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미잠이 국악태교
Various Artists 노래 / 보림(음반)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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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벙글 웃으며 따라부르기도 좋고, 조용히 쉬면서 휴식을 취하기에도 좋다. 

흔히 말하는 '모차르트 이펙트'의 거품을 벗겨내고, '왜 모차르트인가'를 진지하게 물어본다면 '국악은 어떠한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제작된 다큐멘터리를 보았고, 국악이 클래식 못지 않은, 아니 클래식보다 더 좋은 태교효과가 있다는 연구결과를 밝혀졌다.(그 다큐의 결론은 그렇다. 특정 음악이 태교에 좋은 건 사실이지만, 시디로 듣는 디지털 음악은 안 좋다. 우선은 엄마가 들어서 좋은 음악을 즐겨 드는 게 가장 좋은 태교이고, 이왕이면 연주회에서 아날로그 생음악을 듣는 게 좋고, 엄마가 직접 부르면 더 좋고, 굳이 음악이 아니라 자연의 소리도 좋다. 그리고 하는 수 없이 시디를 들어야 한다면 클래식보다 국악이 좋다는 거다.) 

음반시장 선반에서는 물론 우리 마음 속에서도 멀어진 전통음악인데, 이제 와서 굳이 '신토불이'를 따질 것은 없다. 하지만, 평소 관심도 없던 클래식 음악, 그것도 개인적으로 참 밋밋하다 생각하는(사실은 그래서 태교에 좋다지) 모차르트를 태교라는 이유로 몇 백만장을 팔아 치운 한국 음반 시장의 기염과, 또 열심히 듣고 있는 몇 백만의 한국 산모들을 생각한다면 '과연?'이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21세기에 새삼 서양것이라 배격할 이유도 없지만, 동양의 것이라면 '똥이라도 약으로 쓸' 서양의 호들갑을 지켜보면서 생각해본다. 분명 우리 정서에 맞는 전통 태교법도 있을텐데... 더구나 국악이 클래식보다 임상적으로 좋은 효과를 낸다하지 않은가.

그래서 발견한 음반 한 장. 이른바 자미잠이 국악태교.

일단 취향문제는 제쳐두고라도 모든 클래식이 태교에 좋은 것도 아니듯이(하물며 모차르트 전 곡이 태교에 효과가 있는 것도 아니다) 모든 국악이 태교에 좋을 리는 없다. 그 동안 한국문화에 대한 소개 차원에서, 새로운 들을거리라는 호기심으로 국악 시디를 몇 장 소장하고 있었지만, 외국인 신랑 말처럼 하나같이 좀 '청승 맞고 처량하고 슬프다'. 외국인에게 한국 음악은 다 그런거라고 잘못된 선입견을 심어준 거 같아 내심 좀 껄끄러웠는데, 생각해보니 내가 생각해도 한국 전통 음악이라는 게 하나같이 다 구슬프고 처량하다. 사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 역시 선입견을 갖고 있는 셈이다. 어쨌든 그렇게 처량하고 구슬픈 음악이 태교에 좋을리가 있나? 

자미잠이 국악태교음반은 그런 기우를 말끔이 씻어줬다.

외국에 살면서 태교를 하다보니 좀 더 한국적인 것에 관심을 갖게 되고 또 내 아이에게 전해주고 싶은 욕심이 자연스럽게 든다. 그래서 망설임없이 구매하긴 했는데, 그저 좀 새롭고 편안하게 듣기 좋겠지, 했을 뿐이다. 그런데 예상외로 참 살뜰하고 정겹고 흥겹다. 덕분에 하루 종일 싱글벙글 웃었다. 가사도 하나같이 구수하고 착착 감겨서 곧 따라부르며 흥을 내기도 좋을 거 같다. 엄마가 노래하는 게 듣는 거보다 더 좋은 태교라지 않은가. 한국말의 묘미도 잘 살린 거 같아 더욱 흐믓하다. 

