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너를 사랑해서 슬프다
나태주 지음 / 동학사 / 201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9-022 <아직도 너를 사랑해서 슬프다(나태주 시집/동학사)>

풀꽃의 작가 나태주님의 시집

45년생이신 작가는 아직도 순수한 소년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그의 시를 읽다보면 어릴 적의 마음들이 불쑥불쑥 일어나서 놀랄 때가 있다.

아직도 내게 이런 마음이 남아 있나?’하고 놀라다가도 그 마음을 일깨워주는 시인의 능력에 감탄을 한다.

두세 줄, 열 줄을 넘지 않는 짧은 글에서 시인의 마음을 옅보다가 그만 그 마음에 전염되어 버린다. 시인의 그림 역시 그 마음을 잘 그려냈다.

시인의 글에서 아직 오지 않은 봄을 느끼며, 지나간 가을에 대한 그리움으로 다시 올 가을을 기대하게 된다.

올해 겨울은 큰 추위가 없었다지만 봄을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은 어쩔 수 없나보다.

그러나 실제 봄이 왔을 때는 지난 겨울을 돌아보게 될 것 같다.

겨울에 만났던 나태주 시인의 시를 그리워하면서.

 

아버지

 

말없이 방구석만

차지하고 있는 장롱짝

정작 사라지고 나면

조금씩 그리워지는 이름.

 

 

서울

 

그냥

서운하고

울적한 심사.

 

 

이 가을에

 

아직도 너를 사랑해서

슬프다.

 

 

우정

 

힘들어하지 마

내가 옆에 있잖아.

 

 

인생

 

돌아보면

그 자리

 

멀리까지

온 것 같은데.

 

 

사는 법

 

그리운 날은

그림을 그리고

외로운 날은

음악을 듣고

그리고도 남는 날은

너를 생각해야만 했다.

 

 

사랑 · 1

 

밥 먹었는데도

배가 고픈 것 같고

 

물 마셨는데도

목이 마른 것 같은 마음.

 

 

시인 · 2

 

이름에서도

향내가 나는 사람

 

과연

나의 이름에서는

어떤 냄새가 날까?

 

 

민들레

 

아저씨,

시인이 뭐 그래요?

 

나도 이렇게

꽃을 피웠잖아요!

 

 

구절초

 

아이의 웃음이 빛나는 아침

금방 찬물로 세수하고 난 얼굴로

나 여기 있어요

여기 있다니까요

향기로 불러 세우는

또 하나의 아이.

 

 

친구

 

어떠한 경우라도

나는 네 편이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 - 서울대학교 최고의 ‘죽음’ 강의 서가명강 시리즈 1
유성호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9-021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유성호 지음/21세기북스)>

서울대학교 최고의 죽음강의

 

인간이라면 누구나 맞이하게 되는 죽음. 그 죽음을 마주하는 직업을 가진 저자의 이야기.

그러나 죽음 자체라기보다는 죽음을 통한 삶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인생의 마침표인 죽음을 살펴보면서 지금의 인생이 가진 의미를 살펴보고 있다.

저자는 법의학자이다. 전국에 등록된 의사의 수는 2017년 기준으로 121571명인데, 이 가운데 법의학자 수는 정확히 40명이다. 사건, 사고로 사망자가 발생한 경우뿐 아니라 많은 경우에 이루어지는 부검과 많은 수업부담 등 어려운 현실을 담담히 소개된다.

또한 부검을 통해 진실을 밝혀낸 사례들이나 조선시대부터 연연히 내려오던 법의학의 전통이 일제강점기에 끊어지는 아픈 역사도 소개된다.

 

그러나 저자가 가장 강조해서 설명하고 있는 주제는 죽음을 통해 삶의 의의를 확인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죽음에 대해 주체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

저자의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나의 인생이 나의 것이면 나의 죽음도 나의 것이다. 그 죽음을 저주나 실패로 보지 않도록 하자. 부끄럽지 않은 나의 죽음을 준비하자는 이야기를 달리 표현하면 최선을 다한 인생을 살자는 이야기가 아닐런지.

 

법의학자로서 특별히 죽음과 인연 깊은 삶을 살고 있지만, 그 인연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더욱더 많이 생각하게 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이 아닌 삶이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도인은 아니지만 죽음을 생각하고 살피고 돌아보는 과정에서 삶의 경건함과 소중함이 더욱더 절실해지는 것이다. 더 나아기 법의학자로서 우리 사회에 죽음을 숙고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싶다는 작은 소망을 가져본다. 그래야 우리들 삶이 행복해지겠다는 깨달음 아닌 깨달음을 갖게 된 것이다. /p166

100명의 사람이 있다면 100가지의 삶이 있고 100가지의 죽음이 있는 것이다. 나만의 고유성은 죽음에서도 발휘되어야 하지 않을까?

