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국토 나의 산하 1 - 나의 국토인문지리지
박태순 지음, 황헌만 사진 / 한길사 / 2008년 7월
품절


"국토는 어제나 가장 구체적이다. 모든 추상적인 담론들을 걷어내고 국토의 깊숙한 고갱이를 찾고 또 찾아 새로운 시대를 열어나가야 한다." - 서문에서-1쪽

국토 언어는 기본적으로 희망의 언어이다. 사람들은 국토를 통해 끊임없이 낙토(樂土)의 삶을 추구하고 있다. 국토를 희망의 언어로 살펴보게 되는 것은 발길이 스치는 모든 곳들로부터 생활국토의 낙관주의를 구체적으로 목격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땅 사람들의 피와 땀과 눈물로 이룩해내는 삶터의 현장들은 국토를 풍요롭게 하려는 풍경을 핍진하게 보여준다.-11쪽

(청계천의 고독한 군중) 청계천 4가 방산시장에는 내 친척의 노점상이 있었는데 방산(芳山)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흥미로웠다. 왕조시대에도 청계천은 혼탁하기만 하여 하천 일대의 거지(두목을 '꼭지단'이라 불렀다)들로 하여금 오물들을 치우게 하여 쌓아놓는다. 그런즉 그 산더미에서 악취가 심하게 났다. 그렇지만 명칭만은 고상하게 붙여 향기롭다는 의미의 '방'이라는 글자를 내세워 '방산'이라 불렀다던가.-39쪽

(청계천의 고독한 군중) 1930년의 서울 인구는 40만 명이었는데 45년에는 90만 명으로 늘어난다. 6.25가 터지던 50년에는 170만, 4.19가 발생하던 60년에는 240만이 된다. 경제개발로 이농, 탈농이 본격화되면서부터는 걷잡을 수 없는 인구폭발 사태가 벌어진다. 10년 뒤인 1970년에는 550만, 다시 10년 뒤인 1980년에는 840만으로 증가한다.-48쪽

(서울) 도시화 과정은 세 단계를 거쳐간다. 초기 단계는 도시 인구가 전체 인구의 25퍼센트 정도일 때부터 추진되어 급물살을 타게 되는데, 영국은 19세기 말, 미국은 20세기 초, 일본은 1930년대에 이 단계를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한국의 경우 1960년 도시화율은 28.3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두 번째는 가속화 단계이다. 전통 농촌사회의 와해와 이농, 탈농의 도시 인구이동인데, 한국의 경우 1970년 단군 이래 최초로 도시인구가 50퍼센트 이상으로 늘어나며 농촌인구를 앞지르게 된다. 이른바 개발도상국의 단계로서 현재에도 전 세계적으로 이런 단계에 머물러 있는 국가들이 많다. 그렇지만 한국처럼 빠른 시간 내에 이 단계를 돌파한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세 번째는 종착 단계이다. 전체 인구 가운데 70퍼센트 이상이 도시지역에 거주하는 시기인데, 도시화율은 점차 둔화되어 완만한 곡선을 보이게 된다고 한다. 그렇지만 한국의 도시화율은 90년도에 81.9퍼센트, 2000년도에 88.3퍼센트로 엄청난 증가세를 보였고, 2005년 현재로는 이미 90.2퍼센트에 도달되어 임계점에 이르고 있다.-60쪽

한마디로 급경사의 도시화 질주이다. 세계적 기준으로 살펴보아도 특이한 현상임에 틀림없다. 더구나 아파트 거주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가 한국이라니 인구, 주거, 토지 등의 종합상황이 심히 독특한 생활환경을 생성해내고 있음을 살피게 된다. 도시화의 종착단계를 거치는 과정에서 온갖 사회문제들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에 관한 한국적인 현상과 상황 타개 방식도 참으로 독특하다. 국토 다극체제가 아닌 일극 체제로 인해 서울 및 수도권 전체 인구의 60퍼센트가 몰려 있는 상황에 대한 해소책은 당장의 일방정책으로 해결될 수 없다. 장기계획의 다방정책이어야만 지금의 불균형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이어서쪽

(백두산)'반도'(半島)라는 엉뚱한 지리용어는 '페닌슐라'(peninsula)를 오역하고 아울러 오용시킨 한자성어에 해당된다. 고대 그리스는 본디 해양성 국가여서 바다 쪽에서 육지를 관찰하는 표현법에 익숙했다. 페닌슐라라는 단어도 그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나온다. 그런데 육단(陸端)의 동국이 어찌하여 '절반의 섬'이라는 뜻인 '한반도'로 인식되었다는 것인가. 일본은 제국주의 시대에 자국의 열도를 '내지'(內地)라 했는데 조선과 중국은 과연 '외지'(外地)였던 것일까. 바다 바깥의 일본에서 파악하는 동아시아 지리지는 나름대로 편향성이 있었을 것인데 대륙과 해양을 함께 건사하는 한국에서 바라보는 지리지는 이와 달랐으며 아울러 달라져야 한다. '반도사관'의 울타리에 갇힐 이유는 전혀 없다. 민족주의, 국가주의 담론도 달라져야 한다.
대륙성과 해양성의 역전현상은 이제 재역전되어야 할 것이다. 백두산의 역사와 현실에 대해 심사숙고해보게 되는 까닭이다. 백두산에서 동아시아를 전망하노라면 한국을 '반도'라고 파악하는 지리인식이 도무지 납득되지 않는다. 뿐더러 중국과 일본을 백두산이 어찌 원망(遠望)하고 있는지 시야가 크게 틔어오는 것을 깨닫-118쪽