'국악태교'라고 샀지만, 정식 앨범 명칭은 <엄마는 너른 들판, 아빠는 푸른 하늘>이다. 전통음악이니 국악이니 언급했지만 이 앨범은 현대창작물이고 기타와 피아노가 들어간 퓨전음악에 가깝다. 덕분에 구성진 우리 가락과 창법의 묘미를 살리면서도 선율이 지루하지 않고 음색이 흥미로운 게 좋다.


수록곡은 다음과 같다.  찾아 보면 책과 시디가 함께 나온 것과 이미 절판된 구판의 정보와 혼돈이 있다. 현재 개별 판매되는 자미잠이 <엄마는 너른 들판, 아빠는 푸른 하늘>이란 타이틀의 앨범 수록곡은 다음과 같으며, 알라딘 수록곡 명단은 틀린 것이다. 



1. 태담 하나 - 염치 없는 울 애기

2. 태담 둘 - 엄마를 위하여

3. 태담 셋 - 계절에 입 맞추며

4. 연주 하나 - 바다 (제주 자장가 편곡)

5. 태담 넷 - 엄마는 너른 들판, 아빠는 푸른 하늘  


6. 태담 다섯 - 너하고 나하고 콩콩

7. 태담 여섯 - 좋은 길 더듬어

8. 연주 둘 - 나무가 있는 언덕

9. 태담 일곱 - 비 오는 소리

10. 연주 셋 - 꿈속여행

 

 

자미잠이에서 나온 자장가 음반도 있고, 리뷰도 좋아서 이참에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다.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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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센터 2009-11-25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불편드려 죄송합니다. 알려주신 정보 담당부서 통해 확인하여 수록곡 수정요청했습니다. 업데이트가 매일 오전 6시에 반영되고 있으니 번거롭더라도 내일 이후 조회 부탁드립니다. 이후 좀더 정확한 정보 보여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편안한 시간 보내세요
 
물레방아 밀레니엄 북스 34
나도향 지음 / 신원문화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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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을 훌쩍 넘긴 신치규는 돈만 아는 지주. 머슴 부리기를 벌레 부리듯 한다. 막실살이하는 이방원의 22살 먹은 아내에게 눈독을 들여 뭐든 다 줄테니 아들 하나 낳아달라 한다. 물론 마나님도 두 눈 멀쩡 살아있다. 한 마디로 일제 말기 막되 먹은 가부장적 인간의 전형이다. 

 순진한척 튕기던 방원 아내, 이번이 처음도 아니렸다, 급기야 신치규와 모의하고 이방원을 쫓아내려한다. 이방원은 사정도 모르고 아내를 먹여살릴 걱정에 가슴이 먹먹한데, 아내는 앙칼지게 '날 어찌 먹여살리겠수'하고 대거리한다.  

부부싸움 후 술에 얼큰해 돌아오는 이방원. 물레방아에서 나오는 신치규와 아내를 목격하고 신치규를 죽을만치 패놓는다. 차라리 그때 신치규가 죽었으면 두 사람의 운명도 달라졌을거늘....

 순사에게 잡혀간 옥살이를 하고 나온 이방원. 끝내 아내와 신치규에 대한 원망을 풀지 못하고 신치규와 살고 있는 아내를 찾아간다. 옛정에 마음이 녹아 이방원은 다시 아내를 구슬려보지만 돈 맛을 안 아내는 막무가내다. "죽으면 죽었지 구질구질한 가난은 싫소. 결국 임자 손에 죽을 거 아니까 이 자리에서 끝을 보시오!" 이방원은 끝내 아내를 칼로 찔러 죽이고 자신도 자결한다. 