죽음과 친숙한 삶이야말로 더욱 빛나고 아름다운 삶으로 새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꼭 잊지 않았으면 한다. 그것이 죽음으로 삶을 묻는 이유다. /p246

 

1부 죽어야 만날 수 있는 남자

1년에 두 번씩 개최하는 학회에 참석할 때도 법의학자들은 절대 함께 움직이지 않는다. 혹시 같은 고속버스를 타고 가다가 만약 사고라도 날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다. 혹시 사고가 발생해 한꺼번에 죽는 일이 발생하기하도 하면 우리나라 법의학자가 전멸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농담이 포함된 진담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되도록 함께 이동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흩어져서 각자의 교통수단을 이용해서 모인다. /p50

 

2부 우리는 왜 죽는가

현대사회에서는 과학과 자본주의의 발달로 죽음이 의학의 대상이 되었다. 의사라는 새로운 사제에 의해 마지막 순간이 결정되는 과학의 시대가 온 것이다. 또한 신과의 단절과 실존주의의 대두는 죽음에 대한 신의 심판에 기반된 두려움과는 도 다른 새로운 공포감을 고양하면서 쾌락주의의 대두 등의 복잡한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다. /p119

다양하게 제기되는 안락사 논쟁에서 우리나라는 어떤 입장을 띠고 있을까? 첫 번째는 연명희료 보류중지의 경우 우리나라 또한 보수적인 일본보다 늦기는 했으나 시행이 되고 있다. 두 번째 의사조력자실 또는 의사조력사망은 나름의 가치관에 따라 허용을 해야 한다, 하지 말아야 한다는 각자의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몇몇 나라에서 이미 법적인 보호 아래 시행하고 있는 것으로, 아마도 우리 세대의 마지막쯤에서는 이슈화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분명히 이를 원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적극적 안락사는 아직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거부감을 표현하고 있기는 하다. /p164

자살의 원인에 대해서는 크게 세 가지 카테고리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다른 사람에게 짐이 된다는 부채 의식인데, 실제로 짐이 되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본인이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노인 자살이 많다.

두 번째 자살 원인으로는 소속감 부재와 그에 따른 커뮤니케이션의 부재를 들 수 있다. 소속감이 없어지면 다른 사람과의 소통이 단절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때 극심한 소외감으로 우울증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마지막 세 번째 원인은 죽음에 대한 무감각적인 학습이다. 이것은 사회적 역할이 방기되어 일어나는 현상이기도 할 텐데, 자살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문제의 해결책으로 결정하는 것이다. /p178

현재 우리나라 자살의 특징은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노인 자살의 급등, 젊은 여성의 높은 자살률, 가족 동반 자살, 대중매체의 높은 자살 보도 영향이 그것이다. /p184

자살은 예방할 수 있다. 자살 사고는 단계적으로 일어나는 일로, 우선 자살을 오래도록 계획한 후에 자살 시도를 하게 되기에 중간에 누군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주면 충분히 예방이 가능하다. 가족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관심 그리고 사회적 안전망까지 잠재적 자실자에 대한 우리의 따뜻한 시선이 필요하다. /p192

 

3부 죽음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

죽음에 관한 태도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해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죽음을 삶의 자연스러운 끝, 자연의 마지막 질서이자 나의 스토리의 마지막 종결로 보는 태도다. 이것을 중립적 수용 자세라고 한다. 종교적인 내세관을 가진 사람들은 행복한 내세에 대한 믿음으로 접근적 수용 자세를 보인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태도는 죽음에 관한 가장 안 좋은 자세라고 여겨지는데, 바로 죽음을 고통스러운 삶의 탈출로 받아들이는 탈출적 수용 자세다. /p216

우리에게 죽음학이라는 학문을 각인시킨 인물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그녀는 실제로 죽음을 앞둔 사람들을 인터뷰해서 죽음에 대한 인간의 심리학적 반응을 퀴블러 로스 사망 단계라는 5단계로 정리하였다.

첫 번째는 부정이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두 번째 심리적 단계는 분노. 어째서 이런 일이 나에게 생겼는지를 따지면서 화를 내는 것이다. 그 다음 세 번째 타협, 협상의 심리적 단계로 넘어간다. 의사를 상대로 하거나 신을 상대로 협상을 벌인다. 그러다 이내 네 번째 단계인 침체와 절망의 단계에 들어서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다섯 번째 단계인 수용이 일어나게 된다. 이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p221

생을 하나의 여정 또는 작품이라고 본다면 죽음은 마지막 종착지 또는 스토리라고 할 수 있다. 즉 나만이 완성할 수 있는 내레이션인 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죽음은 의사의 내레이션이 되고 말았다. 내 인생을 내가 끝내야 하는데, 인생의 결정권이 생판 모르는 의사나 가족에 의해 행사되고 있다. 물론 그것을 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각자의 삶은 각자의 소유이고 스스로가 결정권자여야 한다는 기본 원칙에서 본다면 연명의료는 현대 의학에서 가장 큰 문제다. /p223

영생에 대한 환상을 가지더라도, 즉 죽음을 어떻게 인지하든 모든 생명체는 반드시 언젠가는 소멸하게 된다. 따라서 인간의 죽음은 실존적으로 반드시 부딪쳐야 되는 사건이며 우리 주변에도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일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우리는 죽음에 대한 논의를 금기시하고, 죽음이라는 단어 자체를 혐오하고 두려워하며 영생이라는 말에 오히려 끌려왔다.

