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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잘 지내고 있어요 - 밤삼킨별의 at corner
밤삼킨별 지음 / MY(흐름출판) / 2018년 11월
평점 :
흐름출판서포터즈로 활동하며 제공받아 읽게 된 도서입니다.
밤삼킨별을 필명으로 사용하는 저자는 여행사진 작가이며 캘리그라퍼이다.
책의 곳곳에 감성을 툭툭 건드리는 사진들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 말을 건넨다.
책은 봄, 여름, 가을, 겨울로 편집되어 있다.
각 계절마다 저자의 이야기들이 담백한 사랑이야기를 들려준다.
봄, 여름, 가을은 책의 앞면에 배치되어 있고,
겨울은 아예 뒷면에 새로 편집되어 있어 읽는 이에게 새로운 느낌과 놀라움을 준다.
책의 처음을 읽으며 손발이 오그라드는 느낌이 나서 함께 배송된 <일본 최고 MBA 경영 수업>이라는 이성만으로 읽어야하는 책을 섞어서 읽었다.
유홍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아는 만큼 보인다”고 이야기했다.
그렇게 경험한 만큼, 생각한 만큼 느껴지는 것은 아닌지.
여유를 두고 천천히 읽어가면서 빠르게 읽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이 서서히 올라오고 있었다. 나이 50의 ‘아저씨’에게도.
긴 이야기가 아닌 산문에서, 시처럼 짧은 저자의 이야기에서, 때론 고백처럼 때론 대화처럼 들러오는 이야기에 고개도 끄덕여보고 아니면 ‘나랑 다르게 느끼는구나’라고 생각하는 동안 책은 끝이 났다.
<겨울>편에는 북해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내가 가보고 느꼈던 북해도와는 다른 이야기들.
온전하게 자신에게 집중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우리의 취향이 온전히 나만의 취향인가.
다른 사람들의 영향과 압력에서 얼마나 자유로운 취향이었는가를 생각해본다.
흐름출판 서포터즈를 하면서 좋은 점으로 어느 분께서 독서의 편식을 막는다고 하셨다.
이 책을 읽으면 크게 동감하였다.
<winter> intro
어른이 되어갈수록 ‘괜찮다’ 혹은 ‘잘 지낸다’는 생래적 거짓말을 한다. 잘 지낸다는 단단하고 따뜻한 말이 단지 그렇지, 실은 그렇지 못한 어른들의 거짓말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잘 지내지 못하는 상황과 이로 인해 발생하는 감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극복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지냈기 때문이다. 행복하고 건강하게 잘 지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닐 텐데 ‘행복’하기 위해 ‘불행’을 병처럼 여기고, 병을 고치려는 노력 대신 감추려 애를 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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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물기가 사라져 조금만 뒤척여도 슬픔이 소리를 내고, 마음이 부서진다. 잘 지낸다는 거짓말이 나쁜 마음을 흘려보낼 마음 길을 다 막고 있으니 그러하다. 불안, 우울, 외로움, 슬픔, 괴로움만이 전부인 때는 내가 그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 또한 지옥을 보는 일이라서 ‘괜찮아, 잘지내’라는 말로 지인들의 다정한 안부의 말을 잘라내고, 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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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이야기가 아닌, 동시에 우리의 이야기이며 상황인 ‘난 잘 지내고 있어요’라는 말이 의심 없이 들리고 말하는 시간이 우리에게 곧 찾아오길 바라며,
사실 나는 잘 지내지 못하고 있어요,
고백한다.
-밤삼킨별 올림
49 행복하지 않은 이 순간마저도 나는 잘 지내고 싶다. 그래서 행복하지 않을 순간의 여백이 되어줄, 북해도에 찾아왔다. 앞으로 나에게 잘 지내냐고 물어줄 계절의 말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으로 행복하지 않은 순간에도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그 겨울에 간다면,
내가 당신의 계절이 되어 안녕을 전하기를
60 왜 좋음에 완전히 몰입되지 못하는가 북해도 VII
여행은 면세된 제품을 사고, 남들 다 가보는 그곳을 기념하며 역시 남는 게 사진이라 말하는 기억이 아니다.
이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풍경을 만나거나 평생 만나지 못할지도 모를 그 찰나를 겸허히 만나 나도 모르는 새 마음으로 정신으로 스며든 풍경 속에서 시나브로 일상에서, 인생에서, 내게 작용하는 나를 구원하는 힘을 만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88 나의 여행이 늘 그랬듯 도쿄에서도 꼭 봐야 하는 것과 알아야 하는 것은 없었고, 정해진 것이 없었다. 그저 여행하는 나 자신이 먼저였다.