이 비극적인 단편이 시사하는 바는 많다.
흔히 말하듯 물욕과 색욕, 신분상승욕에 눈 먼 어리석은 인간들의 군상을 고발하는 것도 의미요,일제치하의 부정한 자본 아래 신음하는 농민들, 그 탈출구 없는 암울한 시대상을 까발리는 것도 의미다. 그 밖에도 지고지순한 현모양처에서 탈피해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려는 여인상을 거의 최초로 그려냈다는 평가도 있다. (하필이면 앞 뒤 안 가리고 부와 신분상승을 꿈꾸는 삶을 그려낸 것은 아쉽지만, 사실상 그 시대에 또 다른 대안은 없지 않았는가)

 그러나 많은 해석과 평가에서 이방원의 우직함과 성실함은 높이사면서 그 폭력성과 애욕, 집착은 간과하는 듯하다. 성실하지만 무식한 농사꾼의 삶이란 아내를 개패듯 패는 매질과  '모 아니면 도' 식의 폭력으로 점철된다. 사실, 파렴치한 신치규의 탐욕과 비윤리적인 방원 아내의 물욕만큼 앞뒤 안 가리는 이방원의 가시적 폭력성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신분과 자본, 인간 본성의 폭력성을 고발하고 모든 책임을 전가한다.  짐짓 동정과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그 가시적 폭력성 뒤에 숨어 있는 작가의 의도야말로 <물레방아>의 가장 큰 핵심이 아닐까.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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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속에 피가 흐른다 - 김남주 시선집
김남주 지음, 염무웅 엮음 / 창비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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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의 시가
오가는 이들의 눈길이나 끌기 위해
최신유행의 의상 걸치기에 급급해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나는 바라지 않는다 나의 시가
생활의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순수의 꽃으로 서가에 꽂혀
호사가의 장식품이 되는 것을
나는 또한 바라지 않는다 자유를 위한 싸움에서
형제들이 피를 흘리고 있는데 나의 시가
한과 슬픔의 넋두리로
설움 깊은 사람 더욱 서럽게 하는 것을


나는 바란다 총검의 그늘에 가위 눌린
한낮의 태양 아래서 나의 시가
탄압의 눈을 피해 손에서 손으로 건네지기를
미처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배부른 자들의 도구가 되어 혹사당하는 이들의 손에 건네져
깊은 밤 노동의 피곤한 눈들에서 빛나기를
한 자 한 자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그들이 나의 시구를 소리내여 읽을 때마다
뜨거운 어떤 것이 그들의 목젖까지 차올라
각성의 눈물로 흐르기도 하고
누르지 못할 노여움이 그들의 가슴에서 터져
싸움의 주먹을 불끈 쥐게 하기를


나는 또한 바라 마지않는다 나의 시가
입에서 입으로 옮겨져 노래가 되고
캄캄한 밤의 귓가에서 밝아지기를
사이사이 이랑 사이 고랑을 타고
쟁기질하는 농부의 들녘에서 울려퍼지기를
때로는 나의 시가 탄광의 굴 속에 묻혀 있다가
때로는 나의 시가 공장의 굴뚝에 숨어 있다가
때를 만나면 이제야 굴욕의 침묵을 깨고
들고일어서는 봉기의 창 끝이 되기를.

 

 

****


김남주 시인의 시와 인생은 억지로나마 위의 시 하나로 요약할 수 있다. 거칠고 투박하지만 팔딱팔딱 살아 날뛰는 시와 인생. 시선집 <꽃 속에 피가 흐른다>는 김남주 시인의 뜨거운 자서전이요, 근대대한민국의 차디찬 역사서다. 마른 눈으로 차마 읽을 수 없었다. 가슴에 뜨겁고 불편한 가래가 끓어서 차마 앉은 자리에서 소화할 수 없었다. 어떤 시는 읽고 또 읽고 몇 번을 읽었건만 타는 목마름은 채워지지 않았다. 

 
내 나라 하늘도 아닌데 '곱기가 지랄인' 화창한 가을날 왜 뜬금없이 김남주인가 추적해본다. 작년 하반기 대한민국 국방부가 발표한 불온서적 명단이었다. 이름만 들어 알고 있던 김남주 시인에 대한 호기심으로 당장 읽지도 못할 책을 주문했었다. 그리곤 잊어버렸다가 지난 8월 한국 친정에서 찾아 온 책이 우연찮게 일요일 아침 내 손끝에 걸린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김남주하면 체 게바라를 떠올리고, 체 게바라하면 김남주를 떠올리는 것은 결코 수사학적 우연이 아니었다. 그런데 체 게바라를 아는 (세계 사람도 아니고) 대한민국 사람 중에 김남주를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120편의 엄선된 시선집이나마 나도 이제사 겨우 만났는데. 시선집을 읽으면서 불편하고 괴로웠던 또 다른 이유였다. 이제, '주먹으로 터지는 네 분노를 위하여'  결코 김남주를 마음에서 놓지 않으리라.
 