그러나 삶의 마지막 여정이 죽음이라는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여야만 현재 우리의 삶을 더 온전하게 살 수 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삶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이 어떠한 모습이기를 바라는지 끊임없이 묻고 답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삶은 더욱 풍성해지고 깊은 의미를 품는다. /p26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크로스 사이언스 - 프랑켄슈타인에서 AI까지, 과학과 대중문화의 매혹적 만남 서가명강 시리즈 2
홍성욱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9-020 <크로스 사이언스(홍성욱 지음/21세기북스)> [인문] [서가명강]

프랑켄슈타인에서 AI까지, 과학과 대중문화의 매혹적 만남

 

서울대학교에 재직중인 저자의 전공은 과학기술학이다. 과학기술학은 과학기술과 사회의 상호작용에 초점을 맞추면서 과학기술을 역사적, 철학적, 사회학적으로 분석하는 학문 전반을 의미한다. 영어로는 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이다.

저자가 강의한 과학기술과 대중문화를 근거로 책이 엮여졌다. 저자는 과학기술과 대중문화를 연결시켜 생각하면서 과학과 인문학 두 문화 사이의 거리를 조금이라도 좁힐 수 있기를 바라며 [서가명강]으로 출간하였다.

이 책에서 다룬 과학과 문화의 교차점들에 대한 이야기가 인간답고 민주적인 과학기술의 모습을 상상하고 이를 구현하는 우리 모두의 실천으로 이어지기를 꿈꿔본다.”

  

대중문화의 예로 들고 있는 다양한 소설과 영화 이야기를 들으며 과학과의 연결고리를 찾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러나 이 책이 과학은 어렵지 않아요와 같은 주장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여전히 천생 문과생인 나에게는 깊이 있는 분석과 해설이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꼭지들이 제법 많다. 그래도 꼭꼭 씹어먹으면서 느낄 수 있는 잡곡밥의 고소함처럼 다양한 학문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책이었다.

 

1/ 대중문화와 과학의 크로스 미친 과학자, 슈퍼우먼 과학자, 오만한 과학자

괴물이 아닌 과학자, 프랑켄슈타인 : 프랑케슈타인 박사는 기존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금기에 도전함으로써 괴로움을 당했는데, 이는 프로메테우스 이미지와 매우 흡사했다고 볼 수 있다. 새로운 지식을 발견한 대가로 고통을 당하는 프로메테우스와 프랑켄슈타인의 이미지는 이후 과학자의 전형적인 이미지 중 하나가 되었다. /p25

과학과 사회를 연구하는 나로서는 소설 속 여러 모티프라든지 주인공의 직업 등으로 생각해볼 때 당시 산업혁명 이후 빠르게 발전하기 시작했지만 누구도 그 방향이나 속도를 통제하지 못했던 과학기술과 관련해서 인간 스스로의 책임감을 질문하는 것에 이 작품의 무게가 실려있다는 해석을 선호한다. /p35

사이비과학의 오래된 역사 : 지금도 과학의 이름으로 우등과 열등을 나누려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누가 우리를 멸시하면 발끈하지만, 우리가 유전적으로 우수하다고 하면 으쓱댄다. 백인이 흑인의 아이큐가 낮기 때문에 흑인이 가난하다고 하면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비난하지만, 한민족의 아이큐가 다른 인종에 비해서 높다는 과학적인결과가 나왔다고 하면 뿌듯해한다. 한글이 가장 과학적인언어라는 얘기를 들을 때에도 그럼, 그렇지한다.

사이비과학은 이런 마음을 비집고 자라난다. 누군가 과학의 이름으로 내가, 한민족이, 한국 사람이 과학적으로 못났다고 한다면 이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과학이 나를, 한민족을, 한국 사람을 잘났다고 하면 이런 얘기는 우리의 허영심을 살살 간지럽힌다. /p117

 

2/ 세상과 과학의 크로스 미래는 유토피아인가 디스토피아인가

결국 디스토피아에서 허용되지 않는 것들을 가만히 보면, 우리가 디스토피아적 상황을 극복한다든지 혹은 이런 상황에 빠지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그렇다. 우리는 생각을 해야 하고, 지금껏 어떤 길을 밟아서 여기에 왔는지, 즉 우리의 과거 역사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래야 내가 누군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또 내가 속한 세상이 미래에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통찰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에겐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일도 중요하지만, 나와 내가 속한 사회가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성찰하고 그중 실천할 수 있는 부분이 있으면 실천해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오웰과 헉슬리의 디스토피아에서 살아남는 방법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풍성한 언어를 지키고, 언어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p188

 

3/ 인간과 과학의 크로스 로봇과 인간은 공존할 수 있을까

유전자가 우리 미래를 결정하는 게 아니듯, 우리 사회의 미래 역시 유전자 결정론이 지배하는 미래로 결정되어 있지 않다. 결국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실천을 하고, 어떻게 사람을 대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p218

오늘날 4차 산업혁명이라는 담론 속에서 가까운 미래에 AI의 발전이 인간을 공장과 사무실에서 쫓아낼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등장하고 있다. 사실 청년 실업이 많아지는 이유는 새로운 산업이 만들어내는 일자리보다 없어지는 일자리가 많기 때문이다. 직장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국가가 기본소득을 제공해야 한다는 말들이 지금 다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1932년에 제작된 로봇 알파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알파는 자신을 만든 해리 메이에게 총을 겨누고 발사했다고 보도되었다. 실제는 이와 너무나 달랐다. 알파가 발사하는 총에 화약을 넣다가 메이가 실수해서 화약이 터졌고, 그래서 메이는 손에 약간의 부상을 입은 것뿐이다. 그런데 이런 사고가 과장되고 왜곡되어 알파가 총을 인간에게 겨눠 발사했다는 기사가 나온 것이다. 실로 터무니없는 과장 보도였다.

