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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
박경리 지음 / 현대문학 / 2003년 4월
평점 :
박경리 작가가 서문에 밝히듯, 이 글은 "체계적이기보다 항상 직감적인 것이어서 두서가 없고 산만"하다. 작가도 수차례 우려를 표하듯, 이 글은 뜬 구룸 잡듯 애매하고 추상적이다.
그럼에도 나는 색연필 끝이 닳도록 줄을 그으며 고개를 끄덕끄덕 '아'하고 감탄사를 연발하며 이 글을 아껴서 읽었다. 다 읽고나서도 줄친 부분을 중심으로 또 한번 읽고 있다. 책이 벌써 10월 단풍처럼 울긋불긋하다.
살아 있는 말과 살아 있는 문장은 그 방법에서 별개가 아닌가 싶다.
문장은 웅축해야 하는 것이지만 말은 풀어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 책머리에
이 글은 1992년 1993년에 걸쳐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에서 창작론 강의한 것을 녹취해두었다가, 그것을 바탕으로 다시 쓴 책이다. 문학도들을 대상으로 '교육자'가 아닌 '선배 작가'로서 경험과 철학을 살려 '이야기 한마당'을 풀어 놓은 것. 풀어 놓은 말을 다시 웅축하는 게 순리에 맞지 않아, '다시 쓴 이 글'도 결국 풀어 놓은 말을 그물로 살짝 걸러두었을 뿐이다.
따라서 체계적인 창작론이나 문학이론을 기대한다면 실망이다.
이 글은 오로지 한 길만을 걸어 온, 일제강점기와 전쟁, 피난 등 온몸으로 역사적 풍파를 마주했던,
운 좋게도 안정적인 인세 수입으로 먹고 살면서(작가 스스로 황송하고 불편해마지않았던) 평론과 독자들 모두에게 문학성과 문학사적 의의를 이어받은 한 여성 작가의 대담이다.
대상은 제목 그대로 '문학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이다.
'생각(또는 사고)가 곧 실체'라고 했으니 작가의 생각(좁게는 문학에 대한, 넓게는 삶에 대한)을 담아 놓은 이 글은 곧 박경리 작가의 실체, 적어도 그 한 조각이라고 해야겠다.
그리고 그 실체와 만난 소감은 매우 고무적이다.
불우한 것이야말로 치열한 문학 정신이 될지언정 처세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 서문 18쪽
작가는 운둔하는 것이 아니며 작업하는 것입니다.예술가는 도피하는 것이 아닌 작품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 서문 27쪽
자본주의와 물질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 환경과 인간성 말살에 대한 깊은 우려, 합리주의와 이성에 대한 경계, 주체적이고도 객관적인 역사관, 꼿꼿한 자의식, 매서운 겸허, 생명과 존재에 대한 애정과 신뢰....
이처럼 글 속에 박경리 작가의 글쓰기 철학, 나아가서 삶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박경리 작가의 작가론, 문학론, 인생론, 우주론이라 할만하다.
아마도 그 철학이 내가 추구하고 싶은 것과 닮은 꼴이어서, 또 그것을 기억하고 되새기고 싶어서
이 알쏭달쏭한 글의 문장문장이 그렇게 크게 가슴에 메아리를 쳤나보다.
오늘날 모든 것은 합리주의로 짜여져 있으나 그 합리주의는 기실 욕망을 추구하는 이성 잃은 사람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 본문 38쪽
중고등학교 시절 '떨이'로 읽은 문학전집을 제외하면, 박경리 작가의 소설 하나 제대로 읽은 게 없다는 자각... 아, 이보다 계면쩍을 수가 없다. 게다가 다음과 같은 문장을 만나면 식은 땀이 흐르며 뜨끔하지 않을 수 없다.
열심히 암기하고 모방하여 복제품을 만들어 호구지책, 아니면 명예를 거머주기 위하여 무슨 자격시험 따내듯 문단에 등단하려 합니까? - 본문 95쪽
영원은 아닐지라도 한 생애에 있어서 변치 않는 것을 찾으세요. 글을 써서 돈 벌겠다 생각한다면 진작 장사를 시작할 것이며 글 써서 명예를 얻겠다면 그런 생각 말고 돈 모아서 국회의원으로나 출마하십시오. 명예나 돈이 덧없는 것이라는 걸 깨닫지 못한다면 문학은 첫걸음에서부터 방향이 잘못된 것입니다.학생 여러분은 지금 부자입니다. 아직은 때묻지 않은 영혼을 가졌으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애늙은이가 되어버린 오렌지족을 위하여 연민을 느끼세요. - 본문 48쪽
이 글의 바탕이 된 강의를 시작한 지 15년이 지난 지금 다시 강의를 한다면 작가는 얼마나 더 절망하고 얼마나 더 호되게 학생들을 꾸짖었을까. 연로한 작가가 더는 그럴 체력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해야 할까,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암튼, 이 책처럼 '직관적인' 이 리뷰가 뜬 구름 잡듯 한없이 길어지는 것이 참을 수가 없다. 이 책을 보다 잘게잘게 곱씹어서 걸러낸 문장, 아니 생각의 단편은 다른 지면을 통해 소개하도록하겠다.
2009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