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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속에 피가 흐른다 - 김남주 시선집
김남주 지음, 염무웅 엮음 / 창비 / 2004년 5월
평점 :
나는 나의 시가
오가는 이들의 눈길이나 끌기 위해
최신유행의 의상 걸치기에 급급해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나는 바라지 않는다 나의 시가
생활의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순수의 꽃으로 서가에 꽂혀
호사가의 장식품이 되는 것을
나는 또한 바라지 않는다 자유를 위한 싸움에서
형제들이 피를 흘리고 있는데 나의 시가
한과 슬픔의 넋두리로
설움 깊은 사람 더욱 서럽게 하는 것을
나는 바란다 총검의 그늘에 가위 눌린
한낮의 태양 아래서 나의 시가
탄압의 눈을 피해 손에서 손으로 건네지기를
미처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배부른 자들의 도구가 되어 혹사당하는 이들의 손에 건네져
깊은 밤 노동의 피곤한 눈들에서 빛나기를
한 자 한 자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그들이 나의 시구를 소리내여 읽을 때마다
뜨거운 어떤 것이 그들의 목젖까지 차올라
각성의 눈물로 흐르기도 하고
누르지 못할 노여움이 그들의 가슴에서 터져
싸움의 주먹을 불끈 쥐게 하기를
나는 또한 바라 마지않는다 나의 시가
입에서 입으로 옮겨져 노래가 되고
캄캄한 밤의 귓가에서 밝아지기를
사이사이 이랑 사이 고랑을 타고
쟁기질하는 농부의 들녘에서 울려퍼지기를
때로는 나의 시가 탄광의 굴 속에 묻혀 있다가
때로는 나의 시가 공장의 굴뚝에 숨어 있다가
때를 만나면 이제야 굴욕의 침묵을 깨고
들고일어서는 봉기의 창 끝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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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주 시인의 시와 인생은 억지로나마 위의 시 하나로 요약할 수 있다. 거칠고 투박하지만 팔딱팔딱 살아 날뛰는 시와 인생. 시선집 <꽃 속에 피가 흐른다>는 김남주 시인의 뜨거운 자서전이요, 근대대한민국의 차디찬 역사서다. 마른 눈으로 차마 읽을 수 없었다. 가슴에 뜨겁고 불편한 가래가 끓어서 차마 앉은 자리에서 소화할 수 없었다. 어떤 시는 읽고 또 읽고 몇 번을 읽었건만 타는 목마름은 채워지지 않았다.
내 나라 하늘도 아닌데 '곱기가 지랄인' 화창한 가을날 왜 뜬금없이 김남주인가 추적해본다. 작년 하반기 대한민국 국방부가 발표한 불온서적 명단이었다. 이름만 들어 알고 있던 김남주 시인에 대한 호기심으로 당장 읽지도 못할 책을 주문했었다. 그리곤 잊어버렸다가 지난 8월 한국 친정에서 찾아 온 책이 우연찮게 일요일 아침 내 손끝에 걸린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김남주하면 체 게바라를 떠올리고, 체 게바라하면 김남주를 떠올리는 것은 결코 수사학적 우연이 아니었다. 그런데 체 게바라를 아는 (세계 사람도 아니고) 대한민국 사람 중에 김남주를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120편의 엄선된 시선집이나마 나도 이제사 겨우 만났는데. 시선집을 읽으면서 불편하고 괴로웠던 또 다른 이유였다. 이제, '주먹으로 터지는 네 분노를 위하여' 결코 김남주를 마음에서 놓지 않으리라.
2009년 10월
시라도 써야겠다
쌓이고 맺힌 서러움
주먹으로 터지는 네 분노를 위하여
고이고 고인 답답함
가슴으로 터지는 네 사랑을 위하여
차마 바로는 보지 못하고
밥상 너머로 훔쳐보아야만 했던
내 눈 속 네 얼굴을 위하여
시라도 써야겠다
그 알량한 시라도 써야겠다
오늘밤과 같이
눈앞이 아찔한 밤에는
'아우를 위하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