왜 그랬을까? 당시에는 기계가 인간의 직장을 없앨 것이라는 불안감이 사회에 팽배해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언론이 작은 사고를 자극적인 사건으로 과장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인공지능과 로봇에 대해 가진 두려움은 얼만큼 근거가 있는 것인가. /p277

 

4/ 인문학과 과학의 크로스 과학의 시대, 생각의 경계가 무너진다

근대적 삶의 이면, 식민지 민중의 애환 : 시계, 전차, 전등, 자동차 등은 도시의 새로운 근대적 삶을 상징했다. 그런데 이렇게 바쁜 삶이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었다. 전등이 켜지고 전차가 들어서는 것이 외형적인 발전이긴 했지만, 어떤 작가들에게는 이것이 조선의 진보나 조선 사람의 행복과는 거리가 먼 침탈이었던 것이다.

전기의 도입 초기에 문학작품들은 전차, 전등, 활동사진같은 전기 문물을 새롭고 신기하고 계몽적인 것으로 그렸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것들은 식민지적 일상을 재현하는 과정에서 적으로 바뀌어갔다. 예컨대 초기에 전등은 다 밝은 것으로 그려졌지만, 1920~30년대가 되면 희미한 전등, 쓸쓸한 느낌을 주는 전등, 신경증을 유발하는 전등이 등장하게 되며, 일부 작품에서는 전등이 일제 통치의 결과물이거나 빈부격차를 상징하는 전형이 되었다. /p304

과학과 인문·예술의 관계에 대한 답을 찾아가기 위한 한 가지 출발점은 상상력일 것이다. 우리는 흔히 과학의 핵심을 발견에 둔다. 하지만 과학도 무엇인가를 만드는 활동이기 때문에 과학에서도 상상력이 매우 중요하다. “과학과 인문학이 상호보완적이다라는 취지의 언급을 맨 처음 했던 철학자 잠바티스타 비코는 과학은 이성에만 근거하고 인문학은 상상력에 근거한다고 했지만, 과학에서도 상상력이 중요하다. 과학도 결국 인간이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p326

칼 세이건은 우주 속에서 우리의 위치를 깨닫는다면 우리는 지구에서 버텨야 하고, 이를 위해서 서로와 환경을 아껴야 한다는 점을 깨달을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우리 인간들은 우연에 우연이 겹쳐서 우리 은하의 한 귀퉁이에 있는 태양계의 세 번째 행성인 지구에서 지금 이렇게 아웅다웅 살고 있는 것이다. 우주 속에서 우리의 위치를 알게 되면 우리의 삶의 터전인 희미한 푸른 점을 아끼고 보존해야한다는 책임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p344

*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체수유병집 - 글밭의 이삭줍기 정민 산문집 1
정민 지음 / 김영사 / 201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9-019 <체수유병집(정민 지음/김영사)>

글밭의 이삭줍기

섬광 같은 사유, 내면 깊은 성찰 고전학자 정민 교수의 산문집

 

인문학이 바람을 일으키며 고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때에도 우리의 고전에 대한 관심은 한문 해석의 어려움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우리의 손길을 끄는 책들도 있었지만 예상했던 것만큼의 깊이가 느껴지지 않는 책들이 많아 아쉬움이 많았다. 그러던 차에 정민 선생님의 글을 읽고, 글의 깊이와 폭이 거대한 강을 이룰 것이라 생각했던 고전에 대한 아름다움과 묵직함을 느낄 수 있었다.

서문을 통해 저자가 책을 펴낸 목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서문 또한 명문이다.

체수는 낙수요, ‘유병은 논바닥에 남은 벼이삭이다. 나락줍기의 뜻이다. 추수 끝난 들판에 여기저기 떨군 볏단과 흘린 이삭이 남았다. 책 제목 체수유병집은 이 구절에서 따왔다. 지난 10여 년간 요청에 따라 쓴 글들을 모았다. 한 편의 글마다 그 시절의 표정과 한때의 생각이 담겨 있다.

다산은 보름에 한 번은 책상을 정리하라고 했고, 연암은 젊은 날에 쓴 메모 쪽지를 냇물에 흘려 지웠다. 이제껏 하고 싶은 공부 실컷하며 즐겁게 지냈다. 문득 돌아보니 책상은 엉망이고, 책꽂이는 정신이 없다. 한 번씩 치우고 버리고 정돈해야 정신이 든다. 글을 한자리에 모아 묶는 것에는 이 뜻도 있다. 그때그때 쓴 글이지만 모으고 보니, 평소에 못 느끼던 흐름이 얼핏 보인다. / 서문

 

1문화의 안목은 삶의 단상과 문화에 대한 생각을 적었다.

