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녀치마
권여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4년 8월
구판절판


그렇게만 읽어준다면, 내가 쓴 것은 연애소설이라 믿고 싶다. 사랑이 아니라 연애다.
연애라는 말, 참 좋다. 사랑이란 말처럼 상대방 면전에서 남발되거나 소모될 수 없는, 매우 촌스럽고 고전적인 맛을 풍기는 3인칭 여인과 사내의 의뭉스런 교감 같은 말이다.
그러나 연애소설만큼 무서운 형식이 없다. 피투성이 된 유년이 성장소설의 담보물이듯, 연애의 학살이 연애소설의 조건이다. 그러니 내가 제대로 된 연애소설을 썼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다시, 그렇게만 읽어준다면, 내가 쓴 것은, 내 글을 기다려왔을 것으로 상상된 단 한 명의 독자에게 내가 심혈까지는 기울이지 못했으나 오랜 세월 끈질긴 스토커로서 써 보낸 뒤늦은 연애편지라 믿고 싶다. 소설까지는 못 되어도 편지 정도는 괜찮겠다. 어쨌든 戀愛다. -작가의 말쪽

아버지를 향한 사랑이 극진할수록 어머니는 초라해졌다. 극진함은 관계에서의 가난이다. 어머니는 사랑이 관계적이라는 것을 몰랐고 관계란 악마에 속한다는 것도 몰랐다. 그래서 일평생 불행했고 기우가 많았다. -42쪽

내일이면 마흔, 새로운 나이가 조용히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종이봉투에 외눈처럼 박힌 쇠단추의 실끈을 천천히 푼다. 늙은 자들도 역시 미숙하다. 그러나 그들은 할 수 있는 것밖에 할 수 없다는 걸 안다. 아무도 세월보다 미리 손쓸 수 없다는 걸 안다.
풀리는 실끈에 쇠단추의 녹이 묻어난다. 이제 내 육체와 정신은, 미세한 주름 하나가 열두 가지도 넘는 의미를 잣던 풍요로운 은유의 세계에서 벗어나, 파안대소와 대성통곡이 구별되지 않는 둔탁한 사물의 세계로 접어들 것이다. 늙은 자는 사물처럼 덜 들키니, 나는 비록 허세일지라도 늙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87~88쪽

믹스 커피를 마시자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언제나 같은 맛을 내기 때문이다. 결코 매혹되지 않을 것들에 둘러싸여 살기. 이제 그만, 다 고아 먹은 사골 같은, 여생이라 불리는 가볍고 다공한 삶을 살기. 이게 요즘 그녀가 거짓되이 추구하는 삶이었다. 꿈꾸는 데에 진위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135쪽

아버지는 파헤쳐 팔려나간 은행나무 자리를 왜 그리 보나. 그녀는 생각했다. 없음이 외려 과녁이 된다면 아버지는 어머니의 빈자리도 그리 보나. -143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