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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9월
평점 :

줄리언 반스의 신작 《우연은 비켜가지 않는다》는 소설이라는 장르의 경계를 가뿐히 넘어서는 작품이다. 이야기의 표면은 단순해 보인다. 그러나 읽다 보면 곧 깨닫게 된다. 이 소설은 ‘서사’가 아니라 ‘사유’를 따라가야만 이해되는 종류의 문학이라는 사실을. 형용사 몇 개로 깔끔하게 정리되는 인물 묘사를 경계하라는 핀치 교수의 말처럼, 반스는 독자가 세계를 단정하는 순간을 끊임없이 흔들어 놓는다.
화자 닐은 두 번의 이혼을 겪으며 삶의 결핍을 안고 살아가다, 성인 강좌에서 엘리자베스 핀치 교수를 만난다. 그녀는 지식을 주입하지 않는 ‘어른’이었다. 학생들의 사소한 생각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논쟁을 두려워하지 않는 배움의 장을 펼쳐 보인다. 닐은 20년 넘게 그녀와 점심을 먹으며 철학, 역사, 그리고 로마의 ‘배교자’ 율리아누스에 대해 깊이 토론한다. 그 시간은 그의 삶을 재구조화한 결정적 경험이었다.
그러나 핀치가 세상을 떠난 뒤, 닐은 그녀의 유품 속에서 예상치 못한 단서를 발견한다. 이를 해석하려는 과정에서 그는 중요한 질문과 마주한다. “당신이 알고 있는 그 사람이, 정말 그 사람이 맞는가?” 닐이 기억하는 핀치 교수의 모습은 그의 고집스러운 회상 속에서만 존재했고, 다른 제자들의 증언은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이는 핀치가 늘 경계했던 ‘일신주의’와 정확히 배치되는 아이러니로, 반스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를 다시 확인하게 한다. 타인은 결코 단일한 서사로 설명될 수 없다.

이 작품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배교자’ 율리아누스를 다루는 방식이다. 승자의 기록 속에서 그는 위험한 이교도로 남았지만, 반스는 그를 ‘의심의 대변자’, 즉 살아 있는 지성의 상징으로 재해석한다. “배교자는 의심의 대변자이고, 의심은 활동적인 지성의 표시다.” 이 문장은 소설 전체의 방향을 관통한다. 확신보다 의심이, 일관성보다 파편성이 오히려 진실에 가깝다는 것. 이 지점에서 반스는 역사와 인간을 바라보는 기존의 시선을 완전히 뒤집는다.
읽는 동안 나 역시 혼란을 느꼈다. 문학적 감수성이 부족한 것 같아 스스로를 의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곧 깨달았다. 이 책은 ‘문학적 감성’보다 ‘사유의 깊이’로 접근하는 독자가 더 즐길 수 있는 작품이라는 사실을. 역사, 철학, 기억, 우연이라는 거대한 주제가 소설의 뼈대에 촘촘하게 박혀 있기 때문이다.

반스가 남긴 결론은 단호하다.
“일관된 서사는 망상일지도 모른다.”
“사람으로 살려면 자기 역사를 잘못 알아야 한다.”
“어떤 일은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있고, 어떤 일은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없다.”
이 문장들이 하나로 이어질 때 비로소 소설의 실체가 드러난다.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절망 앞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해하려 애쓰는 존재라는 것.
그리고 그 실패의 반복 속에서 인간은 조금씩 성숙해진다는 것.
《우연은 비켜가지 않는다》는 단정할 수 없는 세계를 어떻게 견딜 것인가에 대한 성찰이며, 읽을수록 새로운 의미가 드러나는 생각의 미궁이다. 반스가 40년 동안 쌓아 올린 문학의 정수가 담긴 이 작품은, 사유를 멈추지 않는 독자에게 오래도록 남을 질문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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