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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바이든, 지켜야 할 약속 - 나의 삶, 신념, 정치
조 바이든 지음, 양진성.박진서 옮김 / 김영사 / 2020년 10월
평점 :
2020-167 <조 바이든, 지켜야 할 약속(조 바이든 지음/김영사)>
조 바이든이 직접 쓴 유일한 자서전을 통해 그의 삶, 신념, 정치를 읽는다.
이 책을 선택할 시점이 10월 28일 미국 대통령 선거가 일주일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선택이 어려웠던 이유는 바로 미국 정치의 극심한 변동성 때문이었다.
쉽게 표현하면 누가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600페이지 가까운 책을 선택한다는 것이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지난 4년의 미국은 이전의 미국과 달랐다. 세계의 변화와 민주주의의 확장을 주도하는 세계의 지도자 국가가 아니라 자기 몫을 챙기느라 땡깡을 부리는 철부지 국가처럼 보였다. 국가 운영의 방향을 결정하는 지도자를 누구로 선택하느냐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을 우리도 경험했기에 이번 미국 대선에 관한 관심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책을 읽을 당시는 바이든 후보의 우세가 점쳐지고 있었지만 이른바 ‘샤이 트럼프 지지자’들의 움직임이 주목을 끌고 있었다. 선거 결과가 예상대로 나오더라도 트럼프 대통령이 승복하지 않아서 미국이 큰 혼란에 빠질 것이라는 예측도 힘을 얻고 있었다.
이제 미국 대통령 선거는 역전에 재역전을 거쳐 바이든의 승리로 확정되고 있다. 확정되었다고 표현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트럼프의 불복 때문이고 예상대로 트럼프는 소송전을 비롯한 버티기 작전에 들어갔다. 그러나 2021년부터의 백악관 주인이 바이든이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세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나라인 미국의 운전대를 잡은 바이든의 인생과 정치 역정과 그의 철학을 살펴볼 시간이다.
1942년 펜실베이니아주 스크랜턴에서 출생했으니 우리 나이로는 79세. 바이든의 아버지는 주로 영업직에 있었고 어머니는 전업주부였으며, 바이든은 3남 1녀 중 첫째로 태어났고, 백인 중 소수인 아일랜드계다. 그리고 가톨릭이다. 꼬장꼬장한 아버지는 자주 실직을 하였고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그리고 어린 시절 말더듬이로 놀림을 당하는 작은 소년이었다.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말더듬증을 이겨낼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암울했던 말더듬이 시절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싶지는 않았다. 그 장애물은 결국 내게는 신의 선물이었다. 그 장애를 짊어짐으로써 나는 더욱 강해졌고, 내가 바라던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 장애물을 통해 배운 것은 내가 선택한 직업뿐 아니라 삶 전체에도 소중한 교훈이 되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키가 부쩍 자라고 스포츠에 두각을 나타내었고 자신의 약점들을 극복해냈다. 그의 친가와 외가를 통틀어 외삼촌 한 명만 대학을 나왔다. 바이든은 델라웨어대를 졸업하고 시러큐스대 로스쿨에 진학하게 된다. 대학교 4학년에 만난 닐리아와의 운명 같은 사랑을 하고 결혼에 골인하고 1969년 변호사가 된 후 국선 변호사로 활동을 한다. 그리고 1970년 공화당 텃밭이었던 카운티의회에 민주당 의원으로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하게 된다.
1972년 델라웨어주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서 현역의원이자 공화당 거물인사인 케일럽 보그스와 맞붙게 된다. 바이든은 상원의원 선거에 뛰어들 때 자신이 가진 큰 무기로 평생 자신의 편이 되어 준 바이든 가족, 특히 동생들을 우선 꼽는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도 뛰어난 실력을 발휘한 여동생 발은 바이든의 모든 선거운동을 함께 했고, 프랭키와 지미 역시 그 당시부터 대선까지 함께 했다.
어느 누구도 승리를 예측하지 않았지만 3,000표 차이로 승리하면서 미국 역사상 6번째 최연소 상원의원이 된다. 30세에 상원의원이라니, 이 어마어마한 승리의 감격이 채 지나기도 전에 한 달도 되지 않아 부인 닐리아와 딸 나오미가 교통사고로 사망하게 되고 두 아들도 중상을 입게 된다. 이 충격으로 상원의원을 포기하려 하였으나 민주당 지도부의 만류와 설득으로 아이들의 병실에서 상원의원 취임 선서를 하게 된다.
이후 30여 년간 암트랙(미국 철도)을 타고 워싱턴DC와 델라웨어 윌밍턴을 오가며 출퇴근했다. 왕복 350km, 3시간 반 거리의 장거리 통근길을 감내했다.
나는 편의보다 지적 동의와 개인적 원칙을 우선으로 삼는 바람에 힘든 길을 걸었다. 나는 근본적이지 않아 보이는 문제에 대해, 특히 내가 믿는 동료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완벽하게 정치적으로 편의주의적인 방법을 취할 수 있다. 그렇지만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나는 내 직관을 믿으며, 어느 한쪽 편에 서기 어렵게 된 것에 대해서는 사과하지 않는다. -p183
1980년 대통령 선거운동이 진행되면서 민주당이 곤경에 처하게 된다. 당시 서른일곱 살이었던 바이든에게 대선 출마의 압력이 강해지고 있었다. 그때 그를 잡아준 충고를 항상 기억한다고 한다.
“의원님, 전술적으로 이길 수 있다고 해서 대선에 출마해서는 안 됩니다. 의원님께서 먼저 해야 하는 질문은 왜 대선에 출마해야 하느냐, 대통령이 되면 무엇을 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때까지 출마해서는 안 됩니다.”
바이든은 1973년부터 2009년까지 무려 36년간 델라웨어주 상원의원으로 재임하면서, 상원의 법사위원장과 외교위원장을 지낸다. 여성폭력방지법 제정이나 코소보 내전 해결을 이끌어 내는 역할 등은 우리에게 알려진 그의 업적들이다. 그의 정치 역정은 주로 전국적인 인기와 영향력을 얻는 것과는 거리가 있었고 주로 국가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자리에서 자신과 미국 헌법 정신을 지키는 역할에 집중하였다.
1987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출마한 바이든은 두 차례 뇌동맥류 수술을 받으며 대선 레이스에서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
2008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버락 오바마의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지명되어 2009년부터 2017년까지 미국 부통령을 지냈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자 참신하고 젊은 오바마 대통령의 약점이었던 정치적 무게감과 안정성을 채워주는 역할을 하며 대통령의 외교 및 안보 분야를 지탱했다.
바이든은 기존의 민주당 지지층인 ‘진보·여성·유색인종’에 중도 성향까지 갖춘 인물이며, 정치생활 동안 ‘최고 치유자(Healer-in-Chief)를 추구하는 등 중도 실용주의자의 면모를 보여왔다. 트럼프가 공감 능력 없는 스트롱맨이라면, 바이든은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는 공감의 지도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공감의 지도자가 내세우는 슬로건은 ’미국 리더십(Renewing American Leadership)의 회복‘이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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