책만 책이 아니다. 독서는 문자를 빠져나와 세상이라는 텍스트를 읽을 때 가장 위력적이다. 삶의 행간을 읽고, 드러나지 않는 질서를 읽을 때 독서는 비로소 완성의 단계에 진입한다. 남들이 같이 보면서도 못 보는 것들이 내게 보이기 시작한다. 어제까지 아무 의미도 없던 것들이 내 삶 속으로 걸어들어와 간섭하기 시작한다. 수많은 독서는 사실 이 단계에 진입하기 위한 연습 과정일 뿐이다.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생각해서, 더 툭 트인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내 평생 독서의 지침이요, 목표다. / 섬광처럼 번쩍이는 순간

이용휴는 <당헌일기>에서 다만 눈앞의 오늘이 있을 뿐 어제나 내일에 눈 돌릴 여가는 없는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오늘 공부하지 않으면 하루를 헛산 것이라 공일空日이라고 썼다. 이덕무는 오늘이 쌓여 고금이 될 뿐이니 내일이 오늘이 되고 오늘은 어제로 밀려나는 이 사흘의 누적 속에 인생과 고금이 놓여 있다고 단언했다. 나는 오늘의 힘을 믿는다. 이 순간의 중요성을 신뢰한다. 지금 성실치 않고 오늘 열심히 하지 않으면서 어제만 돌아보거나 내일을 꿈꾸지 않기를 늘 다짐하곤 한다. / 공부하지 않은 날은 살지 않은 것과 같다

할 말 못하는 아비, 들을 말 못 듣고 자란 자식들 위에 사회의 구조악까지 얹혀지고 보니 세상에 풍파 잘 날이 없다. 굽실대던 낮은 처지를 벗어나 조금 지위를 갖게 되면 금세 아랫사람 업신여기고 함부로 대한다. 제가 그의 처지일 때 생각은 간 데가 없다. 오히려 한술 더 뜬다. 마침내 광망하게 굴다가 나락에 떨어지고 나서도 제 탓할 생각은 없고 세상 원망만 한다. 가정교육의 부재가 승자독식의 사회구조와 만나 빚어낸 슬픈 풍경이다. / 빛 없는 그늘

남과 기쁘게 나누고 즐거이 베풀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제 이익을 위해 남을 헤코지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망치는 사람이다. 남을 향해 도끼를 휘두르지만 결국 그가 찍는 것은 제 발등이다.

내가 소중해서 남을 아낀다. 이때 나와 남은 우리가 된다. 내가 소중해서 남을 해친다. 그래서 세상은 지옥이 된다. 나에 대한 사랑이 남을 향한 사랑으로 확산되고, 나와 남의 경계를 허물어 우리가 되는 삶, 이것이 나눔의 참된 정신이다. / 스스로를 아끼는 사람

 

2연암과 다산은 저자가 사랑하는 두 지성에 대해 가볍게 쓴 글을 모았다.

연암은 사유의 힘으로 사람을 압도하고, 다산은 방법의 사유로 문제를 풀어준다.

연암집의 수많은 글을 통해 그는 자신을 옥죄고 있던 시대의 질곡에 과감하게 도전했다. 우리는 왜 지금 여기를 살면서 그때 저기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시대를 뛰어넘는 고전이 될 수 있으려면, 옛것을 그대로 흉내만 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오히려 지금 눈앞의 현실, 가슴속의 진실을 글에 담을 때 훗날에는 그것이 고전이 된다. 어찌 보면 단순하고 분명한 진리지만, 당시로서는 꺼내기가 쉽지 않은 말이었다.

색깔 속에는 빛깔이 있다. 속에는 태가 있다. 색깔은 누구나 보지만 빛깔은 보는 사람만 본다. 외형은 다 알지만 그 속에 깃든 태깔은 아무나 볼 수 없다. 겉껍데기만 비슷한 것은 진짜가 아니다. 외형外形에 속지 말고 내태內態를 보아야 한다. 색깔에 현혹되지 말고 빛깔을 읽어야 한다. 진정한 의미는 겉모습에 있지 않고 그 속에 감춰진 빛깔과 태깔에 있다. 겉만 보아서는 알 수가 없다. 연암이 <능양집서 陵陽集序>에서 한 말이다. / 연암, 금기를 뛰어넘는 문체의 불온성

고전은 시간의 손길을 타지 않는다. 열하일기속의 스토리는 현재진행형이다. 어떤 삶이 바른가? 어느 길로 가야 하나? 세상은 무엇으로 돌아가는가? 바른 판단은 가능한가? 정의는 과연 정의로운가? 도처에서 그가 불쑥불쑥 던지는 질문은 여전히 생생하고, 현장은 그에 맞춰 시간의 흐름마저 딱 멈춘 듯하다. 내 생각에 그는 아직도 베이징의 어느 뒷골목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어슬렁거릴 것만 같다. /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그는 도처에서 청의 앞선 문물을 배워와 삶의 질을 높여야 한다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주장을 반복했다. 목청을 내세워서 배우자고 주장한 이용후생의 강조는 오히려 자신의 핵심 주장에서 의도적으로 시선을 돌려놓기 위한 물타기 같은 느낌마저 든다.

