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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루다의 우편배달부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4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지음, 우석균 옮김 / 민음사 / 2004년 7월
평점 :
집에서 취리히 공항가는 길에, 그리고 공항과 프랑크푸르트 가는 비행기 안에서 몇 시간만에 읽어버렸다. 내용도 길지 않지만, 경쾌하게 잘 빠진 스토리에 미끄러지듯 빠져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책을 다 읽고, 우석균씨의 작품해설과 작가 연보까지 꼼꼼하게 다 읽고도 책을 덮을 수가 없었다. 결국 프랑크푸르트에서 폴란드 그단스크까지 가는 길에 하릴없이 책장을 펄렁거리다가 중간 중간 다시 읽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단스크에 도착해 숙소까지 가는 택시 안에서도 이슬라 네그라를 생각했다.
이 소설의 배경인 칠레의 작은 어촌 마을.
지난 칠레 여행에서 끝내 가지 못했던 곳.
아마 이 책을 미리 읽었더라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가고 말았을 곳.
그만큼... 책을 통해 마음을 빼앗겨 버린 곳.
이 책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물론 네루다라는 이름때문이다.
우석균씨가 번역했다는 걸 알고 더 반가웠다.(그가 쓴 두 권의 책 <바람의 노래, 혁명의 노래>, <잉카 인 안데스>을 매우 감명깊게 읽은 바 있기 때문에) 그래서 지난 달 <네루다 자서전>을 주문하면서 함께 주문해버렸다.
보통 겉만 번지르하고 무거운 한국 서적과 달리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의 일부로 나온 이 책은 작고 가벼워서 이번 여행길에 오르면서 '가볍게' 핸드백에 찔러 넣을 수 있었다.
알쏭달쏭한 서문으로 시작한 소설은 이내 17세 소년이 어쩌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가 되었는지, 어쩌다 한 소녀에게 넋을 빼앗겨버리는지, 그리고 어쩌다 네루다가 엉뚱하게도 뚜쟁이 역할을 하게 되는지 힘차고 빠른 속도로 그려나간다(더이상 줄거리를 얘기하면 미래의 독자에 실례. 나처럼 모르고 보는 게 좋다).
비틀즈 노래에 맞춰 어기적 뚱뚱한 몸을 흔들어대는 네루다, 첫눈에 반한 소녀 앞에서 말 한 마디 못하던 마리오의 입에서 시적 메타포가 줄줄 흘러나오는 모습, 마리오의 어설픈 첫경험이나 네루다를 위해 이슬라 네그라의 소리를 녹음하는 장면 등... 한 장면 한 장면 결코 잊지 못할 소설이다.
키득키득 웃다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장이 술술 넘어갔다.
그러나 소설 후미에 이르러서 나도 모르게 여러차례 눈물을 훔쳐내야 했다.
맘 속으론 한편, 주변 낯선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책을 읽기에 그렇게 눈시울을 적심니까...하고 물어봐주길 바랬다. 이 짧은 소설이 얼마나 재밌고, 또 의미심장한지 아무나 붙잡고 침 튀기며 열변을 토하고 싶은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네루다를 아시냐고, 아옌데를 아시냐고... 1970년 초 칠레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아시냐고, 아니 세계 각지에서 그와 비슷한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났고, 또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지 아시냐고 얼굴을 붉혀가며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을지도 모른다.(이는 내가 빅토르 하라의 조그만 재단을 방문한 직후의 충동과 꼭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네루다나 빅토르 하라는 몰라도 그나마 아옌데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피를 토할만큼 열광한 이유는 이 책의 시간적 배경이 되는 3년 정도의 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3년은 아옌데가 대통령 후보로 나서 당선되고, 또 미국과 우파가 사주한 군부 쿠데타로 목숨을 잃기까지의 격변기다. 이는 이슬라 네그라라는 작은 어촌에 칩거하던 유면인사 네루다가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었다가 나중엔 아옌데 정부의 파리대사가 되고, 노벨상을 수상한 후 지병 때문에 쿠데타 직전 이슬라 네그라로 돌아왔지만, 결국 아옌데 대통령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병이 악화되어 처량하게 생을 다하는 시기와 일치한다.
물론 이 책의 주요 이야기는 앞서 이야기했듯, 주인공 마리오가 어떨결에 우편배달부가 되어 네루다와 친분을 쌓고 그의 도움을 받아 한 소녀의 마음을 얻게 되는지 다소 대책없는 젊은 혈기를 주절주절 경쾌하게 그려나간다. 그와 함께 우리는 한 평범한 어촌 청년이 어떻게 시인이 되고 사회주의자가 되는지, 젊은 남녀의 오르가슴에 들뜬 신음과 비명 뒤에 메아리치는 민중의 처참한 신음과 비명 소리를 뒤섞어 듣게 된다.
다시 말해, 이 글 자체가 하나의 '메타포'다(메타포는 이 글의 도입부에 굉장히 주요하게, 또 자주 등장하는 중심어다).
소설 줄거리 표면에 직접적으로 들어나지 않지만, 당시 정치적 사회적 격변기가 한 개인과 작은 어촌 마을에 어떤 변화를 불러일으키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마치 이 3년 이후에 펼쳐지게 될 독재와 민중 탄압, 사라지고 죽어나간 무고한 시민들과 투사들의 레퀴엠 서곡 같은 소설이다.
또한 이 소설은 물론 허구이지만, 민중 시인 네루다의 인간적이고 엉뚱한 모습을 담아 낸 사실적인 '네루다 회고전'인 동시에 마리오와 이슬라 네그라 주변 어민들로 대변된 칠레 민중에 대한 헌정서라 할만하다.
그렇기에 독자는 깔깔 웃으면서 시작한 이 '뜨거운 메타포'를 끝내 안타까움과 미어지는 슬픔, 아련한 눈물로 덮을 수밖에 없다.
2009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