 

 2009년 10월

 

시라도 써야겠다

쌓이고 맺힌 서러움

주먹으로 터지는 네 분노를 위하여

고이고 고인 답답함

가슴으로 터지는 네 사랑을 위하여

차마 바로는 보지 못하고

밥상 너머로 훔쳐보아야만 했던

내 눈 속 네 얼굴을 위하여

시라도 써야겠다

그 알량한 시라도 써야겠다

오늘밤과 같이

눈앞이 아찔한 밤에는

 

'아우를 위하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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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의 상실
톰 울프 지음, 박순철 옮김 / 아트북스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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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 소개에서 이 책에 관한 (모든 것은 아니고) 많은 것을 말해준 덕분에 나는 많은(귀찮은) 수고를 덜었다. 대부분 수긍가는 옳은 말이니 꼭 한번 읽어보라. 그저 책 팔려고 멋지게 휘갈겨 쓴 소개글만은 아니란 얘기다. 

다만 톰 울프가 비판하는 현대미술의 이론과 비평가들의 현학적인 횡설수설만큼 이 글도 이따금씩 뭔지 모를 횡설수설로 가득하다. 톰 울프의 고급 유머를 이해할만한 독해력이 떨어져서인지 톰 울프의 필체가 '소문'만큼 읽기 쉬운 게 아니어서 그런지는 영어 원작을 읽어봐야 알겠지만(뭐, 그 시간에 좀 더 좋은 책을 한 권이라도 더 읽겠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지만), 좀 더 한국독자들이 쉽고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하지 못한 번역은 못내 아쉽다. 

그나마 글이 짧아서 두 번 정도 후딱 읽으면서(술술은 아니고 자주 턱턱 막히면서) 재밌게 읽어나갔던 것은 톰 울프의 위트와 실랄한 풍자의 묘미(물론 이 역시도 현대미술에 대한 왠만한 배경지식이나 관심이 없으면 뭔 소린지도 모를판이다)를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었던 덕분이다. 

부르주아지와 부르주아지가 되고 싶은 '그들만의 잔치'에 일반 관객이란 그저 들러리일 뿐(더 정확히는 불청객), '억억'하는 현대미술시장에서 '헉헉' 팔려나가는 건 알쏭당쏭한 '~주의'나 '~파'로 무장한 이론, 그림은 언제나 '조연'이었다. 그런 와중에 일반 관객과 실수집가들은 언제나 은밀히 '사실주의적' 그림을 흠모해왔고, 이를 눈치챈 교묘한(한편으로 절망한) 현대미술 이론가들은 사실주의적 그림에서 '사실주의'를 표백하는 작업도 병행해왔다(팝 아트가 잘 팔리는 이유랍니다요 이게 ㅋㅋ).

또 그런 와중에 나(를 비롯한 아마추어나 무명화가들은)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환장했으니. '그림을 그려 세상을 바꾸겠다'는 오매불망 야무진 포부를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회의감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나의 은밀한 욕구와 진심, 불만을 모두 폭로하는 동시에 위로해 준 책이랄까. '꿈깨!'하고 찬물도 오지게 끼얹었지만.

사실 지난 30년간 무엄하게 빳빳이 머리 쳐들고 일어난 '플로레타리아' 덕분에 '부르주아지'의 미술시장은 겉보기에나마 좀 더 다채로워졌다. 그럼에도 30년전의 톰 울프의 통찰력이 오늘날까지 그대로 적용되는 현실이 안타깝고 씁쓸하다. 30년 전 전 세계를 합쳐도 '만명(고작 소도시 인구)도 안되던 미술계 인사'들이 싸질러 놓은 분비물을 여전히 묵묵히 소비하고 있는 현실이여!  플로레타리아가 생산해도 같은 플로레타리아가 소비하지 못하고 부르주아지의 매끈한 손만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현실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닌척 해도 결국 부르주아지가 되고 싶은 플로레타리아 예술가들의 '적과의 동침'도 여전히 대세다.  


