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의 탄생 - 한국어가 바로 서는 살아 있는 번역 강의
이희재 지음 / 교양인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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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다 읽은지는 2주가 넘었으나, 그 간 책을 다시 읽으며 공책을 따로 마련해 핵심 내용을 정리하느라 리뷰가 늦었다. 그만큼 그냥 한 번 읽고 던저두기엔 너무너무 아까운, 뼈와 살이 되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영어를 한글로 번역하는 번역가뿐만 아니라 한국어나 외국어를 공부하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읽어보면 좋을 글이다. 좁게는 영어를 한글로 옮기는 데 대한 고찰과 탐구, 경험과 노하우, 제반 문제점과 해결방안 등을 다루고 있지만, 나아가 '우리가 언어(한국어)를 어떻게 잘 쓸 것인가', '언어(한국어)는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글이 원론적인 글인가하면 전혀 아니올시다다. 오히려 이보다 구체적인 예문과 번역 사례로 가득한 실용서는 찾기 힘들다. 

한편, 매일 수십권씩 쏟아지는 수많은 번역책에서 독자들이 얼마나 실망하고 절망하는지 감안한다면,  이 글은 이제 번역가가 되려는 입문자들 뿐 아니라 책 몇 권(또는 수십 권) 냈다는 경력자들도 놓치지 말고 겸허하게 보아야 할 것이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고백한다.

"이 책은 잃어버린 한국어의 창공을 향해 한없이 날아오르고 싶었던 내 마음의 비행 일지인 셈이다"

"이 책은 번역을 업으로 삼으면서 20년 동안 잡다한 번역을 해온 사람이 내놓는 한국어 임상보고서인 셈이다." 

 
저자는 '한국어의 개성'을 이야기한다. 

 "직역이라는 것은 본래 그 글이 주는 느낌까지도 비슷하게 전달해야 마땅한데 직역을 하다 보니까 원문이 주는 느낌에서 오히려 더 멀어지는 아이러니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직역의 함정입니다." 본문 40쪽 

 
따라서 저자의 번역 원칙은 이렇다. 

 "거시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한국어는 과도한 직역주의 때문에 외국어에 너무 많이 물들었으므로 저는 균형을 잡는다는 뜻에서도 의역을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본문 44쪽 

 
번역뿐 아니라 글쓰기에 대한 철학도 여과없이 드러난다. 

 "글의 내용으로 승부를 거는 것이 아니라 쓸데없이 글을 어렵게 꾸면서 독자가 주눅 들게 만드는 글은 비겁한 글입니다." 본문 137쪽 

 
이처럼 저자의 해박한 지식은 물론 번역 철학과 글쓰기 철학, 나아가 삶의 철학과 지혜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저자의 진정성과 성실함, 열정이 꾸미없이 다가오는 만큼 글의 신뢰도도 높고 활용가치도 백배다.  박상익 씨의 <번역은 반역인가>를 독파한 이후 처음으로 만난 존경할만한 '인생선배', 닮고 싶은 '번역가'라고 할까. 내가 번역하고 글 쓰는데도 많은 자극을 주었고, 큰 도움이 되었다. 

그동안 번역하면서 나도 모르게 써먹고 있었던, 그러나 긴가민가 했던 방법들에 확신을 안겨주었는가 하면, 도무지 대안이 없어보이던 골치 아픈 단어나 문장들도 속 시원히 긁어주고 풀어주었다. '한국어는 한국어의 개성과 논리에 맞게'라는 원칙 하나만 고수해도 훨씬 읽기 쉽고 이해하기 쉬운, 동시에 아름다운 한글 번역문이 탄생할 것이다. 


그와 함께 우리가 풀어나가야 할 문제점들도 지적한다. 가령, 영어사전과 국어사전의 한계와 문제점에 대해서는 두말하면 잔소리다. 그러나 저자는 문제점을 가차없이 비난하면서도 유머감각을 잊지 않는다. 

" 가령 real을 영한사전에서 찾으면 대부분 '진짜의'가 앞에 나옵니다. (중략)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정말의'나 '진짜의' 같은 말이 쓰이는 것은 '진짜로', '정말로'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실제로 안쓰는 말을 영한사전에 풀이말로 올리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본문 143쪽 

 글 읽기가 지루하고 어렵지 않고 즐거웠던 까닭은 이와 같은 저자의 은근한 유머감각때문일 것이다. 

 

책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이 한 권 독파하고 나면 '좋은 번역가'가 된다는 보장은 없다. 번역도 노동이고 실력은 물론 시간과 성의가 고스란히 더해져서 결과물이 나오기 때문에 번역가 자기 하기 나름이다.  또한 이 책에 내용에 모두 동의할 필요도, 맹목적으로 따라 갈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 글은 분명 좋은 글을 쓰고 좋은 번역을 하는데 훌륭한 가이드가 되어 줄 것이며,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줄 것이다. 선배가 나서서 후배를 이끌어주니, 청출어람은 시간문제다. 

 
"한국의 번역 문화는 한국어의 논리보다는 외국어의 논리를 너무 숭상하는 풍토라는 생각이 듭니다만, 그 외국어의 논리라는 것도 심도있는 분석을 통해서 수미일관한 체계로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즉물적이고 맹목적으로 따라가지 않았나 싶습니다. 문화도 그렇습니다. 외국 문화의 방정식을 규명하기보다는 그때그때 유행하는 답만 열심히 받아 적어 왔다는 느낌이 듭니다.

(중략)

단순히 번역의 차원이 아니라 문화의 차원에서도, 경제의 차원에서도, 정치와 역사의 차원에서도 한국인이 자기 눈으로 자기 현실을 분석하는 방정식을 세우는 데 이 책이 작은 벽돌 하나라도 올려놓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본문 402~403쪽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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