(어머니의 산 지리산에서) 지리산 입산자들은 원래 세 유형이었다. 과거시험 또는 자각각타(自覺覺他)를 위해 들어오는 이들에게는 현실 출세주의를 위한 수련연마의 지리산, 로빈 후드가 되기 위해 또는 차라투스트라의 각성을 얻기 위해 숨어드는 자에게는 현실 변혁운동의 지리산, 아예 들어와 먹고 살 작정을 내는 이들에게는 활인지지(活人之地)의 지리산.-144쪽

(지리산) 노고단 턱밑의 성삼재는 지리산 관통도로로 인해 항상 분주해졌지만 옛날 걸어 올라가던 때가 아주 그립다. 반선, 달궁, 심원 마을들이 그냥 자동차 도로변이 되고 말아 문화와 역사와 지리의 심오함을 한꺼번에 놓쳐버렸다는 것을 어찌 알릴 수 있을까. 오찬식의 <마뜰>이라는 소설에 보면 달궁에는 지리산 유격대(남부군)의 가족들마저 들어와 아지트 마을이 형성되었고 서당까지도 차려져 있었다고 묘사된다. 마한 시대의 왕궁터가 남아 있는데, 마한 효황(기원전 113~73 재위)이 백제 군사에 쫓기어 월궁(月宮)을 차린 자취라 한다. 달나라 궁전을 세운 고대국가의 판타지를 영영 빼앗기게 되고야 마는가.-164쪽

(지리산) 아울러 지적코자 하는 것은 '세석평전'이라는 명칭이 잘못되었다는 점이다. '평전'은 우리말이 아니니 '세석고원'이라 불러야 마땅하다.-167쪽

(지리산) 세상의 모든 자식들아, 어머니를 그토록 괴롭혔으니 이제는 좀 편히 모셔야 하지 않겠는가.-183쪽

(청춘산맥 설악산 가는 길) '망나니 도로'에서 계속 펑크를 내던, 군용 트럭을 개조해 만든 불량버스의 시대는 분명 지나갔다. 포장도로를 '양반도로'라고 불러 비포장도로를 벗어날 적마다 환호하던 시절에 비하면 오늘의 교통환경은 도리어 과잉 경쟁체제여서 탈이다. 도로는 세련되어졌지만 정작 길의 문학과 사색, 철학을 놓치고 있다. 길을 찾는 구도행, 길을 닦는 수도행, 자아의 계발과 모험을 얻으려는 고행과 만행과는 거리가 먼 것이 고속(화) 도로다. 산보와 산책, 소요와 원족을 배제한다. 길에서 누리는 즐거움, 곧 행락(行樂)으로부터 절제를 잃게 하여 타락시킨다. 에움길의 배회나 뒤안길의 고뇌를 상실케 한다. 세속과 탈속, 세간과 출세간... 산은 이를 호명하는 자가 누구냐에 따라 달리 규정돼왔다.-199쪽

(설악산) 공간 부자, 시간 부자, 인간 부자, 이러한 '3간'의 부유를 짊어지고 다니는 별난 족속이 있다 했다. 산악인은 어떠한 위인이냐 하면 바로 이처럼 '3중주의 부자'라는 것이었다. 흔히 "한순간의 결정이 일생을 좌우한다"는 말을 하지만, 그(한국산악회를 이끌어온 초기 멤버인 윤두선씨)는 다른 좌우명을 갖고 있었다. "순간의 풍경이 일생을 지배한다"는 것이었다. ..(중략).. 여인의 생애는 이 땅에서 여전히 순탄치 않은 만큼 앞으로 어려움에 봉착할 때면 그때(시간) 그곳(공간)에서 나(인간)를 황홀하게 하였던 명장면을 떠올려보라 하였다. 그러면 어떤 난관이라도 극복해낼 힘과 용기를 얻게 될 것이라 주장했다.-201쪽