톰 울프가 요즘 현대미술시장을 보면 뭐라고 했을지 상상해보는 것도 재밌다. 그냥 팬을 꺾고 '니 멋대로 하세요'했을까, 자신의 예언이 나름 적중했음을 기고만장하게, 그러나 씁쓸하게 선전했을까, 또는 새로운 희망과 전망을 역설했을까. 아니, 이는 우리 세대가 써나가야 할 몫이겠지. 이쯤에서 나는 여전히 '한 장의 그림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꿈꾸는 이상주의자가 쓴 현대미술사를 만나고 싶다(어디선가 제트기처럼 솟아오르는, 꿈깨!).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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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월 - 황순원 전집 8 황순원 전집 12
황순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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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 짓는 늙은이>라는 단편과 <일월>을 EBS 라디오문학관을 통해 만났다. 특히 <일월>은 그동안 황순원하면 <소나기>로만 환원하던 나에게 적잖이 신선하고 충격적인 작품이었다. 중산층 주인공들의 일상에 넘치는 '모더니티'와 밑바닥 인생과 도의 경지를 오가는 백정의 이야기가 묘한 균형과 조화, 갈등을 이루었다. '다방'이나 '음악감상실' 같은 어머니 세대의 낭만을 만나는 것도 새삼 반가웠고, 한번쯤 궁금했던 백정의 삶과 애환도 매우 흥미로웠다. 일찍이 천민계급으로 천대를 받으며 멸시와 차별을 겪었던 백정 가문(그렇다, 그것도 대대로 이어지는 가업이었다)을 근대적 관점에서 재해석한 소설이라 현대(오늘날) 백정의 삶과는 많이 다를지 모르겠다. 하지만 뿌리깊은 신분과 계급갈등이 새삼 어제 오늘 일이겠는가. '백정'으로 대변된 사회계층 밑바닥에서 몸부림 치는 사람들은 물론 그 사람들을 바라보는 타자의 다양한 관점과 행동이 작품 전반에서 아슬아슬한 균형을 이룬다. 그 안에 중산층의 위선과 역사의식 없는 젊은이들의 이기적인 방황과 갈등을 잘 녹여 냈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인물을 중심으로 다채롭게 펼쳐진다. 시골에서 백정의 전통과 가업을 당당하게 이어가는 자부심 강한 본돌 영감과 서울에서 백정일을 하고 있는 도사 같은 김기룡, 백정이란 신분을 속이고 출가해 서울에서 사업에 성공한 상진 영감과 그의 배다른 네 자녀, 그 중에서도 집안 내력을 파고들어가는 인철, 인철과 어려서부터 남매처럼 자란 교수의 딸 다혜, 은행장 딸이자 도도한 근대여성을 상징하는 나미. 그 외에도 상진 영감이 밖에서 낳아 온 딸과 그를 짝사랑하는 스토커, 그녀가 사랑하는 극작가, 남편의 외도를 알고 기독교에 빠져든 신실하지만 독선적인 인철의 어머니 홍씨, 뱀이나 두꺼비 따위에 애정을 쏟으며 주변의 역성을 듣는 인철의 남동생, 인철과 다혜, 나미의 묘한 삼각관계 등 다양한 인간관계와 갈등이 이야기의 축을 이룬다. 

숙명을 수긍하고 자신을 묻은 자, 숙명을 박차고 자신을 버린 자, 숙명을 깨닫고 자신을 찾으려는 자. 운명 같은 비극과 몰락은 개인은 물론 잘 나가던 집안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다. 과연 인간은 자신의 태생과 숙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과연 인간의 자율적 의지와  삶의 궁국적 목표와 한계는 어디까지 일까.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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