 개발반대론이다. ‘지속가능한 발전’(환경주의)을 넘어 ‘인간의 탐욕’이란 문제 의식에 기초해 “생태 문제를 최우선시하고 생태가치를 생활의 전반에 구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종철(녹색평론 대표), 장회익(녹색대학 석좌교수)이 있다. 탈근대론자들은 ‘민족주의 비판’(임지현 한양대 교수), ‘냉전적 국가론 비판’(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 ‘소수자 소외 비판’(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 등을 통해 가부장적 획일주의, 순혈주의를 비판한다.

#우파·보수주의자

기본적으로 사회주의 반대, 자본주의 지향을 유지한다. 반공주의, 반공주의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연한 뉴라이트, 시장자유주의 등이 분포하지만 각각 명백히 구분되지 않은 채 혼재된 양상이다.

반공주의 지식인들은 ‘정통 보수’를 자칭하며 ‘대한민국의 법통’을 강조한다.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서 대한민국은 ‘반국가단체’인 북한에 대항해야 한다는 논리를 토대로 한·미동맹과 보안법을 최우선시한다. 조갑제(전 월간조선 대표)가 이 그룹의 대표적 지식인이다. ‘산업화 세력’에 대한 ‘민주화 세력’의 폄훼 시도를 적극 방어하는 이들은 “뉴라이트는 위장 전향한 빨갱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뉴라이트는 신지호 및 홍진표, 최홍재(각각 자유주의연대 사무총장, 조직위원장) 등 ‘전향 386’들이 주도하는 ‘신우파’ 그룹이다. 자유주의, 북한인권 중시, 대외개방 및 시장주도 경제, 기간산업 민영화 등을 주장한다. 최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찬성에서 드러나듯 “자폐적 민족주의를 극복하고 애국적 세계주의를 지향”한다. 대외 개방을 중시하는 탈민족주의자들이다.

“전통적 반공주의자들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됐고 사회 담론도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는 신지호의 지적처럼 뉴라이트 그룹은 최근 보수진영의 사회 이슈를 선점하고 있다. “자유시장경제의 창달을 통한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를 추구하는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 박세일(서울대 교수), “자본주의의 참담한 모순만 다룬, 잘못된 역사쓰기는 바로 세워져야 한다”는 교과서포럼 공동대표 박효종(서울대 교수)이 같은 노선이다.

시장자유주의는 영어공용화론을 주장하는 복거일, 자유시장 경제 지상론을 펴는 민경국(강원대 교수), 좌승희(경기개발연구원장) 등이 있다. 경제·통상 이슈에 집중하며, 정부의 시장개입은 최소한이어야 한다는 ‘작은 정부론’을 주창한다.

#자유주의자

국내 자유주의 개념은 포괄적이며 모호하다. 사회복지를 내세우는 사회적 자유주의(social liberalism)와 시장자유주의(libertarianism) 모두 자유주의로 해석된다.

최장집과 신지호 등 좌우파 지식인들이 모두 자유주의자를 자처한다. 상대적으로 이념 성향이 강하지 않은 지식인 그룹을 자유주의로 분류된다. 좌파와 우파를 넘나드는 총체적 시각으로 현상을 비판한다. 사회주의나 군부 독재 하에서의 ‘동원체제’ 등 억압적 권위를 거부한다. 윤평중(한신대 교수)은 자유주의자를 “열려 있으면서도 혼자 있을 수 있는 사람, 연대하면서도 패거리 만들지 않는 사람”이라며 “사회의 여러 이념들 간의 괴리를 메울 수 있는 지식인”이라고 정의했다. 최근 ‘중도’를 선언한 홍윤기(동국대 교수)가 자유주의자 가운데 상대적 좌파, 유럽적 우파로 통하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출신의 이근식(서울시립대 교수)이 상대적 우파로 분류된다.

〈장관순·손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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