(천상의 화원 소백산) 고대 산성의 능멸은 교통문명의 이름으로 자행된 역사문화 파괴의 반달리즘이었다. 도로의 '고급 생산'이 요청된다는 것을 이로서도 단적으로 일깨울 수 있다. 중앙고속도로는 30퍼센트가 교량으로 이루어져 있고 고도 또한 대단히 높다. 이를 난공사의 개가인 것처럼 내세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역사문화경관에 대한 배려는커녕 기본적인 자연환경에 대한 고려를 얼마나 무시하였기에 그토록 많은 교량과 함께 고산지대의 절개와 절삭을 강행해 고속도로를 냈던가 하는 관찰이 필요하다. 거듭 확인하자면 중앙고속도로는 청사(靑史)의 소백산 공간구성을 억압적으로 재구성해놓은 것이다. 사후 대책이나마 세워야 한다. '저품질 도로 생산'으로 왜곡 변형된 것일망정 소백산 일대의 역사경관을 '고급 소비문화'의 도로 사용과 활용으로 보완시켜나가야 한다.-230쪽

(소백산) 죽령을 영남사람들은 '대재'라고 불러왔다. 대숲고개라는 뜻과 큰 고개라는 뜻을 함께 거느리는 운치가 있으니 '죽령'이라는 한자 표기보다 더 정감이 간다. '영남 선비의 과거길'이라는 문화코드를 놓고 죽령과 문경새재가 경합을 벌이는 현상도 목도한다. 새재와 죽령이 서로 선비 과거길 1번지가 자기네 고개라 내세우고 싶어한다. 그런데 죽령에서 듣게 되는 이야기가 새재의 주장과는 또 다르다.
새재로 상경하여 벼슬길에 오른 사람은 관운이 새어 나가서 단명한다는 풍설이 있었다는 '비방'이다. 죽령을 통한 과거급제자는 오래도록 '죽죽' 높은 벼슬아치로 현달하였다는 '자랑'이다. 새재에서는 죽령을 경유하는 선비들이 과거시험에서 '죽죽' 미끄러진다는 소문으로 굳이 영남선비들이 새재를 넘어가고자 했던 것이라 했는데... 옛 고개일수록 사연이 많고 온갖 구설의 이야깃거리도 많게 마련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죽령과 새재가 영남 선비 1번지라는 말씨름을 더욱 오래도록 지속하기를 바라고 싶다.-241쪽

(소백산) 부석사의 봉황산 옆구리를 질러가는 마구령은 은밀하게 숨어 있던 충북의 의풍 마을만 쑤석거리는 것이 아니다. 세상이 싫어 꽁꽁 숨으려고만 했던 강원도 영월 땅의 김삿갓 계곡마저도 끄집어내고 있다. 특히 옛길 마구령(830미터)을 나는 '역사소설의 루트'라고 읽는다. 고구려의 온달장군과 망해버린 금관가야 왕손의 후예인 김무력(김유신의 조부), 그리고 신라의 이사부와 거칠부가 펼치는 '역사스페셜'이 있기 때문이다. 저작권 보호를 위해 더 이상 발설은 아니 하지만, 이번 여행의 마지막으로 나는 온달산성을 찾아가는데 국토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소백산 탐방을 온달산성으로부터 시작하시라. 그리하여 단양 영춘에서 의풍으로 넘어가는 베틀재를 지나 마구령을 통과하여 부석사를 찾고 풍기로 나와서 죽령을 답사하는 소백산 탐장의 역코스이다.-259쪽

(서라벌 두 성인의 사랑이야기) 나는 유네스코의 지원을 얻어 열화당 출판사가 1984년에 펴낸 <역사도시 경주>라는 책을 다시 펼쳐든다. 김원룡, 김정기 등을 비롯한 역사학계와 고고학계의 해방 후 1세대 학자들과 노태돈, 이기동, 문명대, 이종욱 등 2세대 필진들은 이 역사도시를 정녕 새로운 눈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사진작가 강운구의 경주 남산 사진집은 대단한 노작이었고, 최근에는 소설가 강석경이 아예 경주로 거주지를 옮겨 자전적 에세이로 묶어낸 <경주산책>과 <능으로 가는 길>이 맛깔스런 문장으로 경주를 대리체험케 해주고 있다.-276쪽

(대가야의 달빛 여행) 한국의 고대사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3국사가 아니라 가야가 당연히 제 몫을 누렸던 4국사다. 역사연표를 그대로 따른다 해도 대가야 멸망의 562년까지는 삼국지가 아니라 사국지를 펼쳐 보이고 있었다. 백제의 연표는 660년까지이고 고구려는 668년까지인데, 이보다 백 년 짧게 마감을 고했다 하여 가야사를 아예 신라사에 편입시켜버린 김부식이야말로 편협하기 이를 데 없다. 일연이 <삼국유사>에 가야사를 보충해 넣은 것이나, 최치원이 그보다 앞서 가야산신 정견모주와 가야의 마지막 왕자 월광태자에 관한 기록을 남긴 것은 무엇 때문인가. 역사의 실체이던 가야를 삭제할 수 없음을 일깨우는 일이다.-302쪽

(바로 책 들고 달려가볼 곳)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마애불-3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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