그렇다면 연암이 열하일기에서 정말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뭘까? 문제의 불온성은 문제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담지하고 있는 사유의 불온성과 관련이 있다. 문체는 그 불온성을 발화의 영역으로 끌어내기 위한 전략일 뿐이다.

연암은 한 차례 중국 여행에서 우물 안 개구리의 구태를 활짝 벗어던졌다. 그는 다시 우물 안으로 돌아왔지만, 더 이상 여행 전의 그가 아니었다. 엄마 배 속에서 바깥세상을 그려보는 것과, 마침내 태를 벗어나 사지를 쭉 뻗어 으앙, 시원스레 울음을 터뜨리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의미는 외형이 아닌 내태에서 나온다. 얼마짜리 옷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입어서 맵시가 나느냐가 더 중요하다. 태깔이 나야 값이 있지, 값만 비싼 것은 소용이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무슨 상표와 얼마짜리에 더 연연한다. 연암의 열하일기에는 돌아오는 노정에 대한 기록이 아예 없다. 그는 북경까지 간 이야기만 적고 오는 길에서 일어난 일은 꺼내지도 않았다. 그가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북경 언저리에서 서성이고 있는 것만 같다. 아직 찾아야 할 것이 있고, 가야할 길이 남아서다. / 열하일기의 인문정신

천연두 관련 정보를 정리한 마과회통, 속담을 분류한 이담속찬, 목민관의 행동지침을 갈래지은 목민심서등 그의 모든 작업은 항상 핵심 가치 파악, 자료 분석, 목차 정리, 카드 작업, 정보의 재배치 순으로 이루어졌다. 이렇게 정리된 자료는 일목요연해서, 언제나 누구든 필요한 정보를 꺼내 유용하게 쓸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다산의 경쟁력이 바로 여기에서 나왔다. / 다산의 지식경영, 생각이 경쟁력이다.

다산의 단계별 교육으로 최적화된 로드맵을 제시해 학습 요령과 우선순위를 익히게 했다. 전공별 교육으로 적성을 살려주고, 맞춤형 교육에서 개성을 북돋워 학습동기를 유발했다. 이어 실전형 교육으로 방법론을 터득케 하고, 집체형 교육을 통해 효율성을 극대화했다. 이런 맵짠 훈련을 받은 제자들은 스승의 상경 후에도 스승을 도와 작업에 참여했고, 나중에는 저마다 역량을 갗춘 문인·학자로 성장해서 중앙 문단과 학계에까지 자신들의 존재를 알렸다. / 다산의 제자 교육법

<다산의 제자교육법> https://blog.naver.com/jaytee0514/221293842246

힘센 생각은 메모에서 나온다. 머리를 믿지 말고, 손을 믿어라. 생각은 금세 달아난다. 미루지 말고 그때그때 적어라. 위대한 천재들의 놀라운 성취 속에는 언제나 예외 없이 메모의 습관이 있었다. / 최고의 메모광 다산 정약용

 

3옛 뜻 새 정은 옛일로 지금을 비춰본 짧은 글 모음이다.

그의 이름 원효元曉는 신라말로는 시단始旦, 새 아침또는 첫새벽이라는 뜻이라고 삼국유사는 적고 있다. ‘부처님 땅[佛地村]’에 새털처럼 가볍게 새벽 스님이 태어나 그곳에 처음 열린 절初開寺‘]을 세웠다. 그리고 그 빛이 중국, 일본 등 동양 삼국에 찬연히 빛났다. 인도와 중국의 고승들도 해결 못한 난제를 국내파인 새벽스님이 단번에 격파해버렸다. 통쾌하지 않은가? / 새벽 스님

같이 중국에 갔는데, 한 사람은 돌이나 수선화 뿌리를 사오고, 한 사람을 목화씨 앗는 기계를 구해왔다. 그 해맑은 운치가 귀하고, 값비싼 비단만 잔뜩 사온 것보다야 낫다 해도, 목화씨 앗는 기계가 가져온 이용후생의 보람에 견줄 수야 없겠다. / 박면교거

 

4맥락을 찾아서는 변화의 시대, 인문학의 쓸모와 공부의 방법에 대해 쓴 글들이다.

인문학의 갑작스런 활기에 고무될 일이 아니다. 죽을 쑤고 있는 것보다는 낫겟지만, 이것이 취업과 사회활동 영역의 확장으로 이어질 것이란 핑크빛 전망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사회의 인문학에 대한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이 딱히 인문학에 대해 바라는 것이 무언지조차 잘 모른다. 그래서 인문학은 여전히 위기다.

