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요일이지만 자료는 여전히 오지 않았다.
모르는 번호의 전화가 왔다. 26년 만에 통화하는 고등학교 동창이다.
통화가 끝나고, 반복된 며칠에, 목적 없는 며칠에, 대상 없는 화가 약간 났고
사무실 앞 팍팍해 보이는 땅을 파기 시작했다.
몸을 움직이는 것이 정답이라는 몸의 신호가 왔다.
사무실 옮기고 밭이 없었는데 이제 배추를 옮기기 시작하니
땅이 받아 주건 말건 밭을 몇 평 만들어 볼 요량이다.
삽질에 땀은 비 오듯 하고 손가락이 금세 안으로 굽어든다.
지나가는 어르신들 질문이 시작되고 삽질 10분 만에 마을에는
'컨테이너가 배추 심을랑게~' 라는 생방송이 진행되는 듯 하다.
정수 씨가 갑자기 등장해서 트랙터 시동을 켠다.
"비이 보이소."
트랙터가 세 번 움직이자 한 시간 정도의 삽질 분량을 1분에 끝낸다.
워낙 묵혀둔 땅이라 다시 쇠스랑을 가능하면 깊이 박아 넣었다.
돌을 골라내고 주차할 차들과의 구역을 정했다.
위원장님이 갑자기 등장하신다.
"비료 해야제?"
"내일 읍내 가서 사올려구요."
"집으로 와. 한 포 줄랑게."
그렇게 다시 갑자기 퇴비가 하늘에서 떨어지고 나는 계속 돌을 골라내었다.
전화가 온다. 번호를 보니 짐작이 간다. 삽질을 그만 두고 미루어 둔 전화를 받았다.
잡지 구독. 영업 담당 직원에게 죄송하지만 아침의 말과 다르게 거절했다.
26년 만에 통화한, 얼굴은 기억나지 않고 이름만 기억나는 동창과의 통화.
그 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마주한 대화의 끝은 잡지 구독이었다.
거시기 신문사 거시기부 과장인데 죽겠다고, 난생 처음 이런 전화한다고.
150명을 채워야 는데 좀 도와달라는.
밥벌이의 고단함과 그가 감수해야 할 비굴한 기분 앞에 바로 거절하기 힘들었다.
영업팀에서 그에게 다시 짜증스러운 기별을 할 것이고 그는 상황을 받아들일 것이다.
26년 만에.
나는 오늘 땅을 파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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