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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술잔
현기영 지음 / 화남출판사 / 2002년 11월
평점 :
절판
소설가란 언어로 집을 짓는 사람이 아닐까? 순간에 살고 순간에 죽을 것같이, 찰나적 시간 속에서 예리한 섬광으로 타오르는 것이 시인의 감수성이라면, 소설가는 긴 시간에 걸쳐 집 짓는 근면한 목수와 같은 존재일 것이다.(5. 저자 서문에서)
일요일마다 거기(성당)에 가는 것은 순전히 그녀를 보기 위해서였다. 그녀의 신을 나도 믿고 싶었다. 여학생들 무리 속에 어울려 먼 빛으로만 존재하던 그 소년가 어느 날 문득 내 앞에 나타났을 때, 내 정신 속에서 막연하고 몽상적이던 것이 사랑으로 구체화되는 그 기적의 기쁨을 무어라 표현하면 좋을까? 그녀의 편지를 처음 받고 들뜬 마음을 어찌할 수 없어 그 편지를 개봉도 않은 채, 품에 품고 용두암 바닷가로 달려갔던 일이 생각난다.(22)
일요일 성당에서 만나 건네주는 편지 말미에는 언제나, "I belong to you, I am yours."라고 쓰여 있었다. 우리는 서로 열정적으로 사랑의 편지를 쓰긴 했으나, 만나서는 손도 잡지 않은 이른바 '플라토닉 러브'였다.(23)
좌판 장수 아줌마가 보기에 나는 아마 괴짜 관광객일 것이다. 소주 두 병과 안주 접시를 들고서 물가의 바위 끝에 가 홀로 앉아 있으니 말이다. 아무튼 나는 시끄러운 관광객들을 등지고 앉아 혼자 소주를 마신다. 앉아 있는 바위는 예나 지금이나 같은 모습이다. 그해 겨울, 수평선까지 헤엄쳐 가 죽어버리겠다고 바닷물에 뛰어 들었던 바로 그 바위다. 내가 그리워했던 것처럼, 이 바위도 내가 올기를 기다렸을까? 곰보처럼 구멍이 숭숭 뚫린 바위 표면도, 그 위에 널려 있는 눈곱만한 총알 고동들도, 바위 틈의 노란 거북손들도 옛모습 그대로다.(29)
내 고향 제주의 이미지는 무엇보다도 그 드넓은 청정 바다이다. 서울에서는 집에 있어도 마치 사무실에 앉아있는 것처럼 언제나 구속감으로 답답하다. 아마도 포로로 잡혀와 아스팔트 거리에 꽃혀 있는 가로수들이 내 처지일 것이다. 빌딩과 빌딩 사이의 협곡이 일으키는 왜곡된 바람은 또 얼마나 을씨년스러운가.(36)
여름이면, 바다에서 아주 살다시피했는데 눈의 흰자위만 제외하고 온몸이 새까맣게 그을려 있던 벌거숭이 아이들이 눈에 선하다. 그러니까 햇볕과 바람, 밀물과 썰물, 잔 물결과 거센 물결들이 우리의 심신을 단련시켜 무른 뼈는 굳혀주고 잔뼈는 굵혀주었던 것이다. 헤엄치며 작살질하기, 자리돔 잡는 뗏목배까지 멀리 헤엄쳐 갔다 오기, 높은 데서 다이빙하기, 돌덩이를 안고 물밑을 오래 걸어가기, 건착선 배 밑을 잠수로 통과하기, 강풍이 부는 날에 파도 타기, 등등. 몸이 가벼운지라 헤엄치다 지치면 수면 위에 번듯이 드러누워 쉴 수도 있었다.(36)
오름 정상에서 멀리 내려다본 해변의 도시는 아름다운 풍경화에 눌어붙은 땟자국처럼 보였고, 그래서 위대한 것은 오로지 황금빛 대초원 뿐이었다. 일렁거리는 초원의 빛, 스러져가는 생명이 마지막으로 발산하는 그 눈부신 아름다움... 바람을 피해 분화구 안으로 들어서면, 늦가을의 따뜻한 햇볕에 마치 자궁 속처럼 아늑하지 않았던가. 대지의 자궁, 그 늙은 테우리가 이제 곧 지상에서의 삶을 마감하고 돌아갈 곳은 바로 그 초원이었다. 그러므로 초원은 인간이 그로부터 태어나 죽어서 돌아가야 할 원점인 것이다. 언젠가는 나도 거기로 돌아갈 것이다.(중략..) 저 초원의 야초와 바람 속에 서면, 그렇게 욕심과 허위로 가득찬 내면이 잠시나마 시원하게 비워지면서 허심으로 환원되어지는 것이다. 관광은 그렇게 하면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탄식을 위해, 우리의 영혼의 정화를 위해 저 산과 저 초원은 야생의 거친 모습 그대로 존재해야 옳다.(42)