나의 마음과 시선으로 보이는 것, 담기는 것, 스치는 사소함 하나하나도 소중한 시간들은 지금 또한 변함없다. 이번 여행도 마찬가지다. 삿포로에는 무엇이 맛있고 유명하고, 여기는 꼭 가봐야한다는 정해진 장소가 없어도, 천지사방 눈밖에 없어도, 그 눈을 쏟아내는 이 계절이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음을.
나는 그 말을 듣고 싶었다. 손이 시리고 발끝에 얼음이 박히는 시간이어도 그 언젠가 가장 따뜻한 시간이었노라 회상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124 무언가를 선택해서 갖고 이루고자 하는 것만이 노력이라고 생각하지만, 무언가를 선택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도 노력이다. 여행을 떠나고자 꿈꾸는 것만이 행복이고 떠나지 못하는 이가 불행한 것이 아니라, 이곳에 머무는 차선을 선택한 것 또한 행복이다. 상처 없이 산다고 잘 사는 것이 아니다. 가려던 길을 걷다 넘어져 얻는 상처가 잘 살고 있다는 증거이다.
누군가들이 만들어놓은 가만 있어야 유지되는 ‘중간’을 뒤흔들며 ‘잘 살고 있지 않은 우리 모두’의 하루를 응원한다
<spring>
다가서다
시간과 날씨를 파는 가게에 들러서 너의 로맨틱한 어느 날과 봄꽃 가득 내릴 날씨를 테이크아웃 했어
곧 갈게.
33 사랑하는 우리가 사랑할수록
하나를 알게 되면 둘을 알아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하나를 알게 되면 또 하나를 모르게 되는
어려지기만 하는 어른의 사랑을 하는 시간이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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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마음을
사랑한다는 고백으로 다 하지 못할 거 같아서
“사랑하는 너를 좋아해”라고 말하는
우리의 벅찬 이 시절이 참 좋아.
<summer>
두근거리다
자꾸만 보이지 않는 것도 사랑하게 되어요. 남들은 못 보는데 나만 보여요. 당신과 나는 사랑에 빠진 비정상적인 두근거림증 환자들.
55 하루 종일 고정되어 있는 주파수처럼 당신을 틀어놓고 지내요.
하루 종일 당신을 틀어놓은 채 커피를 마시고 책을 보고 낮잠을 자요. 꺼지지 않는 고장 난 라디오. 나의 오래된 주파수. 나는 늘 당신에게 고정되어 살아요.
68 더 좋아하는 사람의 몫
서운하고나 섭섭한 마음은 나의 마음을 모르는 당신 때문도 아니고, 내가 바라는 그만큼을 해주지 않는 당신 때문도 아니다. 원하고 기대한 사람은 나였다. 그리고 당신을 더 좋아하는 사람은 나다.
더 좋아하는 사람은 섭섭해할 수도 없고, 슬퍼할 수도 없고, 힘들다 말할 수도 없다.
<autumn>
달래다
꽃 사주세요. 어느 날 당신에게 부탁하는 낭만.
106 사랑은 단 하나의 모양이 아닌데 우리는 우리가 아는 사랑만이 사랑이라 생각하며 사랑의 순간을 스쳐 지나만 간다.
인연이 아니었다고 말하지만 사실 인연이었던 적이 더 많았던 시간들. 그러나 그 인연을 모른 채 당신은 나를 나는 당신을 지나쳐간 시간이 인생이다.
120 나는 너를 우리는 당신을 상처주지 말자
거의 대부분의 상처는 아는 이에게 받는다. 아는 이에게 받은 상처는 모르는 타인의 글과, 타인의 사진과, 타인의 노래로 위로받고, 위안 삼는다.
그래 나는 너는 우리는 타인에게 은혜를 입고 산다. 그렇게 입은 은혜를 갚는 방법은 우선, 아는 이에게 상처 주지 않는 것이다.
124 마음을 켜고 힘을 보낼게
마음을 켜고 바라보면 당신의 하루가 조금 더 섬세히 보일지도 모르겠다.
시무룩해하지 말고 지쳐하지 말고 조금 더 생기 있게 하루를 보내길 바랄게 내가 바랄게-
오늘 하루종일 내 마음을 켜고 당신에게 힘을 보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