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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 ㅣ 김승옥 소설전집 1
김승옥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0월
평점 :
소설이란 추체험의 기록,
있을 수 있는 인간관계에 대한 도식,
구제 받지 못한 상태에 대한 연민,
모순에 대한 예민한 반응,
혼란한 삶의 모습 그 자체.
나는 판단하지도 분노하지도 않겠다.
그것은 하느님이 하실 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의미 없는 삶에
의미의 조명을 비춰 보는 일일 뿐.
(김승옥 | 1980년 ‘작가의 말’ 전문)
어릴적 방학마다 내려가 시간을 보내던 진주와 경주의 시골이 생각났다.
나는 문득, 방학마다 쫓듯이 어린 세자식들을 시골로 내려보내야 했던 고달픈 얼굴들을 기억해냈다.
그러나 적어도 그 당시에 시골은 어린 나에게 즐거운 곳이었다.
도시에서 자란 나도 덕분에 비닐팩에 포장되지 않은 살아 있는 소도 돼지도 만났으니까.
공동묘지가를 지나며 밤새해도 모자랄 무서운 이야기들을 상상하고,
사촌들과 어울려 냇가에서, 논밭에서, 자갈밭에서 뒹굴었고,
엉덩이가 델 정도로 장판이 눌러붙었던 시골집 방안과, 아궁이에 구워먹던 고구마....
나에겐 적어도 그렇게 향수할 '시골'이 있었다.
그러나 나의 시골은 나의 '고향'은 아니다.
나의 고향은 어디까지나
시커먼 연기를 내뿜는 굴뚝 사이로 다세대 단칸방이 다닥다닥 붙어 있던 도시의 한 복판이다.
나는 문득 다시 생각했다.
나는, 어쩌면 우리 세대는,
돌아가지 못할 시골을 가진 부모세대와
회귀할 시골조차 같지 못한 더 어린 세대의 중간에 끼어 있구나...하고.
언제부터인가 시골에 가는 것이 마냥 재미있지만은 않았다.
시골에 가도 다시 도시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었다.
나의 그리움은 오래전에 바닥 낳고, 지금의 시골도 더이상 즐겁기만 하던 시골이 아니다.
세상도, 나도, 너무 빨리 자랐다.
<무진 기행>은 바로 그런 이야기였다.
너무 빨리 자라고 변해버린, 그리고 떠나가 버린, 바닥나버린 그리움.
더이상 즐겁지만은 않은 그런 시골, 또는 고향의 이야기 말이다.
2007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