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타르

 

제가 사는 석남리는

낮은 지붕과 정다운 굴뚝들이 이마를 마주대는

서산에서도 설렁설렁 헐거운 동네인데

서산중학교 네거리 못미처 대웅분식이라는 곳도

그중 소박하고 정겨운 술집이에요

닭발에다 순대도 구수하고

배추김치에 칼국수 맛도 심심삼삼,

얼큰한 등뼈해장국에 막걸리 몇 통 놓고 부담 없이

쌈박하게 취할 수 있는 곳인데

어쩌다 영업 일찍 끝나면

두 양반이 소주 한 병 놓고 권커니 잣커니

아름다운 그림을 보여주는 곳이지요

대웅분식 바깥양반 김명수 씨

오늘 낮술에 대취해 느닷없이

지나가던 제 손 잡고 하소연합니다

나이 열일곱에 머슴살이부터 시작해

이날 이때껏 목수 미쟁이 연탄장수

안할말로 안 해본 일 없이 살다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직업이 환경 미화원인데

더럽고 냄새나는 시절들

세상의 온갖 쓰레기 모두 치우면서

좋은 세상 열리는 거 보고 죽어야제

그 흔한 신세타령도 없이

꿍꿍 일밖에 모르고 살아온 분인데

가장 큰 고민이 면허증이래요

알밤 같은 아들 둘 딸 하나 낳아 잘 키우고

일자무식 마누라 손끝 하나는 맵고 당차

분식집 돈벌이도 쏠쏠하기만 한데

나이 오십 줄에 어쩐지 옆구리가 텅 빈 듯 허전하시대요

세상의 온갖 기계란 기계는 다 만지고

몸으로 때우는 것은 누구도 부러워할 것 없이 해치우는데

그놈의 운전면허 시험에는 서른여섯 번이나 떨어졌다나 봐요

이제 땅도 사고 집도 있어

찌들은 주름살 골짜기에 햇빛 들고 봄눈 녹아

어쩌다 가족끼리 자장면이래도 먹으러 갈라치면

몇 행보씩 오토바이 신세를 진대요

모처럼 쉬는 날이면 고생한 마누라 옆에 태우고

아들딸 앞세워 벚꽃 구경, 단풍 구경 시키고

아 바람 아래 포구에라도 나가

산 낙지에 소주 한잔 재미난 이야기 파도에다 띄우고 싶기도 한데

그놈의 면허증이 늘 문제라고

힘없는 내 손을 잡고 마구 흔드는 것이에요

배우지 못한 놈은 자가용도 탈 수 없냐고

배우지 못한 놈은 평생 노가다하고

배우지 못한 놈은 평생 쓰레기나 치우고

배우지 못한 놈은 평생 연탄이나 배달하라는 법이 어디 있겠냐고

한글을 읽을 줄도 모르는 놈은 무슨 수로 고개 떨구면서

땅을 치며 풀을 뜯는 겁니다

죄 없는 흙을 쥐어뜯는 겁니다

그 위로 달구똥 같은 눈물이 번지기 시작하는데요

 

 

- <크나큰 침묵> 솔. 1996.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파란여우 2008-02-12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살던 동네가 저 지역이었습니다.
대웅분식 칼국수는 한겨울 얼음이 꽝꽝 얼때 먹으면 뜨거운 국물이 칼칼하니 시원합니다.
시에서 언급한 것처럼 배추 겉절이도 짱이고
두어평 남짓한 식당방에 엉덩이를 지지고 앉아 옆자리의 아저씨들 얘기 들음 재밌죠.
기억의 저편에서 사라져가던 한자락을 떠올릴 수 있는 시를 만났습니다.
지금은 '석남리'가 아니고 '석남동'이라 불리죠.
유용주 시인은 여적 저 동네에 살고 있는지도 궁금하네요.

달빛푸른고개 2008-02-12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옮겨본 시에 직접 가보신 경험이 있으셨군요.
언제 한번 가보고 싶군요. 김명수씨가 계실 때...
어쩌다 들러본 서산은 그 인상에 군산과 매우 비슷하더군요.
어쩌면 구룡포나 (예전) 삼천포, 벌교 등도 비슷하겠지만요.

유용주 시인은 동문동에 여적 사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