인간의 착취와 학대로 병든 지구는 더 견디지 못할 지경에 이르면, 맨 먼저 가해자인 인간 종을 지표 밖으로 쓸어내 버림으로써 제 몸을 정화시킬 것이다.(<가이아> 저자 제임스 러브록)
죽어있는 마을, 소등해버린 자정 이후의 먹칠 같은 어둠으로 지원진 마을...(<아버지> 일부) 이 표현은 말하자면 객지에 나와 있으면서, 더 이상 지도상에 존재하지 않는 내 고향 마을을 상상해본 것이다 .숲을 벗어나야 숲의 전모가 보이듯이, 일단 고향을 떠나서야 고향의 진정한 모습을 알 수 있었다. 멀리 떠나와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게 되니까, 막연히 잠재의식으로만 존재하던 4.3이 의식의 표면 위로 뚜렷이 떠올랐다. '지도에서 먹칠로 지워진 곳'으로서 고향을 상상했을 때, 나는 4.3이 슬픔과 분노의 모습으로 꿈틀거리며 되살아남을 실감했다.(177)
(<순이 삼촌> 취재) 어느 할머니는 나를 보고 4.3때 죽은 큰 아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며 내 손목으 ㄹ붙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도 가슴 속 옹매듭으로 맺혀 있는 쓰라린 사연을 끝내 털어놓지 않아, 나 역시 덩달아 울기만 하고 발걸음을 돌린 적도 있었다. 취재 내용을 토대로 작품을 만들 때 나는 눈물 젖은 목소리로 말하던 증언자들의 달랠 길 없는 한과 분노가 고스란히 내 작품에 반영되기를 원했다. 작품 형상화의 과정에서 나는 소설의 주인공들이 겪는 고난이 마치 내 자신이 겪은 듯한 뜨거운 일체감을 느꼈다. 글을 쓰다가 눈물을 흘린 적이 여러 번이었다.(179)
(<순이 삼촌>으로) 필화를 입은 뒤로 나는 어쩔 수 없이 의기소침한 사내가 되어버렸다. 일년 이상 절필하고 술로 허송했는데, 그러다가 안되겠다싶어 다시 펜을 들었으나, 4.3얘기 외에는 도대체 염두에 떠오르는 소재가 없었다. 그때 써낸 것이 단편 <길>인데, 매맞은 효과가 그대로 나타나서 종전의 뜨거운 분노는 종적을 감추고 그 대신 4.3의 상흔을 숙명처럼 안고 살아가는 이들의 애잔한 정서가 자리잡고 있었다.(181)
이 장편(<변방에 우짖는 새>)을 써놓고 혹시 천주교 쪽으로부터 욕을 먹지 않을까 했는데, 별탈은 없었다. 오히려 격려받기도 했는데 어느 속 트인 신부는 한국천주교교회사가 다시 씌어져야 한다고 했고, 명동성당의 젊은 풍물패는 교인들을 학살한 이재수를 오히려 메시아로 내세워 마당극을 벌이기도 했다.(182)
1931년을 전후한 식민지 시대의 민중 속으로. 장편 <바람 타는 섬>에서 나는 약 3개월에 걸쳐 연인원 1만 7천여 명이 참가한 제주 잠녀의 항일투쟁을 다루었다. 그 투쟁은 제주 특유의 항쟁 전통에 신사상인 급진주의가 접목되어 일어난, 식민지시대의 탁월한 항일투쟁이건만 본토와 격절된 탓에 역사의 조명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도내의 진보적 젊은 지식인들이 총망라하다시피 이 투쟁에 전위로 가담했는데 그들은 그 후 10여 년간 감옥에서 혹은 지하생활로 일제의 전쟁 암흑기를 보내고 중년의 나이로 해방정국에 재등장한다. 해방정국의 제주사회에 끼친 그들의 영향력은 실로 막강하였다. 그러므로 4.3항쟁의 성격과 동력이 바로 그 잠녀투쟁에서 유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1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