인문학은 원리이지 당장 실용 가능한 메뉴얼이 아니다. 사업 잘하려면 시부터 배우란 말이 아니다. 인문학이 담당하는 것은 식견과 통찰력, 다산 식으로 말하면 문심혜두다. 글로 사물의 마음과 만나면 슬기 구명이 뻥뻥 뚫린다는 얘기다. / 질문의 경로를 바꿔라

고전이란 과거로부터 누적되어 쌓인 삶의 지혜다. 과거는 오래된 미래. 지나간 시간 속에 현재의 문제가 있고, 미래의 해답이 있다. 과거로부터 차곡차곡 누적되어온 삶의 지혜가 그대로 이전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우리가 고전을 공부하는 까닭은 현재와 미래를 위해서지 과거를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옛것에서 배울 것은 본질이지 현상이 아니다. 정신의 원리이지 삶의 형식이 아니다. 형식은 달라도 본질은 같은 것이 진짜다. 겉보기는 똑같은데 알맹이가 다른 것은 가짜다. 옛사람은 이것을 상동구이라고 했다. ‘같음을 지향하되 다름을 추구한다는 말이다. 같음을 지향한다는 말은 그 정신의 원리를 두고 하는 말이고, 다름을 추구한다는 말은 그 형식의 새로움을 일컫는 말이다.

고전은 현재와 소통할 때만 가치가 있다. 형식에 집착해서 본질을 놓치면 아무런 보람이 없게 된다. 고전을 제대로 배운 사람은 옛것을 끌어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한다. 이런 것을 통변通變이라고 한다. 주역에 나오는 말이다. 사물은 오래되면 변해야 한다. 변하지 않으면 통하지 않는다. 변하면 다시 통한다. 통해야만 오래갈 수가 있다. / 변치 않으려면 변해야 한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통 사람들의 전쟁 - 기계와의 일자리 전쟁에 직면한 우리의 선택
앤드루 양 지음, 장용원 옮김 / 흐름출판 / 201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9-018 <보통 사람들의 전쟁(앤드루 양 지음/흐름출판)> - 기계와의 일자리 전쟁

4차 산업혁명의 충격에 대응하는 가장 현실적인 대안!

기계와의 일자리 전쟁에 직면한 우리의 선택

    

저자는 브라운대학과 컬럼비아대학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로 활동한 이후 벤처기업의 창업을 돕는 비영리기업 벤처 포 아메리카의 창업자이자, CEO이다. 이 단체는 진취적인 대학 졸업생 수백 명을 훈련시킨 다음 여러 도시의 스타트업에 파견해 그 지역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혁신을 선도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2025년까지 미국에 10만 개의 일자리가 창출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목표다.

 

우리에게 흔한 단어가 되어버린 ‘4차 산업혁명’. 우리가 지식으로 알고 있는 그 개념이 우리의 현실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지, 변화시키고 있는지에 대한 논의는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저자는 4차 산업혁명이 미치는 영향 중 일자리에 관한 주장을 펴고 있다.

점차 노골적으로 인간의 일자리를 노리고 있는 혁명적 기술들과 인간의 두려움 그리고 의도적 외면.

<1부 일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2부 인간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에서 끓는 물이 가득한 냄비 속의 개구리가 되고 있는 미국의 현실에 대해 자신의 비영리기업과 미국의 통계자료를 제시하며 증언하고 있다.

<3장 해결책과 인간적 자본주의>는 제1부와 제2부에서 지적한 문제에 대한 저자의 해결방안이다. 보편적 기본소득에 대한 주장과 그 반론에 대한 반박,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일자리를 지켜내기 위한 새로운 경제체제에 대한 주장이 제시된다. 인간 중심의 자본주의, 줄여서 인간적 자본주의라고 한다.

  

  

자동화와 일자리 상실의 물결은 더는 미래의 암울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한창 진행 중이다. 전문가와 학자들은 인공지능, 로봇공학, 소프트웨어, 자동화 등이 발전하면서 유례없는 일자리 파괴의 물결이 몰아닥칠 것으로 예상한다. 우리가 그동안 애써 무시하고 있었지만 통계를 보면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주요 생산가능인구에 속한 사람 중 일자리를 잃는 사람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일자리 찾기를 완전히 포기한 사람도 늘고 있다. 자동화는 조만간 사회 구조와 우리 삶의 방식을 위협할 만큼 가속화하고 있다. /p8

 

2000년 이후 미국에서 자동화로 인해 없어진 제조업 일자리만 벌써 약 400만 개에 이른다. 이렇게 일자리를 잃은 사람 상당수가 새로운 직업을 구하지 않고 있다. 국가는 금융위기에서 벗어나 10년째 정상을 회복하고 있는데 9500만 명의 국민이 비경제활동인구로 남아 있는 이 현상을 저자는 대실업Great Displacement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일자리의 유동성이 떨어지고 일자리 성장이 정체되다 보니 정치적 적개심과 사회악이 자라기 쉬운 여건이 조성되었다. 실업률과 불완전고용률이 높아지면서 약물 남용, 가정 폭력, 아동 학대, 우울증 같은 사회 문제가 늘어난다. /p10

 

미국 전체 노동인구 14000만 명 중 6800만 명(48.5퍼센트)이 다섯 개 분야 중 한군데서 일하고 있다. 사무 및 행정 직원/판매 관련/요리 및 서빙 관련/운송 및 물품 운반/생산직. 이 직업군에 있는 노동자들이 지금 일자리를 빼앗기고 있는 것이다.

 

자율주행 자동차의 등장이 위협하는 일자리는 무엇일까? 택시기사와 우버기사도 있겠지만 저자가 주목하고 있는 대상은 화물차 기사다.

화물차 기사의 실직은 가장 극적이고 눈에 띄는, 자동화와 인간 노동자 간의 전쟁터가 될 것이다. 콜센터 직원이나 소매 매장 점원 또는 패스트 푸드 음식점 종업원 같은 일자리는 큰 충돌이나 소란 없이 없앨 수 있다. 하지만 화물차 기사는 다를 것이다.

350만 명에 이르는 화물차 기사 중 일부분만 실직한다고 해도 그 파급 효과는 상당할 것이다. 화물 자동차 휴게소, 식당, 모텔 등에서 화물차 기사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일하는 사람은 720만 명에 이른다.

 

우리는 자동화가 진전되면 기본적·반복적 일을 하는 블루칼라 노동자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라고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사실은 그것보다 문제가 조금 더 복잡하다. 화이트칼라냐, 블루칼라냐 또는 지적 기술이냐, 육체적 기술이냐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실제로 중요한 것은 틀에 박힌 일이냐, 아니냐다. 어떤 종류의 일자리라도 AI와 자동화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더 많은 종류의 일자리가 위협받을 것이다. 틀에 박힌 활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의사, 변호사, 회계사, 자산관리사, 증권거래인, 기자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예술가와 정신분석 전문가까지도 점차 자동화 기술의 희생양이 될 것이다. /p86

 

이전의 혁명적 변화와 무엇이 다른가? 기본적으로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기술은 지금까지 그 어느 때보다도 훨씬 다양할 뿐만 아니라, 훨씬 빠른 속도로, 휠씬 더 많은 경제분야에, 훨씬 더 폭넓게 적용되고 있다. 대규모 농장, 트랙터, 공장, 조립 라인, PC 등의 등장도 각각 노동시장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인공지능, 기계 학습, 자율주행차, 첨단 로봇공학, 스마트폰, 드론, 3D프린터, 가상현실 및 증강현실, 사물 인터넷, 유전체학, 암호 화폐, 나노 기술 등의 발전에 비하면 혁명적인 크기의 자릿수가 다르다. /p111

우리는 지금까지 인간의 상상력이나 창의력, 사회적 상호작용은 인간에게만 있는 독특한 것이므로 기계가 복제할 수 없다고 생각해왔지만, AI는 본질적으로 내연기관과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계산원뿐 아니라 외과 의사까지도, 적어도 일부분은 AI가 대체할 수 있는 시대에 다가서고 있습니다.” -벤 버냉키(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

 

한때 기회의 나라로 불렸던 미국도 소득 불평등과 양극화의 덫에 걸려 있는 모양이다. 이 점에 대해 저자는 너무나 아쉬운 감정을 숨기지 않고 있다. 힐빌리의 노래를 통해 미국의 현실을 거론하고 있다.

우리는 성공은 노력과 인성의 결과물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오늘날 성공은 대부분 시험 성적과 집안 배경에 달려 있다. 물론 일부 예외도 있어 공평한 세상처럼 보이기는 한다. 이제는 학업 성적이나 각종 시험 성적이라는 좁은 잣대로 측정된 지적 능력이 사람의 가치를 재는 척도가 되어버렸다. 그다음 척도는 효율성이다. 우리 교육제도가 필요로 하지 않는 다른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기대 수준을 낮출 수밖에 없다. /p148

힐빌리의 노래https://blog.naver.com/jaytee0514/221293805563

 

일자리 감소와 기술적 실업은 우리 사회가 당면한 역사상 가장 심각한 문제다. 어떤 외부의 적보다도 더 무섭다. 적과 희생자를 구분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몇백 명의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거나 공장이 문을 닫으면, 주변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 것이고 인근 지역은 피해를 당할 것이다. 하지만 관계없는 사람들 눈에는 경제가 발전하면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일 뿐이다. /p216

 

일자리가 없어지는 미래에도 사람들은 먹고살 수 있어야 하고 기본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에는 불결함과 절망과 폭력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정부가 개입해야 할 것이다. 그 첫 번째로 보편적 기본소득이 지급되어야 한다. /p234

보편적 기본소득Universal Basic Income은 사회보장의 한 형태로, 모든 국민이 일이나 소득과 관계없이 매월 일정 금액을 받는 것을 말한다.

 

보편적 기본소득에 대한 주요 반론

돈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일하려는 의욕을 꺾을 것이다.

인플레이션이 천정부지로 치솟을 것이다.

무상으로 받은 돈이니 엉뚱한 곳에 쓰일 것이다.

이상의 반론들을 극복하는 통계적인 자료들을 제시하면서 저자는 기본소득을 기계와의 일자리 전쟁에서 승리하는 우리의 주된 무기임을 강조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 이전부터 쓰러져가던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인간의 복지와 가치 실현 극대화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 경제를 주장한다. 이것을 저자는 인간 중심의 자본주의, 줄여서 인간적 자본주의라고 한다. /p277

인간적 자본주의의 핵심 원리

인간이 돈보다 중요하다.

경제 단위는 하나하나의 돈이 아니라 하나하나의 사람이다.

시장은 우리의 공동 목표와 가치에 기여하기 위해 존재한다.

 

"리뷰어스클럽으로부터 도서만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